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014년 9월 내 어머니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나는할머니와 작별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뒤늦게 서울역으로 향했다. 기차는 느리게 달렸다. 부산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고 나서야 처음으로 할머니의 시 「가시나니까」를 읽을 수 있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야 오랫동안 혼자서 글을 쓰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딸이라는 이유로 학교를 가지 못한 유년 시절의 아픔을 담담하게 써 내려가셨다. 남동생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서 각자의 기량을 펼치며 살아가는 동안 할머니는 맏며느리가되어 대가족을 떠안으셨다. 나는 왜 할머니의 속마음을 단한 번도 헤아리지 못했을까? 할머니가 쓴 시를 읽고 나서야그분의 삶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쓰리고 아픈 속을 털어놓지 않으셨지만, 돌아가신후에 생각해 보니 할머니는 글쓰기와 기도로 삶의 의미를찾으셨던 것 같다. - P5
하지만 어머니는 뒤라스를 이해하지 못했다. 딸이 꿈꾸는 삶을 끝까지 모른 척했다. 심지어 드러내 놓고 멸시하기도했다. "나는 글을 쓰고 싶다. 처음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어머니가 물었다. 뭘 쓰겠다는 거니? 나는 책들,
소설들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수학 교사자격증부터 따고 나서 정 원하면 쓰려무나. 난 그따위 일에는 관심 없다. 어머니는 반대했다. 그건 가치도 없고, 직업이라고도 할 수 없으니. 일종의 허세에 불과해." 글을 쓸 때만살아 있다고 느끼는 딸에게 어머니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뒤에 "정 원하면 쓰려무나."라는 말로 딸의 꿈을 외면했다.
어머니의 말을 따르자면, 가난한 여성에게 글쓰기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었다. "허세에 불과한 글쓰기라는 취미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부자들이었다. 명민한 뒤라스는 거꾸로 생각했다. 부자들만 글을쓸 수 있다면, 반대로 글을 써서 부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뒤라스는 좋은 글을 써서 돈을 벌겠다는 다짐을 굳혔다. 작가가 되어 어머니에게 보란 듯이 자신의 성공을 증명하리라고 결심했다. 어머니에게도 분명 피에르 로티의 책을 열심히 읽었던 청춘의 시간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재능 있는 딸이 글을 쓰겠다고 선언하자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알 수 없는 질투가 뒤엉켰다. 여자가 작가로 이름을 얻고 돈을 벌수있을까? 딸을 걱정하는 마음이 먼저였다. 두려움도 엄습했다. 만약 저토록 뛰어난 딸이 작가로 성공하면 우리를 떠나지 않을까? 딸이 적당하게 자리를 잡아 자기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질투는 좀 더 복잡한 감정이었다. 딸이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만약 자신과 전혀 다른 삶을 멋지게사는 딸을 보게 되면 스스로가 한없이 초라해질 것 같았다.
어머니와 딸은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 P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