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널 - 당내 개혁 세력이 지난 1년 동안 실제로 무엇을 했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하나 김 부총재는 김 대통령과 어떤 차별성이 있는가.
김근태 -민주화운동 세력이 국민 대중으로부터 평가받으면서도 전폭적 신뢰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군사독재의 폭압이 심했을 때 민주주의가 살아날 수 있을까 하는 회의와 계승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는 꿈이 필요했다. 꿈은 관념적이다. 관념성을 동반한 꿈은 실제적인 그림을 그리지못하는 측면이 있다.
두 번째는 탄압이 심할 때는 인격의 연속성이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기 위해 개인의 모든 힘을 발휘해 저항해야 한다. 그러려면 상대방을철저히 부정할 수밖에 없다. 파괴적인 권위주의 세력 아래서 고통 받은사람들 가슴 속에는 상처가 남게 된다.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자기정화 노력이 필요하다. 억울하지만 그렇다.
DJ와 내가 차별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더 외곽에서 돌게 될지도 모르겠다(웃음). 우리 정치의 다음 단계 모습은 정책노선에 따른 재결집이될 것이다. 이것이 어떤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고, 누가 또는 어떤 집단이 해낼 것인가가 문제다. 현재 우리 정치는 최고의 리더십을 빼놓고는각종 정보가 집중되지 않기 때문에 판단과 모색의 범위가 상대적으로협소하다. 이를 제도화하는 것은 다음 단계 리더십들 사이에서는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 P295

패널 김 부총재는 자신에게 반인권적 고문을 자행했던 이근안 전 경감을 이제는 용서하고 싶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용서하고싶더라도 고문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처벌해야 하는 것 아닌가.
김근태 날씨가 안 좋으면 감기몸살이 쉽게 찾아온다. 그때 고문의 후유증이다. 우선은 원한이 나 자신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나자신 네 번에 걸쳐 도합 7년 동안 도피 생활을 해봤다. 그 피신 생활자체가 굉장히 고통스럽다. 사실상 처벌이다. 이근안 씨가 만 10년을 피신하면서 겪은 고초는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세 번째는 이근안 씨도 군사독재의 하수인으로서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였다. 이 세가지를 생각하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남아공의 만델라처럼 진실로 화해했으면 한다. 그리고 국민의 대표를 자임하는 정치인으로서 과거에 대한 복수로 한계를 보이고 싶지 않다는 바람에서였다. - P298

다시 강준만의 지적이다.

나는 김 부총재의 경우 친화력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건 그의 겸손과 성실 덕분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걸 마냥 좋게만 보진 않는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보통 사용되는 ‘친화력‘의 정체에 대해선 깊은 의구심을 갖고 있다. 나는 기자들에게 술은커녕 밥 한 끼 사지 않아 욕을 먹는정치인들이 적잖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 정치인은 아무리 능력이 탁월해도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기자들로부터 욕먹게 마련이고 또 그런 부정적인 평가는 언론에 그대로 반영돼 대중의 인식에도큰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모든 걸 원칙대로 하려는 정치인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마련이다. 반면능력과 윤리에 상당한 문제가 있어도 술 잘 마시고 마당발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정치인들도 적지 않다. 물론 이건 비단 정치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서 통용되는 문화로 보아야 할것이다. 그런 문화를 거스르면서 리더가 될 수는 없으니 이게 바로 딜레마라는 것이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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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건축의 주요 기본 요소들은 기둥, 지붕, 낮은 담장이라는 세 가지로 규정할 수 있다. 동양의 건축 공간은 이 세 가지가 구획하면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 요소들의 가치는 바둑판 위의 돌처럼 상대적인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마치 중국 한자에서 기본 글자들의 상호 위치에 의해서 그 의미가 새롭게 창조되듯이 위의 세 가지 건축 요소는 주어진 자연 조건 안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
동양 건축에서는 건축물들이 대지 위에 구축되어 가면서 다양한 형태의 정원들이 만들어지는데, 빈 공간을 많이 만들어 내는 편이 이기는 바둑의 규칙과 노자의 ‘비움의 사상‘을 염두에 두고 건축물을 바라본다면 동양 건축에서의 정원과 마당이 어떻게, 왜 만들어지는지 이해될 것이다. - P141

동양의 산수화에서는 일반적으로 원경遠景과 근경近景 사이에 중경中景을 그려 넣는 대신 여백으로 처리한다. 그림에 따라서 안개가 낀 모습으로 중경을 지우기도 한다. 이 같은 방식은 건축에서도 나타나는데, 동양 건축에서 자주 사용되는 낮은 높이의 담장이 그 역할을 한다. 낮은 담장은 내 대지 바로 앞에 있는 중간의 경치를 지워 버리고 가까이에 있는 정원과 멀리 있는 풍경인 산만 보이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건물 내부에 위치한 관찰자의 투시도상에서 시각적인 여백을 가져오게하는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도가 사상을 반영한 ‘선의 정원‘에서는 나무를 심은 정원 대신 땅을 비우고 모래만 깐 정원을 도입해서 더 많은 빈 공간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리고 동양의 이러한 디자인은 수학적 황금 분할에 대한 고려 없이 진행된다. 서양 건축과 미술에서는 황금 분할의 역할이 큰 반면, 동양 건축과 미술에서는 만들어진 구조물보다 빈공간 혹은 여백이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 왔다. - P147

극동아시아 문화는 유교가 지배적이었다. 사후 세계보다는 현생을 더중요하게 생각하고 땅 위에서의 현실 삶에서 충忠이나 효孝 같은 관계를 중요시했다. 기둥 구조를 써서 기둥과 기둥 사이로 주변 환경이 잘보이는 동양의 건축은 땅과 연결되어서 집을 짓는 개미처럼 주변 환경과의 관계성이 중요시되는 건축의 성격을 띤다. 반면에 유럽은 이집트, 그리스, 기독교에서 공통적으로 사후 세계, 이데아의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위로부터 오는 형이상학적 원칙을 중요시했다. 이들은 땅과는 관련 없이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관념적으로 무에서 새로운 법칙을 만든다. 이러한 문화적인 특징은 주변의 아무런 영향 없이내재된 법칙에 의해서 허공에 집을 짓는 벌과 비슷하다. 서양의 공간은 주변과의 관계를 맺지 않고 자족적이고 자기 완결적이기 때문에 벌집처럼 기하학적인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피라미드‘나 ‘판테온‘도 주변 환경과 상관없이 자족적인 법칙에 의해서 디자인되었다. 그리고 그 법칙은 수학적 논리를 기반으로 한다. 이렇게 서양의 종교적공간은 기하학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P153

‘판테온‘과 ‘석굴암‘은 유사하기도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첫째 ‘판테온‘은 비워진 공간에 위로부터 빛이 떨어지는 공간이다. ‘판테온‘은 모든 신을 위한 신전인 ‘만신전‘이어야 했기 때문에 어느 특정한 신의 조각상을 둘 수 없었다. 그래서 공간을 비우고 빛으로 채웠다. 반면에 불교사찰인 ‘석굴암‘은 불상을 가운데에 두었다. 이보다 더 큰 차이점은 ‘판테온‘은 밖에서 보면 건축물로 보이지만, ‘석굴암‘은 건축을 마친 다음에 흙을 쌓아 덮어서 건물을 지워 버렸다는 점이다. 이것이 석굴암‘
이 특별한 가장 큰 이유다. 건축에서 공간을 만드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벽이나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어서 공간을 구획하는구축을 통해서 만드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땅이나 바위 같은 덩어리를 파내어 공간을 만드는 방식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한 세트로되어 있는데, 건축 설계를 한 김대성은 ‘불국사‘를 만들 때는 첫 번째 방식인 구축의 방식으로 만든 반면, ‘석굴암‘은 굴을 파내는 방식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석굴암‘도 석재로 구축하면서 만들었지만, 결정적으로 마지막에 건축물을 흙으로 다시 덮어서 굴처럼 만들었다. 김대성은 ‘석굴암‘이 땅을 파내어 만든 것처럼 보이고 싶었던것 같다. 이 같은 디자인은 ‘석굴암‘을 ‘음‘의 공간인 빈 공간으로만 만들려 한 김대성의 의도가 보인다. 건물의 외양이 보이게 되면 ‘양‘의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양의 공간은 이미 서측에 있는 ‘불국사‘에 완성되어 있다. - P160

그렇게 유럽인들은 동양을 동경하게 되었고, 중국과 일본은 그 대표적인 대상 국가가 되었다. 지금도 해외에서 바라보는 두 나라에 대한 시각은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수준이다. 그 이유는 중국과 일본은 도자기를 수출한 나라였고, 우리나라는 높은 수준의 도자기를 만들었지만 수출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출은 그렇게 중요하다. 그나마 우리나라가 1970년대 이후 수출 주도형 산업을 육성했기에 지금의 한류가 가능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류가 성공적인 것은 삼성 핸드폰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1999년 미국NBC 방송의 인기 아침 프로그램에서 삼성 핸드폰은 물에 넣었다가 꺼내도 작동한다는 시연을 하고 나서부터 한국은 첨단 기술의 이미지를갖게 되었다. 문화를 팔기 위해서는 첨단 제품이 필요하다. 1970년대 우리가 <6백만 달러의 사나이> 같은 미국 드라마에 심취했던 것은 제2차세계 대전의 원자폭탄과 1969년의 아폴로 우주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21세기의 첨단 제품이 스마트폰이라면 수백 년 전에는 도자기가 그 역할을 했다. - P173

도자기를 통해서 중국식 문화가 서양에 전파되었다. 유럽은 계속해서 중국으로부터 도자기를 수입해서 사용했는데, 당시 중국 왕조는 이를통해서 막대한 부를 축척했고 도자기 대금으로 받은 멕시코산 은으로 현재의 우리가 볼 수 있는 만리장성을 복원했다. 당시 도자기 생산은 황실에서 독점하고 있었다. 이는 마치 청와대가 삼성 반도체 공장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징더전景德鎭이라는 중국의 도자기 생산 주요 기지가 있었는데 가마가 1천 개 있었고, 연간 400만 개의 도자기를 생산할 정도였다. 하지만 1601년 징더전 도기공들의 노사 분규를 시작으로 1675년 만주 반란군에 의한 파괴 등 17세기 들어서 여러 차례의 민란으로 징더전의 도자기 공장은 점차 파괴되었다. 서양의 도자기 수입 회사는 중국을 대체할 도자기 공급선이 필요했고, 그 기회를 틈타서일본이 도자기 수출의 교두보를 차지하게 되었다. 일본이 이렇게 수출할 수 있었던 것은 상업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조선보다 상업이발달한 데는 건축적인 이유가 있다. 전작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 설명했듯이 일본은 지진 때문에 온돌이라는 난방 시스템을 쓰지 못했고, 덕분에 목조 건축이지만 2층 이상의 주거를 지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고밀화된 도시를 만들 수 있었고, 덕분에 주변에 물건을 사 줄 사람이 많아서 상인들이 돈을 벌수 있었으며 이들은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한계층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온돌 때문에 단층짜리 집만 짓고 살았던 조선은 고밀화된 도시가 만들어지지 않았고, 주변에 물건을 사줄 사람이적었기에 상업이 발달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저 닷새에 한 번씩 열리는 5일장을 통해서만 상업 행위가 이루어졌다. 매일 시장이 열리는 사회와 닷새에 한 번 시장이 열리는 사회는 화폐 통화량에서 5배의 차이가 난다. 화폐 통화량이 5분의 1이 되면 상업으로 새롭게 돈을 벌 기회도 5분의 1이 된다. 5일장의 사회에서는 상인이 성장할 수 없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회 계층의 순서는 ‘사농공상‘으로, 상인이 가장 대우를 못 받았다. 조선은 국운을 바꿀 만한 엄청난 도자기 수출의 기회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높은 인구밀도의 도시가 없었고 그에 따라서 제대로 된 상인이없었기 때문에 그 기회를 잡지 못하고 일본에게 빼앗기게 된 것이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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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니 옷장에서 티셔츠 한 장을 꺼냈다. 티셔츠로 식칼을 둘둘 말아 가방에 넣었다. 무릎은 꿇지 말았어야 했다. 무릎을 꿇으면 희망이 있을 거라고 믿는 태도, 희망을 향해 다가가려는 태도가 나를 희망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것 같았다. 병신이 되지않으려다 상병신이 되었다. 나는 최악의 병신을 상상했다. 그것을 바라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이 유일한 출구였다. 무차별하게 흙을 긁어쥐던 순간처럼, 아무 곳에도 손을 뻗을 수 없는 순간에야만 그러잡을 것이 생기리라는 희망이었다. 교문을 지나올 때 교문을 통과하고 있는 다른 아이들을 살펴보았다. 저들 중누군가는 분명 창문에 매달려 나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비웃어주길 기대했다. 아이들이 내 신발을 쓰레기통에 버려버리고, 밥 위에 가래를 뱉고, 화장실에 가둬버리길 기대했다. 아이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나는 샤프심이 아니었다. 사뿐하고 안전하게 추락할 수 없었다. 딱딱한 아스팔트에 떨어져 깨져버리는 묵직한 수박처럼 완전히 깨어질 때에만 시원함을 느낄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에야 찾아올 강렬한 수치심을 떠올리면 짜릿했다. 수치심의 끝에서만 나는 식칼을 꺼낼 것이다. 식칼을 꺼내기 위해 더 큰 수치심이 필요했다. 회복이 불가능한 병신이 되어야 했다. - P124

아람은 가끔씩 식판을 들고 내 자리로 왔다. 가끔씩 아람은 소영의 반에 가서 소영과도 급식을 먹었다. 책가방에는 식칼 한자루가 늘 있었지만,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까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식칼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나 혼자였고, 그 식칼을 무서워하는 것도 나 혼자였다.
화장실에 가기 시작했다. 밥을 먹으면 예전처럼 졸음이 오기시작했다. 수업시간에 선생이 던지는 농담에 아이들을 따라 웃기 시작했다. 최악의 병신이 될 희망은 점점 사라져갔다. 가짜 희망들이 몸을 간질였다. 웃지 않은 것 같았는데 입이 먼저 웃었다.
병신이 된 후에도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는 것이 진짜 병신이었다. 급식으로 특식이 나오는 날에는 기분이 나아졌고, 엎드려 잠이 들었을 때 등에 떨어지는 햇살은 포근했고, 아람이 가끔은 괜찮은 아이로 느껴졌고, 하루하루가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다. 나는 최악의 병신이 되는 일에도 실패한 최악의 병신이 되어갔다.
칼을 꺼낼 용기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다시 집을 나갈 용기도 사라졌다. 학교를 박차고 떠날 용기도 먼 밖까지 가보고 싶다는 꿈도 사라졌다. 나에게조차 나는 투명해져갔다. 그런 나를 편안해하기 시작했다. - P130

나는 최선을 다했다. 소영도 그랬다. 아람도 그랬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떠나거나 버려지거나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이게 우리의 최선이었다. 나는 이제 읍내동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읍내동을 벗어나고싶었던 나의 소원도 이상한 방식으로 도래해 있었다. 언제 그칠지는 알 수 없지만, 쉽게 녹아 사라지진 않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상하고, 무섭고,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좋은, 함박눈이었다. ■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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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에 대한 가치관에서도 차이점이 보인다. 서양 문화에서는 선악의 가치관이 절대적이다. 예를 들어서 십계명 같은 법은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같은 명확한 독립적인 명제로 선을 규정한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선악의 결정을 관계에 의해서 설명한다. 동양에서는 절대적인 선을 믿지 않는다. 동양 철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중용‘을 살펴보자. 중용은 공자의 생각을 공자의 손자인 자사평가 정리하고 발전시킨 것을 훗날 송나라 때 주자朱구가 정리하여 4서로 만들면서 알려졌다. 중용의 개념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다.
쉽게 말해서 눈치 봐서 가운데에 서라는 말인데, 벼농사 사회의 공동체내에서 튀지 않게 행동하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우리나라 사회는 요즘도 이런 덕목을 최고로 내세운다. 우리 사회는 ‘뛰어나지만 튀는 것보다는 ‘무능하더라도 무난한‘ 것을 더 좋게 보는 사회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중용이 되려면 좌와 우의 거리를 잴 필요가 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중간쯤에 ‘선‘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좌와 우의 관계 속에서 선을 찾는 것이다. 이는 동양 사회가 상대적인 가치와관계를 중요시했음을 보여 준다. 동양에서 최고의 덕으로 이야기되는 ‘중용‘은 절대적 선의 개념이 아니라, 주변의 상황과 관계에 따라서 변화하는 선의 개념이다. 또 다른 예를 찾아보자. 동양에서 도덕의 가장 근본이라고 생각하는 ‘효孝‘는 부모와 자녀라는 두 사람 간의 상대적인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충忠‘은 임금과 신하라는 관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선이다. 동양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선을 찾으려 했다. 부모자식의 관계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생기는 피할 수 없는 관계다. 사람들은 존재하는 즉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게 되는데, 동양에서는 그 관계 속에서 가치를 찾으려고 했다. 이는 집단 노동 방식으로 벼농사를 지으면서 만들어진 가치관이다.
반면 서양 근대 철학의 시작을 연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를 찾았는데, 사고의 근저를 계속 파내려 가다 ‘생각하는 나‘에 다다른 것이다. 이는 서양 철학은 독립적인 자아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보여 준다. 혼자서 씨뿌리고 일하는, 밀을 경작하는 사람다운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이다. - P97

동서양은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고 생각했던 서양과는 달리, 동양은 특이하게도 사후 세계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공자는 어느 날 제자 계로가 "사람이 죽으면어디로 가나요?"라고 질문하자, "사는 것도 모르는데 죽은 뒤를 어떻게알겠는가?"라고 답했다고 한다. 「세계 종교의 역사』의 저자 리처드 할러웨이에 의하면 사후 세계에 대해서 무관심 혹은 의식적으로 무시하려는 경향은 전 세계의 종교 역사를 통틀어서 중국 등 일부 나라에만 나타나는 특이한 특징 중 하나라고 말한다. 이집트나 힌두 쪽 문명은사후 세계에 상당한 관심을 갖는데 반해, 중국은 상대적으로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집단으로 농사를 지어야 하는 벼농사 사회의구성원으로서 갖는 생각답다. 당장에 내 눈앞에 닥친 집단 노동 속에서만들어지는 사회적 문제가 더 급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절대적인서양의 사고 체계에 반해서 동양의 상대주의 사고 체계의 가장 확실한예제는 중국 고대 철학인 ‘음양설‘에서 찾을 수 있다. 음과 양 두 개의 반대되는 ‘기‘는 서로 상충되는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둘이 상호 의존적이면서 하나가 되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고 있다. 상충되는 것을 오히려 상호 의존적이며 하나가 되기 위한 것으로 보려는 시각은 갈등이 있더라도 함께 집단 노동을 해야했던 벼농사 사회의 시각이다. - P100

다시 말해서 한자는 자유로운 성장 패턴을 띠게 되는데, 이와 같은 성격은 동양의 건축 평면에서도 나타난다. 서양의 종교 건축이나 왕궁 등을 보면 좌우 대칭성을 가지고서 한 방향의 축을 따라 배치되는 경향이 있다. ‘판테온‘, ‘하기아소피아 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 ‘노트르담 대성당‘, ‘베르사유 궁전‘ 모두 좌우대칭에 가운데 축이 있다. 반면 동양에서는 많은 경우 주변 환경에 맞추어서 좌우 비대칭성을 가지고 자연 발생적인 형태로 증식하듯 평면이 구성된다. ‘경복궁‘과 일본의 각종성들이 그렇다. 이렇듯 일방향성과 다방향성은 두 건축 문화가 각기 가지고 있는 다른 특징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서양 문화는 세상을 절대자가 만든 ‘수학적 규칙의 조합‘으로 보고, 동양은 세상을 ‘관계의 집합‘으로 보는 시각 차이에서 나온 것이라 여겨진다. 이 같은 관점의 차이는 체스와 바둑이라는 게임에서도 나타난다. - P110

이같이 로마의 ‘판테온‘에서 이스탄불의 ‘하기아소피아‘로 이어지는 건축 디자인에서 보이는 수학적인 진화는 콘스탄티노플(현 터키의이스탄불)의 지리적인 위치 때문이다. 로마에 비해서 콘스탄티노플은그리스에 가깝고, 그리스는 로마보다 수학적으로 앞서서 발전한 문화였기 때문이다. 그리스 멸망 이후 그리스의 많은 학자가 동로마 제국으로 들어오게 되고 따라서 문화 전반적으로 좀 더 발전한 수학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렇듯 수학적으로나 건축적으로 아름다운 ‘하기아소피아성당‘은 당시 유목 민족으로서 제대로 된 건축을 해 본 적이 없던 중동의 유목민들에게는 문화 충격이었다. 이후 이슬람 종교가 만들어진 후에 그들만의 종교 건축을 지을 때에 모든 이슬람 성전은 ‘하기아소피아성당‘ 디자인에 기반을 두고 발전시키게 된다. 중동에서 동서양의 중계무역으로 수학에 강했던 이슬람인들은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 이미 시작된 프랙털 분열 방식을 더 복잡한 형태로 발전시키고, 훗날 훨씬 더 복잡한 기하학적 프랙털 패턴을 가진 아라베스크 문양도 건축에 적용시키게 된다.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 유럽은 당시 번성하고 있던이슬람 제국에 대항할 만큼 조직적이지 못했다. 반면, 이슬람은 스페인과 북아프리카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고 있었고, 이와 함께 고도로 복잡한 기하학적인 형태의 이슬람 건축이 유럽에 영향을 미치면서 서양 건축 문화의 수학적인 성향이 증폭된다. 스페인 지역은 이때 하이브리드적인 건축 양식을 만들어 냈는데, ‘알람브라 궁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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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의미 없이 라이터를 던지는 것처럼 우리는 별 기대 없이 아람에게로 향했다. 새 술집을 찾아내지 못했더라도 아람은 들뜬 목소리로 우리를 불러냈을 것이다. 소주병 뚜껑마다 다른 숫자가 적힌 걸 발견했다며 아이들을 불러냈고, 술집의 의자가 바뀌었다며 아이들을 불러냈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날에는 이전에 발견한 무언가를 처음 발견한 것처럼 말하며 아이들을 불러냈다. 아람은 발견한 모든 것을 좋다고 말했다. 아람은 좋아하는 것을 쉽게 늘려갔다. 소각장에 버려진 귀가 너덜너덜한 곰인형이라든가, 길가에서 주운 유리구슬 같은 것. 하찮아 보이는 것들을 줍고 아람은 쉽게 좋다고 했다. 아람의 들뜬 목소리에 아이들도 쉽게 호응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게 모이는것. 아람은 그런 자리를 주선하는 유일한 아이였다. 우리가 각자아무것도 아닐 때에,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우리를 뭉치게 했다. - P28

외제 사탕 통을 가지고 있는 소영이라면, 영어 교과서를 유창한 발음으로 읽어나가는 소영이라면, 지하철 정도는 타보았을 것이라고 여겼다. 소영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가만히 서있었다.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행인들만주시하면서 딴청을 부렸다. 대전을 벗어나고서야 전민동 아이 또한 충청도 아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소영의 크림색 정장바지가 촌스러워 보였다. 서울 아이들은 이런 바지를 입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서울 아이 또한 한국을 벗어난다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변방의 사람들이었다. - P38

"너는 개 닮았다야."
어려서부터 ‘강아지‘ ‘똥개‘ ‘개코‘ 같은 별명을 갖고 있었다. 강아지를 부르듯 혀를 차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나를 부르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에게는 개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고 사람들은말했다. 친구를 따라 화장실에 갈 때,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을때, 밥을 먹고 운동장을 산책할 때, 친구들은 내게 ‘개 같다‘고 했다. 왜냐는 반발에 친구들은 말했다.
"졸졸 따라다니잖아."
"먹자고 할 때까지 밥만 보면서 기다리잖아."
"산책만 하면 킁킁대며 좋아하잖아."
남들은 내가 사람에게 충성을 다한다고 했다. 매번 집을 나가는 것도 친구에 빠져 충성하느라 그러는 것이라고 했다. 엄마는내가 아람을 졸졸 따라다니다가 ‘나쁜 물‘이 들었다고 했다.
"그게 아니야."
"그럼 왜 나갔는데. 네가 개처럼 엄마가 없어, 뭐가 없어."
할말이 없어졌다. 나는 내가 개를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의리가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같이 잡혀오면 잡혀왔지친구를 길거리에 두고 혼자 집에 돌아올 수는 없었다. 학교에서외부인 취급을 받는 친구들만이 내 유일한 내부인이었고, 누구도 우리를 지켜주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인끼리 의리를 지켜주어야 한다고 여겼다. 의리를 지켜갈수록 나는 더욱 개 취급을 받았다. 아저씨들에게서 ‘개‘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아람과 소영은 비어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는 모든 것이 머리 스타일 때문이라고 투덜거렸다. 소영은 생머리 때문에 배우처럼 보이는 것같았고, 아람은 하늘색 머리 때문에 아이돌 가수처럼 보이는 것같았다. 하지만 생머리를 한다고 해서 내가 배우처럼 보이지는않을 것이고 염색을 한다고 해서 가수처럼 보일 리도 만무했다. - P45

난간을 꼭 쥐고 아래쪽을 내려다보다가, 가방에 있는 것을 모조리 꺼내 하나씩 던져버리기 시작했다. 유리구슬을 던지고 교과서들을 던지고 필통을 열어 색연필을 던지고 샤프펜슬을 던지고 샤프심 통에서 샤프심을 꺼내 던졌다. 그리고 옥상을 내려왔다. 화단에는 내가 던져버린 것들이 깨어지거나 구겨지거나 부러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눈앞이 새하얘질 때까지 서 있었다. 사물의 윤곽이 사라졌을 때, 검게 다가오는 선 하나를 이명처럼 보았다. 주워들었다. 또각 부러졌다. 샤프심만이 하늘을가볍게 날아 무사하게 착지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 목격했다.
가출 청소년은 샤프심처럼 힘이 없었다. 쉽게 부서질 수 있기때문에,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한 대, 두 대, 아저씨가 손을 올리고 고개가 돌아갈 때 땅이 휙휙 돌아가는 횟수를 셌다. 땅이 마구 흔들려 보이기 시작할 때쯤이면 누군가가 우리를 구해주었다. 아저씨에게서 우리를 구해주는 사람 역시 길거리의 모르는 아저씨였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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