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각 지역의 방어 거점은 대개 산성이었다. 병자호란 전야 조선의 산성 거점 방어전략은 과거의 전쟁 경험에서 얻은교훈을 충실히 반영한 결과였다. 조선은 일찍이 1619년 심하(深河) 전투의 경험을 통해 사방이 훤히 트인 평지에서 적의 강력한 기병과 정면 승부를벌여서는 승산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평지의 성곽 또한 청군의 공격을 막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공성 작전 능력을 갖추고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공성 작전 경험이 풍부했다. 조선은 정묘호란때 그 사실을 직접 체험했다. 동시에 조선은 산성이나 험준한 산악 지형의 전술상 이점을 십분 활용한다면 그들과 충분히 싸울 만하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 이에 따라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각 지역에 산성을 신축·보수하여 적의 침공에 대비했다. 게다가 산성 거점 방어전략은 단지 전술상의 이점만 고려한것이 아니라 일반 백성의 안전까지 시야에 넣은 것이었다. 이 또한 정묘호란 때 적의 살육과 약탈로 일반 백성이 엄청난 피해를 입은 사실로부터 얻은 교훈이었다. - P78
여기서 주의할 점은, 조선 조정이 오로지 산성 거점 방어전략에만 매달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특히 일차 방어선이자 주력 방어선이었던 안주와 영변에는 유사시 성곽을 버리고 산성으로 들어간다는 입보入保 전략이 적용되지 않았다. 두 곳은 반드시 지켜야 할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영변의 철옹산성은 그 자체가 천혜의 요새였지만, 안주성은 평지에 입지한 성곽이라 방어가 어려웠음에도 의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에 위치한 까닭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인식했다. 당시 가장 유능한 무장이었던 유림을 평안병사로 임명하여 안주성 방어의 책임을 맡겼던 것도 안주의 중요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전야 조선이 세운 유사시 방어전략의 근간은 뭐니 뭐니해도 역시 조정의 강화도 파천播遷이었다. 평안도와 황해도의 각 지역 군민이 산성으로 입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울의 조선 조정 또한 강화도로 입보한다는 구상이었다는 말이다. 강화도 파천의 목적은 물론 전쟁의 장기화였다. 즉, 조선의 방어전략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지구전持久戰 전략이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쟁은 시간을 끌면 끌수록 원정군에게 점점 더 불리해지기마련이다. 특히나 조선이 구상한 강화도 거점 지구전 전략은 청의 원정군을 상대로 하는 전쟁에 안성맞춤이었다. 기병 위주의 북방 민족에게 해상에 입지한 강화도는 공격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한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이다. - P79
이처럼 정묘호란의 경우 인조는 적군이 황주까지 왔다는 소식에 파천을결정했고, 그로부터 나흘 뒤 강화도에 도착했다. 만약 병자호란 때에도 똑같이 움직일 요량이었다면, 일차. 이차 방어선이 모두 무너지는 최악의 상황이벌어진 뒤에야 비로소 파천을 결정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병자년의 경우에는 아예 전쟁 발발을 기다릴 것 없이 일찌감치 강화도로 파천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었으므로, 황주마저 무너질 때까지 기다리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정묘호란의 사례를 참고하건대 단 사나흘의 말미만 확보하더라도 강화도로의 파천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 P81
청군이 안주에서 개성까지의 약 600리를 진군하는 데 걸린 시간은아무리 길게 잡아도 만 사흘을 넘지 않았던 셈이다. 평균적으로 파발마 속도의 절반을 상회하는 엄청나게 빠른 진군 속도였다. 청군의 가공할 침공 속도를 잇따라 전한 12~14일 사흘간의 장계에 문자그대로 패닉에 빠졌을 조선 조정의 모습은 충분히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십이월 14일 오전 조선 조정은 겨우 빈궁을 비롯한 왕실 가족 등을 먼저 강화도로 떠나보냈을 따름이다. 가장 중요한 인물인 인조와 소현세자는 숭례문까지 왔다가 적군이 이미 연서역(延曙驛) [오늘날의 은평구 역촌동]을 지나 홍제원(弘濟院)에 이르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고는 강화도로 가기는 글렀다고 판단하여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인조는 이제야 막 얼음이 얼어 아직은 안전을 담보할 수 없었던 한강의 얼음길을 허둥지둥 말을 타고 건넜다. 남한산성에 들어간 것은 어둠이 깔린 초경(初更) 무렵이었다. 그나마 남한산성으로 갈 수 있었던 것도 최명길과 이경직(李景稷)이 단 한 명의 비장(神將)과 함께 홍제원으로 나아가 청군 측의 마푸타(Mafuta)[조선 기록의 ‘마부대(馬夫大)]와 협상을 벌이며 시간을 벌어준덕분이었다. - P87
먼저 일차적 요인이다. 홍타이지가 세운 공격전략에서 개전 초기의 작전목표는 조선의 심장부인 서울을 곧바로 기습하여 인조를 서울 도성에 가두는 것이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기습작전이었으므로 ‘전격 작전‘이라고 부를만하다. 이러한 전격 작전의 성패는 청군이 얼마나 빨리 서울에 도착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즉, 진군 속도가 생명이었다. 진군 속도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강물이라는 자연 장애를 극복해야 했다. 홍타이지가 엄동설한의한겨울이 오기를 기다린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다음으로, 의주-서울의 대로를 따라 자리를 잡고 있던 조선군과 싸움을 벌여서는 안 되었다. 정묘호란 때처럼 중도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면 서울 도착 시간이 늦어질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을 고려했기 때문일까? 홍타이지는 ‘통과 작전‘ 내지 ‘패싱 작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전을 구사했다. 압록강을 건넌 이후서울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의 방어 거점을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치는작전이었다. 다음으로 이차적 요인이다. 전격 작전을 세운 홍타이지는 작전 목표의 실현을 위해 고속 진군과 통과 작전을 구사했다. 하지만 청군이 고속 진군과 통과 작전을 구사한다고 해서 그들의 작전 목표가 자동적으로 달성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압록강으로부터 서울까지는 약 1,200리나 되는 거리였다. 만약 중간에 조선군이 청군의 진로를 가로막기라도 했다면, 서울의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파천하는 데 필요한 며칠의 말미를 확보할 수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청군은 인조의 강화도 파천을 저지하기에 충분할 만큼 빠르게 진군했는데, 그것은 조선군이 산성으로 입보한 탓에 대로를 질주하는 청군을 저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P89
실제로 병자년 사월 이후 전쟁 발발 직전까지 조선과 청나라 간에 외교적접촉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병자년 사월 나덕헌과 이획을 사실상 추방할때, 홍타이지는 나덕현과 이획의 무례 등을 거론하면서 조선 측이 형제 맹약을 파기하려고 한다며 강력히 비난하는 국서를 건넸다. 그러나 나덕헌일행은 황제를 칭한 홍타이지의 국서를 차마 조선 조정에 전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 숙박했던 통원보(通遠堡)에 국서를 버려두고 귀국했고, 단지 국서의 내용을 베낀 장계를 서울로 보냈을 뿐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조선은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의 접수를 일단 거부한 셈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나라와의 접촉을 완전히 끊어버리지는 않았다. 전혀 이로울 것이 없는 전쟁을 가능한 한 회피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병자년유월, 조선 조정은 정묘년 이래의 맹약을 깬 적이 없다는 취지의 문서를 의주로 보내어 청나라에 전달하기로 했다. 이는 나덕현 일행이 장계로 보고한 홍타이지의 국서 내용에 대한 반박이었지만, 청나라 측의 접수 거부로인해 문서의 전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어서 인조는 ‘척화파의 격렬한 반대를 뚫고 심양에 역관(譯官)을 파견했다. 조선의 역관 일행은 병자년 시월 말 심양에 도착했지만, 청나라에서 접수를 거부한 탓에 가져간 문서도 전달하지 못하는 등 별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조선 조정은정식 사신의 파견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격론을 벌인 끝에 십이월 4일 추신사(秋信使) 박로가 서울을 출발했다. 그러나 박로가 서울을 떠난 십이월 4일은 홍타이지가 이미 대군을 이끌고 심양을 출발한 뒤였다. - P90
조선에서도 만약 홍타이지가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 시기는 강물이 어는 결빙기일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얼어붙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와서 약탈을 하고 달아나는 여진인들의 행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익히 경험한 바였다. 『인조실록(仁祖實錄)』의 병자년 십일월 기사만 보더라도 "얼음이 언 뒤"라면 언제 적의 침공이 있을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조선 조정의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결빙기에 전쟁을 벌이기로 한 홍타이지의 결정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빙기 중에서도 언제였느냐가 문제이다. 압록강과 두만강의 결빙기였느냐, 아니면 한강의 결빙기였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조선 전기 여진인들의 침공을 경계해야 했던 계절은 압록강과 두만강의 결빙기였다. 정묘호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넌 날짜는 정묘년 정월 13일이었다. 이 날짜를 보고 그냥 요즘 달력의 ‘1월13일‘을 떠올린다면, 정묘년의 후금군 역시 한겨울에 쳐들어왔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해보면, 정묘년 정월 13일은 1627년 2월 28일이었다. 정묘호란은 기본적으로 양력 3월에 진행된 ‘봄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단 압록강은 여전히 결빙기였기 때문에 후금군은 얼음길로 강을 건넜다. 하지만 적어도 대동강 이남의 강들은 이미 얼음이 녹은 뒤였다. 병자호란 때의 청군 선봉대가 압록강을 건넌 것은 정묘호란 때보다 거의 두 달이 앞서는 1637년 1월 3일(병자년 십이월 8일)이었다. 한반도의 1월은 겨울의 한복판이다. 압록강은 물론이고 청천강, 대동강, 임진강도 모두 얼어 있었다. 청군 선봉대가 서울에 도착한 병자년 십이월 14일에는 한강에도 얼음길이 열렸다. 그들이 겨우 엿새 만에, 그리고 이틀 뒤인 십이월 16일 청군의 증원 병력 두 부대가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강이얼어 있었던 덕분이다. 홍타이지는 서울을 최단 시간에 직격하는 데 필요한 자연 조건이 형성되는 시기를 골라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 P93
홍타이지가 전쟁의 초기 판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승부수를 던진 것은 심양을 떠난 다음 날인 십이월 3일의 일이었다. 이날 홍타이지는 마푸타와 로오사(Loosa)에게 300명의 병력을 맡기면서, "상인을 가장하여 밤낮 없이달려가 조선의 왕이 사는 왕경(京) 성을 포위하라"고 명령했다. 이 300명은 ‘전봉(前鋒:gabsihiyan cooha)‘ 이라고 불리던 부대로 청군 중에서도 기동력이 가장 뛰어난 경무장의 최정예기병이었다. 로오사는 당시 전봉대신(前鋒大臣:gabsihiyan coohai amban), 즉 전봉 부대의 사령관으로, 일찍이 ‘숑코로 바투르(Songkoro Baturu)‘라는 일종의 전쟁 영웅 칭호를 받은 용맹한 장수였다. 조선의 기록에 ‘마부대‘라는 이름으로 종종 등장하는 마푸타는 ‘용골대(龍骨大)‘, 즉 잉굴다이(Ingguldai)와 더불어 홍타이지의 사신으로 조선을 여러 차례 방문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길잡이역할을 겸해서 청군의 최선봉에 섰을 것으로 보인다. - P95
그들의 진군 속도야 어쨌든 간에, 만약 십이월 14일의 조선 조정이 그날 서울에 들이닥치고 있던 청군이 겨우 수백 명이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패닉 상태에서 남한산성으로 도망친 것과는 다른 선택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역사에서 이런 종류의 ‘만약‘을 가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청군의 작전이 조선 조정의 착각을 유도했다는 사실이다. 즉, 기동력이 가장 뛰어난 소수 정예의 전봉 병력을 상인으로 가장하여 은밀하게 침투시킨 홍타이지의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말이다. 요즘의 전쟁에 빗대자면, 홍타이지는 공수 부대를 안주에 낙하시킨 것과 다름이 없는 효과를 거둔 셈이다. - P99
그러나 홍타이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개전 초기 로오사 선봉대가 거둔 성과는 엄밀히 말해서 ‘절반의 성공‘에 불과했다. 인조를 서울 도성에 묶어둔다는 당초의 작전 목표를 100퍼센트 실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로오사 선봉대가 일단 인조의 발을 묶어두면 도도 부대와 요토 부대가 도착하여 포위망을 구축한다는 것이 홍타이지의 원래 계획이었다. 서울 도성은 성벽의 대부분이 평지에 입지했으므로도도 부대와 요토 부대가 일단 포위망을 구축한 뒤에 전 병력을 서울에 집결시켜 공격에 나선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함락시킬 수 있다는 심산이었을것이다. 반면에 남한산성은 험준한 산악 지형에 입지한 천혜의 요새였다. 성벽가까이 공성 장비를 가져다 대기조차 쉽지 않았다. 설사 전 병력이 집결한다고 해도 당장 공격해서 함락시키리라고 보장할 수 없었다. 남한산성에대한 공성전은 자칫 아무런 소득도 없이 인명 손실만 늘릴 가능성이 있었다. 사실 남한산성처럼 공성 자체가 어려운 산악 요새에 대해서는 포위망을단단히 구축하고 수비 측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서울 도성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남한산성에 대한 포위망 구축과 유지에는 서울 도성보다 훨씬 더많은 병력이 요구되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홍타이지가 전쟁이 끝난 뒤 로오사에게 인조의 남한산성 입성을 저지하지 못한 군사적 책임을 물은 것도충분히 이해가 간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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