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키니 옷장에서 티셔츠 한 장을 꺼냈다. 티셔츠로 식칼을 둘둘 말아 가방에 넣었다. 무릎은 꿇지 말았어야 했다. 무릎을 꿇으면 희망이 있을 거라고 믿는 태도, 희망을 향해 다가가려는 태도가 나를 희망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것 같았다. 병신이 되지않으려다 상병신이 되었다. 나는 최악의 병신을 상상했다. 그것을 바라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이 유일한 출구였다. 무차별하게 흙을 긁어쥐던 순간처럼, 아무 곳에도 손을 뻗을 수 없는 순간에야만 그러잡을 것이 생기리라는 희망이었다. 교문을 지나올 때 교문을 통과하고 있는 다른 아이들을 살펴보았다. 저들 중누군가는 분명 창문에 매달려 나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비웃어주길 기대했다. 아이들이 내 신발을 쓰레기통에 버려버리고, 밥 위에 가래를 뱉고, 화장실에 가둬버리길 기대했다. 아이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나는 샤프심이 아니었다. 사뿐하고 안전하게 추락할 수 없었다. 딱딱한 아스팔트에 떨어져 깨져버리는 묵직한 수박처럼 완전히 깨어질 때에만 시원함을 느낄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에야 찾아올 강렬한 수치심을 떠올리면 짜릿했다. 수치심의 끝에서만 나는 식칼을 꺼낼 것이다. 식칼을 꺼내기 위해 더 큰 수치심이 필요했다. 회복이 불가능한 병신이 되어야 했다. - P124

아람은 가끔씩 식판을 들고 내 자리로 왔다. 가끔씩 아람은 소영의 반에 가서 소영과도 급식을 먹었다. 책가방에는 식칼 한자루가 늘 있었지만,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까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식칼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나 혼자였고, 그 식칼을 무서워하는 것도 나 혼자였다.
화장실에 가기 시작했다. 밥을 먹으면 예전처럼 졸음이 오기시작했다. 수업시간에 선생이 던지는 농담에 아이들을 따라 웃기 시작했다. 최악의 병신이 될 희망은 점점 사라져갔다. 가짜 희망들이 몸을 간질였다. 웃지 않은 것 같았는데 입이 먼저 웃었다.
병신이 된 후에도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는 것이 진짜 병신이었다. 급식으로 특식이 나오는 날에는 기분이 나아졌고, 엎드려 잠이 들었을 때 등에 떨어지는 햇살은 포근했고, 아람이 가끔은 괜찮은 아이로 느껴졌고, 하루하루가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다. 나는 최악의 병신이 되는 일에도 실패한 최악의 병신이 되어갔다.
칼을 꺼낼 용기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다시 집을 나갈 용기도 사라졌다. 학교를 박차고 떠날 용기도 먼 밖까지 가보고 싶다는 꿈도 사라졌다. 나에게조차 나는 투명해져갔다. 그런 나를 편안해하기 시작했다. - P130

나는 최선을 다했다. 소영도 그랬다. 아람도 그랬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떠나거나 버려지거나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이게 우리의 최선이었다. 나는 이제 읍내동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읍내동을 벗어나고싶었던 나의 소원도 이상한 방식으로 도래해 있었다. 언제 그칠지는 알 수 없지만, 쉽게 녹아 사라지진 않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상하고, 무섭고,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좋은, 함박눈이었다. ■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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