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말야. 강한 척하는 타입 별로야. 누가 봐도 멋지고 빛이 나고, 그러면 뭐랄까, 나만 이는 소중함 같은 건 좀 없잖아. 그런 애라면 좋아하는 게 당연하지. 이런 기분도 너무 뻔하고.
그래, 맞아.
내 가슴은 겉잡을 수 없이 쿵쾅거리고 머릿속은 깨질 듯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서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닿는 일, 팔이 길어지는 거지. 손가락이 닿는 순간 서로임을 확인하고 깍지를낀다. 그런 다음 한 걸음씩 다가가며 둘 사이에 가로놓인 시간과 거리를 없애는 거야. 서로 조금씩 가까이 가는 것, 두 눈은 나만 아는 소중한 너의 모습에 사로잡힌 채, 그래. 한쪽에서 자기 쪽으로잡아당기는 게 아니고. 근데 말야.
마리는 이미 정돈이 돼 있는 프린트물과 노트의 모서리를 계속해서 맞추고 있다. 얼굴은 빨개질 대로 빨개져서 누군가 한방 내리친 토마토처럼 금방이라도 으깨어져버릴 것만 같다. 웬일인지 나는 마리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불편하지만 기쁘고 두려우면서도 간절한 것, 말없이 함께 있을 때온 세상이 이야기와 노래로 가득 차고 누구에게라도 웃어주고 싶어 내 얼굴이 환해지는 것, 혼자 있을 때에도 자꾸 생각이 나고 멀리서라도 한번 더 보고 싶은 웃는 얼굴 그런 게 있지. 근데 말야.
지금은 그런 생각이 더할 수 없이 내 마음을 아프게 만들거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화가 나고 또 허탈한 마음, 머릿속에서 물이 끓는 것 같고, 민기훈과 그리핀. 내가 너무 강렬한 빛에 눈이 멀어서 그 주변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걸까. - P339
소년이라면 시간과 겨뤄봐야지.
열두 살 무렵이었다. 옆집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부터 뛰기 시작한 나는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그 할아버지와 마주쳤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멈추지 않고 그대로 계단을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한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끊어질 듯 아픈 다리를 끌고 가까스로 내가 살던 8층에 닿았을 때, 할아버지도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중이었다. 엘리베이터하고 시합했구나? 어깨를 들썩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부터 뛰어왔니? 나는 힘들게 침을 삼킨다음 겨우 대답을 했다. 할아버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때는 버스를 따라서 달렸는데, 소년들은 시간과 겨루는 법이지. - P411
그나저나 이 봄눈, 모든 것을 순식간에 덮어버린다.
점점 눈앞이 보이지 않아. 온통 하얗고 흔들리고 쏟아지고, 다른 별에 온것 같아. 나의 노래를 싣고 시간이 우주 저편으로 흘러가고있군. ■ - P4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