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

이 책은 2013년 12월 28일 <한겨레>에 청와대 비서실장 김기춘의 내력에 대해 쓴 글부터 2014년 12월 22일 <한겨레>에 통합진보당 해산과 관련하여 쓴 글까지 1년간 쓴 글 열 편을 모은 것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2012년 12월 19일 새누리당 후보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2년 차에 해당하는 기간에 부정기적으로 쓴 글들이다. 이 1년간 정말 엄청나게 크고 중요한 일들이 있었다. 세월호 사건이 있었고, 통합진보당이 해산당했고, 전시작전권의 회수가 사실상 포기되었고,
또다시 조작 간첩 사건이 터졌다. 누구는 ‘유신공주‘의 등장으로 우리 사회가 유신 시대로 회귀했다고 그러고 또 누구는1958년 진보당 해산을 떠올리며 자유당 시절로까지 돌아갔다고 그랬다.
역사학은 분명 과거를 다루는 학문이지만 역사학자가 서 있는 자리는 지금 이 순간 여기일 수밖에 없다.  - P5

세월호는 우리에게 준엄한 물음을 던진다.
책임이란 무엇인가? 역사 앞에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속옷 바람으로 도망치는, 어처구니없는 선장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저 기막힌 모습을 우리는 역사의 굽이굽이에서 많이 보아왔다. 어쩌면 저 징글징글한 모습을 되풀이해서 또 보게 될는지도 모른다. ‘세월호의 악마‘라 불린 선장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 세월호의 악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악마들이 너무도 많았다. - P17

전향자들의 단체인 보도연맹을 관리했던 대표적인 공안 검사 정희택 역시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숨어 있어야 했다. 그는 인민군에게 잡히면 살아남을 수 없는 처지였기에 땅굴을 파고 권총을 몸에 지닌 채 77일을 쪼그려 있었다고 한다. 간신히 살아남은 그는 정부가 환도하자 지팡이를 짚고 법무 장관 이우익에게 인사를 갔다. 장관이 살아 돌아온 정희택을 보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이제부터 잔류파에 대해서는 부역 여하를 막론하고 수사해서 재판에 회부한다"는 것이었다. 정희택은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지팡이로 장관의 책상을 내리치며 "수도를 사수하겠다고 거짓말을하고 애국 시민을 유기한 채 도망간 자는 누구인가. 당신들이야말로 한강의 남쪽 강가에서 잔류 시민들에게 사과하고 허가를 얻은 후에 들어왔어야 했다"고 외쳤다고 한다. 이승만의 거짓 녹음 방송에 앞서 서울 사수를 호소하는 즉흥시를 생방송으로 내보냈던 모윤숙도 피난을 가지 못했다. 모윤숙은 9월30일 경무대에 가서 이승만을 만나자 분한 생각이 가슴에 북받쳐 넥타이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리다시피 하며 "할아버지, 도대체 나를 부려먹고 막판에는 방송을 시키고 혼자만 살려고 피난 가기예요?" 하고 바락바락 악을 썼다고 한다. 이렇게 대통령 넥타이에 매달리고 장관 책상을 지팡이로 후려치기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당대 최고의 우익 인사였기때문이다. 이도 저도 아닌 사람에게는 가혹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 P28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줬다던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내건 조봉암이 내건 구호는 ‘평화통일‘과 ‘피해대중을 위한 정치‘였다."
피해대중이 누구겠는가. 바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며, 억울하게 부역자로 몰려 처벌받은 사람들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에게 간첩이라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뒤집어씌워 그를죽인 뒤 편안하게 1960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려 하였다. 그러나 1958년 7월 2일에 서울지방법원에서 열린 진보당 사건 1심 선고 공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은 조봉암은 예상을 깨고 간첩죄 부분은 무죄, 국가보안법 위반만을 유죄로 인정하여 정역 5년 형을 언도받았다. 재판장은 유병진, 부역자 처벌의 부당성을 깊이 고민했던 바로 그 판사였다.
7월 5일, 법원에 반공청년을 자처하는 300여 명의 청년들이들이닥쳐 "빨갱이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자", "죽여" 등의 구호를 외치며 난동을 부렸다. 유병진은 간신히 법원을 빠져나와 친구인 ‘반공청년단장‘ 신도환의 집에 몸을 숨겨야 했다.
이승만 정권은 주동자 5명을 긴급 구속했지만 금방 풀어주었다. 이 반공청년들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일제가 키운 군국소년들이었다. 정작 일본에서는 패전후 미군이 군국소년들의 머릿속에서 군국주의 물을 빼는 작업을 벌였지만, 분단된 한국에서 미군은 그런 제스처를 취하지않았다. 전쟁이 터지자 군국소년들은 군인이 되어 전쟁을 치렀고, 전쟁이 끝난 후 반공청년이 되어 "빨갱이 판사를 타도하라"며 법원에 난입했다. 박정희 시절, 이들은 향토예비군이 되어 "일하며 싸우고 싸우며 일하세 ", "싸우면서 건설하자" 등을 외치며 병영국가 건설과 유신과업수행에 앞장섰다. 그들은 편안한 노년을 보낼 수 없었다. 김대중 빨갱이, 노무현 빨갱이가 대통령이 된 나라에서 ‘가스통 할배‘, ‘애국 할배‘가 된 1950년대 반공청년 세대는 요즘도 <PD수첩> 무죄, 미네르바무죄, 강기갑 무죄, 한명숙 무죄, 유우성 무죄 같은 판결을 쏟아내는 법원을 찾아가 "빨갱이 판사 타도하자"를 외치며 팔십청춘을 불태우고 있다. - P36

분단과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몰아닥친 엄청난 비극이었지만 친일파들에게는 하늘이 내린 축복이었다. 인간성을 파괴하는 분단과 전쟁을 신분세탁의 찬스로 받아들인 데에서 친일파 중의 친일파인 악질 고등경찰과 헌병 나부랭이들의 반민족적, 아니 반인간적인 민낯이 드러난다. 일제의 악질 고등경찰과 헌병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분단과 전쟁 때문이다. 일제의 악질 고등경찰과 헌병들이 어떻게 권력을 공고히 했는가. 가만있으라 거짓 방송하고 다리 끊고 도망갔다가 돌아와 가만히 있었던 사람들을 빨갱이로, 부역자로 잡아 죽이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것이 수십 년간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공안 권력의 출생의 비밀이다. 그 후예들이 지금껏 대한민국을지배하고 있다. 공안 권력은 대한민국 수구 세력의 중추이다. - P39

 백사 이항복의 자손으로 조선 최고의 명문가 후예이자 8만 석을 거두는 대부호였던 이회영의 형제는 나라가 망하자 재산을 정리하여 중국으로 망명했다. 해방된조국에 살아 돌아온 것은 막내 이시영뿐이었다. 이회영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문당해 죽었고, 형제들 중 가장 많은 돈을내놓은 이석영은 굶어 죽었다. 8만석이라면 삼성, 현대 같은재벌은 아닐지라도 ‘황제 노역‘ 했다는 토호보다는 훨씬 큰 재산이었다 할 것이다. 그 재산을 바쳐 이회영 형제가 한 일이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것이었다. 교과서에야 독립군 양성기관이라고 우아하게 처리가 되겠지만, 독립군 양성기관에 들어간청년 중 상당수는 집에서 부리던 종들이었다. 남자들이야 돈내고 거창한 독립 방략을 세우고 학교에서 가르치고 했겠지만, 조선에 있을 때 뜨르르하던 대갓집 마나님들은 새벽같이일어나 만주 칼바람을 맞으며 집에서 부리던 종들을 위해 밥하고 빨래하고 버선을 기웠다. 이게 위기의 순간에 나오는 보수의 참모습이다. 한 사회에서 온갖 혜택을 받았던 사람이라면 그 사회가 침몰해갈 때 자신이 설 자리를 알아야 한다. - P44

 이 땅에서진짜 사라진 것은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우익이었다. 남북협상을 중간파가 했다지만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에 비추어보면 백범 김구는 극우, 우사 김규식은 합리적 우파나 잘해야 중도우파 정도라 할 것이다. 이승만이 다리 끊고 도망갈 때 서울에남았다가 북으로 끌려간 조소앙, 안재홍 등의 인사들이 양심과 부끄러움과 합리성을 지니고 역사 앞에서 책임을 질 줄아는 우익 인사들이었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청산하자고 주장하던 민족적 양심을 가진 우익 중에서 백범은 암살되고, 나머지 지도급 인사들은 끌려가고 남은 사람들은 학살당하고 부역자로 처벌받으며 낙백해버렸다. 우익이라면 당연히 민족을내세워야 하는데, 이 땅의 자칭 우익들은 삼일절에도 성조기들고나오는 부류들이다. 내가 여러 번 강조하는 바지만, 한국의 진보는 원래 진짜 보수였다. 극우파 김구의 수행비서였던장준하는 김구가 남북협상에 나서자 공산주의자와 무슨 협상이냐며 광복군 참모장 이범석과 함께 떨어져 나왔고, 이승만정권의 국무총리가 된 이범석이 직책상 당연히 좌익 전향자들을 포용하는 태도를 보이자 좌익들에게 관대하다며 이범석과도 갈라선 강골 극우파였다. 신의주 반공학생의거의 사상적 배후 함석헌,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시절 우익 정도가 아니라아예 미군 장교였던 문익환과 박형규, 반탁학련이라는 극우파학생 조직의 행동대장이었던 계훈제, 7년간 국군 장교로 복무한 리영희, 반공포로 김수영, 유학생의 열에 아홉이 미국에 잔류하던 시절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납북당한 것을 잊지 않고 군에 복무하기 위해 유학을 중단하고 돌아온 백낙청 등등은어느 모로 보나 보수의 가치를 충실히 지킨 양심적인 인물들이었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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