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살 우리가 폭발물이면서도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것은. 도화선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모든 것을 실천에 옮길 만한 기회와 행동력과 돈과 시간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분노와 불안을 극한까지 상상할 수 있는 안전장치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지? 그냥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쥐었을 뿐인데 누군가가 너에게 칼을쥐여준 셈이다. 누구였냐구? 그냥, 모두들. 틀 안에 들어가 있어야 안전하다고 우리에게 잔소리를 잔뜩 늘어놓으면서 정작 세상은 너무나 부주의하다. 우리가 깨지기 쉽다고 보호하다가도 상자 속에 넣은 다음에는 던져버린다. - P14
이사 때만 해도 그렇다. 거의 이삼 년에 한 번씩 엄마와 둘이서 수많은 이사를 했는데, 언젠가부터 남자 어른이 없다는 점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종이상자 속에 꼬박꼬박 모아온 나의 전 재산중 지폐만 모조리 없어져버린 일, 이삿짐 트럭이 내 자전거를 그대로 싣고 가버린 일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점심값을 요구하거나 사다리 비용 같은 걸 흥정할 때 으레 엄마한테 반말을 하고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쩔쩔매게 만드는 짓궂은 아저씨들이 적지 않았다. 짐을옮기다 말고 욕실에 들어가서 웃통을 벗고 머리를 감는 아저씨도봤다. 또 엄마와 내가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가면 경비 아저씨들은 유난히 참견하고 잔소리를 하려 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남들이 왜 그렇게 우리에게 무례한가 생각하곤 했다. 부자연스럽게 과장된 친절도 속으로는 크게 다를 것 없었고. 물론 좋은 아저씨들도 많았다. 하지만 누구나 다 부당한 취급을받았을 때의 기억이 더 안 잊히고 오래가는 거 아닌가. 만약 남자 어른이 있는 집이었다면, 엄마가 열시 넘어까지 침대에서 못 일어나는 싱글맘이 아니고 깐깐한 주부 스타일이었다면, 그리고 우리 집이 오십 평쯤 되는 큰 집이었다면,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이 화분이나 양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 P40
- 내가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그게 관계를가볍게 만들어주거든, 누구나 짐을 지는 건 싫어하니까. 연우야, 이거 중요한 문제야. 약간 멀리 있는 존재라야 매력적인 거야. 뜨겁게 얽히면 터져 알았지? 엄마가 내게 알려주고 싶은 건, 그러니까 인생의 쓴맛인가. 예방주사를 놓듯이? 그래도 이건…… 미리부터 너무 겁먹는 거 아냐? 엄마는 모르고 있다. 몇년전부터 내가 엄마의 충고를 별로 귀담아듣지 않고 있다는 걸. 내 방으로 들어가선 엄마와 다른 생각을 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시간에는 나를 둘러싼 공기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내 안의 뭔가에 집중하게 되는데, 그것이 때로 고독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것을 말이다. 늦은 밤, 식탁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엄마와 내방 거울 앞에 서 있는 나.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서로의 고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모두 다 그런 것일까. - P47
다섯 살 때였던가. 내가 여자 옷을 입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엄마는 원피스를 사와서 내게 입히고, 뭘 하든 기왕이면 예뻐야 한다며 머리핀도 꽂아주었다. 나는 치맛자락을 날리며 들뜬 표정으로 놀이터로 뛰쳐나갔다. 놀이터를 한 바퀴 돌고 그네와 미끄럼틀을한 번씩 탄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뿐이었다. 그뒤로 다시 그 원피스를 입었던가?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이웃 아줌마들에게 놀림은 당했던 것 같다. 고추가 떨어진다나 뭐라나. 하지만 그 한 번의 경힘은 너무나 상쾌하고 신기해서 마치 우주여행이라도 다녀온 것 같있다. 나만 그럴까. 누구나 한번쯤 그런 옷을 입어보고 싶을 수 있는 거아닌가. 다른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흉내로 해소되기도 한다고 엄마도 말한 적 있다. 한 인간의 내면에 여러 가지 다른 본성이 섞여있다는 사실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면서.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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