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헌의 말은 지극히 의로우나 그것은 말일 뿐입니다. 상헌은 말을 중히 여기고 생을 가벼이 여기는 자이옵니다. 갇힌 성 안에서 어찌 말의 길을 따라가오리까.
김상헌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최명길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 P143

밝음과 어둠이 꿰맨 자리 없이 포개지고 갈라져서 날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남한산성에서 시간은 서두르지않았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군량은 시간과 더불어 말라갔으나, 시간은 성과 사소한 관련도 없는 낯선 과객으로 분지 안에 흘러 들어왔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었다. 쌓인 눈이 낮에는 빛을 튕겨냈고, 밤에는 어둠을 빨아들였다. 동장대 위로 해가 오르면 빛들은 눈 덮인 야산에 부딪쳤다. 빛이 고루 퍼져서 아침의 성 안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오목한 성 안에 낮에는 빛이 들끓었고 밤에는 어둠이고였다. 짧은 겨울 해가 넘어가면 어둠은 먼 골짜기에서 퍼졌다. 빛이 사위어서 물러서는 저녁의 시간들은 느슨했으나, 어둠은 완강했다. 먼 산들이 먼저 어두워졌고 가까운 들과 민촌과 행궁 앞마당이 차례로 어두워졌다. 가까운 어둠은 기름과서 번들거렸고, 먼 어둠은 헐거워서 산 그림자를 품었다. 어둠 속에서는 가까운 것이 보이지 않았고, 멀어서 닿을 수 없는 것들이 가까워 보였다. 하늘이 팽팽해서 별들이 뚜렷했다.
행궁 마당에서 올려다보면 치솟은 능선을 따라가는 성벽이 밤하늘에 닿아 있었고, 모든 별들이 성벽 안으로 모여서 오목한 성은 별을 담은 그릇처럼 보였다. 별들은 영롱했으나 땅위에 아무런 빛도 보태지 않아서, 별이 뚜렷한 날 성은 모든 별들을 모아 담고 캄캄했다. 어둠 저편 가장자리에 보이지 않는 적들이 자욱했다. 이십만이라고도 했고, 삼십만이라고도했는데, 자욱해서 헤아릴 수 없었다. 적병은 눈보라나 안개와같았다. 성을 포위한 적병보다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면서종적을 감추는 시간의 대열이 더 두렵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있었다. 아무도 아침과 저녁에서 달아날 수 없었다. 새벽과 저녁나절에 빛과 어둠은 서로 스미면서 갈라섰고, 모두들 그푸르고 차가운 시간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 P179

서날쇠가 바랑에서 호미를 꺼내 배수구 앞에 쌓인 얼음과 잡석을 걷어 냈다. 배수구 구멍 밖으로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 대감, 제가 없는 동안 나루 혼자 있으니……
- 알았다. 내 거두마- 그럼 대감… 서날쇠가 눈 위에 꿇어앉아 김상헌에게 큰절을 올렸다. 김상헌이 땅에 엎드려 맞절로 받았다. 예조판서의 머리와 대장장이의 머리가 닿을 듯이 가까웠다. 새가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엎드린 김상헌의 등에 눈덩이가 떨어져 내렸다. 김상헌이 일어섰다. 서날쇠가 일어섰다. 서날쇠는 바랑을 벗어서 앞으로 밀면서 기어서 배수구를 빠져나갔다. - P232

••• 온조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
최명길의 이마가 차가운 돗자리에 닿았다. 왕조가 쓰러지고 세상이 무너져도 삶은 영원하고, 삶의 영원성만이 치욕을 덮어서 위로할 수 있는것이라고, 최명길은 차가운 땅에 이마를 대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치욕이 기다리는 넓은 세상을 향해 성문을 열고 나가야할 것이었다. 최명길은 오랫동안 엎드려 있었다. 김상헌이 종헌을 올렸다. 잔을 올리고 물러나 절할 때, 비틀거리는 김상헌을 최명길이 부축했다.
향 연기 속에 떠오른 온조의 혼령이 일천육백 년의 시간을건너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환영을 김상헌은 느꼈다. 침탈과 살육과 기근과 유랑의 들판을 가벼운 옷자락으로 스치며 혼령은 한 줄기 피리소리처럼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성안으로 들어오던 새벽에, 새로 내린 눈 위에 빛나던 새로운 햇빛과 새로운 시간들, 서날쇠가 떠나던 새벽에 서날쇠가 나아가는 쪽에서 아침의 빛으로 깨어나던 봉우리들을 김상헌은 생각했다. 시간은 흘러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모든 환란의시간은 다가오는 시간 속에서 다시 맑게 피어나고 있으므로,
끝없이 새로워지는 시간과 더불어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이었다. 모든 시간은 새벽이었다. 그 새벽의 시간은 더럽혀질수 없고, 다가오는 그것들 앞에서 물러설 자리는 없었다. 이마를 땅에 대고 김상헌은 그 새로움을 경건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P236

정명수가 대답했다.
- 조선 국왕이 누리를 거느리고 명을 향해 원단의 예를 행하는 것이옵니다.
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 무어라 명에게… 북경 쪽으로... 대청 황제 칸이 이역만리 조선 땅에 와 일월성신의 신년영접하는 봉우리 아래에서, 갇힌 성 안의 조선 국왕이 명에게 예를 올리고 있었다. 용골대는 무참했다. 칸의 진노가 떨어질듯 등줄기가 시켰다. 용골대가 단 앞에 엎드렸다.
-폐하, 소장의 무능이옵니다.
- 뭐, 그렇기야 하겠느냐. 저들이 제 짓을 하는 것이겠지.
- 지금 포를 쏴서 헤쳐버릴까 하옵니다.
- 사정거리가 닿겠느냐?
- 홍이포紅夷砲는 닿고도 남습니다.
사냥개 한 마리가 칸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개가 칸의 신발을 핥았다. 칸이 개의 대가리를 쓰다듬었다. 개가 벌건 아가리를 벌려서 하품했다. 칸이 빙그레 웃었다.
- 쏘지 마라. 저들이 예법을 행하고 있지 않느냐.
- 폐하께서도 신들의 예를 받고 계시옵니다.
-쏘지 마라. 정초에 화약 냄새는 상서롭지 못하다.
- 신은 차마 볼 수가 없나이다.
- 냅둬라. 저들을 살려서 대면하려 한다. 발포를 금한다.
행궁 마당이 조용해질 때까지 칸은 성 안을 내려다보았다. - P263

김상현이 말했다.
- 군왕끼리의 예는 국경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마주보는것입니다. 이 일은 용골대에게 세찬을 보낸 것과는 다른 일이옵니다. 사전에 문서도 사신도 없이 군사를 몰아서 불쑥 왔다면 이미 예를 논할 수 없사옵니다.
최명길이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 칸은 비록 황제라 하나 몸을 가벼이 움직이는 자이옵니다. 배후에 명이 있으니, 칸은 삼전도에 오래 머물지는 못할것이옵니다. 칸이 머무는 동안 성을 나가는 길을 여소서. 칸이 돌아가면 그 다음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옵니다.
김상헌이 말했다.
- 칸이 왔다면 빈손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을 것이오. 그가 취하려는 바가 뭐라고 이판은 생각하시오?
최명길이 말했다.
- 그게 무엇인지를 예판은 모르시오? 아마 전하께서는 아실 것이오.
김상헌이 말했다.
-  전하, 명길은 전하를 앞세우고 적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려는 자이옵니다. 죽음에도 아름다운 자리가 있을진대,
하필 적의 아가리 속이겠나이까?
최명길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 전하, 살기 위해서는 가지 못할 길이 없고, 적의 아가리속에도 삶의 길은 있을 것이옵니다. 적이 성을 깨뜨리기 전에 성단을 내려주소서. - P270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조선이었다. 송파강은 날마다 부풀었다. 물비늘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칸은 답답했다. 저처럼 외지고 오목한 나라에 어여쁘고 단정한 삶의 길이 없지않을 터인데, 기를 쓰고 스스로 강자의 적이 됨으로써 멀리있는 황제를 기어이 불러들이는 까닭을 칸은 알 수 없었고 물을 수도 없었다. 스스로 강자의 적이 되는 처연하고 강개한 자리에서 돌연 아무런 적대행위도 하지 않는 그 적막을 칸은이해할 수 없었다. 압록강을 건너서 송파강에 당도하기까지행군대열 앞에 조선 군대는 단 한 번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대처를 지날 때에도 관아와 마을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조선의 누런 개들이 낯선 행군대열을 향해 짖어 댈 뿐이었다. 도성과 강토를 다 비워 놓고 군신이 언 강 위로 수레를 밀고 당기며 산성 속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내다보지 않으니, 맞겠다는 것인지 돌아서겠다는 것인지, 싸우겠다는 것인지 달아나겠다는 것인지, 지키겠다는 것인지 내주겠다는 것인지,
버티겠다는 것인지 주저앉겠다는 것인지, 따르겠다는 것인지거스르겠다는 것인지 칸은 알 수 없었다. - P280

임금이 승지를 바라보았다. 임금의 눈동자에서 촛불 불빛이 타올랐다. 임금이 말했다.
- 사흘 뒤에 성을 나가겠다. 승지는 오늘 밤 안에 내 뜻을 삼사에 알리고 세자에게도 그리 전하라. 야심하다. 서둘러라.
마루에서 사관이 장지문 안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임금의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승지가 밤새도록 성 안을 돌면서 당상들의 처소를 찾아다녔다.
이른 아침부터 묘당은 내행전으로 몰려들었다.
성을 나가기 전에, 화친을 배척했던 사대부들 중에서 묶어서 적 앞으로 보낼 신하를 골라내라고 임금은 김류에게 명했다. 칸이 돌아가기 전에••••••. 임금은 말끝을 흐렸다.
- 세자는 나와 함께 갈 채비를 갖추라.
최명길이 말했다.
-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짓이 없고,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하여 못할 짓이 없는 것이옵니다.
최명길이 울었다. 울음을 멈추고 최명길이 또 말했다.
- 전하, 뒷날에 신들을 다 죽이시더라도 오늘의 일을 감당하여주소서. 전하의 크나큰 치욕으로 만백성을 품어주소서 감당하시어 새날을 여소서.
아하••••••. 김상현이 낮게 신음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행궁 밖으로 나갔다. 임금이 말했다.
-출성의 일은 재론하지 말라.
삼사의 당하들이 내행전 마당으로 몰려왔다. 당하들은 청대를 요구했다. 임금은 응하지 않았다. 임금은 침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승지가 장지문 앞을 서성거렸다. 마루 왼쪽 구석에서 사관은 조용히 먹을 갈았다. 사관의 귀는 임금의 침소쪽을 향해 있었다. 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저녁을 준비하는 나인들이 수라간에서 달그락거렸다. 날이저물어 새들이 행궁 뒤 숲으로 날아들었다. 내행전 마당에서 당하들이 울부짖었다. 당하들은 밤새도록 돌아가지 않았다. - P339

자결에 실패한 뒤 상헌은 곡기를 끊고 누워 있었다. 조카들이 곁을 지켰다. 큰조카가 김류의 감시 명령을 김상헌에게 전했다.
- 조정이 척화신을 찾고 있다 하옵니다.
아직 죽을 때가 오지 않았음을 김상헌은 알았다. 김상현의 몸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죽기 전에 감당해야 할 일이 남한산성에는 남아 있었다. 묶어서 삼전도로 끌려가서 거기서 적의 칼에 죽는다면, 아마도 사공이 죽은 자리에서 가까울 것이었다.
김상헌이 윗몸을 일으켜서 앉았다.
- 알았다. 당분간 살아 있으마 마음을 가져와라.
김상헌은 요 위에 앉아서 미음 그릇을 들여다보았다. - P344

- 일배요!
조선 왕이 구층 단 위를 향해 절했다. 세자가 왕을 따랐다.
조선 기녀들이 풍악을 울리고 춤추었다. 기녀들의 소맷자락과 치마폭이 바람에 나부꼈다. 풍악소리가 강바람에 실려 멀리 퍼졌다. 홍이포가 터지고, 청의 군장들이 여진말로 함성을질렀다.
조선 왕은 오랫동안 이마를 땅에 대고 있었다. 조선 왕은 먼 지심 속 흙냄새를 빨아들였다. 볕에 익은 흙은 향기로웠다. 흙냄새 속에서 살아가야 할 아득한 날들이 흔들렸다. 조선 왕은 이마로 땅을 찧었다.
청의 사령이 다시 소리쳤다.
-이배요!
조선 왕이 다시 절을 올렸다. 기녀들이 손을 잡고 펼치고 좁히며 원무를 추었다. 풍악이 자진모리로 바뀌었다. 춤추는기녀들의 동작이 빨라졌다. 속곳이 펄럭이고 머리채가 흔들렸다. 다시 홍이포가 터지고 함성이 일었다. 조선 왕이 삼배를 마쳤다.
칸이 조선 왕을 가까이 불렀다. 조선 왕은 양쪽으로 청의 군장들이 도열한 계단을 따라 구층단으로 올라갔다. 세자가따랐다. 조선왕이 칠층을 지날 때, 강화에서 끌려온 사녀들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울음을 참았다. - P355

서날쇠는 서문으로 들어와 행궁 뒷담길을 따라서 대장간으로 돌아왔다. 불길이 끊긴 화덕이 썰렁했고, 오소리가 굴을 뚫었다. 서날쇠는 진흙을 이겨서 화덕 안쪽의 구멍을 막았다.
백성들이 날마다 몇명씩 성안으로 돌아왔다. 봄농사를 시작하기가 너무 늦지는 않았다.
서날쇠는 뒷마당 장독 속의 똥물을 밭에 뿌렸다. 똥물은 잘 익어서 말갛게 떠있었다. 쌍둥이 아들이 장군을 날랐고,
아내와 나루가 들밥을 내왔다. 다시 대장간으로 돌아온 날 나루는 초경을 흘렸다.
나루가 자라면 쌍둥이 아들 둘 중에서 어느 녀석과 혼인을 시켜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며 서날쇠는 혼자 웃었다. -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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