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카시즘의 위력은 미국 사회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미국정부는 공산주의를 이롭게 한다는 의심이 들면 무슨 일이든 간섭하고 개입하며 ‘세계의 경찰‘을 자처했다. ‘베트남의 공산화‘는 묵인할 수 없는 사태였다. 군사전략적·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려는 장삿속도 물론 작용했다. 인도차이나는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는 데 요긴한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주석과 텅스텐 같은 자원이 풍부했다. 미국 국방부의 장성들과 군수산업 자본가들은 평화를 반기지 않았다. 그들은 대중의 반공 정서를 이용해 행정부를 쥐락펴락하고 의회를 움직여 대규모 전쟁 예산을 편성했다. 전쟁의 승패가 어찌 되든, 베트남 민중과 미국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죽든 상관하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제발로 전쟁의 늪으로 걸어 들어갔다.  - P257

응오딘지엠은 지나치게 열심히 일한 탓에 남베트남의 멸망을 앞당겼다. 그는 치안유지법을 제정해 모든 형태의 반정부운동탄압했다. 야당과 사회단체뿐만 아니라 정부와 군대에까지 ‘라오‘라는 비밀조직을 심어 사찰과 테러를 저질렀다. 북베트남에서 도망쳐 나온 가톨릭 신도가 중심이 된 칸라오는 불교 탄압으로 악명을 떨쳤다. 응오딘지엠 정부는 프랑스인 소유 토지를 지주에게 넘겼고 게릴라들이 빈농에게 나눠준 토지도 회수해 돌려있다. 장교들은 예산을 착복했으며 관리들은 뇌물을 받고 탈세를용인했다. 남베트남 정부군은 농촌 게릴라를 소탕한다면서 9천여개의 전략촌을 지정해 농민을 강제로 수용하고, 제네바협정 이후귀향한 6천여 명의 베트민 전사를 색출하기 위해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전개했다.
정부가 부패와 폭정을 저지르자 전국의 농촌에서 무장 세력이 출현했다. 남베트남과 미국 정부는 ‘베트콩(베트남 코뮤니스트)‘이라 했지만 대부분 지식인과 불교도였으며 소수민족도 일부 있었다. 정부군과 미군한테서 빼앗은 총으로 무장하고 각양각색의 깃발을 들었던 남베트남 무장 세력은 1960년 해방전선을 결성하고 전국적인 게릴라전에 들어갔다. 해방전선은 점령한 해방구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도시의 노동조합을 끌어들여 지지 기반을 넓혔으며 행정기관과 군대 내부를 파고들어 협력자를 찾았다. 얼마지나지 않아 해방전선은 남베트남 땅의 절반 이상을 장악했다. - P259

해방전선은 병력과 무기의 열세를 자기네 방식으로 이겨냈다. 미군은 유격전으로 상대했고, 미국 정부와 남베트남 정부는 정치투쟁으로 흔들었으며, 남베트남 군대는 설득공작으로 무너뜨렸다." 유격전부터 살펴보자. 베트남에 상륙한 미군은 세 종류의 적을 만났다. 가장 먼저 민간인 사이에 숨은 민병과 게릴라가 미군을 기습하고 함정에 빠뜨렸다. 도시와 농촌 모든 곳이 전장이었다. 다음에는 소규모 지방군이 기동전으로 공격했고, 마지막으로 정규군이 밀림에서 미군의 주력을 타격했다. 미군 보병은 공격을 받으면 일단 물러났고 포병과 공군이 적의 진지를 폭격했다. 보병이 다시 진입해 수색할 때, 진지를 빠져나온 해방전선 게릴라는 후방의 포병부대와 전투사령부를 습격했다.
미군은 적대적인 민간인과 게릴라에게 스물네 시간 동안 포위됐다. 현지 음식과 물을 믿을 수 없어서 필리핀에서 공수한 식수와 콜라를 마시고 통조림을 먹었다. 해방전선은 손실을 입어도 농민과 도시 노동자, 청년 학생과 지식인, 불교도와 산악 소수민족의 지원 덕분에 금방 회복했다. 그들은 땅굴 · 죽창·함정 같은 원시적인 수단뿐만 아니라 소련제 첨단무기도 사용했다. 1965년부터 3년 동안 소련은 북베트남에 15억 달러 규모의 원조를 제공했다. 맨발의 게릴라가 소련제 휴대용 로켓포로 최신형 미군 전투기를 격추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 P261

그 무렵 미국사회의 최대 현안은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가 이끈 흑인민권운동이었다. 흑인들은 법률적·관습적 차별의 철폐와 빈곤층에 대한 복지정책 확대를 요구했다. 그러나 빈곤 추방을 국가 과제로 선포하고 사회복지 예산의 대폭확대를 공언했던 케네디 대통령도 베트남 전비가 끝없이 늘어난탓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흑인민권운동과 반전(反戰) 평화운동이 손을 잡자 미국 사회는 남북전쟁 이후 가장 거센 정치투쟁의 격랑에 휩싸였다. 미군의 양민학살 사건이 드러나면서 베트남전쟁을 비판하는 국제사회의 여론도 높아졌다. - P263

9월 12일 『타임』지는 미국의 적이었던 호찌민의 얼굴을 표지에 올리고 다음과 같은 고별사를 실었다.

호찌민은 독립한 통일 베트남 건설에 일생을 바쳤다. 북베트남과인민은 이런 미래상을 이루려고 전력을 다한 그의 헌신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그들은 애정 어린 마음으로 ‘호 아저씨‘
를 이해했다. 남베트남 사람들도 같은 감정을 품고 있다. 살아 있는 민족 지도자 중에서 이 사람만큼 오랫동안 꿋꿋하게 적의 총구앞에서 버틴 이는 없다. - P266

문서 유출에서 언론보도와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이르기까지 놀라움의 연속이었던 그 사태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펜타곤페이퍼‘의 내용이었다. 그 문서는 미국 정부의 베트남 개입 동기가 처음부터 추악했고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거짓과 조작을 일삼았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미국 국방부가 어떤목적에서 어떤 자세로 베트남에 개입했는지 보여주는 몇몇 문서만 살펴보자."

「남베트남 행동계획」 최종 각서 (1964년 8월 3일, 비밀문서 제19호)
만일 최악의 경우 남베트남이 붕괴하든가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어 남베트남을 버리기로 결정한다면, 훌륭한 의사가 최선을 다해치료했는데도 환자는 죽고 말았다는 인상을 대외적으로 주게끔 노력한다.

미국의 베트남 개입 목적(1964년 11월 29일, 국방성 비밀문서 제27호)① 침략에 반대하는 보호자라는 명성을 지킨다.
② 동남아시아에서 공산화 도미노 현상을 저지한다.
③ 남베트남을 ‘붉은 손‘ 에서 지킨다.

미국의 베트남전쟁 목적 (1965년 3월 24일, 맥너턴 국방차관보가 맥너마라 국방장관에게 보낸 남베트남을 위한 행동계획)
70% : 미국의 굴욕적인 패배를 저지한다.
20%: 남베트남(그리고 이웃 나라들)의 영토를 중공의 손에서 지킨다.
10% 남베트남 국민에게 더 나은 자유생활을 보장한다.
그리고 수락 불가능한 폐해가 남지 않게 하면서 위기에서 빠져나간다. 만약 미군 철수를 요청받을 경우에는 그대로 남아 있기 어렵지만, 우리의 목적은 벗을 돕는 것이 아니다. - P268

베트남전쟁은 명백한 제국주의 침략전쟁이었다. 미군은 5만여 명이 전사하고 수십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살아서 귀환한 참전 군인들은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와 고엽제 후유증을않았다. 전쟁비용을 충당하려고 달러를 너무 많이 발행한 탓에 연방준비은행은 금 태환을 중지해야 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미국 경제는 1973년을 기점으로 활력을 잃고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미국 국민은 독립전쟁을 벌여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날 때 내세운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켰다. 베트남전쟁의 추악한 진실을 알린 엘스버그와 기자들, 언론자유를 수호한 연방대법원 판사들, 반전운동을 벌인 시민과 투옥의 고통을 감수하며 징집을 거부한 청년들, 전쟁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비판한 지식인들, 그들 모두가 함께 미국의 민주주의를 구했다. - P273

베트남 참전이 잘못이었다고 하면 참전 군인과 가족은 마음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트남전쟁의 기억을 지우는 것은 떳떳한 일이 아니다. 용맹하기로 명성이 높았다는 ‘따이한 부대‘가 그토록 많은 사상자를 냈다면 변변치 못한 무기를 들고 싸운 해방전선의 손실은 얼마나 컸겠는가. 한국군은 퐁니·퐁넛 사건과 같은 양민학살을 다른 곳에서도 저질렀고 베트남 여성이 낳은 한국계 자녀를 모두 버리고 철수했다. 베트남전쟁의 상처는 어디까지나 ‘가해자‘로서 입은 것이었다.
그 문제를 덮어두고 한국과 베트남의 우호관계를 말하는 것은 남과 자기 자신을 모두 속이는 일이다. 그런 식이라면 합리화하지 못할 죄악이란 없다. 조선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가리켜 ‘제국주의 시대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불행한일‘이라거나 ‘좋은 미래를 위해 어두운 과거를 얼른 잊어버리는게 좋다‘고 하는 일본 우익과 다를 바 없다. 베트남에 파병한 덕에 우리 기업이 사업 기회를 잡았고, 그렇게 벌어들인 외화로 산업화를 성공시켰으니 잘된 일이라고 한다면, 정당화할 수 없는 침략전쟁은 없을 것이다. - P274

맬컴은 흑인사회 내부의 계급분화 현상을 눈여겨봤다. 20세기 들어 농촌의 흑인들이 도시로 대거 이주하고 소득과 교육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지자 백인과 백인 기업이 공급할 수 없거나공급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시장 수요가 생겼다. 교사·복사·의사·변호사 · 이발사 · 미용사· 장의사·보험업 · 흑인신문 같은 분야에서 백인이 흑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흑인 전문직업인 집단과 소규모 기업이 탄생하고 ‘중산층 흑인‘ 또는 ‘흑인 부르주아지‘가 등장했다. 그들은 미국 사회에 통합되기를 원해서 기독교와 백인 문화를 받아들였다. 백인은 그들이 흑인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대기업과 행정기관에 받아들이는 한편 ‘흑인향상협회‘나 ‘인종평등협회‘ 같은 민권운동 단체를 지원했다. 그런데 이런 정책은 빈민가의 흑인과 무관했다. 그래서 맬컴은 이슬람을 선택하고 통합을 거부했으며 흑인민권운동 지도자들을 ‘백인화한 흑인‘이라고 비난했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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