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추정이 가능하다. 청군이 11시~11시 30분의 어느 시점에 도해를 개시하자, 잠시 후 봉림대군 일행이 갑곶을 떠나 강화부성으로 달려갔다. 청군의 선봉 병력은 순식간에 갑을장악하고 이내 성으로 진격하여 남문 밖에 진을 쳤다. 봉림대군과 함께 성으로 돌아온 김상용은 절망감에 휩싸여 남문 위에 쌓아둔 화약에 불을 붙여자결했는데, 그 시각은 12시 30분경이었다. 다섯째, 청군이 갑곶에 상륙한 이후 육상에서 벌어진 전투에 관한 것이다. (갑)의 『인조실록』 정월 22일 기사에 "중군 황선신은 수백 명의 군사를이끌고 나룻가 뒷산에 있었는데 적을 만나자 군사가 무너져 죽었다"는 말이있었다. 황선신과 관련하여, 이민구는 (을)에서 "본부의 중군 황선신이 광성으로부터 비로소 육군 113명을 이끌고 왔다고 하여 매우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황선신은 강화부성이 아니라 장신이 주둔하고있던 광성으로부터 올라왔고, 그의 병력은 113명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갑)의 『인조실록』 정월 22일 기사로 돌아가 보면, 황선신의 패전다음에 곧바로 청군이 강화부성 밖에 진을 쳤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민구의 기록에서도 황선신의 패전 이후 강화부성으로 몰려가면서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는 청군에 맞서 싸운 조선군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않는다. 조익의 경우에는 황선신 부대를 아예 언급하지 않았고, 단지 김경징이 강화부성에서 데리고 나간 무사들이 겨우 70~80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했을 따름이다. ) 나만갑은 「기강도사」에서 당시 강화부성의 군사가 수백 명을 채우지 못할 정도로 적었다고 했으나, ) 『인조실록과 이민구의 목격담에서는 "수백 명은커녕 그 존재가 아예 언급되지 않았고, 조익의 기록에서는 그 숫자가 훨씬 더 적었다. 앞에서 이미 고찰했듯이, 당시 강화부성과 갑곶 일대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던 것이다. - P202
이처럼 조석·조류가 조선 수군의 동태에 중대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었다면 청군 역시 염하수로를 건널 때 조류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이 질문과 관련해서는 위에서 소개한 광해군 11년 우의정 조정의 상주에서 "만약 선체가 작은 병선이라면 적을 막는 데 쓸 수 있다"는 구절을 상기할 필요가있다. 염하수로에서는 작은 크기의 배가 오히려 군사적 효용이 더 크다는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홍타이지 또한 조대수에게 보낸 서신에서 "아군의 비선(飛船)은 가볍고 날카로워 운전[旋轉] 이 편리하고 빨랐기 때문에 조선 수군의 배들이 막지 못했다고 자랑하여, 132) 이 점을 강화도 작전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최대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비선" 이라는 표현 자체가 청군의 작은 배들이 마치 새가 날아가는 것처럼 경쾌한 기동력을 갖추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지만, 청군의 배들이 염하수로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일수 있었던 데에는 배의 크기 외에 또 다른 요인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단서는 (정)의 도르곤 보고에 보이는 "(배 위에) 서서 상앗대질을 하며"라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 P216
남급의 [강도록]에는, 청군의 도해 직전 상황에서 임선백(任善伯)이 봉림대군에게 "적(賊)의 배는 가볍고 빠르기가 (마치) 날아가는 것 같지만, 우리의 전선은 조수가 물러날 때 움직이기 어려우니 전적으로 주사에만 기댈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갑곶의 진해루(鎭海樓) 아래 좁고 험한 곳에 포진하여 상륙하는 적과 혈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강도록]은 이 장면에 앞서 임선백이 강화부성의 남문 수비를 맡았다고 하고서는, 난데없이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했다가 뱃사람에의해 구조되어 살아났다고 하면서 갑곶 현장의 봉림대군 앞에 그를 등장시키고 있다. 임선백의 등장은 아무래도 허구적 장치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염하수로에서 "조수가 물러날 때에는 조선 수군의 전선들이 청군의 도해를 저지할 수 없다는 말 자체는 허구적 장치를 빌려서 정축년 정월 22일의 ‘교훈‘을 지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전후 조선 조정이 강화도해안의 요해처에 목책(木柵)의 설치를 추진한 것도 그날에 얻은 ‘교훈‘ 때문일 것이다. 물론 만시지탄을 자아낼 따름이지만 말이다. - P219
그러나 남한산성은 청군의 전투력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쉽사리 함락시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사실 당시 청군의 입장에서는 굳이 적지 않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공성전을 서두를 필요 자체가 없었다. 남한산성의 식량이 떨어지면 조선군은 굶주림에 지쳐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할 터였기때문이다. 청군은 그때까지 느긋하게 시간만 흘려보내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당시 남한산성의 식량은 늦어도 이월 20일경이면 바닥을 드러낼 지경이었다. 남한산성에 대한 포위 작전 태세를 완성한 청군이 만약 이월 하순까지 ‘고사(枯死) 작전‘을 지속했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마도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참극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참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은 남한산성의 식량이 떨어지기 훨씬 전인 정축년 정월 30일(1637년 2월 24일에 끝이 났다. 이날 인조가 남한산성에서의 농성을 포기하고 삼전도로나와 홍타이지에게 항복했기 때문이다.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고사 작전이 청군의 입장에서 가장 유리할뿐더러 충분히 실행 가능했다는 점에 비추어보자면, 병자호란이 남한산성의 조선군이 고사하기 전에 막을 내린 것은오히려 뜻밖의 결말이었으며 조선으로서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할만하다. - P222
그렇다면, 병자호란은 어떻게 해서 이런 방식, 즉 의외로 일찍 그리고 조선의 종묘사직과 인조의 왕위가 그대로 유지되는 방식으로 막을 내리게되었던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정축년 정월 30일 인조의 남한산성 성 경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인조의 출성은 홍타이지가 내건 종전 조건을 받아들인 결과였고, 홍타이지가 그런 종전조건을 명시적으로 제시한 것은 그로부터 열흘 전인 정월 20일의 일이었다. 정월 20일 새벽 청군은 남한산성의 조선 조정에 홍타이지의 국서 한 통을전달했다. 이 국서에서 홍타이지는 인조가 출성하고 척화신 두세 명을 박송縛送하기만 하면 전쟁을 끝내고 철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고립무원의 궁지에 몰려 있던 인조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파격적이고 관대한 조건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로써 인조가 이 두 가지 조건을 수용하여 단지 두세 명의 척화신을 포박하여 보내고 그 자신이 남한산성에서 나가기만 한다면 더 이상 피를 흘릴 필요없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제시한 두 조건은 조선 조정의 입장에서 수용하기 곤란한 것이었다. 신료의 대다수가 척화를 주장한 터에 두세 명만을 희생양으로 골라 사지에 밀어 넣는다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조의 출성은 더욱더 수용할 수 없었다. 오랑캐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성을 나갔다가 자칫 배신이라도 당하면 어찌할 것인가? 조선 조정은 옛날 송나라 휘종과 흠종이 겪었던 참극이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조선 조장으로서는 인조의 출성만은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했다. 홍타이지의 정월 20일자 국서에 대하여, 인조는 다음날 바로 청군 진영에 답서를 보냈다. 답서의 첫 문장은 이랬다. "조선국왕 신(臣) 이종(李(宗)이 대청국 관온인성황제 폐하께 삼가 상서합니다." 정월 19일 청군 진영에 보낸 국서까지만 해도 "조선국왕이 대청국관온인성황제께 삼가 상서합니다"라는 말로 시작했다. "신 이종"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답서에서는 인조가 자신을 "신"이라고 칭하면서 성과 이름을 그대로썼다. 이뿐만 아니라 홍타이지를 "폐하"라고 불렀다. 완전한 칭신(稱臣)의 서식이었다. 그 대신에 인조는 자신의 출성과 척화신의 박송없이 군사를 물려달라고 간청했다. 홍타이지의 조선 침공이 궁극적으로 인조의 칭신 거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면 인조의 완전한 칭신으로 전쟁의 발발 원인은 일단 해소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청 측은 두 조건, 특히 인조의 출성은 반드시 관철시켜야겠다는 강경한 태도였다. 인조는 정월 24일 청군 측에 전달한 국서에서도 출성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척화신 두세 명을 포박해서 보내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한발물러섰다. 당시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나가 있던 홍익한을 척화신의 대표로 거명했고, 나머지 척화신은 청군의 철수 후에 색출해서 보내겠다는뜻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청 측은 더 이상 양보하려들지 않았다. 그들은 아예 국서의 접수조차 거부하면서 인조의 출성 수용을 압박했다. 협상은인조의 출성 문제를 놓고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정월 26일에 이르러 조선 조정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청군 측에서 이미 나흘 전인 정월 22일에 강화도를 점령했다는 사실을통고한 것이다. 청군은 봉림대군의 친필 서신과 윤방 등의 장계를 증거로,강화도에서 사로잡은 환관 나업과 진원군 이세완을 증인으로 제시했다. 당시 강화도에는 종묘사직의 신주와 원손 및 두 대군이 피난을 가 있었다. 인조는 설사 남한산성이 무너지더라도 강화도만 버틴다면 나라가 멸망에는 이르지 않을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따라서 강화도 함락 소식은 남한산성의 조선 조정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인조는 어쩔 수 없이 농성을 접고 출성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 P223
여기서 남한산성의 조선 조정이 식량 부족에 시달렸듯이 청군 또한 군량확보에 곤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제2장에서 엄동설한의 한겨울이 홍타이지가 구상한 공격전략의 실현에 최적의 계절이었다고 말한 바 있는데, 겨울철이 군량의 현지 조달에 유리한 시기라는 점도 감안했을 것으로 보인다. 모든 전쟁이 다 그렇지만, 특히 병자호란처럼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총력전이자 적국 땅 깊숙이까지 쳐들어가는 장거리 원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물자, 특히 군량의 보급이었다. 수만 명의 병력이 몇 달 동안 먹어야할 군량은 확보하기도 수송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이 골치 아픈 문제는 가을걷이가 끝난 뒤에 전쟁을 일으키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다. 약탈을통한 군량의 현지 조달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즉, 가을걷이 이후는 조선의 관아나 민간의 비축 식량이 연중 가장 풍부한 때이므로 약탈에 의한 군량 조달에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 P226
그러나 정월 17일 상황의 일대 반전이 일어났다. 청군이 단 하루 만에 태도를 180도 바꾸어 먼저 적극적으로 협상을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날 그들은 갑작스럽게 남한산성으로 사람을 보내어 사신 파견을 요구했다. 전날의 만남에서 확인한 잉굴다이의 태도로 볼 때 실로 뜻밖의 일이었다. 『승정원일기』는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었음을 전한다
인조: "호인(胡人)이 와서 (우리 사신을 불렀다고 들었는데, 무슨 의도인지 "알겠는가?" 홍서봉 : "어제는 느긋느긋한 마음을 극도로 보이더니,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갑작스레 와서 (사신을 내보내라고) 청하니, 필시 저들에게 급한 일이있어서 그럴 것입니다."
이날 청 측의 난데없는 사신 파견 요구는 홍타이지의 국서를 전달하기위한 것이었다. 정월 17일의 국서에서 홍타이지는 인조의 정월 13일 자 국서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인조에게 출성하여 투항하든가, 아니면 어서 결전을 벌이든가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언사는 여전히 거칠었지만, 이 시점에서는 홍타이지가 국서를 보냈다는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다. 홍타이지와 인조 간 국서 왕래, 즉 대화의 물꼬가열린 셈이기 때문이다. 정월 16일 접촉 때 잉굴다이의 태도로 보건대 청측은 대화의 의사가 없었다. 또한 정월 16일 심양으로 보낸 서신에서도 홍타이지는 다음 날 조선 측에 회답 국서를 보낼 의사를 비치지 않았다. 따라서 정월 17일의 갑작스러운 회담 제안과 국서는 분명 청 측의 돌연한 태도변화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 P244
인조의 출성 문제로 줄다리기가 한창이던 정월 25일, 잉굴다이와 마푸타는 "국왕이 만약 출성하지 않을 것이라면, 사신은 절대로 다시 오지 말라"고하며 조선 측의 출성 결단을 압박했는데, 이때 그들은 황제가 이튿날 귀국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황제가 귀국해버리면 협상에 의한 종전 가능성, 바꾸어 말하자면 ‘질서 있는 종전‘의 가능성도 사라질 터이니 결단을 서두르라는 의미였다. 이튿날 황제가 떠날 것이라는 이야기는 물론 사실이 아니었지만, 청군이 급기야는 조선 측에 대놓고 시간이 없다면서 성화를 부리기시작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그 이튿날인 정월26일의 접촉에서도 최명길이 황제는 언제 돌아갈 예정이냐고 묻자 청 측에서는 곧 귀국할 것이라고 답했다. 인조가 출성을 결심하고서 보낸 정월 27일의 국서에서 황제의 귀국이 임박했다고 하기에 서둘러 투항을 결정한 것이라고 특필(特筆)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 P253
그러나 분명 홍타이지는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으로 인해 전쟁을 서둘러 끝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군사적 측면에서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이 될 만한 후보를 찾을 수 없다면, 그 후보는 비군사적 측면에서 찾지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고찰에 근거하건대, 홍타이지로 하여금 전쟁을 서둘러 끝내게 만든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은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할 것이다. 첫째, ‘사건‘은 병자호란 동안 조선 땅에서 발생한 것이어야 한다. 둘째, ‘사건‘은 홍타이지에게 전쟁 계획의 변경을 강제할 만큼 심각한 것이어야 한다. 셋째, ‘사건‘은 홍타이지뿐만 아니라 청의 왕공들 대부분이 조선 땅을 서둘러 떠나야 하는 이유도 되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적어도 병자호란 기간, 즉 병자년 십이월과 정축년 정월에 관한 한, 청 측의 기록에서는 후보로 상정할만한 비군사적 ‘중대사건‘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청 측의 기록에서 16일 이후의 약 보름 동안은 홍타이지가 인조와 주고받은 국서의 전문 인용과 강화도 관련 기사로 채워져 있다. 정월 23일 외번몽고의 일부를 두만강방면으로 출발시켰다는 유일한 예외를 제외하면,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진영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강화도 작전을 지휘한 도르곤과 두두를 제외하면, 홍타이지나 왕•버일러의 동정도 전혀 드러나지않는다. 청 측의 기록은 마치 이 기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인 양 ‘침묵‘을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청태종실록』처럼 나중에 편찬된 사서에서 이런 종류의 ‘침묵‘은 간혹 ‘은폐‘를 위한 것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사서의 은폐 대상이 될 만한것에서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의 후보를 찾아보면 어떨까? 즉, 청의 사서에서 은폐한 사실이 확인되는 종류의 사건으로서 위에서 열거한 세 가지조건 가운데 일부라도 충족하는 것을 후보로 상정해보자는 말이다. 이러한 발상에서 얼른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당시조선에서 널리 유행하던 전염병인 ‘마마‘, 즉 천연두(smallpox)이다. 그것은 다음 장에서 보듯이 『청태종실록이 정묘호란 때의 후금군이 조선의 천연두에 쫓겨 귀국을 서둘렀다는 사실을 ‘은폐‘한 ‘전과‘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연두는 만주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홍타이지에게 엄청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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