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

몇 년 전 바버라 콜스를 처음 보았을 때, 그가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은 순전히 누군가가 "저 여자가 존슨의 새 여자야"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은밀하고 야한 의미로 쓰는
"아, 그거"라는 말을 그녀에게 사용하지는 않았다. 존슨이 그 여자에게서 과연 무엇을 보았는지 궁금했다. 그때 존슨을 지켜보면서 ‘저 여자는 오래가지 못하겠군‘이라고 생각한 기억이 났다. 존슨은 미남이었지만, 술기운에 조금 붉어진 얼굴로 어떤 여자에게 수작을 걸고 있었다. 바버라는 벽 앞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보기에는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았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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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부터 2008년까지 도리스 레싱은 50편이 넘는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거의 매해 책을 출간했다. 그는 과거에 함몰되지 않고, 현재에 안주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미래가 달라질 리 없다고 단정 짓는 "도덕적 피로"를 항상 경계했다.  - P31

안타깝게도 프리다의 건강은 빠른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오른발은 염증 재발로 썩어들어가고, 요추 통증도 나날이 심해졌다. 1950년 프리다는 오른발 절단 수술을 받았고, 영국에서 일곱 번의 척추수술을 받은 후 또다시 9개월을 병상에서 머물러야 했다. "한 세기분의 고통이 지속되었다. 거의 이성을 잃을 정도로 "그렇다고 마냥 운명 앞에 굴복할 수는 없었다. 프리다는 반전 평화 운동 서명에 참여했고, 개인전을 준비했으며, 꼬박꼬박 일기를 썼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나의 삶을 통틀어 22번의 외과 수술을 받았다." 고통도 프리다를 이기지는 못했다.
1953년 4월, 멕시코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프리다의 작품전이 열렸다. "내 의지는 강하다. 내 의지는 변함이 없다." 개막식 날 프리다는 구급차를 타고 전시장에 도착해 침대에 누워 친구들과 손님들을 맞이했다. 그로부터 1년 3개월 후인 1954년 7월 13일, 프리다는 세상을 떠났다.
죽기 직전 프리다는 자기 작품에 짧은 인사를 남긴다.
"인생 만세!" 스스로에게 전하는 따뜻한 위로의 말이었다.
쓰라렸던 자신의 삶에 보내는 찬사도 잊지 않았다. "나는 많은 것을 이루었다." 프리다 칼로의 성취 앞에 서면 언제나 겸손해진다. 삶을 다시 사랑하게 된다. 매번 큰 용기를 얻는다.
글쓰는 여자는 사랑을 증명한다. - P68

제이디 스미스가 지향하는 문학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의 믿음은 확고하다. 시간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할 것인가? 작가는 오직 그 질문만을 던진다. "구원은 현재하고 있는 일에, 지금 쓰고 읽는 것에 존재한다." 글 쓰는 여자는 오늘에 집중한다. - P94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 지면을 얻지 못하고 독자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 할지라도 타협할 수는 없었다. 좀 더 기다리기로 결심한다. 아무래도 당대에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들 때마다 후대의 독자들을 상상하며 글을 썼고 책을 만들었다. 막연한 희망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큰 용기가필요했다. "소리 내 싸우는 건 / 아주 용감하다// 하지만 더용감한 건/ 내면에서 싸우는 슬픔의 기병대/ 이겨도 나라가 알아주지 않고/쓰러져도 누가 봐 주지 않으며," 결과도장담할 수 없었다. 에밀리 디킨슨에게 기다림과 희망은 같은 말이었다. "나는 가능성 속에서 살아갑니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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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니없이 예측을 잘못한 전문가의 사례만 선별했다고 생각하는가? 분명 이 내용들은 이례적인 사례에 속한다. 전문가들이 아무것도모른다거나 항상 틀린다고 말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과학 분야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일반인보다 훨씬 많이 알고, 그들의 지식은 일반인이 아는 내용보다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앞의 사례들은 과학적 사고를 하는 전문가들조차 자신의 지식을 지나치게 믿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유전학자들은 인간 유전자 수를 실제보다 높게 측정했고, 어떤 학자의 측정치는 다섯 배나 차이 났다. 컴퓨터 과학자들이 예상했던 시기는 네배나 차이가 났고, 재앙을 예측했던 경제학자들은 직접 선택한 광물자원의 예상가격도 알아맞히지 못했다. 전문가들조차 이러니, 우리도 자신의 지식을 지나치게 신뢰할 가능성이 분명히 있지 않겠는가. 사람은실제로 자신이 알고 있는 수준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할 때마다, 또하나의 일상적인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제부터 다룰 주제인 지식 착각知識錯覺 illusion of knowledge이 바로 그것이다. - P178

 우리가 세운 계획이 빗나갔다는 사실은 큰 문제가 아니다. "예측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미래에 대해서는 "이라는 요기 베라 Yogi Berra 의 말처럼 결국 세상은 인간이 머릿속으로 설계한 단순한 모형보다 훨씬 복잡한 체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관리전문가조차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할 때가 많다. 물론 아마추어들보다는 정확하지만 여전히 소요시간에 대해서는 3분의 1정도 잘못 예측한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지식의 착각을 경험하며, 단순한 일 역시 예외는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간단하고 쉬워 보였던 일이 현실과 맞닥뜨려야 비로소 복잡한 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에, 예측할 때는 시간이나 비용을 너무 과소평가하기 쉽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한계를 고려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거듭 말하지만 익숙함에서 비롯된 단순하고 낙관적인 추측에 지나지 않는데도, 우리는 지식 착각에 의해 모든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 - P187

지식 착각에서 벗어나려면, 낯선 프로젝트에 대해 당신이 추정한 소요 기간과 비용 예상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한다. 자기프로젝트를 본인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사실을 인정하긴 어려울 수 있다. 이미 프로젝트 내용에 익숙해졌기에 자신만이 정확하게 설계할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하기 쉽다. 다른 사람이나 기관에서 이미 완료한 프로젝트를 찾아본다면(당신이 맡은 프로젝트 내용과 비슷할수록 당연히 더 좋다), 기존 프로젝트에서 실제 사용된 비용과사업기간을 비교 자료로 활용해 더 나은 예상을 할 수 있다. 자기 생각만 고수했던 태도에서 벗어나 ‘바깥에서 살펴보기 outside view‘ 를 선택하면 계획을 바라보는 방식이 극적으로 달라진다. - P489

이처럼 현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착각하는 전문가를 사람들이 선호하기 때문에 지식 착각은 계속된다. 자기 지식의 한계를 아는 사람들은 "비올 확률은 75퍼센트입니다"라고 말하겠지만, 자신의 한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확신하고 단언한다. 하지만 자기 분야에서 최고라는 사람들조차 지식 착각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유전자 개수와 천연 자원의 한계를 잘못 예측하고, 체스 컴퓨터의 가능성을 단언했던 과학자들을 다시 떠올려보라. 그들은 실패자도 아니고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인간 유전자 수를 잘못예견한 에릭 랜더와 원자재 가격이 끊임없이 상승한다고 잘못 예견한 존 홀드렌은 오바마 행정부의 과학 고문이 되었다. 반면 폴 에를리히는 1990년에 345,000달러의 상금이 걸린 맥아더 재단의 ‘특별한 재능‘ 상을 받았으나 같은 해에 있었던 원자재 가격 내기에서 지고 말았다. 허버트 사이먼은 ‘경제 조직 내의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선도적인 연구로 1978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지만 인간과 컴퓨터의 체스 경기 결과는 틀리게 예측했다. 
지금까지 열거한 사례에서 지식 착각 때문에 생계가 어려워진 사람은 없었지만, 때로는 그렇게 되는 사람도 존재한다. 흔히 성공한 투자자로 언급되는 사람의 전형은 리스크를 조심스레 헤지하고, 미래의 불확실성 수준을 판단해 그에 맞게 자산을 배분하고 레버리지를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다. 모든 돈을 걸고 과감하게 게임에 배팅하는 사람이다. 지식 착각은 너무도 강력해서 많은 사람들이 잠시 승리를 맛본 뒤 과도한 욕심을 부려 모든 것을 잃고 망하는 과정을 반복하게 만든다.
2007년 브라이언 헌터는 아마란스와 도이체방크에 처참한 손해를 끼치고 미국 정부로부터 주식 시장을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아 공식 기소를 당한 와중에도 새로운 헤지펀드를 만들기 위해 자금을 모았다. 이는 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나 그 밖에 파산한 예전의 펀드 설립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반복되었던 일들이다. - P217

 안전하고 효과적인 백신이 나온 지 40년이 넘었는데도 어째서 부모들은 홍역처럼 치명적일 수 있는 질병에 자녀들을 무방비로 노출시키는 걸까?
이런 행동은 앞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또다른 일상의 착각, 즉 원인착각 原因錯覺 illusion of cause의 결과다. 사람들이 자식에게 예방 접종을 하지 않겠다고 선택하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서로 별개이면서도 밀접히 연관되어있는 세 가지 편견, 즉 원인 착각을 일으키는 편견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 편견들은 우리의 머리 구조가 패턴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우연의 일치에서 인과관계를 추론하며, 앞서 일어난 사건이 뒤에 일어난 사건의 원인이라고 믿도록 되어 있기에 발생한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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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헌의 말은 지극히 의로우나 그것은 말일 뿐입니다. 상헌은 말을 중히 여기고 생을 가벼이 여기는 자이옵니다. 갇힌 성 안에서 어찌 말의 길을 따라가오리까.
김상헌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최명길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 P143

밝음과 어둠이 꿰맨 자리 없이 포개지고 갈라져서 날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남한산성에서 시간은 서두르지않았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군량은 시간과 더불어 말라갔으나, 시간은 성과 사소한 관련도 없는 낯선 과객으로 분지 안에 흘러 들어왔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었다. 쌓인 눈이 낮에는 빛을 튕겨냈고, 밤에는 어둠을 빨아들였다. 동장대 위로 해가 오르면 빛들은 눈 덮인 야산에 부딪쳤다. 빛이 고루 퍼져서 아침의 성 안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오목한 성 안에 낮에는 빛이 들끓었고 밤에는 어둠이고였다. 짧은 겨울 해가 넘어가면 어둠은 먼 골짜기에서 퍼졌다. 빛이 사위어서 물러서는 저녁의 시간들은 느슨했으나, 어둠은 완강했다. 먼 산들이 먼저 어두워졌고 가까운 들과 민촌과 행궁 앞마당이 차례로 어두워졌다. 가까운 어둠은 기름과서 번들거렸고, 먼 어둠은 헐거워서 산 그림자를 품었다. 어둠 속에서는 가까운 것이 보이지 않았고, 멀어서 닿을 수 없는 것들이 가까워 보였다. 하늘이 팽팽해서 별들이 뚜렷했다.
행궁 마당에서 올려다보면 치솟은 능선을 따라가는 성벽이 밤하늘에 닿아 있었고, 모든 별들이 성벽 안으로 모여서 오목한 성은 별을 담은 그릇처럼 보였다. 별들은 영롱했으나 땅위에 아무런 빛도 보태지 않아서, 별이 뚜렷한 날 성은 모든 별들을 모아 담고 캄캄했다. 어둠 저편 가장자리에 보이지 않는 적들이 자욱했다. 이십만이라고도 했고, 삼십만이라고도했는데, 자욱해서 헤아릴 수 없었다. 적병은 눈보라나 안개와같았다. 성을 포위한 적병보다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면서종적을 감추는 시간의 대열이 더 두렵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있었다. 아무도 아침과 저녁에서 달아날 수 없었다. 새벽과 저녁나절에 빛과 어둠은 서로 스미면서 갈라섰고, 모두들 그푸르고 차가운 시간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 P179

서날쇠가 바랑에서 호미를 꺼내 배수구 앞에 쌓인 얼음과 잡석을 걷어 냈다. 배수구 구멍 밖으로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 대감, 제가 없는 동안 나루 혼자 있으니……
- 알았다. 내 거두마- 그럼 대감… 서날쇠가 눈 위에 꿇어앉아 김상헌에게 큰절을 올렸다. 김상헌이 땅에 엎드려 맞절로 받았다. 예조판서의 머리와 대장장이의 머리가 닿을 듯이 가까웠다. 새가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엎드린 김상헌의 등에 눈덩이가 떨어져 내렸다. 김상헌이 일어섰다. 서날쇠가 일어섰다. 서날쇠는 바랑을 벗어서 앞으로 밀면서 기어서 배수구를 빠져나갔다. - P232

••• 온조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
최명길의 이마가 차가운 돗자리에 닿았다. 왕조가 쓰러지고 세상이 무너져도 삶은 영원하고, 삶의 영원성만이 치욕을 덮어서 위로할 수 있는것이라고, 최명길은 차가운 땅에 이마를 대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치욕이 기다리는 넓은 세상을 향해 성문을 열고 나가야할 것이었다. 최명길은 오랫동안 엎드려 있었다. 김상헌이 종헌을 올렸다. 잔을 올리고 물러나 절할 때, 비틀거리는 김상헌을 최명길이 부축했다.
향 연기 속에 떠오른 온조의 혼령이 일천육백 년의 시간을건너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환영을 김상헌은 느꼈다. 침탈과 살육과 기근과 유랑의 들판을 가벼운 옷자락으로 스치며 혼령은 한 줄기 피리소리처럼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성안으로 들어오던 새벽에, 새로 내린 눈 위에 빛나던 새로운 햇빛과 새로운 시간들, 서날쇠가 떠나던 새벽에 서날쇠가 나아가는 쪽에서 아침의 빛으로 깨어나던 봉우리들을 김상헌은 생각했다. 시간은 흘러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모든 환란의시간은 다가오는 시간 속에서 다시 맑게 피어나고 있으므로,
끝없이 새로워지는 시간과 더불어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이었다. 모든 시간은 새벽이었다. 그 새벽의 시간은 더럽혀질수 없고, 다가오는 그것들 앞에서 물러설 자리는 없었다. 이마를 땅에 대고 김상헌은 그 새로움을 경건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P236

정명수가 대답했다.
- 조선 국왕이 누리를 거느리고 명을 향해 원단의 예를 행하는 것이옵니다.
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 무어라 명에게… 북경 쪽으로... 대청 황제 칸이 이역만리 조선 땅에 와 일월성신의 신년영접하는 봉우리 아래에서, 갇힌 성 안의 조선 국왕이 명에게 예를 올리고 있었다. 용골대는 무참했다. 칸의 진노가 떨어질듯 등줄기가 시켰다. 용골대가 단 앞에 엎드렸다.
-폐하, 소장의 무능이옵니다.
- 뭐, 그렇기야 하겠느냐. 저들이 제 짓을 하는 것이겠지.
- 지금 포를 쏴서 헤쳐버릴까 하옵니다.
- 사정거리가 닿겠느냐?
- 홍이포紅夷砲는 닿고도 남습니다.
사냥개 한 마리가 칸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개가 칸의 신발을 핥았다. 칸이 개의 대가리를 쓰다듬었다. 개가 벌건 아가리를 벌려서 하품했다. 칸이 빙그레 웃었다.
- 쏘지 마라. 저들이 예법을 행하고 있지 않느냐.
- 폐하께서도 신들의 예를 받고 계시옵니다.
-쏘지 마라. 정초에 화약 냄새는 상서롭지 못하다.
- 신은 차마 볼 수가 없나이다.
- 냅둬라. 저들을 살려서 대면하려 한다. 발포를 금한다.
행궁 마당이 조용해질 때까지 칸은 성 안을 내려다보았다. - P263

김상현이 말했다.
- 군왕끼리의 예는 국경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마주보는것입니다. 이 일은 용골대에게 세찬을 보낸 것과는 다른 일이옵니다. 사전에 문서도 사신도 없이 군사를 몰아서 불쑥 왔다면 이미 예를 논할 수 없사옵니다.
최명길이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 칸은 비록 황제라 하나 몸을 가벼이 움직이는 자이옵니다. 배후에 명이 있으니, 칸은 삼전도에 오래 머물지는 못할것이옵니다. 칸이 머무는 동안 성을 나가는 길을 여소서. 칸이 돌아가면 그 다음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옵니다.
김상헌이 말했다.
- 칸이 왔다면 빈손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을 것이오. 그가 취하려는 바가 뭐라고 이판은 생각하시오?
최명길이 말했다.
- 그게 무엇인지를 예판은 모르시오? 아마 전하께서는 아실 것이오.
김상헌이 말했다.
-  전하, 명길은 전하를 앞세우고 적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려는 자이옵니다. 죽음에도 아름다운 자리가 있을진대,
하필 적의 아가리 속이겠나이까?
최명길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 전하, 살기 위해서는 가지 못할 길이 없고, 적의 아가리속에도 삶의 길은 있을 것이옵니다. 적이 성을 깨뜨리기 전에 성단을 내려주소서. - P270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조선이었다. 송파강은 날마다 부풀었다. 물비늘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칸은 답답했다. 저처럼 외지고 오목한 나라에 어여쁘고 단정한 삶의 길이 없지않을 터인데, 기를 쓰고 스스로 강자의 적이 됨으로써 멀리있는 황제를 기어이 불러들이는 까닭을 칸은 알 수 없었고 물을 수도 없었다. 스스로 강자의 적이 되는 처연하고 강개한 자리에서 돌연 아무런 적대행위도 하지 않는 그 적막을 칸은이해할 수 없었다. 압록강을 건너서 송파강에 당도하기까지행군대열 앞에 조선 군대는 단 한 번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대처를 지날 때에도 관아와 마을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조선의 누런 개들이 낯선 행군대열을 향해 짖어 댈 뿐이었다. 도성과 강토를 다 비워 놓고 군신이 언 강 위로 수레를 밀고 당기며 산성 속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내다보지 않으니, 맞겠다는 것인지 돌아서겠다는 것인지, 싸우겠다는 것인지 달아나겠다는 것인지, 지키겠다는 것인지 내주겠다는 것인지,
버티겠다는 것인지 주저앉겠다는 것인지, 따르겠다는 것인지거스르겠다는 것인지 칸은 알 수 없었다. - P280

임금이 승지를 바라보았다. 임금의 눈동자에서 촛불 불빛이 타올랐다. 임금이 말했다.
- 사흘 뒤에 성을 나가겠다. 승지는 오늘 밤 안에 내 뜻을 삼사에 알리고 세자에게도 그리 전하라. 야심하다. 서둘러라.
마루에서 사관이 장지문 안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임금의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승지가 밤새도록 성 안을 돌면서 당상들의 처소를 찾아다녔다.
이른 아침부터 묘당은 내행전으로 몰려들었다.
성을 나가기 전에, 화친을 배척했던 사대부들 중에서 묶어서 적 앞으로 보낼 신하를 골라내라고 임금은 김류에게 명했다. 칸이 돌아가기 전에••••••. 임금은 말끝을 흐렸다.
- 세자는 나와 함께 갈 채비를 갖추라.
최명길이 말했다.
-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짓이 없고,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하여 못할 짓이 없는 것이옵니다.
최명길이 울었다. 울음을 멈추고 최명길이 또 말했다.
- 전하, 뒷날에 신들을 다 죽이시더라도 오늘의 일을 감당하여주소서. 전하의 크나큰 치욕으로 만백성을 품어주소서 감당하시어 새날을 여소서.
아하••••••. 김상현이 낮게 신음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행궁 밖으로 나갔다. 임금이 말했다.
-출성의 일은 재론하지 말라.
삼사의 당하들이 내행전 마당으로 몰려왔다. 당하들은 청대를 요구했다. 임금은 응하지 않았다. 임금은 침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승지가 장지문 앞을 서성거렸다. 마루 왼쪽 구석에서 사관은 조용히 먹을 갈았다. 사관의 귀는 임금의 침소쪽을 향해 있었다. 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저녁을 준비하는 나인들이 수라간에서 달그락거렸다. 날이저물어 새들이 행궁 뒤 숲으로 날아들었다. 내행전 마당에서 당하들이 울부짖었다. 당하들은 밤새도록 돌아가지 않았다. - P339

자결에 실패한 뒤 상헌은 곡기를 끊고 누워 있었다. 조카들이 곁을 지켰다. 큰조카가 김류의 감시 명령을 김상헌에게 전했다.
- 조정이 척화신을 찾고 있다 하옵니다.
아직 죽을 때가 오지 않았음을 김상헌은 알았다. 김상현의 몸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죽기 전에 감당해야 할 일이 남한산성에는 남아 있었다. 묶어서 삼전도로 끌려가서 거기서 적의 칼에 죽는다면, 아마도 사공이 죽은 자리에서 가까울 것이었다.
김상헌이 윗몸을 일으켜서 앉았다.
- 알았다. 당분간 살아 있으마 마음을 가져와라.
김상헌은 요 위에 앉아서 미음 그릇을 들여다보았다. - P344

- 일배요!
조선 왕이 구층 단 위를 향해 절했다. 세자가 왕을 따랐다.
조선 기녀들이 풍악을 울리고 춤추었다. 기녀들의 소맷자락과 치마폭이 바람에 나부꼈다. 풍악소리가 강바람에 실려 멀리 퍼졌다. 홍이포가 터지고, 청의 군장들이 여진말로 함성을질렀다.
조선 왕은 오랫동안 이마를 땅에 대고 있었다. 조선 왕은 먼 지심 속 흙냄새를 빨아들였다. 볕에 익은 흙은 향기로웠다. 흙냄새 속에서 살아가야 할 아득한 날들이 흔들렸다. 조선 왕은 이마로 땅을 찧었다.
청의 사령이 다시 소리쳤다.
-이배요!
조선 왕이 다시 절을 올렸다. 기녀들이 손을 잡고 펼치고 좁히며 원무를 추었다. 풍악이 자진모리로 바뀌었다. 춤추는기녀들의 동작이 빨라졌다. 속곳이 펄럭이고 머리채가 흔들렸다. 다시 홍이포가 터지고 함성이 일었다. 조선 왕이 삼배를 마쳤다.
칸이 조선 왕을 가까이 불렀다. 조선 왕은 양쪽으로 청의 군장들이 도열한 계단을 따라 구층단으로 올라갔다. 세자가따랐다. 조선왕이 칠층을 지날 때, 강화에서 끌려온 사녀들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울음을 참았다. - P355

서날쇠는 서문으로 들어와 행궁 뒷담길을 따라서 대장간으로 돌아왔다. 불길이 끊긴 화덕이 썰렁했고, 오소리가 굴을 뚫었다. 서날쇠는 진흙을 이겨서 화덕 안쪽의 구멍을 막았다.
백성들이 날마다 몇명씩 성안으로 돌아왔다. 봄농사를 시작하기가 너무 늦지는 않았다.
서날쇠는 뒷마당 장독 속의 똥물을 밭에 뿌렸다. 똥물은 잘 익어서 말갛게 떠있었다. 쌍둥이 아들이 장군을 날랐고,
아내와 나루가 들밥을 내왔다. 다시 대장간으로 돌아온 날 나루는 초경을 흘렸다.
나루가 자라면 쌍둥이 아들 둘 중에서 어느 녀석과 혼인을 시켜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며 서날쇠는 혼자 웃었다. -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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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2014년 9월 내 어머니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나는할머니와 작별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뒤늦게 서울역으로 향했다. 기차는 느리게 달렸다. 부산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고 나서야 처음으로 할머니의 시 「가시나니까」를 읽을 수 있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야 오랫동안 혼자서 글을 쓰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딸이라는 이유로 학교를 가지 못한 유년 시절의 아픔을 담담하게 써 내려가셨다. 남동생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서 각자의 기량을 펼치며 살아가는 동안 할머니는 맏며느리가되어 대가족을 떠안으셨다. 나는 왜 할머니의 속마음을 단한 번도 헤아리지 못했을까? 할머니가 쓴 시를 읽고 나서야그분의 삶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쓰리고 아픈 속을 털어놓지 않으셨지만, 돌아가신후에 생각해 보니 할머니는 글쓰기와 기도로 삶의 의미를찾으셨던 것 같다.  - P5

하지만 어머니는 뒤라스를 이해하지 못했다. 딸이 꿈꾸는 삶을 끝까지 모른 척했다. 심지어 드러내 놓고 멸시하기도했다. "나는 글을 쓰고 싶다. 처음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어머니가 물었다. 뭘 쓰겠다는 거니? 나는 책들,
소설들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수학 교사자격증부터 따고 나서 정 원하면 쓰려무나. 난 그따위 일에는 관심 없다. 어머니는 반대했다. 그건 가치도 없고, 직업이라고도 할 수 없으니. 일종의 허세에 불과해." 글을 쓸 때만살아 있다고 느끼는 딸에게 어머니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뒤에 "정 원하면 쓰려무나."라는 말로 딸의 꿈을 외면했다.
어머니의 말을 따르자면, 가난한 여성에게 글쓰기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었다. "허세에 불과한 글쓰기라는 취미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부자들이었다. 명민한 뒤라스는 거꾸로 생각했다. 부자들만 글을쓸 수 있다면, 반대로 글을 써서 부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뒤라스는 좋은 글을 써서 돈을 벌겠다는 다짐을 굳혔다. 작가가 되어 어머니에게 보란 듯이 자신의 성공을 증명하리라고 결심했다. 어머니에게도 분명 피에르 로티의 책을 열심히 읽었던 청춘의 시간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재능 있는 딸이 글을 쓰겠다고 선언하자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알 수 없는 질투가 뒤엉켰다. 여자가 작가로 이름을 얻고 돈을 벌수있을까? 딸을 걱정하는 마음이 먼저였다. 두려움도 엄습했다. 만약 저토록 뛰어난 딸이 작가로 성공하면 우리를 떠나지 않을까? 딸이 적당하게 자리를 잡아 자기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질투는 좀 더 복잡한 감정이었다. 딸이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만약 자신과 전혀 다른 삶을 멋지게사는 딸을 보게 되면 스스로가 한없이 초라해질 것 같았다.
어머니와 딸은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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