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도편추방에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또다른 건설적 목적이 있었다. 이렇게 추방된 아테네인 중 몇몇은 유배 기간에 최고의 성과를 거뒀다. 이를테면 투키디데스는 군사작전에 실패하여 추방된 뒤 최고 걸작을 썼다. 어떤 사람들에게 배제는 위대함을 향한 박차가 되는 걸까? 존스홉킨스대학 캐리경영대학원 교수 샤론 킴은 일련의 실험을 통해 배제와 창의성의 관계를 탐구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자신이 배제되었다고 느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창의적사고 검사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는 설문지에 자신이 ‘독립적‘이라고 묘사한 사람에게서 특히 두드러졌다. 킴에 따르면 이사람들에게 배제는 "이미 가지고 있던 느낌,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느낌을 확증시키며" 이러한 확증은 실제로 더 큰 창의성을 이끌어낸다. - P100
그리스인들은 이런 연구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지만, 배제의 힘과 그 절친한 사촌인 질투의 힘을 정확히 이해했다. 그들은 인간이란 질투를 타고났으며 질투가 좋은 것이라고 믿었다. 언뜻 보기에는말도 안 되는 소리 같다. 칠죄종七罪宗의 하나인 질투는 칼럼니스트 조지프 엡스타인 말마따나 어떤 성품으로도 만회할 수 없는 유일한 죄 아니던가. 답을 알기 위해서는 늘 그렇듯 신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이번에는 불화의 여신 에리스를 찾아야 한다. 그녀는 사뭇 다른 두가지 면을 갖췄다. 시인 헤시오도스는 이렇게 썼다. "한 에리스는만나면 반갑지만 또다른 에리스는 만나면 증오스럽다."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좋은 에리스는 사람들을 "일하도록 부추기고 동료보다 앞서도록 북돋움으로써 높은 경지에 이르게 했다. 이 좋은 질투덕에 그리스인들은 경쟁을 유해한 힘에서 생산적 힘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었다. 왜인지 그들은 질투의 어두운 면 (옆집 사람을 목 졸라죽이고 싶어)에 굴복하지 않고 질투에서 동기 부여 (옆집 사람을 이기고 싶어)를 이끌어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들이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왜 못 할까? - P101
아테네인들은 무척이나 불안정한 시대를 살았으나, 사나운 스파르타인처럼 벽 뒤로 물러서거나 여느 도시국가처럼 향락과 산해진미에 빠지기보다는 불확실성과 고통과 모든 것을 힘차게 끌어안았으며 모든 방면에서 열려 있었다. 그러지 않는 편이 현명해 보일때조차도 외국 문물, 기이한 사람들, 낯선 아이디어에 대한 개방성. 이러한 개방성이 아테네를 아테네이게 했다. 아테네인들은 아주 훌륭했으나,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의 황금기는 놀랍도록 짧았다. 뭐가 잘못됐던 걸까? 어떤 면에서는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다. 1944년에 앨프리드 크로버라는 인류학자가 『문화 성장의 요소』라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책을 펴냈다. 제목은 어마어마하지만, 이 야심차고 매혹적인 책은 단순히 인간 성취의 흥망성쇠만을 기록했다. 크로버는 아테네 같은 천재 집단은 유전이 아니라 문화로 설명된다고 믿었다. 또한 이 황금기가 어째서 예외 없이 사그라드는지에 대한 이론을 세웠다. 크로버에 따르면 모든 문화는 주방요리사와 같다. 쓸 수 있는 재료(그는 ‘문화의 요소‘라고 표현했다)가 많아질수록 만들 수 있는 음식의 가짓수도 많아진다. 하지만 아무리 재료가 넉넉한 주방이더라도 결국은 비기 마련이다. 아테네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소크라테스가 처형된 기원전 399년 이도시의 찬장은 텅 비었다. ‘문화의 요소‘는 고갈되었다. 이제 할 수있는 일이라고는 자기표절뿐이었다. - P104
항저우는 아테네처럼 무역도시였다. 북적거리는 시장에서는 인도에서 가져온 코뿔소 뿔, 아프리카에서 온 상아, 거기다 진주, 수정, 단향, 장뇌, 정향, 카르다몸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살 수 있었다. 항저우는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상품과 아이디어의 교차로에 자리잡았으며 중국 안팎에서 방문객이 찾아오는 목적지였다. 이곳의 명소 중 하나는 도시의 ‘유원지‘였다. (여러분이 생각하는그런 유원지가 아니다. 물론 옛 항저우에는 그런 데도 많았지만.) 이곳에서는 중국의 가로피리 연주법을 배우거나 연기 수업을 받을 수있었으며 연중 눈앞에서 펼쳐지는 서커스(줄타기, 저글링, 칼 삼키기, 코미디, 레슬링, 개미놀음)를 보며 그저 경탄할 수도 있었다. 제르네는 항저우에서 "대혼란이 거듭된다"고 했는데, 이 표현을 보자마자 아테네의 북적거리는 아고라가 떠올랐다. 여기서 어떤 패턴이 감지된다. 천재의 장소에는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이 아니 혼란까지도 필요하다. - P115
시후(西湖)는 항저우의 천재성과 무슨 관계일까? 앞에서 말했듯, 천재성은 대체로 도시적 현상이지만 창조적인 사람들이 자연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위대한 도시들이 결코 자연과 완전히 단절하지 않는 이유는 그래서다. 그런 도시들은 자연을 향유할기회를 언제나 남겨둔다. 뉴욕에는 센트럴파크가 빈에는 비너발트가 도쿄에는 신주쿠 교엔이 있다. 자연과 완전히 분리된 도시는 죽은 장소이며, 그다지 창조적인 장소가 못 된다. - P118
우리 서양인은 창의성을 창조적 천재성은 말할 것도 없고-선택된 소수의 영역으로 여긴다. 하지만 모든 문화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인류학자 마저리 쇼스탁은 칼라하리사막의 쿵족을 인터뷰했는데, 이들은 구슬꿰기, 이야기, 음악으로 유명하다. 부족원 중에서 가장 창의적인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전부 다요." 원시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창조적 활동에 종사한다. 반면에 더 발전한 사회에서는 창조성이 뭔가 특별한 것으로 바뀌어 점점 더 소수의 선택지가 되어간다. 아시아의 문화, 특히 중국과 한국 같은 유교 문화는 창의성에대한 접근방식이 서양과 사뭇 다르다. 서양인은 창의성의 결과에만 관심을 두는 경향이 있다. 무엇을 만들어내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에 반해 아시아인은 과정을 중시해 목적지 못지않게 여정에도 관심을 둔다. 또한 서구 문화는 창의성을 참신함과 동일시한다. 창의적인 것이라면 뭐든지 마땅히 전통과 근본적으로 결별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중국 같은 유교 국가는 그렇지 않다. 중국인은 발명이나 아이디어의 참신함보다는 그 쓰임새를 훨씬 더 중시한다. "새롭고 놀라운 혁신인가?"가 아니라 "쓸모 있는가?"라고 묻는다. 중국에서 창의성이란 전통으로부터의 단절이 아니라 전통의 계승, 전통으로의회귀다. - P138
왜 이토록 접근법이 다른 걸까? 서양인의 창의성 개념과 천재성 개념은 창조 신화에 깊이 뿌리를 둔다. 이 신화들은 무지막지한 힘을 발휘한다.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이 신화를 내면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은 종교인에게나 비종교인에게나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에서는 엑스 니힐로ex nihilo, 즉 무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신의천지 창조가 그러했고 우리 인간의 목표도 그러하다. 이런 세계관에서 예술가(또는 건축가나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예전에 없던 것을 난데없이 만들어내는 존재다. 창조적 행위는 시간 자체와 마찬가지로 직선적이다. 창작자는 X에서 출발하여 수많은 커피를 마시며꾸준히 앞으로 나아가 Y에 이른다. 하지만 중국 우주론에서 우주, 즉 道에는 시작도 창조주도 없다. 언제나 무언가가 있었으며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것이다. 따라서 창조적 행위는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중국의 방식은 ‘크레아티오인 시투creatio insitu‘, 즉 맥락 안에서의 창조다. 공자 스스로도 "나는 알렸을 뿐 만든 것은 아닐지니"라며 새로운 것과 별난것을 멀리하여 "이단"의 덫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했다. - P139
창의성을 북돋우는 최선의 방법은 모든 걸림돌을 없애는 것이라고들 말하지만, 그 반대라는 증거가 얼마든지 있다. 심리학자로널드 핑커는 피실험자들에게 미술 과제물을 만들도록 했다. 몇 사람에게는 재료를 다양하게 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재료를 적게줬다. 그랬더니 선택폭이 가장 적었던 사람들이 가장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아니면 서양과 중국의 회화 양식 차이를 생각해보라. 중국화는 ‘수직적‘이다. 그림의 요소 중 어떤 것은 꼭 들어가야하지만 어떤 것은 미술가의 재량에 맡겨진다. 이에 반해 서양화는 ‘수평적‘이어서 모든 방향의 참신함이 허용된다. 중국 화가는 서양화가보다 큰 제약을 받기 때문에, 이들의 창의성은 더 좁은 공간에서 발휘된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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