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에서 1636년 홍타이지의 ‘칭제‘에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은 차하르 정복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홍타이지와 대결하던 차하르의 대칸 릭단은 1634년 가을 천연두에 걸려 사망했다. 만약 릭단이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18세기 중엽 건륭 연간 청의 준가르 정복 과정에서는 준가르 초원의 유목민 가운데 열에 셋이 청군에게 도륙되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열에 넷이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준가르 유목민의 지도자 아무르사나(Amursana)도 천연두에 걸려 사망했다. 따라서 청의 준가르 정복에 대해서도 ‘천연두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올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물론 청조가 천연두의 ‘혜택‘만 입었던 것은 아니다. 17세기 중엽 청이입관을 달성한 때의 황제 순제(順帝)가 겨우 스물네 살의 나이로 사망한 것도, 19세기 후반 동치제(同治帝)가 스무 살에 사망한 것도 천연두때문이었다. 결국 운명을 돌이키지는 못했지만, 입관 초기의 황제 순치제는 천연두 유행의 가능성이 특히 높은 겨울과 봄이면 거의 어김없이 은둔생활에 들어가 천연두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했다. 강희제(康熙帝)는어려서 천연두를 앓아 면역을 획득한 덕분에 순치제의 계승자로 선택되었다.
강희제는 황태자가 천연두에 걸렸다가 회복된 이후 인두 접종 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청조는 천연두 면역이 없는 몽고의 왕공 귀족에 대하여 북경 대신 열하(熱河)로 와서 조근(朝覲)의 의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안배했다.  - P261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입관 전의 만주인은 대명 전쟁에서 마마의 위협을 중대 요소로 고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 당시의한반도에도 이미 1,000년에 이르는 천연두 유행의 역사가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말까지의 조선 군적(軍籍)에서 사람들의 얼굴에 마마자국이 어느 정도인지가 필수적인 기입 사항이었을 정도이다. 더군다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연중 천연두의 유행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계절에 일어났다. 특히 병자호란은 한겨울에 벌어진 만큼 청군이 조선 땅에서 마마의 위협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이로부터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만주인들은 과연 조선의 마마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P267

앞장의 말미에서 청태종실록』이 정묘호란 때 후금군이 조선의 마마를 경험한 사실을 ‘침묵‘으로 ‘은폐‘한 사실이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한 말이다. 그렇다면, 「청태종실록』이 정묘호란 당시 조선에서의 마마 관련사실을 은폐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은 그간 조선이 자신들에게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 죄를 묻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노라고 주장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자신들의 조선 침공은 ‘의로운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가호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예컨대 만주어 당안을 보면,
홍타이지는 조선을 침공한 원정군이 "하늘의 은혜(abkai kesi)"를 입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한문 [청태종실록]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하늘의 보살핌과 도움을 입고 있다蒙天眷佑/蒙天佑]"는 것이다. 그런데 마마를 극도로 두려워했던 만주인들은 마마를 곧 신의 뜻이라고여겼다. 만주어 당안에서 (가)와 (나)는 전쟁 당시 조선에 출병한 후금군과 심양의 홍타이지가 주고받은 전황 관련 문서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므로 당시의 전쟁 수행에 중대 변수가 되는 마마에 대한 언급을 그대로 실었을 것이다. (다)는 전쟁이 끝난 뒤의 상황이므로 일견 사실대로 적지 않을이유가 딱히 없어 보인다. 그러나 훗날 실록과 같은 사서를 편찬하면서 체계적인 역사 서사를 구성할 때에는, 후금군이 조선에서 마마의 위협에 직면했다는 것은 "하늘의 은혜", "하늘의 보살핌과 도움" 등과 심각한 모순으로 부각되었을 것이다. 만약 실록의 정묘호란 서사에 신의 뜻인 마마 관련 사실을 남겨둔다면, ‘의로운 전쟁‘이라는 역사 서사의 틀이 통째로 흔들리기때문이다. - P271

 다른 무엇보다도 정묘호란 때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은폐의동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은 정묘호란과 달리 황제인 홍타이지가 직접 이끈 친정이었으며, 당시 홍타이지는 명시적으로 이번 조선 침공이 ‘의로운 전쟁‘ 임을 표방하고 있었다. 병자년 십일월 25일 홍타이지는 동지 제천 의식을 거행하면서조선을 침공하는 이유를 하늘에 고했다. 이날의 고천(告天) 제문에서 홍타이지는, 기미년(1619) 조선이 명과 연합하여 "사악한 전쟁(chedain)" [사르후 전투를 지칭을 일으킨 이래 조선이 자신들에게 저지른 갖가지 죄악을열거했다. 제문의 말미에서는 ‘절화교서‘의 내용을 조선이 먼저 맹약을 파기하여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증거로 내세웠다. 이처럼 전쟁 발발의 책임을 조선으로 돌리면서 홍타이지는 누가 옳고 그른지 하늘과 땅이 가려달라"고 기원하며 고천 제문을 마무리 지었다. - P273

그러나 생신 병사들의 탈영 현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태는 두말할 나위 없이 보호토의 죄목에 보이듯이 홍타이지의 어영 부근에서 마마 환자가발생했다는 사실 자체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청나라에서는 마마 발생 시홍타이지와 생신 버일러들이 곧장 피두에 들어가서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는 것이 ‘매뉴얼‘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숙소 부근에서 마마 환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홍타이지는 생신 버일러들과 함께 곧장 피두를위한 칩거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월 16일의 심양행 서신 이후 약보름 동안의 청 측 기록이 사실상 홍타이지와 인조가 주고받은 국서의 인용과 강화도 작전 관련 기사로만 채워져 있는 까닭도 비로소 이해가 간다.
마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인 양 홍타이지나 왕 · 버일러들의 동정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은 그들이 모두 피두에 들어갔기 때문이라는말이다.
단, 정월 22일에 감행한 강화도 작전을 지휘한 도르곤과 두두가 예외적인데, 이는 아마도 두 사람이 숙신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청의 왕 · 일러가운데 숙신이었다는 사실이 사료상 명시적으로 확인되는 사람은 아바타이, 아지거, 사할리얀, 두두 등 네 사람이므로, 일단 두두가 숙신이었다는것은 확실하다. 도르곤의 경우는 숙신이었음을 명시하는 사료상 기록이 확인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생 동안 그가 피두한 흔적 또한 없다. 게다가 홍타이지가 천연두 감염이 무서워 한동안 접견을 기피했던 소현세자 일행을 서울에서 심양까지 데려간 사람이 바로 도르곤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도르곤이 만약 생신이었다면, 홍타이지는 그에게 두두와 함께 조선에 남아 청군의 철수를 지휘하는 임무를 맡길 수 없었을 것이다. - P277

요컨대, 홍타이지는 마마에 쫓겨 조선 땅을 서둘러 떠났던 것이 분명하다. 이제 남은 문제는 청군 진영에 마마 환자가 발생한 시점이다. 바로 이대목에서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제5장에서 고찰했듯이, 분명 홍타이지는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으로 인해 전쟁을 서둘러 끝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정월 16일경의 청군에게 전쟁 계획의 궤도 수정을 요구했을 법한 군사적 상황 변화는 없었다. 군사적 측면에서는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이 될 만한 후보를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이라는 미지수에 ‘어영 부근에 천연두 환자가 생겼다는 사실의 인지‘라는 사건을 대입해보면 어떨까?
제5장의 말미에서 홍타이지로 하여금 전쟁을 서둘러 끝내게 만든 ‘정월16일의 중대사건‘은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청군진영의 마마 환자 발생이야말로 ‘중대사건‘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조건을모두 충족한다. 첫째, 청군 진영의 마마 발발(smallpox outbreak)은 병자호란 동안 조선 땅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둘째, 그것은 홍타이지에게 전쟁계획의 변경을 강제할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그는 피부에 들어가야 했다. 셋째, 홍타이지를 포함한 대부분의 왕공들은 생신이었으므로 마마의 발발은 그들이 모두 조선을 서둘러 떠나야 할 이유가 되기에 충분하다. 실제로홍타이지는 자신이 천연두를 피해 서둘러 귀국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 P281

‘승자의 전쟁 서사‘로 흐른 것은 오히려 종래의 ‘외교 실패‘ 서사였다는첨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외교 실패‘ 서사는 청이 일으킨 침략 전쟁이 조선의 죄를 묻기 위한 ‘의로운 전쟁‘이었다는 ‘승자의 전쟁서사‘와 공명하고 있다. 이기지도 못할 전쟁의 발발을 사전에 막지 못한 ‘외교 실패‘의 책임을 조선의 위정자들에게 묻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병자호란은 조선이 자초한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전쟁이었다는 청이 만들어낸 ‘승자의 전쟁서사‘와 별 차이가 없는 인식이 부지불식간에 자리를 잡았다는 말이다. 물론 그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청의 ‘의로운 전쟁‘ 논리와 공명하든 말든 간에그대로 사실로 승인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 책의 제1장에서는 ‘홍타이지는 왜 병자호란을 일으켰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과 함께 그가 친정과총력전으로 병자호란에 임한 까닭을 규명함으로써, 병자호란이 ‘잉태‘ 당초부터 다른 누구도 아닌 홍타이지 본인의 정치적 야망과 어젠다를 군사적수단으로 달성하려는 ‘홍타이지의 전쟁‘이었음을 드러낸 바 있다.
여기에 더하여 이 책에서는 조선 침공을 위해 총력전을 준비한 것도 홍타이지요. 청군의 공격전략을 짠 것도 홍타이지요, 청군의 작전 수행을 총괄지휘한 것도 홍타이지였음을 밝혔다. 그뿐만 아니다. 앞에서의 고찰에 따르면, 고사 작전을 폐기하고 협상으로 국면을 전환하여 전쟁의 조기 종결을 추진한 것도 홍타이지가 천연두 면역이 없는 생신이었기 때문이다. 인조의출성과 척화신 두세 명의 박송을 조건으로 하는 철군 약속과 그 약속의 이행도 홍타이지의 존재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만약 홍타이지가 없었다면 이른바 ‘삼전도의 치욕‘도 물론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병자호란은 발발 원인은 물론이거니와 개전부터 종전까지 시종일관 ‘홍타이지의 전쟁‘이었다. - P292

전근대 시기의 전쟁에서 승전 이후의 전후 처리는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극단적인 경우, 그는 조선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철저히 파괴하겠다는 생각을 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병자년 십일월 29일 이번 전쟁은맹약을 깬 조선 조정의 죄를 묻기 위한 것이니 저항하거나 도주하지 않는일반 조선인에 대해서는 살상이나 약탈을 엄금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조선의 관민(官民)을 상대로 한 선전문에서도 조선의 왕과 대신들이 저지른잘못 때문에 군사를 일으켰을 뿐이니 저항하거나 도주하지 말라고 말했다. 무고한 인명의 살상이나 약탈을 엄금했다는 것은 ‘조선 정복‘ 이후 어떤 형태로든, 즉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조선을 지배할 의사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 P294

만약 홍타이지의 전후 구상이 괴뢰정권을 통한 간접 지배였다면, 병자호란이후 아예 조선의 종묘사직이 끊어졌거나, 아니면 최소한 인조 대신에 종친중 다른 누군가가 왕위에 올랐을 수 있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정말 정권 교체를 구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설사 그런 구상을 품었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전쟁은 홍타이지가 그런 구상을 일방적으로 강행할 실질적 근거도, 명분적 근거도 확보할 수 없는방향으로 흘러갔다. 천연두 문제로 인해 홍타이지가 전쟁의 종결과 귀국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고, 결국 인조와의 협상을 통해 전쟁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조 정권의 온존溫存은 홍타이지의 애초 구상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병자호란 발발 이후 조선 땅에서 진행된 전쟁과 협상의 결과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P296

여기서 조선의 마마라는 변수까지 고려하여 상황을 다시 되돌아보자면, 홍타이지의 친정 및 총력전 선택은 처음부터 ‘양날의 칼‘이었다고 말할 수있다. 그 자신도 천연두 면역이 없는 생신이었거니와, 도르곤과 두두를 제외한 참전 왕공의 대다수도 생신이었다. 동맹군으로 참전한 외번몽고 왕공들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 땅에서 마마와 조우하는 경우, 친정과 총력전의 지속은 불가능해질 터였다. 만약 홍타이지 본인과 생신 왕공들이 전쟁을 마무리하지도 못한 채 귀국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조선 정복‘을 위해 몇 달 동안 공을 들여 준비한 전쟁이 그만 정묘호란과 질적으로 다를바 없는 약탈전으로 변질될 수도 있었다. 조선이 천연두걱정이 없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정묘호란 때 알려진 바이므로, 홍타이지는 자신의 선택이 ‘양날의 칼‘이라는 것도 알 고 있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홍타이지는 실제로 천연두 문제에 봉착했다. 마치 천연두발발 시의 비상 대책(contingency plan)이라도 있었던 것인 양, 그는 재빨리 협상으로 국면을 전환하여 전쟁의 조기 종결을 추진했다. 천연두 발발에도불구하고 즉각 철수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전쟁을 약탈전으로 변질시키느니 차라리 인조 정권을 온존시킬지언정 ‘조선 정복‘의 명분이라도 챙기는쪽이 더 나았기 때문일 것이다. - P297

삼전도 의례가 사실상 항복 의식이었다는 점에 견주자면, 위의 의례 진행과정에 뚜렷이 나타나는 인조에 대한 우대는 실로 예상 밖이다. 이날의 연석에서 인조의 석차는 홍타이지 바로 다음이었다. 인조 제2위의 자리에 앉힌 것도 홍타이지의 결정이었다. 『청태종실록』에 의하면, 그가 이런 뜻밖의 결정을 하면서 내세운 이유는, 비록 어쩔 수 없이 항복했지만 인조는그래도 "역시 한 나라의 왕"이며, "위세로써 그를 떨게 하는 것은 덕(德)으로써 그를 품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었다. "한 나라의 왕"이라는 구절은만주어 기록에서 "다른 나라의 왕"이라고 표현되어 있으니 홍타이지는인조를 외국의 군주로 대우했다는 말이다. 승정원일기』도 이날의 잔치에서 인조와 홍타이지의 술잔 및 잔 받침이 같았던 것을 가리켜 인조에 대한존경과 우대의 뜻을 표현한 것이라고 적었다. 아마도 자신이 아는 범위의 세계에서 조선이 명나라 다음가는 대국이라는 인식의 발로였을 터이지만, 그 동기야 어쨌든 간에 이날 홍타이지의 인조에 대한 뜻밖의 우대는 훗날 청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조선이 높은 위상을점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삼전도비의 정식 명칭에 드러나듯이, 조선은 나중에 외교적 수사의 영역에서 홍타이지의 ‘공덕‘을 찬미했다. 그리고 훗날 청의 전쟁 서사는 병자호란이라는 엄연한 침략 행위를 ‘관온인성황제‘ 홍타이지의 조선에 대한 관대하고 온유하며 인자하고 성스러운‘ 시은(恩) 행위로 둔갑시키면서 그날의 우대를 대서특필했다. - P300

위에서 소개했듯이, 삼전도 의례의 메인이벤트는 인조의 두 차례에 걸친삼궤구고두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 번째는 하늘, 즉 천신(天神)에 대한 삼궤구고두였다. 이때에는 홍타이지 역시 인조 일행과 함께 하늘에 삼궤구고두를 올렸다. 두 번째는 홍타이지에 대한 삼궤구고두였다. 조선의 왕 인조가 홍타이지의 신하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절차였다. 이러한 의례 절차를통해서 홍타이지의 ‘조선 정복‘ 사실이 분명하게 확인되었음은 물론이다.
여기서 병자년 사월 11일 심양에서 거행되었던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에서도 두 차례의 삼궤구고두가 의례의 핵심 절차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황제 즉위식‘에서 홍타이지는 먼저 고천의 절차를 밟았다. 그는 자신의 신하들과 함께 천신에 대한 삼궤구고두를 올렸다.
이어서 존호를 받는 의례를 진행하여 그 자신이 신하들로부터 삼궤구고두를 받았다. 역시 새로운 군신 관계의 확립을 의미하는 절차였다.
이로부터 정축년 정월 30일 삼전도 의례의 메인이벤트가 사실상 병자년 사월 11일에 거행되었던 ‘황제 즉위식‘을 간소화한 형태로 재현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날짜와 장소를 달리한 두 의례의 공통점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두 의례 모두에서 활쏘기가 거행되었던 것이다. 이 활쏘기는 단순히무예를 겨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옛날 요금의 제천 의례에서 부수적으로거행되던 ‘사류(射柳)‘라는 이름의 샤머니즘 의식을 계승한 것이었다. 또한 홍타이지가 삼전도 의례를 심양에서의 ‘황제 즉위식‘ 못지않게 엄숙한 의례로 치르고 싶어했다는 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전쟁의 패자로부터 항복을 받는 자리에서는 승리에 도취한 장수와 병사들의 방종도 얼마간 허용되기 마련이다. 삼전도 의례에 참석한 청군에게도 그런 분위기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그런 자들을 가차 없이 처벌했다. 정축년 유월말, 홍타이지는 삼전도 의례 현장에서 대열을 멋대로 벗어나거나 갑옷 · 투구를 풀고 있었다는 이유로 8명의 최고위 대신들을 처벌했던 것이다.  - P301

결국 홍타이지는 ‘미완‘에 그쳤던 병자년 사월의 ‘황제 즉위식‘을 정축년정월 삼전도에서 ‘완성‘, 그것도 좀더 고차원적으로 ‘완성‘ 하고자 했다고 볼수 있다. 홍타이지는 본인의 정치적 야심과 어젠다를 끝까지 잊지 않으면서, 말하자면 수미(首尾)가 상응하는 의례로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의 대미를 장식했던 셈이다. 이처럼 병자년 사월 11일 ‘황제 즉위식‘의 ‘미완‘으로인해 ‘잉태‘된 병자호란이 정축년 정월 30일 ‘황제 즉위식‘의 고차원적인 ‘완성‘으로 종결되었다면,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철저하게 ‘홍타이지의 전쟁‘이었다고 성격을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링컨의 말을 차용하자면, 병자호란은 ‘홍타이지의, 홍타이지에 의한, 홍타이지를 위한 전쟁‘이었던 것이다. - P303

만약 홍이포가 위력을 발휘했다면, 그것은 물리적 차원이라기보다는 심리적 차원에서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건너편 갑곶을 향해 발사한 포탄은엄청난 공포를 야기했고, 강진은 함대를 향해 쏜 포탄은 함대의 남하를 저지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장신의 함대도 북쪽 해상이나 갑곶을 향해 쏜 천지를 진동하는 홍이포의 위력에 지레 겁을 먹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그렇다고 하더라도, 심리적 타격의 정도는 청군이 사전에 예상할 수 없는성질이다. 조선군이 홍이포만 쏘면 달아나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중대한 군사작전에 나섰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추론에 큰 하자가 없다면, 역시 나룻배 수준의 작은 배들을 타고강화도로 건너간다는 작전의 수립 자체가 염하수로의 물리적 해양환경에관한 정보의 사전 입수를 전제로 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실 실제 도해 과정에서 청군은 그들이 사전에 정보를 입수했다고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를 보였다. 작전 당일 아침 청군은 일찌감치 도해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배도 바다에 띄웠고 흥이포도 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당장 도해를 개시하지 않았다. 11시~11시 30분까지 기다렸다.
게다가 이미 사거리에 들어온 장신의 함대를 향해 대포를 쏜 흔적도 없다.
굳이 홍이포를 쏘지 않더라도 조류의 방향이 바뀌면 장신의 함대가 결국에는 스스로 뱃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으리라고 예상하지 않았다면 이런 행태를 보였을 리 없다. 염하수로의 특성을 사전에 파악하지 않았다면 그런 예상은 물론 불가능하다. - P308

앞서 언급했듯이 청군은 염하수로의 특성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나서 강화도 작전을 입안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종류의 정보는 경기 서해안 지역의 뱃사람으로부터 입수했을 것이다. 그리고 청군의 정보원이 되었을 뱃사람은 이제 조선인으로 국한시킬 필요가 없다. 광해군 대의 논의로부더 향화호인(귀화한 여진족)을 그런 뱃사람의 후보로 올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광해군 대의 조선 조정에서는 향화호인을 잘 다스려 "인화가 깨지지 않는다면 그들이 이반하는 사태가 초래되지는 않으리라고 판단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인조 대, 특히 병자호란 전야에 이르러 혹 향화호인이 이반할만한 조건이 형성되어 있지는 않았을까?  - P315

그야 어쨌든 간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퉁커션 모델‘이 아닌 ‘흑룡강 모델‘의 선박이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이다. (ㄱ-1)의 ㉡에서 홍타이지가 강조하고 있듯이, ‘흑룡강 모델‘의 ‘비선" 은 강화도 작전 당시 수심이 얕고조류가 빠른 염하수로에서 대단한 기동성을 발휘했다. 그렇다면 청군의 정보원이 된 뱃사람은 염하수로의 특성뿐만 아니라 ‘흑룡강 모델‘의 배가 염하수로에서의 작전에 최적이라는 점까지 알려주었다고 추정하지 않을 수없으며, 이는 다시 청군의 정보원이 조선인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P335

요컨대, 병자호란 전야에 조선의 향화호인들은 정묘호란을 계기로 잠재적 이반자라는 의심의 눈초리에 둘러싸여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행하게도, 향화호인을 향한 조선 사회의 의심은 병자호란 동안에 실제 이반사례가 발생함으로써 현실화되고 말았다. 경기 남부 연해 지역의 남양에살던 여천과 마푸타가 청구에 귀순했고, 이들의 안내로 청군은 남양부를기습했다. 또한 두 사람은 청군의 강화도 작전 입안. 감행을 가능하게 만든정보의 제공자이자, 청군의 강화도 작전과 가도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선박건조의 ‘숨은 공로자‘로 추정되는 것이다. -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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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주방 대리석 조리대 위에 쾅하고 샴페인 병이 쓰러지자, 나는 펄쩍 뛰어오른다. 내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아챘을까 두려워 얼른 잭을 쳐다본다.
잭은 그런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한다. "아주 잘했네" - P9

에스터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밀리의 방 색깔이 뭐였지, 그레이스?"
나는 잠시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빨간색." 목소리가 갈라진다. "밀리의 방은 빨간색이었어."
"그럴 거라 생각했어." 에스터가 조용히 대꾸한다.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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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말야. 강한 척하는 타입 별로야. 누가 봐도 멋지고 빛이 나고, 그러면 뭐랄까, 나만 이는 소중함 같은 건 좀 없잖아. 그런 애라면 좋아하는 게 당연하지. 이런 기분도 너무 뻔하고.
그래, 맞아.
내 가슴은 겉잡을 수 없이 쿵쾅거리고 머릿속은 깨질 듯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서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닿는 일, 팔이 길어지는 거지. 손가락이 닿는 순간 서로임을 확인하고 깍지를낀다. 그런 다음 한 걸음씩 다가가며 둘 사이에 가로놓인 시간과 거리를 없애는 거야. 서로 조금씩 가까이 가는 것, 두 눈은 나만 아는 소중한 너의 모습에 사로잡힌 채, 그래. 한쪽에서 자기 쪽으로잡아당기는 게 아니고. 근데 말야.
마리는 이미 정돈이 돼 있는 프린트물과 노트의 모서리를 계속해서 맞추고 있다. 얼굴은 빨개질 대로 빨개져서 누군가 한방 내리친 토마토처럼 금방이라도 으깨어져버릴 것만 같다. 웬일인지 나는 마리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불편하지만 기쁘고 두려우면서도 간절한 것, 말없이 함께 있을 때온 세상이 이야기와 노래로 가득 차고 누구에게라도 웃어주고 싶어 내 얼굴이 환해지는 것, 혼자 있을 때에도 자꾸 생각이 나고 멀리서라도 한번 더 보고 싶은 웃는 얼굴 그런 게 있지. 근데 말야.
지금은 그런 생각이 더할 수 없이 내 마음을 아프게 만들거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화가 나고 또 허탈한 마음, 머릿속에서 물이 끓는 것 같고, 민기훈과 그리핀. 내가 너무 강렬한 빛에 눈이 멀어서 그 주변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걸까. - P339

소년이라면 시간과 겨뤄봐야지.
열두 살 무렵이었다. 옆집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부터 뛰기 시작한 나는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그 할아버지와 마주쳤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멈추지 않고 그대로 계단을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한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끊어질 듯 아픈 다리를 끌고 가까스로 내가 살던 8층에 닿았을 때, 할아버지도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중이었다. 엘리베이터하고 시합했구나? 어깨를 들썩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부터 뛰어왔니? 나는 힘들게 침을 삼킨다음 겨우 대답을 했다. 할아버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때는 버스를 따라서 달렸는데, 소년들은 시간과 겨루는 법이지. - P411

 그나저나 이 봄눈, 모든 것을 순식간에 덮어버린다.
점점 눈앞이 보이지 않아. 온통 하얗고 흔들리고 쏟아지고, 다른 별에 온것 같아. 나의 노래를 싣고 시간이 우주 저편으로 흘러가고있군. ■ - P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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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추정이 가능하다. 청군이 11시~11시 30분의 어느 시점에 도해를 개시하자, 잠시 후 봉림대군 일행이 갑곶을 떠나 강화부성으로 달려갔다. 청군의 선봉 병력은 순식간에 갑을장악하고 이내 성으로 진격하여 남문 밖에 진을 쳤다. 봉림대군과 함께 성으로 돌아온 김상용은 절망감에 휩싸여 남문 위에 쌓아둔 화약에 불을 붙여자결했는데, 그 시각은 12시 30분경이었다.
다섯째, 청군이 갑곶에 상륙한 이후 육상에서 벌어진 전투에 관한 것이다. (갑)의 『인조실록』 정월 22일 기사에 "중군 황선신은 수백 명의 군사를이끌고 나룻가 뒷산에 있었는데 적을 만나자 군사가 무너져 죽었다"는 말이있었다. 황선신과 관련하여, 이민구는 (을)에서 "본부의 중군 황선신이 광성으로부터 비로소 육군 113명을 이끌고 왔다고 하여 매우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황선신은 강화부성이 아니라 장신이 주둔하고있던 광성으로부터 올라왔고, 그의 병력은 113명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갑)의 『인조실록』 정월 22일 기사로 돌아가 보면, 황선신의 패전다음에 곧바로 청군이 강화부성 밖에 진을 쳤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민구의 기록에서도 황선신의 패전 이후 강화부성으로 몰려가면서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는 청군에 맞서 싸운 조선군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않는다. 조익의 경우에는 황선신 부대를 아예 언급하지 않았고, 단지 김경징이 강화부성에서 데리고 나간 무사들이 겨우 70~80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했을 따름이다. ) 나만갑은 「기강도사」에서 당시 강화부성의 군사가 수백 명을 채우지 못할 정도로 적었다고 했으나, ) 『인조실록과 이민구의 목격담에서는 "수백 명은커녕 그 존재가 아예 언급되지 않았고, 조익의 기록에서는 그 숫자가 훨씬 더 적었다. 앞에서 이미 고찰했듯이, 당시 강화부성과 갑곶 일대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던 것이다. - P202

이처럼 조석·조류가 조선 수군의 동태에 중대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었다면 청군 역시 염하수로를 건널 때 조류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이 질문과 관련해서는 위에서 소개한 광해군 11년 우의정 조정의 상주에서 "만약 선체가 작은 병선이라면 적을 막는 데 쓸 수 있다"는 구절을 상기할 필요가있다. 염하수로에서는 작은 크기의 배가 오히려 군사적 효용이 더 크다는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홍타이지 또한 조대수에게 보낸 서신에서 "아군의 비선(飛船)은 가볍고 날카로워 운전[旋轉] 이 편리하고 빨랐기 때문에 조선 수군의 배들이 막지 못했다고 자랑하여, 132) 이 점을 강화도 작전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최대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비선" 이라는 표현 자체가 청군의 작은 배들이 마치 새가 날아가는 것처럼 경쾌한 기동력을 갖추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지만, 청군의 배들이 염하수로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일수 있었던 데에는 배의 크기 외에 또 다른 요인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단서는 (정)의 도르곤 보고에 보이는 "(배 위에) 서서 상앗대질을 하며"라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 P216

남급의 [강도록]에는, 청군의 도해 직전 상황에서 임선백(任善伯)이 봉림대군에게 "적(賊)의 배는 가볍고 빠르기가 (마치) 날아가는 것 같지만, 우리의 전선은 조수가 물러날 때 움직이기 어려우니 전적으로 주사에만 기댈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갑곶의 진해루(鎭海樓) 아래 좁고 험한 곳에 포진하여 상륙하는 적과 혈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강도록]은 이 장면에 앞서 임선백이 강화부성의 남문 수비를 맡았다고 하고서는, 난데없이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했다가 뱃사람에의해 구조되어 살아났다고 하면서 갑곶 현장의 봉림대군 앞에 그를 등장시키고 있다. 임선백의 등장은 아무래도 허구적 장치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염하수로에서 "조수가 물러날 때에는 조선 수군의 전선들이 청군의 도해를 저지할 수 없다는 말 자체는 허구적 장치를 빌려서 정축년 정월 22일의 ‘교훈‘을 지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전후 조선 조정이 강화도해안의 요해처에 목책(木柵)의 설치를 추진한 것도 그날에 얻은 ‘교훈‘ 때문일 것이다. 물론 만시지탄을 자아낼 따름이지만 말이다.  - P219

그러나 남한산성은 청군의 전투력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쉽사리 함락시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사실 당시 청군의 입장에서는 굳이 적지 않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공성전을 서두를 필요 자체가 없었다. 남한산성의 식량이 떨어지면 조선군은 굶주림에 지쳐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할 터였기때문이다. 청군은 그때까지 느긋하게 시간만 흘려보내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당시 남한산성의 식량은 늦어도 이월 20일경이면 바닥을 드러낼 지경이었다. 남한산성에 대한 포위 작전 태세를 완성한 청군이 만약 이월 하순까지
‘고사(枯死) 작전‘을 지속했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마도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참극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참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은 남한산성의 식량이 떨어지기 훨씬 전인 정축년 정월 30일(1637년 2월 24일에 끝이 났다. 이날 인조가 남한산성에서의 농성을 포기하고 삼전도로나와 홍타이지에게 항복했기 때문이다.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고사 작전이 청군의 입장에서 가장 유리할뿐더러 충분히 실행 가능했다는 점에 비추어보자면, 병자호란이 남한산성의 조선군이 고사하기 전에 막을 내린 것은오히려 뜻밖의 결말이었으며 조선으로서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할만하다. - P222

그렇다면, 병자호란은 어떻게 해서 이런 방식, 즉 의외로 일찍 그리고 조선의 종묘사직과 인조의 왕위가 그대로 유지되는 방식으로 막을 내리게되었던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정축년 정월 30일 인조의 남한산성 성 경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인조의 출성은 홍타이지가 내건 종전 조건을 받아들인 결과였고, 홍타이지가 그런 종전조건을 명시적으로 제시한 것은 그로부터 열흘 전인 정월 20일의 일이었다.
정월 20일 새벽 청군은 남한산성의 조선 조정에 홍타이지의 국서 한 통을전달했다. 이 국서에서 홍타이지는 인조가 출성하고 척화신 두세 명을 박송縛送하기만 하면 전쟁을 끝내고 철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고립무원의 궁지에 몰려 있던 인조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파격적이고 관대한 조건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로써 인조가 이 두 가지 조건을 수용하여 단지 두세 명의 척화신을 포박하여 보내고 그 자신이 남한산성에서 나가기만 한다면 더 이상 피를 흘릴 필요없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제시한 두 조건은 조선 조정의 입장에서 수용하기 곤란한 것이었다. 신료의 대다수가 척화를 주장한 터에 두세 명만을 희생양으로 골라 사지에 밀어 넣는다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조의 출성은 더욱더 수용할 수 없었다. 오랑캐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성을 나갔다가 자칫 배신이라도 당하면 어찌할 것인가? 조선 조정은 옛날 송나라 휘종과 흠종이 겪었던 참극이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조선 조장으로서는 인조의 출성만은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했다.
홍타이지의 정월 20일자 국서에 대하여, 인조는 다음날 바로 청군 진영에 답서를 보냈다. 답서의 첫 문장은 이랬다. "조선국왕 신(臣) 이종(李(宗)이 대청국 관온인성황제 폐하께 삼가 상서합니다." 정월 19일 청군 진영에 보낸 국서까지만 해도 "조선국왕이 대청국관온인성황제께 삼가 상서합니다"라는 말로 시작했다. "신 이종"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답서에서는 인조가 자신을 "신"이라고 칭하면서 성과 이름을 그대로썼다. 이뿐만 아니라 홍타이지를 "폐하"라고 불렀다. 완전한 칭신(稱臣)의 서식이었다. 그 대신에 인조는 자신의 출성과 척화신의 박송없이 군사를 물려달라고 간청했다. 홍타이지의 조선 침공이 궁극적으로 인조의 칭신 거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면 인조의 완전한 칭신으로 전쟁의 발발 원인은 일단 해소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청 측은 두 조건, 특히 인조의 출성은 반드시 관철시켜야겠다는 강경한 태도였다. 
인조는 정월 24일 청군 측에 전달한 국서에서도 출성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척화신 두세 명을 포박해서 보내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한발물러섰다. 당시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나가 있던 홍익한을 척화신의 대표로 거명했고, 나머지 척화신은 청군의 철수 후에 색출해서 보내겠다는뜻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청 측은 더 이상 양보하려들지 않았다. 그들은 아예 국서의 접수조차 거부하면서 인조의 출성 수용을 압박했다. 협상은인조의 출성 문제를 놓고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정월 26일에 이르러 조선 조정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청군 측에서 이미 나흘 전인 정월 22일에 강화도를 점령했다는 사실을통고한 것이다. 청군은 봉림대군의 친필 서신과 윤방 등의 장계를 증거로,강화도에서 사로잡은 환관 나업과 진원군 이세완을 증인으로 제시했다. 당시 강화도에는 종묘사직의 신주와 원손 및 두 대군이 피난을 가 있었다. 인조는 설사 남한산성이 무너지더라도 강화도만 버틴다면 나라가 멸망에는 이르지 않을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따라서 강화도 함락 소식은 남한산성의 조선 조정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인조는 어쩔 수 없이 농성을 접고 출성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 P223

여기서 남한산성의 조선 조정이 식량 부족에 시달렸듯이 청군 또한 군량확보에 곤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제2장에서 엄동설한의 한겨울이 홍타이지가 구상한 공격전략의 실현에 최적의 계절이었다고 말한 바 있는데, 겨울철이 군량의 현지 조달에 유리한 시기라는 점도 감안했을 것으로 보인다.
모든 전쟁이 다 그렇지만, 특히 병자호란처럼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총력전이자 적국 땅 깊숙이까지 쳐들어가는 장거리 원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물자, 특히 군량의 보급이었다. 수만 명의 병력이 몇 달 동안 먹어야할 군량은 확보하기도 수송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이 골치 아픈 문제는 가을걷이가 끝난 뒤에 전쟁을 일으키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다. 약탈을통한 군량의 현지 조달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즉, 가을걷이 이후는 조선의 관아나 민간의 비축 식량이 연중 가장 풍부한 때이므로 약탈에 의한 군량 조달에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 P226

그러나 정월 17일 상황의 일대 반전이 일어났다. 청군이 단 하루 만에 태도를 180도 바꾸어 먼저 적극적으로 협상을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날 그들은 갑작스럽게 남한산성으로 사람을 보내어 사신 파견을 요구했다. 전날의 만남에서 확인한 잉굴다이의 태도로 볼 때 실로 뜻밖의 일이었다. 『승정원일기』는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었음을 전한다

인조: "호인(胡人)이 와서 (우리 사신을 불렀다고 들었는데, 무슨 의도인지
"알겠는가?"
홍서봉 : "어제는 느긋느긋한 마음을 극도로 보이더니,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갑작스레 와서 (사신을 내보내라고) 청하니, 필시 저들에게 급한 일이있어서 그럴 것입니다."

이날 청 측의 난데없는 사신 파견 요구는 홍타이지의 국서를 전달하기위한 것이었다. 정월 17일의 국서에서 홍타이지는 인조의 정월 13일 자 국서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인조에게 출성하여 투항하든가, 아니면 어서 결전을 벌이든가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언사는 여전히 거칠었지만, 이 시점에서는 홍타이지가 국서를 보냈다는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다. 홍타이지와 인조 간 국서 왕래, 즉 대화의 물꼬가열린 셈이기 때문이다. 정월 16일 접촉 때 잉굴다이의 태도로 보건대 청측은 대화의 의사가 없었다. 또한 정월 16일 심양으로 보낸 서신에서도 홍타이지는 다음 날 조선 측에 회답 국서를 보낼 의사를 비치지 않았다. 따라서 정월 17일의 갑작스러운 회담 제안과 국서는 분명 청 측의 돌연한 태도변화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 P244

인조의 출성 문제로 줄다리기가 한창이던 정월 25일, 잉굴다이와 마푸타는 "국왕이 만약 출성하지 않을 것이라면, 사신은 절대로 다시 오지 말라"고하며 조선 측의 출성 결단을 압박했는데, 이때 그들은 황제가 이튿날 귀국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황제가 귀국해버리면 협상에 의한 종전 가능성,
바꾸어 말하자면 ‘질서 있는 종전‘의 가능성도 사라질 터이니 결단을 서두르라는 의미였다. 이튿날 황제가 떠날 것이라는 이야기는 물론 사실이 아니었지만, 청군이 급기야는 조선 측에 대놓고 시간이 없다면서 성화를 부리기시작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그 이튿날인 정월26일의 접촉에서도 최명길이 황제는 언제 돌아갈 예정이냐고 묻자 청 측에서는 곧 귀국할 것이라고 답했다. 인조가 출성을 결심하고서 보낸 정월 27일의 국서에서 황제의 귀국이 임박했다고 하기에 서둘러 투항을 결정한 것이라고 특필(特筆)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 P253

그러나 분명 홍타이지는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으로 인해 전쟁을 서둘러 끝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군사적 측면에서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이 될 만한 후보를 찾을 수 없다면, 그 후보는 비군사적 측면에서 찾지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고찰에 근거하건대, 홍타이지로 하여금 전쟁을 서둘러 끝내게 만든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은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할 것이다. 첫째, ‘사건‘은 병자호란 동안 조선 땅에서 발생한 것이어야 한다. 둘째, ‘사건‘은 홍타이지에게 전쟁 계획의 변경을 강제할 만큼 심각한 것이어야 한다. 셋째, ‘사건‘은 홍타이지뿐만 아니라 청의 왕공들 대부분이 조선 땅을 서둘러 떠나야 하는 이유도 되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적어도 병자호란 기간, 즉 병자년 십이월과 정축년 정월에 관한 한, 청 측의 기록에서는 후보로 상정할만한 비군사적 ‘중대사건‘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청 측의 기록에서 16일 이후의 약 보름 동안은 홍타이지가 인조와 주고받은 국서의 전문 인용과 강화도 관련 기사로 채워져 있다. 정월 23일 외번몽고의 일부를 두만강방면으로 출발시켰다는 유일한 예외를 제외하면,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진영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강화도 작전을 지휘한 도르곤과 두두를 제외하면, 홍타이지나 왕•버일러의 동정도 전혀 드러나지않는다. 청 측의 기록은 마치 이 기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인 양 ‘침묵‘을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청태종실록』처럼 나중에 편찬된 사서에서 이런 종류의 ‘침묵‘은 간혹 ‘은폐‘를 위한 것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사서의 은폐 대상이 될 만한것에서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의 후보를 찾아보면 어떨까? 즉, 청의 사서에서 은폐한 사실이 확인되는 종류의 사건으로서 위에서 열거한 세 가지조건 가운데 일부라도 충족하는 것을 후보로 상정해보자는 말이다.
이러한 발상에서 얼른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당시조선에서 널리 유행하던 전염병인 ‘마마‘, 즉 천연두(smallpox)이다. 그것은 다음 장에서 보듯이 『청태종실록이 정묘호란 때의 후금군이 조선의 천연두에 쫓겨 귀국을 서둘렀다는 사실을 ‘은폐‘한 ‘전과‘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연두는 만주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홍타이지에게 엄청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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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보았듯이 병자호란 전야 조선의 방어전략은 정묘호란의 역사적교훈에 규정된 성격이 짙었다. 그렇다면, 서울 "직도"에 대한 우려를 망각하는 데에도 정묘호란의 경험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즉위 초까지만 해도인조는 적의 서울 "직도"를 우려했고, 이괄의 난 때 반란군의 서울 "직도"로 큰 낭패를 보았다. 그럼에도 인조 대의 조선 조정이 적의 서울 "직도"를 심각하게 우려하는 모습이 사라져버린 시기는 공교롭게도 정묘호란 이후이다.
그렇다면 조심스럽지만, 이렇게 추정해볼 수 있지 않을까? 정묘호란 발발 전의 조선 조정은 광해군 대이든 인조 대이든 간에 아직 후금군의 침공을 경험하지 않은 덕분에 서울 "직도까지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대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정묘호란 이후에는 후금군의 침공을 실제로 경험한 탓에 오히려 상상력이 제약되고 말았다. 즉, 조선 조정은 정묘호란의 역사적 교훈에 ‘매몰‘된 나머지, 적의 서울 "직도" 가능성을 아예 무시하거나, 혹은 최소한 그 위험을 과소평가하여 안주 등지의 방어 태세만으로 마음을 놓게 되었를 것이라는 말이다. - P114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해명하지 않은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바로 평안도와 황해도에 있던 조선군의 동태 문제이다. 개전 초기의 며칠동안 평안도와 황해도의 조선군은 서울을 향해 질주하는 로오사, 도도, 요토 등의 부대를 저지하지 못했다. 앞장에서 밝힌 대로, 그것은 청군의 통과작전과 조선군의 산성 입보가 낳은 복합 효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개전 초기의 며칠은 어쩔 수 없었다고 치더라도, 도도 부대와 요토 부대까지 지나간 뒤라면, 그들의 뒤를 쫓아 내려올 수 있지 않았을까? 예컨대, 당시 조선군의 최정예 병력을 거느리고 있던 의주의 임경업이나 안주의 유림은 왜 서둘러 남하하지 않았는가? 만약 그들이 서둘러 남하했다면, 인조가 십이월 18일의 교서에서 말한 것처럼, 병력이 5,000명도 되지 않았던적의 "고군"을 앞뒤에서 협격할 수 있지 않았을까?
개전 초기 서울을 급습한 청군의 세 부대가 지나간 뒤 조선군은 왜 즉각 그들의 뒤를 쫓아 남하하지 않았는지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자 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은 각 지역의 거점 방어가 평안도 황해도 지역 조선군이 사전에 부여받은 임무였다는 사실이다. 군사를 움직이라는 상부의 이동명령 없이 자의적인 상황 판단에 따라 방어 지역을 이탈하는 것은 군율위반이었다는 말이다.
예컨대 정축년 정월 평안병사 유림이 남한산성을 구원하러 출격하겠다는 평안감사 홍명구를 만류하면서 내세웠던 이유는 조정의 명령이 없었다는것이었다. 의주의 임경업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줄곧 백마산성에 머무르며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근왕에 나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책을 당하지 않았다. 어떤 기록에도 인조가 임경업에게 출격을 명한 사실은 보이지 않으므로 이는 역시 그가 사전에 부여받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결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 P125

 정묘호란의 경우와 비교할 때,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진군 방식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양로 병진‘과 ‘시차 진군‘으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양로 병진‘이란 청군의 진군로가 두 갈래였다는 의미이다. 청 측의 기록에 따르면, 홍타이지는 처음 심양을 떠날 때부터 전군(全軍)을 우익과 좌익의 두 갈래로 나누었다. 여기서 좌우는 남면(南面)하는 군주를 기준으로 하는 방위 개념이다. 동서남북의 방위로 말하자면, 좌익의 진군로는 동로, 우익의 진군로는 서로가 된다. 지금까지 언급된 청군의 여러 부대는 모두 의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서쪽 진군로를 따라 남하했으므로 서로군이라고 부를 수 있다. 좌익의 부대는 동쪽의 무순(撫順) 방면으로 난 길로 심양을 떠나 압록강 북쪽의 관전을 거쳐 조선의 창성 땅으로 진입했으므로 동로군이라고 부를 수 있다. 홍타이지는 팔기만주 · 팔기몽고 가운데 정백기, 양백기, 정람기의 병력과 외번몽고 좌익의 병력으로 동로군을 구성하여, 도르곤과 호오거에게 그 지휘를 맡겼다. 동로군에 속하지 않은 정황기, 양황기, 정홍기, 양홍기, 양람기와 외번몽고 우익은 당연히 서로군으로 편성되었다.  - P131

결과적으로 서로를 따라 남하한 청군은 전후 여섯 부대가 각각 시차를두면서 남하한 셈이었다. 전군은 세 부대로 나뉘어 있었다. 도도 부대와 요토 부대는 비록 같은 날 서울에 도착했지만, 분명 진군을 함께하지는 않았으므로 도착 시각은 달랐을 것이다. 후군의 부대들은 처음에 중군과 마찬가지로 단일 대오로 이동했지만, 홍타이지가 십이월 26일에 하달한 명령에따라 두 부대로 나뉘었다.
청군의 양로 병진과 시차 진군은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 조선군의 기동에큰 영향을 끼쳤다.  - P132

조정으로부터 근왕령을 받지도 않았거니와, 유림으로서는 청군의 시차진군 작전 때문에 후군이 모두 통과할 때까지 안주성을 지키는 데 전념하지않을 수 없었다. 설령 조정으로부터 출격 명령을 받았다 한들 안주를 떠날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말이다. - P134

나중에 홍타이지가 정축년 칠월 26일 명의 장수 조대수(祖大壽)에게 보낸 서신에서 "조선의 군사들을 살펴보니, 비록 말 위에서의 전투 능력은 없었지만 법도를 어기지 않았으며 보병전과 조총전에 뛰어났다"고 하여 조선군의 역량을 인정한 것도151) 결코 빈말은 아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정축년 십이월 인조에게 보낸 칙서에서 홍타이지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버텼다면 인조도 목숨을 잃고 조선의 종묘사직도 끊어졌을 터인데, 그 경우 자신이 설령 조선의 백성들을 위무하려들었더라도 전쟁과 이산(離散)의 여파로 끔찍한 비극이 벌어져 결국 "동방의 한 나라가 끝내 파괴되기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조선의 백성들이 자신에게 순순히 복종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 칙서의 취지는 알량하게도 남한산성에서 내려온 인조의 결단을 자신이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외교적 수사에 불과하다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전쟁을 치르면서 조선군의 강고한 저항 의지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홍타이지가 이런 식의 수사를 구사하지도 않았으리라. - P162

그런 강화도가 병자호란 때의 청군에게는 단 하루 만에 함락되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오늘날 학계는 물론 일반 대중에게 널리 공유되고 있는 통설은 강화도의 조선 지휘부, 특히 검찰사(檢察使)김경징(金慶徵)과 강도유수(江都留守) 장신(張紳)의 안일, 무능, 비겁 등한심한 작태에서 그 해답을 찾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인재(人災論)‘이다. 하지만 몇 년 전 이러한 통설적 이해에 이의를 제기하는 연구가 나왔다.
이에 따르면, 오늘날 강화도 함락 과정에 대한 역사적 이해의 사료적 근거는 기본적으로 나만갑의 병자록(丙子錄)』에 수록된 기강도사(記江都事)인데, 거기에 자세히 묘사된 김경징의 한심한 작태는 김경징의 부친 김류와 나만갑의 악연을 고려할 때 곧이곧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사실 병자호란 당시 조선 조정은 김경징에게 강화도 수비의 군사적 책임을맡기지 않았으며, 전후의 김경징 처형 결정도 군사적 차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윤리적 차원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강화도 함락의 군사적 원인은 다른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전력 차이, 즉 청군이 병력과 무기- 대표적으로 홍이포-에서 현격한 우세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하며, 여기에 우월한 수군 전력에 의지하여 청군을 해상에서 저지한다는 것이 조선군의 구상이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 P167

이처럼 강력한 대포였기에, 『인조실록에서는 청군이 쏜 홍이포 때문에 "(조선의 수군과 육군이 허둥지둥하며 감히 접근하지 못하자, 적(賊)이 빈틈을 타고 급히 (염하수로를 건넜다"고 했고, (B)의 도르곤 보고도 조선 수군의 전선 40여 척이 "우리가 홍이포와 장군포를 쏘자 견디지 못하고 위아래로 흩어져 도망쳤습니다"라고 하여, 홍이포가 청군의 강화도 상륙작전에서 막대한 위력을 발휘한 것처럼 썼다. 선행 연구에서도 이러한 사료기록에 근거하여 당시 청군의 전력 구성에서 홍이포의 존재를 강조했다. 그러나 강화도 작전에서 청군이 홍이포를 투입하여 거둔 실전 효과를 따져보면, 조선 측에 가한 심리적 충격의 효과는 강력했을지 몰라도, 실제 물리적 타격의 효과는 매우 제한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추정하는ㅜ이유로는,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청군이 강화도 작전에 투입한 홍이포의숫자가 결코 많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청군이 강화도 작전에 투입한 홍이포는 겨우 3문 수준에 그쳤다. - P190

현재 4문의 실물이 남아 있는 숭덕 8년(1643) 주조 "신위대장군(神威大將軍)"의 경우를 보면  청군의 홍이포는 구경이 13~14.5센티미터, 포신이264~305센티미터, 무게가 3,600~4,000근에 달했다. 이 시기 조선군의 화포로는 16세기 중엽 주조의 천자총통(天字銃筒)이나 지자총통(地字銃筒)이 현존하는데, 전자는 구경 11~13센티미터, 길이 90~130센티미터, 무게300~400킬로그램[500~667금]이고, 후자는 구경 10센티미터, 길이 80~90센티미터, 무게 70~150킬로그램 [117~250)이다.71) 이처럼 홍이포는 그 크기에서 조선군의 화포를 압도했으며, 크기만큼이나 사거리도 길어서 최대 사거리 약 9킬로미터, 유효 사거리 약 2.8킬로미터에 이르렀다. 홍이포등장 이전 동아시아에서 위력이 가장 셌던 화포로 알려져 있는 불랑기(佛狼機) 대포의 유효 사거리도 약 1킬로미터에 불과했으니, 당시 홍이포의 위력은 말 그대로 막강했다고 할 수 있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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