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도편추방에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또다른 건설적 목적이 있었다. 이렇게 추방된 아테네인 중 몇몇은 유배 기간에 최고의 성과를 거뒀다. 이를테면 투키디데스는 군사작전에 실패하여 추방된 뒤 최고 걸작을 썼다. 어떤 사람들에게 배제는 위대함을 향한 박차가 되는 걸까?
존스홉킨스대학 캐리경영대학원 교수 샤론 킴은 일련의 실험을 통해 배제와 창의성의 관계를 탐구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자신이 배제되었다고 느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창의적사고 검사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는 설문지에 자신이 ‘독립적‘이라고 묘사한 사람에게서 특히 두드러졌다. 킴에 따르면 이사람들에게 배제는 "이미 가지고 있던 느낌,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느낌을 확증시키며" 이러한 확증은 실제로 더 큰 창의성을 이끌어낸다. - P100

그리스인들은 이런 연구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지만, 배제의 힘과 그 절친한 사촌인 질투의 힘을 정확히 이해했다. 그들은 인간이란 질투를 타고났으며 질투가 좋은 것이라고 믿었다. 언뜻 보기에는말도 안 되는 소리 같다. 칠죄종七罪宗의 하나인 질투는 칼럼니스트 조지프 엡스타인 말마따나 어떤 성품으로도 만회할 수 없는 유일한 죄 아니던가.
답을 알기 위해서는 늘 그렇듯 신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이번에는 불화의 여신 에리스를 찾아야 한다. 그녀는 사뭇 다른 두가지 면을 갖췄다. 시인 헤시오도스는 이렇게 썼다. "한 에리스는만나면 반갑지만 또다른 에리스는 만나면 증오스럽다."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좋은 에리스는 사람들을 "일하도록 부추기고 동료보다 앞서도록 북돋움으로써 높은 경지에 이르게 했다. 이 좋은 질투덕에 그리스인들은 경쟁을 유해한 힘에서 생산적 힘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었다. 왜인지 그들은 질투의 어두운 면 (옆집 사람을 목 졸라죽이고 싶어)에 굴복하지 않고 질투에서 동기 부여 (옆집 사람을 이기고 싶어)를 이끌어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들이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왜 못 할까?
- P101

아테네인들은 무척이나 불안정한 시대를 살았으나, 사나운 스파르타인처럼 벽 뒤로 물러서거나 여느 도시국가처럼 향락과 산해진미에 빠지기보다는 불확실성과 고통과 모든 것을 힘차게 끌어안았으며 모든 방면에서 열려 있었다. 그러지 않는 편이 현명해 보일때조차도 외국 문물, 기이한 사람들, 낯선 아이디어에 대한 개방성. 이러한 개방성이 아테네를 아테네이게 했다.
아테네인들은 아주 훌륭했으나,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의 황금기는 놀랍도록 짧았다. 뭐가 잘못됐던 걸까? 어떤 면에서는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다.
1944년에 앨프리드 크로버라는 인류학자가 『문화 성장의 요소』라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책을 펴냈다. 제목은 어마어마하지만, 이 야심차고 매혹적인 책은 단순히 인간 성취의 흥망성쇠만을 기록했다. 크로버는 아테네 같은 천재 집단은 유전이 아니라 문화로 설명된다고 믿었다. 또한 이 황금기가 어째서 예외 없이 사그라드는지에 대한 이론을 세웠다. 크로버에 따르면 모든 문화는 주방요리사와 같다. 쓸 수 있는 재료(그는 ‘문화의 요소‘라고 표현했다)가 많아질수록 만들 수 있는 음식의 가짓수도 많아진다. 하지만 아무리 재료가 넉넉한 주방이더라도 결국은 비기 마련이다. 아테네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소크라테스가 처형된 기원전 399년 이도시의 찬장은 텅 비었다. ‘문화의 요소‘는 고갈되었다. 이제 할 수있는 일이라고는 자기표절뿐이었다. - P104

항저우는 아테네처럼 무역도시였다. 북적거리는 시장에서는 인도에서 가져온 코뿔소 뿔, 아프리카에서 온 상아, 거기다 진주, 수정, 단향, 장뇌, 정향, 카르다몸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살 수 있었다. 항저우는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상품과 아이디어의 교차로에 자리잡았으며 중국 안팎에서 방문객이 찾아오는 목적지였다.
이곳의 명소 중 하나는 도시의 ‘유원지‘였다. (여러분이 생각하는그런 유원지가 아니다. 물론 옛 항저우에는 그런 데도 많았지만.) 이곳에서는 중국의 가로피리 연주법을 배우거나 연기 수업을 받을 수있었으며 연중 눈앞에서 펼쳐지는 서커스(줄타기, 저글링, 칼 삼키기, 코미디, 레슬링, 개미놀음)를 보며 그저 경탄할 수도 있었다. 제르네는 항저우에서 "대혼란이 거듭된다"고 했는데, 이 표현을 보자마자 아테네의 북적거리는 아고라가 떠올랐다. 여기서 어떤 패턴이 감지된다. 천재의 장소에는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이 아니 혼란까지도 필요하다. - P115

시후(西湖)는 항저우의 천재성과 무슨 관계일까? 앞에서 말했듯, 천재성은 대체로 도시적 현상이지만 창조적인 사람들이 자연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위대한 도시들이 결코 자연과 완전히 단절하지 않는 이유는 그래서다. 그런 도시들은 자연을 향유할기회를 언제나 남겨둔다. 뉴욕에는 센트럴파크가 빈에는 비너발트가 도쿄에는 신주쿠 교엔이 있다. 자연과 완전히 분리된 도시는 죽은 장소이며, 그다지 창조적인 장소가 못 된다. - P118

우리 서양인은 창의성을 창조적 천재성은 말할 것도 없고-선택된 소수의 영역으로 여긴다. 하지만 모든 문화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인류학자 마저리 쇼스탁은 칼라하리사막의 쿵족을 인터뷰했는데, 이들은 구슬꿰기, 이야기, 음악으로 유명하다. 부족원 중에서 가장 창의적인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전부 다요." 원시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창조적 활동에 종사한다. 반면에 더 발전한 사회에서는 창조성이 뭔가 특별한 것으로 바뀌어 점점 더 소수의 선택지가 되어간다.
아시아의 문화, 특히 중국과 한국 같은 유교 문화는 창의성에대한 접근방식이 서양과 사뭇 다르다. 서양인은 창의성의 결과에만 관심을 두는 경향이 있다. 무엇을 만들어내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에 반해 아시아인은 과정을 중시해 목적지 못지않게 여정에도 관심을 둔다.
또한 서구 문화는 창의성을 참신함과 동일시한다. 창의적인 것이라면 뭐든지 마땅히 전통과 근본적으로 결별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중국 같은 유교 국가는 그렇지 않다. 중국인은 발명이나 아이디어의 참신함보다는 그 쓰임새를 훨씬 더 중시한다. "새롭고 놀라운 혁신인가?"가 아니라 "쓸모 있는가?"라고 묻는다. 중국에서 창의성이란 전통으로부터의 단절이 아니라 전통의 계승, 전통으로의회귀다. - P138

왜 이토록 접근법이 다른 걸까? 서양인의 창의성 개념과 천재성 개념은 창조 신화에 깊이 뿌리를 둔다. 이 신화들은 무지막지한 힘을 발휘한다.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이 신화를 내면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은 종교인에게나 비종교인에게나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에서는 엑스 니힐로ex nihilo, 즉 무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신의천지 창조가 그러했고 우리 인간의 목표도 그러하다. 이런 세계관에서 예술가(또는 건축가나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예전에 없던 것을 난데없이 만들어내는 존재다. 창조적 행위는 시간 자체와 마찬가지로 직선적이다. 창작자는 X에서 출발하여 수많은 커피를 마시며꾸준히 앞으로 나아가 Y에 이른다.
하지만 중국 우주론에서 우주, 즉 道에는 시작도 창조주도 없다. 언제나 무언가가 있었으며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것이다. 따라서 창조적 행위는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중국의 방식은 ‘크레아티오인 시투creatio insitu‘, 즉 맥락 안에서의 창조다. 공자 스스로도 "나는 알렸을 뿐 만든 것은 아닐지니"라며 새로운 것과 별난것을 멀리하여 "이단"의 덫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했다. - P139

창의성을 북돋우는 최선의 방법은 모든 걸림돌을 없애는 것이라고들 말하지만, 그 반대라는 증거가 얼마든지 있다. 심리학자로널드 핑커는 피실험자들에게 미술 과제물을 만들도록 했다. 몇 사람에게는 재료를 다양하게 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재료를 적게줬다. 그랬더니 선택폭이 가장 적었던 사람들이 가장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아니면 서양과 중국의 회화 양식 차이를 생각해보라. 중국화는 ‘수직적‘이다. 그림의 요소 중 어떤 것은 꼭 들어가야하지만 어떤 것은 미술가의 재량에 맡겨진다. 이에 반해 서양화는
‘수평적‘이어서 모든 방향의 참신함이 허용된다. 중국 화가는 서양화가보다 큰 제약을 받기 때문에, 이들의 창의성은 더 좁은 공간에서 발휘된다. - P1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이때,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경고하는 이상한 감각에 두 내외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테레즈는 로랑의 손에서 작은 질그릇 병을 보았다. 그리고 로랑은 테레즈의 치마 사이에서 시퍼런 칼날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이런 모습으로 남편은 식탁 곁에서, 그리고 아내는 찬장 앞에 서서 말없이 냉랭하게 잠시 서로 노려보았다. 그들은 알아차렸다.
둘은 상대방의 마음에서 자기 자신의 생각을 다시 발견하고 얼어붙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당황한 얼굴에서 은밀한 계획을 읽으면서 서로 가엾게 여기고 서로 무서워했다.
결말이 가까워진 것을 느낀 라캥 부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 P347

그러다가 테레즈와 로랑은 별안간 울음을 터뜨렸다. 마지막 발작에 그들의 마음은 찢어져서 마치 어린애들처럼 서로 상대방의 품 안으로 덤벼들었다. 그러자 따뜻하고 부드러운 무엇이 그들의 가슴속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아무 말도없이 그들이 지금까지 겪어왔고, 또 비겁함으로 인해 살아남게되면 또다시 겪어야 할 심연 속의 생활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과거를 회상하자, 끝없고 거대한 휴식과 망각을 바랄만큼 지쳐, 스스로에 대해 구역질을 느꼈다. 그리고 칼과 독이 든 컵앞에서 마지막 시선, 감사의 시선을 교환했다. 테레즈는 그 컵을 들어 반쯤 마시고 나머지를 로랑에게 내밀었다. 로랑은 단숨에 마셨다. 그것은 하나의 번개였다. 그들은 벼락을 맞은 듯이 서로 포개져 쓰러지고 마침내는 죽음 속에서 하나의 위안을 찾았다.
젊은 여인의 입은 남편의 목에 있는 흉터에 닿았다. 그것은 카미유가 이로 물어뜯어 생긴 상처였다.
뒤틀려 엎어진 두 시체는 등피를 씌운 램프의 노란빛을 받으며 밤새도록 식당의 마루 위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정오경까지 약 열두 시간 동안, 뻣뻣한 몸으로 말없이 앉아서 라캥부인은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듯 발밑의 두 시체에 무겁고 매서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 P3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포개진 그들의 손은 불타고 있었다. 땀이 밴 두 손바닥은 하나처럼 붙고, 꽉 낀 손가락들은 서로를 아프도록 눌렀다. 로랑과 테레즈는 상대편의 피가 손가락을 통해서 서로의 가슴속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붙잡은 두 손은그들의 생명이 끓는 불타는 가마솥이 되었다. 밤과 다가오는 괴로운 침묵의 한복판에서 그들이 나누고 있는 정열적인 손의 결합은 카미유가 물 속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그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듯했다. - P1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그렇다. 소크라테스는 난놈이었다. 하지만 그냥 난놈이 아니라 아테네 난놈이었다. 그 아테네의 난놈이 소크라테스였다. 한 인물과 도시가 이토록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적은 그전에도 그후에도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를 사랑했으며 다른 곳에서 살겠다- 아니면 죽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아테네에서 달아나면 처형을 면할 수 있었지만, 탈옥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는 도시와 계약을 맺었으며, 최후까지 의무를 다하고자 했다.
맨발의 기인이자 사랑스러운 고집쟁이인 소크라테스는 여느 천재와 마찬가지로 위태로운 자리 -내부자와 외부자의 중간 지점-에 서 있었다. 참신한 시각으로 세상을 볼 만큼 주류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자신의 참신한 시각을 남에게 설득할 만큼 가까운 자리였다. - P59

 얼리샤가 고대 그리스인을 왜 현재 시제로 언급하는지도 설명된다. 좋은 작품, 심지어 위대한 작품을 진정한 천재의 작품과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도 설명된다. 좋은 시나 그림은 특정 시기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하지만 천재의 작품은 그런시간적 제약을 뛰어넘으며 뒤이은 세대들에게 새로이 재발견된다.
이런 작품은 정적이지 않다. 새로운 수용자가 작품을 만날 때마다작품은 수용자를 바꾸고 수용자는 작품을 바꾼다. 파블로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미술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미술 작품이 늘현재를 살 수 없다면 그건 결코 미술이라 할 수 없다. 그리스인의 미술, 이집트인의 미술, 다른 시대를 산 위대한 화가의 미술은 과거의 미술이 아니다.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더 생생히 살아 있는것인지도 모른다." - P62

그 답은 전문성에, 아니 그보다는 전문성의 결여에 있다고 브래다는 말한다. 고대 아테네에는 직업 정치인도, 직업 판사도, 심지어 직업 성직자도 없었다. 모두가 모든 일을 했다. 군인이 시를 쓰고 시인이 싸우러 나갔다. 당시는 엄밀히 말해서 아마추어의 시대였으며, 그리스인들만 놓고 보자면 이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들은 천재성이 단순함에 있다고 생각했기에 전문성에 의혹의 눈초리를던졌다.
브래디는 다윈의 진화론에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이르기까지 지적 도약이 일어날 때마다 세상이 좀더 단순해졌다고말한다. "연관성 없어 보이는 데이터가 널려 있는데 누가 이렇게말하는 겁니다. ‘잠깐만, 이렇게 하면 전부 들어맞는군. 근데 그걸좋아하는 거죠."
이를테면 수학은 ‘우아한 증명을 높이 평가한다. 우아한 증명이란 단순히 정확한 게 아니라 매우 간소화된 증명이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 우아한 증명은 우아한 디자인이 눈을 즐겁게 하는것처럼 마음을 즐겁게 한다. 그리스인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늘 가장 우아한 해결책을 모색했다. 이는 예외 없이 연관성을 찾는다는 뜻이었는데 역사가 이디스 해밀턴 말마따나 "뭐든 다른 것과의 관계로 보는 것은 단순화하여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 P77

로버트는 저 항구가 없었으면 고대 아테네도 없었을 거라며 페리클레스를 인용한다. "우리 도시가 위대하기에 온 땅의 열매가 우리에게 흘러든다." 아테네는 세계 최초의 국제도시였다. 조선술과 항해술의 달인이었던 아테네인들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너머까지 항해하여,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물건을 가져왔다. 이런 물건에는 밀항자가 숨어 있었으니, 바로 아이디어였다. 이는 곧잘 일어나는 일이다. 아이디어는 물건에 스며들어서는 눈 밝은 관찰자가 꺼내줄 때까지 잠들어 있다. 정치는 안 되지만 경제는 개방할 수있다고 믿는 전체주의 정권이 어리석은 이유는 그래서다.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토마토 수프 깡통이나 크록스 신발에 들어 있던 전복적 아이디어는 언젠가 빠져나오기 마련이다.
그리스인들은 외국의 아이디어를 기꺼이 ‘빌렸다‘. 관점에 따라서는 ‘훔쳤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는 결론을 알게 됐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스스로 발명한 게 별로 없다. 그들은 사실 지독한 거지였다. 페니키아인에게는 알파벳을, 이집트인에게는 의약과 조각을, 바빌로니아인에게는 수학을, 수메르인에게는 문학을 빌렸다. 그들은 지적 도둑질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아테네인들은 온갖 잘못을 저질렀지만(노예제와 여성에 대한 처우를 보라) ‘우리가 발명하지않았어‘ 콤플렉스는 없었다. 그들은 괴테 말마따나 "자신이 표절했음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무의식적 자만"임을 알고 있었다. - P91

물론 그들은 아이디어를 빌려 거기에 자신의 도장을 찍었다. 아테네인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훔치든 그들은 ‘아테네화‘했다. 플라톤은 휴브리스의 기미를 강하게 풍기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인은 외국인에게서 빌린 것을 완벽하게 만든다." - P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매카시즘의 위력은 미국 사회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미국정부는 공산주의를 이롭게 한다는 의심이 들면 무슨 일이든 간섭하고 개입하며 ‘세계의 경찰‘을 자처했다. ‘베트남의 공산화‘는 묵인할 수 없는 사태였다. 군사전략적·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려는 장삿속도 물론 작용했다. 인도차이나는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는 데 요긴한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주석과 텅스텐 같은 자원이 풍부했다. 미국 국방부의 장성들과 군수산업 자본가들은 평화를 반기지 않았다. 그들은 대중의 반공 정서를 이용해 행정부를 쥐락펴락하고 의회를 움직여 대규모 전쟁 예산을 편성했다. 전쟁의 승패가 어찌 되든, 베트남 민중과 미국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죽든 상관하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제발로 전쟁의 늪으로 걸어 들어갔다.  - P257

응오딘지엠은 지나치게 열심히 일한 탓에 남베트남의 멸망을 앞당겼다. 그는 치안유지법을 제정해 모든 형태의 반정부운동탄압했다. 야당과 사회단체뿐만 아니라 정부와 군대에까지 ‘라오‘라는 비밀조직을 심어 사찰과 테러를 저질렀다. 북베트남에서 도망쳐 나온 가톨릭 신도가 중심이 된 칸라오는 불교 탄압으로 악명을 떨쳤다. 응오딘지엠 정부는 프랑스인 소유 토지를 지주에게 넘겼고 게릴라들이 빈농에게 나눠준 토지도 회수해 돌려있다. 장교들은 예산을 착복했으며 관리들은 뇌물을 받고 탈세를용인했다. 남베트남 정부군은 농촌 게릴라를 소탕한다면서 9천여개의 전략촌을 지정해 농민을 강제로 수용하고, 제네바협정 이후귀향한 6천여 명의 베트민 전사를 색출하기 위해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전개했다.
정부가 부패와 폭정을 저지르자 전국의 농촌에서 무장 세력이 출현했다. 남베트남과 미국 정부는 ‘베트콩(베트남 코뮤니스트)‘이라 했지만 대부분 지식인과 불교도였으며 소수민족도 일부 있었다. 정부군과 미군한테서 빼앗은 총으로 무장하고 각양각색의 깃발을 들었던 남베트남 무장 세력은 1960년 해방전선을 결성하고 전국적인 게릴라전에 들어갔다. 해방전선은 점령한 해방구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도시의 노동조합을 끌어들여 지지 기반을 넓혔으며 행정기관과 군대 내부를 파고들어 협력자를 찾았다. 얼마지나지 않아 해방전선은 남베트남 땅의 절반 이상을 장악했다. - P259

해방전선은 병력과 무기의 열세를 자기네 방식으로 이겨냈다. 미군은 유격전으로 상대했고, 미국 정부와 남베트남 정부는 정치투쟁으로 흔들었으며, 남베트남 군대는 설득공작으로 무너뜨렸다." 유격전부터 살펴보자. 베트남에 상륙한 미군은 세 종류의 적을 만났다. 가장 먼저 민간인 사이에 숨은 민병과 게릴라가 미군을 기습하고 함정에 빠뜨렸다. 도시와 농촌 모든 곳이 전장이었다. 다음에는 소규모 지방군이 기동전으로 공격했고, 마지막으로 정규군이 밀림에서 미군의 주력을 타격했다. 미군 보병은 공격을 받으면 일단 물러났고 포병과 공군이 적의 진지를 폭격했다. 보병이 다시 진입해 수색할 때, 진지를 빠져나온 해방전선 게릴라는 후방의 포병부대와 전투사령부를 습격했다.
미군은 적대적인 민간인과 게릴라에게 스물네 시간 동안 포위됐다. 현지 음식과 물을 믿을 수 없어서 필리핀에서 공수한 식수와 콜라를 마시고 통조림을 먹었다. 해방전선은 손실을 입어도 농민과 도시 노동자, 청년 학생과 지식인, 불교도와 산악 소수민족의 지원 덕분에 금방 회복했다. 그들은 땅굴 · 죽창·함정 같은 원시적인 수단뿐만 아니라 소련제 첨단무기도 사용했다. 1965년부터 3년 동안 소련은 북베트남에 15억 달러 규모의 원조를 제공했다. 맨발의 게릴라가 소련제 휴대용 로켓포로 최신형 미군 전투기를 격추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 P261

그 무렵 미국사회의 최대 현안은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가 이끈 흑인민권운동이었다. 흑인들은 법률적·관습적 차별의 철폐와 빈곤층에 대한 복지정책 확대를 요구했다. 그러나 빈곤 추방을 국가 과제로 선포하고 사회복지 예산의 대폭확대를 공언했던 케네디 대통령도 베트남 전비가 끝없이 늘어난탓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흑인민권운동과 반전(反戰) 평화운동이 손을 잡자 미국 사회는 남북전쟁 이후 가장 거센 정치투쟁의 격랑에 휩싸였다. 미군의 양민학살 사건이 드러나면서 베트남전쟁을 비판하는 국제사회의 여론도 높아졌다. - P263

9월 12일 『타임』지는 미국의 적이었던 호찌민의 얼굴을 표지에 올리고 다음과 같은 고별사를 실었다.

호찌민은 독립한 통일 베트남 건설에 일생을 바쳤다. 북베트남과인민은 이런 미래상을 이루려고 전력을 다한 그의 헌신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그들은 애정 어린 마음으로 ‘호 아저씨‘
를 이해했다. 남베트남 사람들도 같은 감정을 품고 있다. 살아 있는 민족 지도자 중에서 이 사람만큼 오랫동안 꿋꿋하게 적의 총구앞에서 버틴 이는 없다. - P266

문서 유출에서 언론보도와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이르기까지 놀라움의 연속이었던 그 사태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펜타곤페이퍼‘의 내용이었다. 그 문서는 미국 정부의 베트남 개입 동기가 처음부터 추악했고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거짓과 조작을 일삼았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미국 국방부가 어떤목적에서 어떤 자세로 베트남에 개입했는지 보여주는 몇몇 문서만 살펴보자."

「남베트남 행동계획」 최종 각서 (1964년 8월 3일, 비밀문서 제19호)
만일 최악의 경우 남베트남이 붕괴하든가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어 남베트남을 버리기로 결정한다면, 훌륭한 의사가 최선을 다해치료했는데도 환자는 죽고 말았다는 인상을 대외적으로 주게끔 노력한다.

미국의 베트남 개입 목적(1964년 11월 29일, 국방성 비밀문서 제27호)① 침략에 반대하는 보호자라는 명성을 지킨다.
② 동남아시아에서 공산화 도미노 현상을 저지한다.
③ 남베트남을 ‘붉은 손‘ 에서 지킨다.

미국의 베트남전쟁 목적 (1965년 3월 24일, 맥너턴 국방차관보가 맥너마라 국방장관에게 보낸 남베트남을 위한 행동계획)
70% : 미국의 굴욕적인 패배를 저지한다.
20%: 남베트남(그리고 이웃 나라들)의 영토를 중공의 손에서 지킨다.
10% 남베트남 국민에게 더 나은 자유생활을 보장한다.
그리고 수락 불가능한 폐해가 남지 않게 하면서 위기에서 빠져나간다. 만약 미군 철수를 요청받을 경우에는 그대로 남아 있기 어렵지만, 우리의 목적은 벗을 돕는 것이 아니다. - P268

베트남전쟁은 명백한 제국주의 침략전쟁이었다. 미군은 5만여 명이 전사하고 수십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살아서 귀환한 참전 군인들은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와 고엽제 후유증을않았다. 전쟁비용을 충당하려고 달러를 너무 많이 발행한 탓에 연방준비은행은 금 태환을 중지해야 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미국 경제는 1973년을 기점으로 활력을 잃고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미국 국민은 독립전쟁을 벌여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날 때 내세운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켰다. 베트남전쟁의 추악한 진실을 알린 엘스버그와 기자들, 언론자유를 수호한 연방대법원 판사들, 반전운동을 벌인 시민과 투옥의 고통을 감수하며 징집을 거부한 청년들, 전쟁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비판한 지식인들, 그들 모두가 함께 미국의 민주주의를 구했다. - P273

베트남 참전이 잘못이었다고 하면 참전 군인과 가족은 마음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트남전쟁의 기억을 지우는 것은 떳떳한 일이 아니다. 용맹하기로 명성이 높았다는 ‘따이한 부대‘가 그토록 많은 사상자를 냈다면 변변치 못한 무기를 들고 싸운 해방전선의 손실은 얼마나 컸겠는가. 한국군은 퐁니·퐁넛 사건과 같은 양민학살을 다른 곳에서도 저질렀고 베트남 여성이 낳은 한국계 자녀를 모두 버리고 철수했다. 베트남전쟁의 상처는 어디까지나 ‘가해자‘로서 입은 것이었다.
그 문제를 덮어두고 한국과 베트남의 우호관계를 말하는 것은 남과 자기 자신을 모두 속이는 일이다. 그런 식이라면 합리화하지 못할 죄악이란 없다. 조선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가리켜 ‘제국주의 시대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불행한일‘이라거나 ‘좋은 미래를 위해 어두운 과거를 얼른 잊어버리는게 좋다‘고 하는 일본 우익과 다를 바 없다. 베트남에 파병한 덕에 우리 기업이 사업 기회를 잡았고, 그렇게 벌어들인 외화로 산업화를 성공시켰으니 잘된 일이라고 한다면, 정당화할 수 없는 침략전쟁은 없을 것이다. - P274

맬컴은 흑인사회 내부의 계급분화 현상을 눈여겨봤다. 20세기 들어 농촌의 흑인들이 도시로 대거 이주하고 소득과 교육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지자 백인과 백인 기업이 공급할 수 없거나공급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시장 수요가 생겼다. 교사·복사·의사·변호사 · 이발사 · 미용사· 장의사·보험업 · 흑인신문 같은 분야에서 백인이 흑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흑인 전문직업인 집단과 소규모 기업이 탄생하고 ‘중산층 흑인‘ 또는 ‘흑인 부르주아지‘가 등장했다. 그들은 미국 사회에 통합되기를 원해서 기독교와 백인 문화를 받아들였다. 백인은 그들이 흑인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대기업과 행정기관에 받아들이는 한편 ‘흑인향상협회‘나 ‘인종평등협회‘ 같은 민권운동 단체를 지원했다. 그런데 이런 정책은 빈민가의 흑인과 무관했다. 그래서 맬컴은 이슬람을 선택하고 통합을 거부했으며 흑인민권운동 지도자들을 ‘백인화한 흑인‘이라고 비난했다. - P2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