- 엄마는 괜찮아. 난 아빠를 무서워했었어.
손가락이 희고 여위어서 빨갛게 벗겨진 끝부분이 유난히 두드러지는 채영의 손.
- 아빠는 나를 무척 귀여워해. 근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내가 아빠 마음에 안 들 거라고 생각하곤 했거든. 요즘은 사람들이 나를 안좋아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 같은 거 안해. 그냥 아무도 날 안좋아한다고 생각해버리는 편이 나아.
-뭐야, 엄마보다 더 특이하잖아.
퍼즐 한 개를 한 손에 쥔 채 태수가 채영을 아리송하다는 듯 건너다보았다.
하지만 채영의 마음, 나는 알 것도 같은데.
신민아씨도 비슷한 말을 한 적 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안 좋아하는 것 같으면 그 사람을 겁내게 돼. 나에 대한 무슨 권력 같은 게 그사람한테 생기는 거야. 말이 되니? 근데 그런 게 있긴 있거든.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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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

이 책은 2013년 12월 28일 <한겨레>에 청와대 비서실장 김기춘의 내력에 대해 쓴 글부터 2014년 12월 22일 <한겨레>에 통합진보당 해산과 관련하여 쓴 글까지 1년간 쓴 글 열 편을 모은 것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2012년 12월 19일 새누리당 후보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2년 차에 해당하는 기간에 부정기적으로 쓴 글들이다. 이 1년간 정말 엄청나게 크고 중요한 일들이 있었다. 세월호 사건이 있었고, 통합진보당이 해산당했고, 전시작전권의 회수가 사실상 포기되었고,
또다시 조작 간첩 사건이 터졌다. 누구는 ‘유신공주‘의 등장으로 우리 사회가 유신 시대로 회귀했다고 그러고 또 누구는1958년 진보당 해산을 떠올리며 자유당 시절로까지 돌아갔다고 그랬다.
역사학은 분명 과거를 다루는 학문이지만 역사학자가 서 있는 자리는 지금 이 순간 여기일 수밖에 없다.  - P5

세월호는 우리에게 준엄한 물음을 던진다.
책임이란 무엇인가? 역사 앞에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속옷 바람으로 도망치는, 어처구니없는 선장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저 기막힌 모습을 우리는 역사의 굽이굽이에서 많이 보아왔다. 어쩌면 저 징글징글한 모습을 되풀이해서 또 보게 될는지도 모른다. ‘세월호의 악마‘라 불린 선장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 세월호의 악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악마들이 너무도 많았다. - P17

전향자들의 단체인 보도연맹을 관리했던 대표적인 공안 검사 정희택 역시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숨어 있어야 했다. 그는 인민군에게 잡히면 살아남을 수 없는 처지였기에 땅굴을 파고 권총을 몸에 지닌 채 77일을 쪼그려 있었다고 한다. 간신히 살아남은 그는 정부가 환도하자 지팡이를 짚고 법무 장관 이우익에게 인사를 갔다. 장관이 살아 돌아온 정희택을 보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이제부터 잔류파에 대해서는 부역 여하를 막론하고 수사해서 재판에 회부한다"는 것이었다. 정희택은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지팡이로 장관의 책상을 내리치며 "수도를 사수하겠다고 거짓말을하고 애국 시민을 유기한 채 도망간 자는 누구인가. 당신들이야말로 한강의 남쪽 강가에서 잔류 시민들에게 사과하고 허가를 얻은 후에 들어왔어야 했다"고 외쳤다고 한다. 이승만의 거짓 녹음 방송에 앞서 서울 사수를 호소하는 즉흥시를 생방송으로 내보냈던 모윤숙도 피난을 가지 못했다. 모윤숙은 9월30일 경무대에 가서 이승만을 만나자 분한 생각이 가슴에 북받쳐 넥타이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리다시피 하며 "할아버지, 도대체 나를 부려먹고 막판에는 방송을 시키고 혼자만 살려고 피난 가기예요?" 하고 바락바락 악을 썼다고 한다. 이렇게 대통령 넥타이에 매달리고 장관 책상을 지팡이로 후려치기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당대 최고의 우익 인사였기때문이다. 이도 저도 아닌 사람에게는 가혹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 P28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줬다던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내건 조봉암이 내건 구호는 ‘평화통일‘과 ‘피해대중을 위한 정치‘였다."
피해대중이 누구겠는가. 바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며, 억울하게 부역자로 몰려 처벌받은 사람들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에게 간첩이라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뒤집어씌워 그를죽인 뒤 편안하게 1960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려 하였다. 그러나 1958년 7월 2일에 서울지방법원에서 열린 진보당 사건 1심 선고 공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은 조봉암은 예상을 깨고 간첩죄 부분은 무죄, 국가보안법 위반만을 유죄로 인정하여 정역 5년 형을 언도받았다. 재판장은 유병진, 부역자 처벌의 부당성을 깊이 고민했던 바로 그 판사였다.
7월 5일, 법원에 반공청년을 자처하는 300여 명의 청년들이들이닥쳐 "빨갱이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자", "죽여" 등의 구호를 외치며 난동을 부렸다. 유병진은 간신히 법원을 빠져나와 친구인 ‘반공청년단장‘ 신도환의 집에 몸을 숨겨야 했다.
이승만 정권은 주동자 5명을 긴급 구속했지만 금방 풀어주었다. 이 반공청년들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일제가 키운 군국소년들이었다. 정작 일본에서는 패전후 미군이 군국소년들의 머릿속에서 군국주의 물을 빼는 작업을 벌였지만, 분단된 한국에서 미군은 그런 제스처를 취하지않았다. 전쟁이 터지자 군국소년들은 군인이 되어 전쟁을 치렀고, 전쟁이 끝난 후 반공청년이 되어 "빨갱이 판사를 타도하라"며 법원에 난입했다. 박정희 시절, 이들은 향토예비군이 되어 "일하며 싸우고 싸우며 일하세 ", "싸우면서 건설하자" 등을 외치며 병영국가 건설과 유신과업수행에 앞장섰다. 그들은 편안한 노년을 보낼 수 없었다. 김대중 빨갱이, 노무현 빨갱이가 대통령이 된 나라에서 ‘가스통 할배‘, ‘애국 할배‘가 된 1950년대 반공청년 세대는 요즘도 <PD수첩> 무죄, 미네르바무죄, 강기갑 무죄, 한명숙 무죄, 유우성 무죄 같은 판결을 쏟아내는 법원을 찾아가 "빨갱이 판사 타도하자"를 외치며 팔십청춘을 불태우고 있다. - P36

분단과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몰아닥친 엄청난 비극이었지만 친일파들에게는 하늘이 내린 축복이었다. 인간성을 파괴하는 분단과 전쟁을 신분세탁의 찬스로 받아들인 데에서 친일파 중의 친일파인 악질 고등경찰과 헌병 나부랭이들의 반민족적, 아니 반인간적인 민낯이 드러난다. 일제의 악질 고등경찰과 헌병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분단과 전쟁 때문이다. 일제의 악질 고등경찰과 헌병들이 어떻게 권력을 공고히 했는가. 가만있으라 거짓 방송하고 다리 끊고 도망갔다가 돌아와 가만히 있었던 사람들을 빨갱이로, 부역자로 잡아 죽이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것이 수십 년간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공안 권력의 출생의 비밀이다. 그 후예들이 지금껏 대한민국을지배하고 있다. 공안 권력은 대한민국 수구 세력의 중추이다. - P39

 백사 이항복의 자손으로 조선 최고의 명문가 후예이자 8만 석을 거두는 대부호였던 이회영의 형제는 나라가 망하자 재산을 정리하여 중국으로 망명했다. 해방된조국에 살아 돌아온 것은 막내 이시영뿐이었다. 이회영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문당해 죽었고, 형제들 중 가장 많은 돈을내놓은 이석영은 굶어 죽었다. 8만석이라면 삼성, 현대 같은재벌은 아닐지라도 ‘황제 노역‘ 했다는 토호보다는 훨씬 큰 재산이었다 할 것이다. 그 재산을 바쳐 이회영 형제가 한 일이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것이었다. 교과서에야 독립군 양성기관이라고 우아하게 처리가 되겠지만, 독립군 양성기관에 들어간청년 중 상당수는 집에서 부리던 종들이었다. 남자들이야 돈내고 거창한 독립 방략을 세우고 학교에서 가르치고 했겠지만, 조선에 있을 때 뜨르르하던 대갓집 마나님들은 새벽같이일어나 만주 칼바람을 맞으며 집에서 부리던 종들을 위해 밥하고 빨래하고 버선을 기웠다. 이게 위기의 순간에 나오는 보수의 참모습이다. 한 사회에서 온갖 혜택을 받았던 사람이라면 그 사회가 침몰해갈 때 자신이 설 자리를 알아야 한다. - P44

 이 땅에서진짜 사라진 것은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우익이었다. 남북협상을 중간파가 했다지만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에 비추어보면 백범 김구는 극우, 우사 김규식은 합리적 우파나 잘해야 중도우파 정도라 할 것이다. 이승만이 다리 끊고 도망갈 때 서울에남았다가 북으로 끌려간 조소앙, 안재홍 등의 인사들이 양심과 부끄러움과 합리성을 지니고 역사 앞에서 책임을 질 줄아는 우익 인사들이었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청산하자고 주장하던 민족적 양심을 가진 우익 중에서 백범은 암살되고, 나머지 지도급 인사들은 끌려가고 남은 사람들은 학살당하고 부역자로 처벌받으며 낙백해버렸다. 우익이라면 당연히 민족을내세워야 하는데, 이 땅의 자칭 우익들은 삼일절에도 성조기들고나오는 부류들이다. 내가 여러 번 강조하는 바지만, 한국의 진보는 원래 진짜 보수였다. 극우파 김구의 수행비서였던장준하는 김구가 남북협상에 나서자 공산주의자와 무슨 협상이냐며 광복군 참모장 이범석과 함께 떨어져 나왔고, 이승만정권의 국무총리가 된 이범석이 직책상 당연히 좌익 전향자들을 포용하는 태도를 보이자 좌익들에게 관대하다며 이범석과도 갈라선 강골 극우파였다. 신의주 반공학생의거의 사상적 배후 함석헌,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시절 우익 정도가 아니라아예 미군 장교였던 문익환과 박형규, 반탁학련이라는 극우파학생 조직의 행동대장이었던 계훈제, 7년간 국군 장교로 복무한 리영희, 반공포로 김수영, 유학생의 열에 아홉이 미국에 잔류하던 시절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납북당한 것을 잊지 않고 군에 복무하기 위해 유학을 중단하고 돌아온 백낙청 등등은어느 모로 보나 보수의 가치를 충실히 지킨 양심적인 인물들이었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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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각 지역의 방어 거점은 대개 산성이었다. 병자호란 전야 조선의 산성 거점 방어전략은 과거의 전쟁 경험에서 얻은교훈을 충실히 반영한 결과였다. 조선은 일찍이 1619년 심하(深河) 전투의 경험을 통해 사방이 훤히 트인 평지에서 적의 강력한 기병과 정면 승부를벌여서는 승산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평지의 성곽 또한 청군의 공격을 막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공성 작전 능력을 갖추고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공성 작전 경험이 풍부했다. 조선은 정묘호란때 그 사실을 직접 체험했다. 동시에 조선은 산성이나 험준한 산악 지형의 전술상 이점을 십분 활용한다면 그들과 충분히 싸울 만하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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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각 지역에 산성을 신축·보수하여 적의 침공에 대비했다. 게다가 산성 거점 방어전략은 단지 전술상의 이점만 고려한것이 아니라 일반 백성의 안전까지 시야에 넣은 것이었다. 이 또한 정묘호란 때 적의 살육과 약탈로 일반 백성이 엄청난 피해를 입은 사실로부터 얻은 교훈이었다. - P78

여기서 주의할 점은, 조선 조정이 오로지 산성 거점 방어전략에만 매달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특히 일차 방어선이자 주력 방어선이었던 안주와 영변에는 유사시 성곽을 버리고 산성으로 들어간다는 입보入保 전략이 적용되지 않았다. 두 곳은 반드시 지켜야 할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영변의 철옹산성은 그 자체가 천혜의 요새였지만, 안주성은 평지에 입지한 성곽이라 방어가 어려웠음에도 의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에 위치한 까닭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인식했다. 당시 가장 유능한 무장이었던 유림을 평안병사로 임명하여 안주성 방어의 책임을 맡겼던 것도 안주의 중요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전야 조선이 세운 유사시 방어전략의 근간은 뭐니 뭐니해도 역시 조정의 강화도 파천播遷이었다. 평안도와 황해도의 각 지역 군민이 산성으로 입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울의 조선 조정 또한 강화도로 입보한다는 구상이었다는 말이다. 강화도 파천의 목적은 물론 전쟁의 장기화였다. 즉, 조선의 방어전략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지구전持久戰 전략이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쟁은 시간을 끌면 끌수록 원정군에게 점점 더 불리해지기마련이다. 특히나 조선이 구상한 강화도 거점 지구전 전략은 청의 원정군을 상대로 하는 전쟁에 안성맞춤이었다. 기병 위주의 북방 민족에게 해상에 입지한 강화도는 공격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한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이다. - P79

이처럼 정묘호란의 경우 인조는 적군이 황주까지 왔다는 소식에 파천을결정했고, 그로부터 나흘 뒤 강화도에 도착했다. 만약 병자호란 때에도 똑같이 움직일 요량이었다면, 일차. 이차 방어선이 모두 무너지는 최악의 상황이벌어진 뒤에야 비로소 파천을 결정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병자년의 경우에는 아예 전쟁 발발을 기다릴 것 없이 일찌감치 강화도로 파천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었으므로, 황주마저 무너질 때까지 기다리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정묘호란의 사례를 참고하건대 단 사나흘의 말미만 확보하더라도 강화도로의 파천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 P81

청군이 안주에서 개성까지의 약 600리를 진군하는 데 걸린 시간은아무리 길게 잡아도 만 사흘을 넘지 않았던 셈이다. 평균적으로 파발마 속도의 절반을 상회하는 엄청나게 빠른 진군 속도였다.
청군의 가공할 침공 속도를 잇따라 전한 12~14일 사흘간의 장계에 문자그대로 패닉에 빠졌을 조선 조정의 모습은 충분히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십이월 14일 오전 조선 조정은 겨우 빈궁을 비롯한 왕실 가족 등을 먼저 강화도로 떠나보냈을 따름이다. 가장 중요한 인물인 인조와 소현세자는 숭례문까지 왔다가 적군이 이미 연서역(延曙驛) [오늘날의 은평구 역촌동]을 지나 홍제원(弘濟院)에 이르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고는 강화도로 가기는 글렀다고 판단하여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인조는 이제야 막 얼음이 얼어 아직은 안전을 담보할 수 없었던 한강의 얼음길을 허둥지둥 말을 타고 건넜다. 남한산성에 들어간 것은 어둠이 깔린 초경(初更) 무렵이었다. 그나마 남한산성으로 갈 수 있었던 것도 최명길과 이경직(李景稷)이 단 한 명의 비장(神將)과 함께 홍제원으로 나아가 청군 측의 마푸타(Mafuta)[조선 기록의 ‘마부대(馬夫大)]와 협상을 벌이며 시간을 벌어준덕분이었다. - P87

먼저 일차적 요인이다. 홍타이지가 세운 공격전략에서 개전 초기의 작전목표는 조선의 심장부인 서울을 곧바로 기습하여 인조를 서울 도성에 가두는 것이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기습작전이었으므로 ‘전격 작전‘이라고 부를만하다. 이러한 전격 작전의 성패는 청군이 얼마나 빨리 서울에 도착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즉, 진군 속도가 생명이었다. 진군 속도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강물이라는 자연 장애를 극복해야 했다. 홍타이지가 엄동설한의한겨울이 오기를 기다린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다음으로, 의주-서울의 대로를 따라 자리를 잡고 있던 조선군과 싸움을 벌여서는 안 되었다. 정묘호란 때처럼 중도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면 서울 도착 시간이 늦어질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을 고려했기 때문일까? 홍타이지는 ‘통과 작전‘ 내지 ‘패싱 작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전을 구사했다. 압록강을 건넌 이후서울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의 방어 거점을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치는작전이었다.
다음으로 이차적 요인이다. 전격 작전을 세운 홍타이지는 작전 목표의 실현을 위해 고속 진군과 통과 작전을 구사했다. 하지만 청군이 고속 진군과 통과 작전을 구사한다고 해서 그들의 작전 목표가 자동적으로 달성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압록강으로부터 서울까지는 약 1,200리나 되는 거리였다. 만약 중간에 조선군이 청군의 진로를 가로막기라도 했다면, 서울의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파천하는 데 필요한 며칠의 말미를 확보할 수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청군은 인조의 강화도 파천을 저지하기에 충분할 만큼 빠르게 진군했는데, 그것은 조선군이 산성으로 입보한 탓에 대로를 질주하는 청군을 저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P89

실제로 병자년 사월 이후 전쟁 발발 직전까지 조선과 청나라 간에 외교적접촉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병자년 사월 나덕헌과 이획을 사실상 추방할때, 홍타이지는 나덕현과 이획의 무례 등을 거론하면서 조선 측이 형제 맹약을 파기하려고 한다며 강력히 비난하는 국서를 건넸다. 그러나 나덕헌일행은 황제를 칭한 홍타이지의 국서를 차마 조선 조정에 전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 숙박했던 통원보(通遠堡)에 국서를 버려두고 귀국했고, 단지 국서의 내용을 베낀 장계를 서울로 보냈을 뿐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조선은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의 접수를 일단 거부한 셈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나라와의 접촉을 완전히 끊어버리지는 않았다. 전혀 이로울 것이 없는 전쟁을 가능한 한 회피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병자년유월, 조선 조정은 정묘년 이래의 맹약을 깬 적이 없다는 취지의 문서를 의주로 보내어 청나라에 전달하기로 했다. 이는 나덕현 일행이 장계로 보고한 홍타이지의 국서 내용에 대한 반박이었지만, 청나라 측의 접수 거부로인해 문서의 전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어서 인조는 ‘척화파의 격렬한 반대를 뚫고 심양에 역관(譯官)을 파견했다. 조선의 역관 일행은 병자년 시월 말 심양에 도착했지만, 청나라에서 접수를 거부한 탓에 가져간 문서도 전달하지 못하는 등 별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조선 조정은정식 사신의 파견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격론을 벌인 끝에 십이월 4일 추신사(秋信使) 박로가 서울을 출발했다. 그러나 박로가 서울을 떠난 십이월 4일은 홍타이지가 이미 대군을 이끌고 심양을 출발한 뒤였다. - P90

조선에서도 만약 홍타이지가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 시기는 강물이 어는 결빙기일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얼어붙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와서 약탈을 하고 달아나는 여진인들의 행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익히 경험한 바였다. 『인조실록(仁祖實錄)』의 병자년 십일월 기사만 보더라도 "얼음이 언 뒤"라면 언제 적의 침공이 있을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조선 조정의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결빙기에 전쟁을 벌이기로 한 홍타이지의 결정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빙기 중에서도 언제였느냐가 문제이다. 압록강과 두만강의 결빙기였느냐, 아니면 한강의 결빙기였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조선 전기 여진인들의 침공을 경계해야 했던 계절은 압록강과 두만강의 결빙기였다. 정묘호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넌 날짜는 정묘년 정월 13일이었다.  이 날짜를 보고 그냥 요즘 달력의 ‘1월13일‘을 떠올린다면, 정묘년의 후금군 역시 한겨울에 쳐들어왔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해보면, 정묘년 정월 13일은 1627년 2월 28일이었다. 정묘호란은 기본적으로 양력 3월에 진행된 ‘봄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단 압록강은 여전히 결빙기였기 때문에 후금군은 얼음길로 강을 건넜다. 하지만 적어도 대동강 이남의 강들은 이미 얼음이 녹은 뒤였다.
병자호란 때의 청군 선봉대가 압록강을 건넌 것은 정묘호란 때보다 거의 두 달이 앞서는 1637년 1월 3일(병자년 십이월 8일)이었다. 한반도의 1월은 겨울의 한복판이다. 압록강은 물론이고 청천강, 대동강, 임진강도 모두 얼어 있었다. 청군 선봉대가 서울에 도착한 병자년 십이월 14일에는 한강에도 얼음길이 열렸다. 그들이 겨우 엿새 만에, 그리고 이틀 뒤인 십이월 16일 청군의 증원 병력 두 부대가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강이얼어 있었던 덕분이다. 홍타이지는 서울을 최단 시간에 직격하는 데 필요한 자연 조건이 형성되는 시기를 골라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 P93

홍타이지가 전쟁의 초기 판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승부수를 던진 것은 심양을 떠난 다음 날인 십이월 3일의 일이었다. 이날 홍타이지는 마푸타와 로오사(Loosa)에게 300명의 병력을 맡기면서, "상인을 가장하여 밤낮 없이달려가 조선의 왕이 사는 왕경(京) 성을 포위하라"고 명령했다. 이 300명은 ‘전봉(前鋒:gabsihiyan cooha)‘ 이라고 불리던 부대로 청군 중에서도 기동력이 가장 뛰어난 경무장의 최정예기병이었다. 로오사는 당시 전봉대신(前鋒大臣:gabsihiyan coohai amban), 즉 전봉 부대의 사령관으로, 일찍이 ‘숑코로 바투르(Songkoro Baturu)‘라는 일종의 전쟁 영웅 칭호를 받은 용맹한 장수였다. 조선의 기록에 ‘마부대‘라는 이름으로 종종 등장하는 마푸타는 ‘용골대(龍骨大)‘, 즉 잉굴다이(Ingguldai)와 더불어 홍타이지의 사신으로 조선을 여러 차례 방문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길잡이역할을 겸해서 청군의 최선봉에 섰을 것으로 보인다. - P95

그들의 진군 속도야 어쨌든 간에, 만약 십이월 14일의 조선 조정이 그날 서울에 들이닥치고 있던 청군이 겨우 수백 명이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패닉 상태에서 남한산성으로 도망친 것과는 다른 선택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역사에서 이런 종류의 ‘만약‘을 가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청군의 작전이 조선 조정의 착각을 유도했다는 사실이다. 즉, 기동력이 가장 뛰어난 소수 정예의 전봉 병력을 상인으로 가장하여 은밀하게 침투시킨 홍타이지의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말이다. 요즘의 전쟁에 빗대자면, 홍타이지는 공수 부대를 안주에 낙하시킨 것과 다름이 없는 효과를 거둔 셈이다. - P99

 그러나 홍타이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개전 초기 로오사 선봉대가 거둔 성과는 엄밀히 말해서 ‘절반의 성공‘에 불과했다. 인조를 서울 도성에 묶어둔다는 당초의 작전 목표를 100퍼센트 실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로오사 선봉대가 일단 인조의 발을 묶어두면 도도 부대와 요토 부대가 도착하여 포위망을 구축한다는 것이 홍타이지의 원래 계획이었다. 서울 도성은 성벽의 대부분이 평지에 입지했으므로도도 부대와 요토 부대가 일단 포위망을 구축한 뒤에 전 병력을 서울에 집결시켜 공격에 나선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함락시킬 수 있다는 심산이었을것이다.
반면에 남한산성은 험준한 산악 지형에 입지한 천혜의 요새였다. 성벽가까이 공성 장비를 가져다 대기조차 쉽지 않았다. 설사 전 병력이 집결한다고 해도 당장 공격해서 함락시키리라고 보장할 수 없었다. 남한산성에대한 공성전은 자칫 아무런 소득도 없이 인명 손실만 늘릴 가능성이 있었다. 사실 남한산성처럼 공성 자체가 어려운 산악 요새에 대해서는 포위망을단단히 구축하고 수비 측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서울 도성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남한산성에 대한 포위망 구축과 유지에는 서울 도성보다 훨씬 더많은 병력이 요구되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홍타이지가 전쟁이 끝난 뒤 로오사에게 인조의 남한산성 입성을 저지하지 못한 군사적 책임을 물은 것도충분히 이해가 간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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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 우리가 폭발물이면서도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것은. 도화선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모든 것을 실천에 옮길 만한 기회와 행동력과 돈과 시간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분노와 불안을 극한까지 상상할 수 있는 안전장치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지? 그냥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쥐었을 뿐인데 누군가가 너에게 칼을쥐여준 셈이다. 누구였냐구? 그냥, 모두들.
틀 안에 들어가 있어야 안전하다고 우리에게 잔소리를 잔뜩 늘어놓으면서 정작 세상은 너무나 부주의하다. 우리가 깨지기 쉽다고 보호하다가도 상자 속에 넣은 다음에는 던져버린다. - P14

이사 때만 해도 그렇다. 거의 이삼 년에 한 번씩 엄마와 둘이서 수많은 이사를 했는데, 언젠가부터 남자 어른이 없다는 점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종이상자 속에 꼬박꼬박 모아온 나의 전 재산중 지폐만 모조리 없어져버린 일, 이삿짐 트럭이 내 자전거를 그대로 싣고 가버린 일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점심값을 요구하거나 사다리 비용 같은 걸 흥정할 때 으레 엄마한테 반말을 하고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쩔쩔매게 만드는 짓궂은 아저씨들이 적지 않았다. 짐을옮기다 말고 욕실에 들어가서 웃통을 벗고 머리를 감는 아저씨도봤다. 또 엄마와 내가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가면 경비 아저씨들은 유난히 참견하고 잔소리를 하려 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남들이 왜 그렇게 우리에게 무례한가 생각하곤 했다. 부자연스럽게 과장된 친절도 속으로는 크게 다를 것 없었고.
물론 좋은 아저씨들도 많았다. 하지만 누구나 다 부당한 취급을받았을 때의 기억이 더 안 잊히고 오래가는 거 아닌가.
만약 남자 어른이 있는 집이었다면, 엄마가 열시 넘어까지 침대에서 못 일어나는 싱글맘이 아니고 깐깐한 주부 스타일이었다면, 그리고 우리 집이 오십 평쯤 되는 큰 집이었다면,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이 화분이나 양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 P40

- 내가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그게 관계를가볍게 만들어주거든, 누구나 짐을 지는 건 싫어하니까. 연우야, 이거 중요한 문제야. 약간 멀리 있는 존재라야 매력적인 거야. 뜨겁게 얽히면 터져 알았지?
엄마가 내게 알려주고 싶은 건, 그러니까 인생의 쓴맛인가. 예방주사를 놓듯이? 그래도 이건…… 미리부터 너무 겁먹는 거 아냐?
엄마는 모르고 있다. 몇년전부터 내가 엄마의 충고를 별로 귀담아듣지 않고 있다는 걸. 내 방으로 들어가선 엄마와 다른 생각을 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시간에는 나를 둘러싼 공기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내 안의 뭔가에 집중하게 되는데, 그것이 때로 고독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것을 말이다.
늦은 밤, 식탁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엄마와 내방 거울 앞에 서 있는 나.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서로의 고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모두 다 그런 것일까. - P47

다섯 살 때였던가. 내가 여자 옷을 입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엄마는 원피스를 사와서 내게 입히고, 뭘 하든 기왕이면 예뻐야 한다며 머리핀도 꽂아주었다. 나는 치맛자락을 날리며 들뜬 표정으로 놀이터로 뛰쳐나갔다. 놀이터를 한 바퀴 돌고 그네와 미끄럼틀을한 번씩 탄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뿐이었다. 그뒤로 다시 그 원피스를 입었던가?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이웃 아줌마들에게 놀림은 당했던 것 같다. 고추가 떨어진다나 뭐라나. 하지만 그 한 번의 경힘은 너무나 상쾌하고 신기해서 마치 우주여행이라도 다녀온 것 같있다.
나만 그럴까. 누구나 한번쯤 그런 옷을 입어보고 싶을 수 있는 거아닌가. 다른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흉내로 해소되기도 한다고 엄마도 말한 적 있다. 한 인간의 내면에 여러 가지 다른 본성이 섞여있다는 사실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면서.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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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매달 소집에 꼭 와야 하나요?"
"행정부에서 정한 의무사항입니다. 프랑스의 모든 실업자들은 매달 약속한 날에 나와야만 합니다."
그녀는 가만히 있다가 계속 이어간다.
"당신 역시 우리를 소집하는 게 의무인가요?"
"네. 만약 우리가 정한 날짜, 정한 시각에 사람들을 소집하지 않으면, 컴퓨터에 경고가 뜨기 시작합니다. 우리 역시 제재를 받게 됩니다. 우리 할당분이 올라가고 평가 점수는 추락한답니다."
또다시 침묵이 일고, 그 침묵의 깊이가 갑자기 상황이 악화되고있다는 느낌을 준다. 원래 한 상담원이 맡는 구직자들은 60명인데, 어떤 대행사들은 180 명 이상을 맡고 있다. 이 지역만 해도 4천 명이상의 구직자들 서류가 밀려 있는 형편이다. 제대로 보조를 맞출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시 그녀는 그 상담원에게 몸을 구부리며 말한다.
"참 안되셨군요. 잘해보세요." - P310

마르그리트가 저녁에 일하는 곳에서 ㅡ 만약 그곳이 맞다면ㅡ그녀를 만나보려고 하루 종일 시간 가는 것만 기다리며 보낸다. 마침내 나는 텅 빈 사무실에 도착한다. 멀리 어느 층에서 카트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복도를 지나 그녀를 찾아간다.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그녀와 맞닥뜨린다.
복도의 회색 네온 불빛 아래서 웃고 추억들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진정한 재회의 기쁨을 누린다. 이 반가움이 사라질 순간을 가능한 한 최대한 늦추기 위해 나는 그녀를 붙잡고 끝없이 안부를 물어댄다. -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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