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보았듯이 병자호란 전야 조선의 방어전략은 정묘호란의 역사적교훈에 규정된 성격이 짙었다. 그렇다면, 서울 "직도"에 대한 우려를 망각하는 데에도 정묘호란의 경험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즉위 초까지만 해도인조는 적의 서울 "직도"를 우려했고, 이괄의 난 때 반란군의 서울 "직도"로 큰 낭패를 보았다. 그럼에도 인조 대의 조선 조정이 적의 서울 "직도"를 심각하게 우려하는 모습이 사라져버린 시기는 공교롭게도 정묘호란 이후이다. 그렇다면 조심스럽지만, 이렇게 추정해볼 수 있지 않을까? 정묘호란 발발 전의 조선 조정은 광해군 대이든 인조 대이든 간에 아직 후금군의 침공을 경험하지 않은 덕분에 서울 "직도까지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대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정묘호란 이후에는 후금군의 침공을 실제로 경험한 탓에 오히려 상상력이 제약되고 말았다. 즉, 조선 조정은 정묘호란의 역사적 교훈에 ‘매몰‘된 나머지, 적의 서울 "직도" 가능성을 아예 무시하거나, 혹은 최소한 그 위험을 과소평가하여 안주 등지의 방어 태세만으로 마음을 놓게 되었를 것이라는 말이다. - P114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해명하지 않은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바로 평안도와 황해도에 있던 조선군의 동태 문제이다. 개전 초기의 며칠동안 평안도와 황해도의 조선군은 서울을 향해 질주하는 로오사, 도도, 요토 등의 부대를 저지하지 못했다. 앞장에서 밝힌 대로, 그것은 청군의 통과작전과 조선군의 산성 입보가 낳은 복합 효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개전 초기의 며칠은 어쩔 수 없었다고 치더라도, 도도 부대와 요토 부대까지 지나간 뒤라면, 그들의 뒤를 쫓아 내려올 수 있지 않았을까? 예컨대, 당시 조선군의 최정예 병력을 거느리고 있던 의주의 임경업이나 안주의 유림은 왜 서둘러 남하하지 않았는가? 만약 그들이 서둘러 남하했다면, 인조가 십이월 18일의 교서에서 말한 것처럼, 병력이 5,000명도 되지 않았던적의 "고군"을 앞뒤에서 협격할 수 있지 않았을까? 개전 초기 서울을 급습한 청군의 세 부대가 지나간 뒤 조선군은 왜 즉각 그들의 뒤를 쫓아 남하하지 않았는지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자 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은 각 지역의 거점 방어가 평안도 황해도 지역 조선군이 사전에 부여받은 임무였다는 사실이다. 군사를 움직이라는 상부의 이동명령 없이 자의적인 상황 판단에 따라 방어 지역을 이탈하는 것은 군율위반이었다는 말이다. 예컨대 정축년 정월 평안병사 유림이 남한산성을 구원하러 출격하겠다는 평안감사 홍명구를 만류하면서 내세웠던 이유는 조정의 명령이 없었다는것이었다. 의주의 임경업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줄곧 백마산성에 머무르며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근왕에 나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책을 당하지 않았다. 어떤 기록에도 인조가 임경업에게 출격을 명한 사실은 보이지 않으므로 이는 역시 그가 사전에 부여받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결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 P125
정묘호란의 경우와 비교할 때,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진군 방식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양로 병진‘과 ‘시차 진군‘으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양로 병진‘이란 청군의 진군로가 두 갈래였다는 의미이다. 청 측의 기록에 따르면, 홍타이지는 처음 심양을 떠날 때부터 전군(全軍)을 우익과 좌익의 두 갈래로 나누었다. 여기서 좌우는 남면(南面)하는 군주를 기준으로 하는 방위 개념이다. 동서남북의 방위로 말하자면, 좌익의 진군로는 동로, 우익의 진군로는 서로가 된다. 지금까지 언급된 청군의 여러 부대는 모두 의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서쪽 진군로를 따라 남하했으므로 서로군이라고 부를 수 있다. 좌익의 부대는 동쪽의 무순(撫順) 방면으로 난 길로 심양을 떠나 압록강 북쪽의 관전을 거쳐 조선의 창성 땅으로 진입했으므로 동로군이라고 부를 수 있다. 홍타이지는 팔기만주 · 팔기몽고 가운데 정백기, 양백기, 정람기의 병력과 외번몽고 좌익의 병력으로 동로군을 구성하여, 도르곤과 호오거에게 그 지휘를 맡겼다. 동로군에 속하지 않은 정황기, 양황기, 정홍기, 양홍기, 양람기와 외번몽고 우익은 당연히 서로군으로 편성되었다. - P131
결과적으로 서로를 따라 남하한 청군은 전후 여섯 부대가 각각 시차를두면서 남하한 셈이었다. 전군은 세 부대로 나뉘어 있었다. 도도 부대와 요토 부대는 비록 같은 날 서울에 도착했지만, 분명 진군을 함께하지는 않았으므로 도착 시각은 달랐을 것이다. 후군의 부대들은 처음에 중군과 마찬가지로 단일 대오로 이동했지만, 홍타이지가 십이월 26일에 하달한 명령에따라 두 부대로 나뉘었다. 청군의 양로 병진과 시차 진군은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 조선군의 기동에큰 영향을 끼쳤다. - P132
조정으로부터 근왕령을 받지도 않았거니와, 유림으로서는 청군의 시차진군 작전 때문에 후군이 모두 통과할 때까지 안주성을 지키는 데 전념하지않을 수 없었다. 설령 조정으로부터 출격 명령을 받았다 한들 안주를 떠날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말이다. - P134
나중에 홍타이지가 정축년 칠월 26일 명의 장수 조대수(祖大壽)에게 보낸 서신에서 "조선의 군사들을 살펴보니, 비록 말 위에서의 전투 능력은 없었지만 법도를 어기지 않았으며 보병전과 조총전에 뛰어났다"고 하여 조선군의 역량을 인정한 것도151) 결코 빈말은 아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정축년 십이월 인조에게 보낸 칙서에서 홍타이지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버텼다면 인조도 목숨을 잃고 조선의 종묘사직도 끊어졌을 터인데, 그 경우 자신이 설령 조선의 백성들을 위무하려들었더라도 전쟁과 이산(離散)의 여파로 끔찍한 비극이 벌어져 결국 "동방의 한 나라가 끝내 파괴되기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조선의 백성들이 자신에게 순순히 복종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 칙서의 취지는 알량하게도 남한산성에서 내려온 인조의 결단을 자신이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외교적 수사에 불과하다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전쟁을 치르면서 조선군의 강고한 저항 의지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홍타이지가 이런 식의 수사를 구사하지도 않았으리라. - P162
그런 강화도가 병자호란 때의 청군에게는 단 하루 만에 함락되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오늘날 학계는 물론 일반 대중에게 널리 공유되고 있는 통설은 강화도의 조선 지휘부, 특히 검찰사(檢察使)김경징(金慶徵)과 강도유수(江都留守) 장신(張紳)의 안일, 무능, 비겁 등한심한 작태에서 그 해답을 찾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인재(人災論)‘이다. 하지만 몇 년 전 이러한 통설적 이해에 이의를 제기하는 연구가 나왔다. 이에 따르면, 오늘날 강화도 함락 과정에 대한 역사적 이해의 사료적 근거는 기본적으로 나만갑의 병자록(丙子錄)』에 수록된 기강도사(記江都事)인데, 거기에 자세히 묘사된 김경징의 한심한 작태는 김경징의 부친 김류와 나만갑의 악연을 고려할 때 곧이곧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사실 병자호란 당시 조선 조정은 김경징에게 강화도 수비의 군사적 책임을맡기지 않았으며, 전후의 김경징 처형 결정도 군사적 차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윤리적 차원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강화도 함락의 군사적 원인은 다른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전력 차이, 즉 청군이 병력과 무기- 대표적으로 홍이포-에서 현격한 우세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하며, 여기에 우월한 수군 전력에 의지하여 청군을 해상에서 저지한다는 것이 조선군의 구상이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 P167
이처럼 강력한 대포였기에, 『인조실록에서는 청군이 쏜 홍이포 때문에 "(조선의 수군과 육군이 허둥지둥하며 감히 접근하지 못하자, 적(賊)이 빈틈을 타고 급히 (염하수로를 건넜다"고 했고, (B)의 도르곤 보고도 조선 수군의 전선 40여 척이 "우리가 홍이포와 장군포를 쏘자 견디지 못하고 위아래로 흩어져 도망쳤습니다"라고 하여, 홍이포가 청군의 강화도 상륙작전에서 막대한 위력을 발휘한 것처럼 썼다. 선행 연구에서도 이러한 사료기록에 근거하여 당시 청군의 전력 구성에서 홍이포의 존재를 강조했다. 그러나 강화도 작전에서 청군이 홍이포를 투입하여 거둔 실전 효과를 따져보면, 조선 측에 가한 심리적 충격의 효과는 강력했을지 몰라도, 실제 물리적 타격의 효과는 매우 제한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추정하는ㅜ이유로는,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청군이 강화도 작전에 투입한 홍이포의숫자가 결코 많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청군이 강화도 작전에 투입한 홍이포는 겨우 3문 수준에 그쳤다. - P190
현재 4문의 실물이 남아 있는 숭덕 8년(1643) 주조 "신위대장군(神威大將軍)"의 경우를 보면 청군의 홍이포는 구경이 13~14.5센티미터, 포신이264~305센티미터, 무게가 3,600~4,000근에 달했다. 이 시기 조선군의 화포로는 16세기 중엽 주조의 천자총통(天字銃筒)이나 지자총통(地字銃筒)이 현존하는데, 전자는 구경 11~13센티미터, 길이 90~130센티미터, 무게300~400킬로그램[500~667금]이고, 후자는 구경 10센티미터, 길이 80~90센티미터, 무게 70~150킬로그램 [117~250)이다.71) 이처럼 홍이포는 그 크기에서 조선군의 화포를 압도했으며, 크기만큼이나 사거리도 길어서 최대 사거리 약 9킬로미터, 유효 사거리 약 2.8킬로미터에 이르렀다. 홍이포등장 이전 동아시아에서 위력이 가장 셌던 화포로 알려져 있는 불랑기(佛狼機) 대포의 유효 사거리도 약 1킬로미터에 불과했으니, 당시 홍이포의 위력은 말 그대로 막강했다고 할 수 있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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