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에서 1636년 홍타이지의 ‘칭제‘에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은 차하르 정복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홍타이지와 대결하던 차하르의 대칸 릭단은 1634년 가을 천연두에 걸려 사망했다. 만약 릭단이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18세기 중엽 건륭 연간 청의 준가르 정복 과정에서는 준가르 초원의 유목민 가운데 열에 셋이 청군에게 도륙되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열에 넷이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준가르 유목민의 지도자 아무르사나(Amursana)도 천연두에 걸려 사망했다. 따라서 청의 준가르 정복에 대해서도 ‘천연두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올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물론 청조가 천연두의 ‘혜택‘만 입었던 것은 아니다. 17세기 중엽 청이입관을 달성한 때의 황제 순제(順帝)가 겨우 스물네 살의 나이로 사망한 것도, 19세기 후반 동치제(同治帝)가 스무 살에 사망한 것도 천연두때문이었다. 결국 운명을 돌이키지는 못했지만, 입관 초기의 황제 순치제는 천연두 유행의 가능성이 특히 높은 겨울과 봄이면 거의 어김없이 은둔생활에 들어가 천연두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했다. 강희제(康熙帝)는어려서 천연두를 앓아 면역을 획득한 덕분에 순치제의 계승자로 선택되었다.
강희제는 황태자가 천연두에 걸렸다가 회복된 이후 인두 접종 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청조는 천연두 면역이 없는 몽고의 왕공 귀족에 대하여 북경 대신 열하(熱河)로 와서 조근(朝覲)의 의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안배했다.  - P261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입관 전의 만주인은 대명 전쟁에서 마마의 위협을 중대 요소로 고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 당시의한반도에도 이미 1,000년에 이르는 천연두 유행의 역사가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말까지의 조선 군적(軍籍)에서 사람들의 얼굴에 마마자국이 어느 정도인지가 필수적인 기입 사항이었을 정도이다. 더군다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연중 천연두의 유행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계절에 일어났다. 특히 병자호란은 한겨울에 벌어진 만큼 청군이 조선 땅에서 마마의 위협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이로부터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만주인들은 과연 조선의 마마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P267

앞장의 말미에서 청태종실록』이 정묘호란 때 후금군이 조선의 마마를 경험한 사실을 ‘침묵‘으로 ‘은폐‘한 사실이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한 말이다. 그렇다면, 「청태종실록』이 정묘호란 당시 조선에서의 마마 관련사실을 은폐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은 그간 조선이 자신들에게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 죄를 묻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노라고 주장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자신들의 조선 침공은 ‘의로운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가호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예컨대 만주어 당안을 보면,
홍타이지는 조선을 침공한 원정군이 "하늘의 은혜(abkai kesi)"를 입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한문 [청태종실록]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하늘의 보살핌과 도움을 입고 있다蒙天眷佑/蒙天佑]"는 것이다. 그런데 마마를 극도로 두려워했던 만주인들은 마마를 곧 신의 뜻이라고여겼다. 만주어 당안에서 (가)와 (나)는 전쟁 당시 조선에 출병한 후금군과 심양의 홍타이지가 주고받은 전황 관련 문서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므로 당시의 전쟁 수행에 중대 변수가 되는 마마에 대한 언급을 그대로 실었을 것이다. (다)는 전쟁이 끝난 뒤의 상황이므로 일견 사실대로 적지 않을이유가 딱히 없어 보인다. 그러나 훗날 실록과 같은 사서를 편찬하면서 체계적인 역사 서사를 구성할 때에는, 후금군이 조선에서 마마의 위협에 직면했다는 것은 "하늘의 은혜", "하늘의 보살핌과 도움" 등과 심각한 모순으로 부각되었을 것이다. 만약 실록의 정묘호란 서사에 신의 뜻인 마마 관련 사실을 남겨둔다면, ‘의로운 전쟁‘이라는 역사 서사의 틀이 통째로 흔들리기때문이다. - P271

 다른 무엇보다도 정묘호란 때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은폐의동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은 정묘호란과 달리 황제인 홍타이지가 직접 이끈 친정이었으며, 당시 홍타이지는 명시적으로 이번 조선 침공이 ‘의로운 전쟁‘ 임을 표방하고 있었다. 병자년 십일월 25일 홍타이지는 동지 제천 의식을 거행하면서조선을 침공하는 이유를 하늘에 고했다. 이날의 고천(告天) 제문에서 홍타이지는, 기미년(1619) 조선이 명과 연합하여 "사악한 전쟁(chedain)" [사르후 전투를 지칭을 일으킨 이래 조선이 자신들에게 저지른 갖가지 죄악을열거했다. 제문의 말미에서는 ‘절화교서‘의 내용을 조선이 먼저 맹약을 파기하여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증거로 내세웠다. 이처럼 전쟁 발발의 책임을 조선으로 돌리면서 홍타이지는 누가 옳고 그른지 하늘과 땅이 가려달라"고 기원하며 고천 제문을 마무리 지었다. - P273

그러나 생신 병사들의 탈영 현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태는 두말할 나위 없이 보호토의 죄목에 보이듯이 홍타이지의 어영 부근에서 마마 환자가발생했다는 사실 자체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청나라에서는 마마 발생 시홍타이지와 생신 버일러들이 곧장 피두에 들어가서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는 것이 ‘매뉴얼‘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숙소 부근에서 마마 환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홍타이지는 생신 버일러들과 함께 곧장 피두를위한 칩거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월 16일의 심양행 서신 이후 약보름 동안의 청 측 기록이 사실상 홍타이지와 인조가 주고받은 국서의 인용과 강화도 작전 관련 기사로만 채워져 있는 까닭도 비로소 이해가 간다.
마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인 양 홍타이지나 왕 · 버일러들의 동정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은 그들이 모두 피두에 들어갔기 때문이라는말이다.
단, 정월 22일에 감행한 강화도 작전을 지휘한 도르곤과 두두가 예외적인데, 이는 아마도 두 사람이 숙신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청의 왕 · 일러가운데 숙신이었다는 사실이 사료상 명시적으로 확인되는 사람은 아바타이, 아지거, 사할리얀, 두두 등 네 사람이므로, 일단 두두가 숙신이었다는것은 확실하다. 도르곤의 경우는 숙신이었음을 명시하는 사료상 기록이 확인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생 동안 그가 피두한 흔적 또한 없다. 게다가 홍타이지가 천연두 감염이 무서워 한동안 접견을 기피했던 소현세자 일행을 서울에서 심양까지 데려간 사람이 바로 도르곤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도르곤이 만약 생신이었다면, 홍타이지는 그에게 두두와 함께 조선에 남아 청군의 철수를 지휘하는 임무를 맡길 수 없었을 것이다. - P277

요컨대, 홍타이지는 마마에 쫓겨 조선 땅을 서둘러 떠났던 것이 분명하다. 이제 남은 문제는 청군 진영에 마마 환자가 발생한 시점이다. 바로 이대목에서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제5장에서 고찰했듯이, 분명 홍타이지는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으로 인해 전쟁을 서둘러 끝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정월 16일경의 청군에게 전쟁 계획의 궤도 수정을 요구했을 법한 군사적 상황 변화는 없었다. 군사적 측면에서는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이 될 만한 후보를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이라는 미지수에 ‘어영 부근에 천연두 환자가 생겼다는 사실의 인지‘라는 사건을 대입해보면 어떨까?
제5장의 말미에서 홍타이지로 하여금 전쟁을 서둘러 끝내게 만든 ‘정월16일의 중대사건‘은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청군진영의 마마 환자 발생이야말로 ‘중대사건‘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조건을모두 충족한다. 첫째, 청군 진영의 마마 발발(smallpox outbreak)은 병자호란 동안 조선 땅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둘째, 그것은 홍타이지에게 전쟁계획의 변경을 강제할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그는 피부에 들어가야 했다. 셋째, 홍타이지를 포함한 대부분의 왕공들은 생신이었으므로 마마의 발발은 그들이 모두 조선을 서둘러 떠나야 할 이유가 되기에 충분하다. 실제로홍타이지는 자신이 천연두를 피해 서둘러 귀국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 P281

‘승자의 전쟁 서사‘로 흐른 것은 오히려 종래의 ‘외교 실패‘ 서사였다는첨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외교 실패‘ 서사는 청이 일으킨 침략 전쟁이 조선의 죄를 묻기 위한 ‘의로운 전쟁‘이었다는 ‘승자의 전쟁서사‘와 공명하고 있다. 이기지도 못할 전쟁의 발발을 사전에 막지 못한 ‘외교 실패‘의 책임을 조선의 위정자들에게 묻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병자호란은 조선이 자초한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전쟁이었다는 청이 만들어낸 ‘승자의 전쟁서사‘와 별 차이가 없는 인식이 부지불식간에 자리를 잡았다는 말이다. 물론 그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청의 ‘의로운 전쟁‘ 논리와 공명하든 말든 간에그대로 사실로 승인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 책의 제1장에서는 ‘홍타이지는 왜 병자호란을 일으켰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과 함께 그가 친정과총력전으로 병자호란에 임한 까닭을 규명함으로써, 병자호란이 ‘잉태‘ 당초부터 다른 누구도 아닌 홍타이지 본인의 정치적 야망과 어젠다를 군사적수단으로 달성하려는 ‘홍타이지의 전쟁‘이었음을 드러낸 바 있다.
여기에 더하여 이 책에서는 조선 침공을 위해 총력전을 준비한 것도 홍타이지요. 청군의 공격전략을 짠 것도 홍타이지요, 청군의 작전 수행을 총괄지휘한 것도 홍타이지였음을 밝혔다. 그뿐만 아니다. 앞에서의 고찰에 따르면, 고사 작전을 폐기하고 협상으로 국면을 전환하여 전쟁의 조기 종결을 추진한 것도 홍타이지가 천연두 면역이 없는 생신이었기 때문이다. 인조의출성과 척화신 두세 명의 박송을 조건으로 하는 철군 약속과 그 약속의 이행도 홍타이지의 존재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만약 홍타이지가 없었다면 이른바 ‘삼전도의 치욕‘도 물론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병자호란은 발발 원인은 물론이거니와 개전부터 종전까지 시종일관 ‘홍타이지의 전쟁‘이었다. - P292

전근대 시기의 전쟁에서 승전 이후의 전후 처리는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극단적인 경우, 그는 조선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철저히 파괴하겠다는 생각을 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병자년 십일월 29일 이번 전쟁은맹약을 깬 조선 조정의 죄를 묻기 위한 것이니 저항하거나 도주하지 않는일반 조선인에 대해서는 살상이나 약탈을 엄금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조선의 관민(官民)을 상대로 한 선전문에서도 조선의 왕과 대신들이 저지른잘못 때문에 군사를 일으켰을 뿐이니 저항하거나 도주하지 말라고 말했다. 무고한 인명의 살상이나 약탈을 엄금했다는 것은 ‘조선 정복‘ 이후 어떤 형태로든, 즉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조선을 지배할 의사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 P294

만약 홍타이지의 전후 구상이 괴뢰정권을 통한 간접 지배였다면, 병자호란이후 아예 조선의 종묘사직이 끊어졌거나, 아니면 최소한 인조 대신에 종친중 다른 누군가가 왕위에 올랐을 수 있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정말 정권 교체를 구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설사 그런 구상을 품었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전쟁은 홍타이지가 그런 구상을 일방적으로 강행할 실질적 근거도, 명분적 근거도 확보할 수 없는방향으로 흘러갔다. 천연두 문제로 인해 홍타이지가 전쟁의 종결과 귀국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고, 결국 인조와의 협상을 통해 전쟁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조 정권의 온존溫存은 홍타이지의 애초 구상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병자호란 발발 이후 조선 땅에서 진행된 전쟁과 협상의 결과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P296

여기서 조선의 마마라는 변수까지 고려하여 상황을 다시 되돌아보자면, 홍타이지의 친정 및 총력전 선택은 처음부터 ‘양날의 칼‘이었다고 말할 수있다. 그 자신도 천연두 면역이 없는 생신이었거니와, 도르곤과 두두를 제외한 참전 왕공의 대다수도 생신이었다. 동맹군으로 참전한 외번몽고 왕공들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 땅에서 마마와 조우하는 경우, 친정과 총력전의 지속은 불가능해질 터였다. 만약 홍타이지 본인과 생신 왕공들이 전쟁을 마무리하지도 못한 채 귀국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조선 정복‘을 위해 몇 달 동안 공을 들여 준비한 전쟁이 그만 정묘호란과 질적으로 다를바 없는 약탈전으로 변질될 수도 있었다. 조선이 천연두걱정이 없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정묘호란 때 알려진 바이므로, 홍타이지는 자신의 선택이 ‘양날의 칼‘이라는 것도 알 고 있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홍타이지는 실제로 천연두 문제에 봉착했다. 마치 천연두발발 시의 비상 대책(contingency plan)이라도 있었던 것인 양, 그는 재빨리 협상으로 국면을 전환하여 전쟁의 조기 종결을 추진했다. 천연두 발발에도불구하고 즉각 철수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전쟁을 약탈전으로 변질시키느니 차라리 인조 정권을 온존시킬지언정 ‘조선 정복‘의 명분이라도 챙기는쪽이 더 나았기 때문일 것이다. - P297

삼전도 의례가 사실상 항복 의식이었다는 점에 견주자면, 위의 의례 진행과정에 뚜렷이 나타나는 인조에 대한 우대는 실로 예상 밖이다. 이날의 연석에서 인조의 석차는 홍타이지 바로 다음이었다. 인조 제2위의 자리에 앉힌 것도 홍타이지의 결정이었다. 『청태종실록』에 의하면, 그가 이런 뜻밖의 결정을 하면서 내세운 이유는, 비록 어쩔 수 없이 항복했지만 인조는그래도 "역시 한 나라의 왕"이며, "위세로써 그를 떨게 하는 것은 덕(德)으로써 그를 품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었다. "한 나라의 왕"이라는 구절은만주어 기록에서 "다른 나라의 왕"이라고 표현되어 있으니 홍타이지는인조를 외국의 군주로 대우했다는 말이다. 승정원일기』도 이날의 잔치에서 인조와 홍타이지의 술잔 및 잔 받침이 같았던 것을 가리켜 인조에 대한존경과 우대의 뜻을 표현한 것이라고 적었다. 아마도 자신이 아는 범위의 세계에서 조선이 명나라 다음가는 대국이라는 인식의 발로였을 터이지만, 그 동기야 어쨌든 간에 이날 홍타이지의 인조에 대한 뜻밖의 우대는 훗날 청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조선이 높은 위상을점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삼전도비의 정식 명칭에 드러나듯이, 조선은 나중에 외교적 수사의 영역에서 홍타이지의 ‘공덕‘을 찬미했다. 그리고 훗날 청의 전쟁 서사는 병자호란이라는 엄연한 침략 행위를 ‘관온인성황제‘ 홍타이지의 조선에 대한 관대하고 온유하며 인자하고 성스러운‘ 시은(恩) 행위로 둔갑시키면서 그날의 우대를 대서특필했다. - P300

위에서 소개했듯이, 삼전도 의례의 메인이벤트는 인조의 두 차례에 걸친삼궤구고두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 번째는 하늘, 즉 천신(天神)에 대한 삼궤구고두였다. 이때에는 홍타이지 역시 인조 일행과 함께 하늘에 삼궤구고두를 올렸다. 두 번째는 홍타이지에 대한 삼궤구고두였다. 조선의 왕 인조가 홍타이지의 신하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절차였다. 이러한 의례 절차를통해서 홍타이지의 ‘조선 정복‘ 사실이 분명하게 확인되었음은 물론이다.
여기서 병자년 사월 11일 심양에서 거행되었던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에서도 두 차례의 삼궤구고두가 의례의 핵심 절차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황제 즉위식‘에서 홍타이지는 먼저 고천의 절차를 밟았다. 그는 자신의 신하들과 함께 천신에 대한 삼궤구고두를 올렸다.
이어서 존호를 받는 의례를 진행하여 그 자신이 신하들로부터 삼궤구고두를 받았다. 역시 새로운 군신 관계의 확립을 의미하는 절차였다.
이로부터 정축년 정월 30일 삼전도 의례의 메인이벤트가 사실상 병자년 사월 11일에 거행되었던 ‘황제 즉위식‘을 간소화한 형태로 재현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날짜와 장소를 달리한 두 의례의 공통점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두 의례 모두에서 활쏘기가 거행되었던 것이다. 이 활쏘기는 단순히무예를 겨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옛날 요금의 제천 의례에서 부수적으로거행되던 ‘사류(射柳)‘라는 이름의 샤머니즘 의식을 계승한 것이었다. 또한 홍타이지가 삼전도 의례를 심양에서의 ‘황제 즉위식‘ 못지않게 엄숙한 의례로 치르고 싶어했다는 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전쟁의 패자로부터 항복을 받는 자리에서는 승리에 도취한 장수와 병사들의 방종도 얼마간 허용되기 마련이다. 삼전도 의례에 참석한 청군에게도 그런 분위기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그런 자들을 가차 없이 처벌했다. 정축년 유월말, 홍타이지는 삼전도 의례 현장에서 대열을 멋대로 벗어나거나 갑옷 · 투구를 풀고 있었다는 이유로 8명의 최고위 대신들을 처벌했던 것이다.  - P301

결국 홍타이지는 ‘미완‘에 그쳤던 병자년 사월의 ‘황제 즉위식‘을 정축년정월 삼전도에서 ‘완성‘, 그것도 좀더 고차원적으로 ‘완성‘ 하고자 했다고 볼수 있다. 홍타이지는 본인의 정치적 야심과 어젠다를 끝까지 잊지 않으면서, 말하자면 수미(首尾)가 상응하는 의례로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의 대미를 장식했던 셈이다. 이처럼 병자년 사월 11일 ‘황제 즉위식‘의 ‘미완‘으로인해 ‘잉태‘된 병자호란이 정축년 정월 30일 ‘황제 즉위식‘의 고차원적인 ‘완성‘으로 종결되었다면,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철저하게 ‘홍타이지의 전쟁‘이었다고 성격을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링컨의 말을 차용하자면, 병자호란은 ‘홍타이지의, 홍타이지에 의한, 홍타이지를 위한 전쟁‘이었던 것이다. - P303

만약 홍이포가 위력을 발휘했다면, 그것은 물리적 차원이라기보다는 심리적 차원에서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건너편 갑곶을 향해 발사한 포탄은엄청난 공포를 야기했고, 강진은 함대를 향해 쏜 포탄은 함대의 남하를 저지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장신의 함대도 북쪽 해상이나 갑곶을 향해 쏜 천지를 진동하는 홍이포의 위력에 지레 겁을 먹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그렇다고 하더라도, 심리적 타격의 정도는 청군이 사전에 예상할 수 없는성질이다. 조선군이 홍이포만 쏘면 달아나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중대한 군사작전에 나섰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추론에 큰 하자가 없다면, 역시 나룻배 수준의 작은 배들을 타고강화도로 건너간다는 작전의 수립 자체가 염하수로의 물리적 해양환경에관한 정보의 사전 입수를 전제로 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실 실제 도해 과정에서 청군은 그들이 사전에 정보를 입수했다고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를 보였다. 작전 당일 아침 청군은 일찌감치 도해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배도 바다에 띄웠고 흥이포도 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당장 도해를 개시하지 않았다. 11시~11시 30분까지 기다렸다.
게다가 이미 사거리에 들어온 장신의 함대를 향해 대포를 쏜 흔적도 없다.
굳이 홍이포를 쏘지 않더라도 조류의 방향이 바뀌면 장신의 함대가 결국에는 스스로 뱃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으리라고 예상하지 않았다면 이런 행태를 보였을 리 없다. 염하수로의 특성을 사전에 파악하지 않았다면 그런 예상은 물론 불가능하다. - P308

앞서 언급했듯이 청군은 염하수로의 특성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나서 강화도 작전을 입안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종류의 정보는 경기 서해안 지역의 뱃사람으로부터 입수했을 것이다. 그리고 청군의 정보원이 되었을 뱃사람은 이제 조선인으로 국한시킬 필요가 없다. 광해군 대의 논의로부더 향화호인(귀화한 여진족)을 그런 뱃사람의 후보로 올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광해군 대의 조선 조정에서는 향화호인을 잘 다스려 "인화가 깨지지 않는다면 그들이 이반하는 사태가 초래되지는 않으리라고 판단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인조 대, 특히 병자호란 전야에 이르러 혹 향화호인이 이반할만한 조건이 형성되어 있지는 않았을까?  - P315

그야 어쨌든 간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퉁커션 모델‘이 아닌 ‘흑룡강 모델‘의 선박이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이다. (ㄱ-1)의 ㉡에서 홍타이지가 강조하고 있듯이, ‘흑룡강 모델‘의 ‘비선" 은 강화도 작전 당시 수심이 얕고조류가 빠른 염하수로에서 대단한 기동성을 발휘했다. 그렇다면 청군의 정보원이 된 뱃사람은 염하수로의 특성뿐만 아니라 ‘흑룡강 모델‘의 배가 염하수로에서의 작전에 최적이라는 점까지 알려주었다고 추정하지 않을 수없으며, 이는 다시 청군의 정보원이 조선인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P335

요컨대, 병자호란 전야에 조선의 향화호인들은 정묘호란을 계기로 잠재적 이반자라는 의심의 눈초리에 둘러싸여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행하게도, 향화호인을 향한 조선 사회의 의심은 병자호란 동안에 실제 이반사례가 발생함으로써 현실화되고 말았다. 경기 남부 연해 지역의 남양에살던 여천과 마푸타가 청구에 귀순했고, 이들의 안내로 청군은 남양부를기습했다. 또한 두 사람은 청군의 강화도 작전 입안. 감행을 가능하게 만든정보의 제공자이자, 청군의 강화도 작전과 가도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선박건조의 ‘숨은 공로자‘로 추정되는 것이다. -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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