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키터리지 선생님이 어느 날 했던 그 말이 늘 기억에 남아 있어. 배고픔을 두려워하지 마라. 배고픔을 두려워하면 다른사람들과 똑같은 얼간이가 될 뿐이다."
위니는 줄리가 새끼손가락에 한 번 더 매니큐어를 찬찬히 바르는 걸 지켜보며 기다렸다. "아무도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지"
줄리가 손톱을 들어올려 쳐다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었는데?" 위니가 물었다.
"그냥 말 그대로야. 내생각에 처음엔 우리 대부분이 키터리지 선생님이 음식에 대해서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 우리는 기껏해야 7학년-아, 미안, 꼬맹이 - 이었으니까. 하지만시간이 지나니까 좀더 이해할 것 같아." - P352

달에 건설한 도시 같았다. 도시는 그때도 지금도 끌리지 않았지만, 비행기 두 대가 트윈 타워를 뚫고 들어갔을 때 올리브는 침실에 앉아서 아기처럼 울었다. 나라 때문이라기보다는 도시 때문이었다. 뉴욕이라는 도시는 갑자기 낯설고 딱딱한 곳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의연한, 한 무리의 연약한 유치원 아이들이 된 것만 같았다. 창문에서 뛰어내리다니. 그 광경에 올리브는 가슴이 아팠고, 검은 머리의 비행기 납치범들이 조용히 그들만의대의에 취해 캐나다에서 내려온 다음, 그 무시무시한 파괴를 자행하기 위해 포틀랜드 공항을 뚜벅뚜벅 통과했다는 걸 알고는속으로 치를 떨었다. (그날 아침 올리브가 차를 타고 가며 그들곁을 지나쳤을지 누가 안단 말인가?) - P359

"엄마한테 와달라고 했죠. 크리스토퍼가 천천히 입을 열었드려보았다.
다. "엄마를 보고 싶어서요. 앤이 엄마를 만나고 싶어해서요. 우린 그저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따름이에요. 좀 달라졌기를,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엄마, 전엄마의 그 극도로 변덕스러운 기분에 대해 책임지지 않을 거예요. 뭔가 속상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면 말씀을 하셔야죠. 그래야대화를 하죠."
"젠장, 넌 평생 입을 다물고 살았어. 왜 이제야 갑자기 말을시작하는 건데?" 갑자기 깨달았다. 이게 다 정신과 의사 때문이었다. 그럼 그렇지. 그 멍청한 아서라는 작자, 올리브는 조심해야 했다. 이 모든 게 치료 모임에서 다 재연될 테니. 엄마의 그 극도로 변덕스러운 기분. 그것은 크리스토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세상에, 그들은 벌써 올리브에 대해 샅샅이 논의를 했던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너 무슨 소리하는 거야? 내 극도로 변덕스러운 기분이라니. 대체 그게 무슨우라질 소리야?" - P411

놀랍게도, 아들은 조리대에서 더러운 접시를 모아 식기세척기에 넣기 시작했다.
"이렇게 날 그냥 쫓아낼 셈이냐?" 올리브가 말했다. 심장이방망이질을 하며 사납게 날뛰었다.
"봤죠, 이게 극명한 예잖아요." 크리스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차분하게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넣으면서, "엄마가 가고 싶다면서 내가 엄마를 쫓아낸다고 비난하잖아요. 과거에는 그런 말을들으면 기분이 처참해졌는데 이젠 그러지 않을 거예요. 제가 그런게 아니니까요. 엄마의 그런 행동에는 대응이 따른다는 걸 엄마는 깨닫지 못하시는 거 같아요." - P413

레베키는 개수대 밑에서 바비큐 라이터를 꺼내 배낭에 집어넣는 자신을 지켜보았다. 속옷 서랍에서 엄마로부터 온 오래된엽서들을 조용히 꺼내는 자신을 지켜보았다. 부엌에서 엽서를반으로 찢었다. 엽서를 찢을 때 레베카에게서 조용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찢은 엽서를 배낭에 넣었다. 그러고는 데이비드를 위해 산 셔츠를 가방에 집어넣고, 그 광고가 들어 있던 잠지도 넣었다. 그리고 담배 라이터를 외투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복도를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오는데 머릿속에서 아까 들은말이 되풀이되었다.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 권리가 있다. 권리가 있다. 권리가 있다.
체포되어도 좋으리라. 그들이 그렇게 말해준다면. - P448

올리브는 이틀을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썼다. "내 아들도 날 미워해요."
한 시간 후 답장이 왔다. "그래서 죽도록 괴롭소? 난 죽도록괴로워요, 딸이 날 미워해서. 하지만 나도 그게 내 잘못이라는건 알아요."
올리브는 당장 답장을 썼다. "나도 죽도록 괴로워요. 죽음보다더, 분명 내 잘못일 텐데, 난 이해를 못하겠어요. 같은 일도 아이가 기억하는 것하고 내가 기억하는 게 달라요. 아들은 아서라는정신과 의사를 만나는데, 내생각엔 아서가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것 같아요." 그리고 오랫동안 가만히 있다가 ‘보내기‘
를 누르곤 바로 다시 썼다. "추신. 하지만 분명 내잘못이기도할 거예요. 내가 절대로 사과를 하지 않는다고 헨리가 말한 적이있는데, 어쩌면 헨리 말이 맞을 거예요."  - P479

너무 슬퍼서 올리브는 눈을 감았다.
젊은 사람들은 모르지. 이 남자의 곁에 누우며, 그의 손을 팔을 어깨에 느끼며 올리브는 생각했다. 오, 젊은 사람들은 정말로모른다. 그들은 이 커다랗고 늙고 주름진 몸뚱이들이 젊고 탱탱한 그들의 몸만큼이나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내차례가 돌아올 타르트 접시처럼 사랑을 경솔하게 내던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모른다. 아니, 사랑이 눈앞에 있다면 당신은 선택하거나,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녀의 타르트 접시는 헨리의선량함으로 가득했고 그것이 부담스러워 올리브가 가끔 부스러기를 털어냈다면, 그건 그녀가 알아야 할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지 못하는 새 하루하루를 낭비했다는 것을. - P483

그녀는 눈을 감았다. 지친 그녀는 파도를 느꼈다. 감사의, 그리고 회한의 파도를 그리고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햇살 좋은 이방을 햇살이 어루만진 벽을 바깥의 베이베리를 그것이 그녀를힘들게 했다. 세상이 그러나 올리브는 아직 세상을 등지고 싶지않았다. - P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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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도 잘 아시겠지만, 과학은 이런 식으로 굴러가지 않습니다.
김 선생님도 지적하셨듯이 과학은 기본적으로 집단적인 작업이지않습니까? 어떤 주제를 연구하는 일군의 과학자 공동체가 있고, 그사람들이 공유하는 문제, 해답, 풀이 방식이 존재합니다. 이건 꼭 과학 철학자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죠. 그래서 만일 어떤 이들이,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기존의 과학 이론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면, 기본적인 규칙을 잘 지켜서 해야합니다.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믿고 받아들이는 진화론을 일개 대학원생이 하루 이틀 공부하고 대본을 달달 외워 선량한 교인들을 상대로 "아멘 할렐루야‘를이끌어내는 행위는 열성적 종교 행위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과학자들이 대중들과 소통하는 정상적인 방식은 아닙니다. - P379

과학에 대해 사람들이 자주 혼동하는 몇 가지가 있는 듯해요. 과학의 본질은 ‘내용‘이 아니라 ‘절차‘ 또는 ‘방법‘인데, 사람들은 자꾸 내용에 대해서만 물어요. "공룡과 인간이 같은 시대에 살았다는 주장이 과학이냐?", "외계인이 사람을 납치해 간다는 주장이 과학이냐?", "B형 남자는 성질이 더럽다는데 그게 과학적 사실이냐?"
등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 어떤 내용을담은 주장도 원칙적으로 제지당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이 모든 것이 과학이라고 해도 경찰에 연행되지는 않지요. (갈릴레오 때까지만 해도로마 가톨릭 교리에 반하는 주장을 하면 끌려가기도 하고 심지어 화형도 당했으니까 세상 많이 좋아진 셈이지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주장들이 과학자 공동체의 인정을 받지는 못합니다. 과학자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런 주장들이과학적 절차나 방법을 거쳐서 나온 것인가 하는 것이죠. 누구나 참신하고 엉뚱한 주장을 할 수는 있겠지만, 과학자 공동체는 그 주장의 내용보다 그 주장이 나온 절차를 문제 삼습니다. 물론 그 절차에대해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겠죠. 20세기 과학 철학의 역사 속에 등장한 귀납주의, 가설 연역주의, 반증주의, 패러다임 이론 등은바로 그 절차에 관한 논쟁의 결과물들입니다. - P381

김 선생님도 지적하셨듯이, ‘지적설계론‘라는 용어 자체는 1989년에 사상과 윤리 재단이 출간한 「판다와 사람에 관하여』에 처음 공식적으로 등장합니다. 이 책은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용으로 씌어졌는데, 「창세기」의 구절들을 직접적으로 인용하는 창조과학의 방식과는 달리, 성서를 참조하지 않으면서 ‘창조‘나 ‘창조론‘ 등의 용어들을 ‘지적 설계(ID)‘ 같은 탈기독교적 용어로 대체하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현명한 선택이었죠. 이 책의 저자들은 지적 설계론이 "생명의 다양한 형태들이 본래의 특성을 가진 상태에서 갑자기 지적 행위자(intelligent agent)에 의해 시작되었다."라고 주장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적인 행위자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공립 학교 교과서의 최소요건 중 하나 - "특정 종교의 확립에 기여해서는 안 된다." 를 만족시키려 했습니다. 이때부터 출판사는 여러 자원들을 동원해 교육위원회들이 이 책을 교과서로 택할 수 있도록 홍보와 로비를 펼치기시작합니다. - P393

서두가 길었습니다. 그럼 제가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을 비롯해창조 vs. 진화 논쟁을 어떻게 보는지 먼저 밝히죠. 우선 저는 기독교에는 진화론에 대한 입장이 거부에서 수용까지 다양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창조 vs. 진화 논쟁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죠.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 운동이 양자택일을강요하고 있죠. 이들은 본질적으로 과학 운동이 아닙니다. 과학계밖, 종교계 안에 있는 제 입장에서 봤을 때 이 운동은 뿌리도 동인因)도 기독교 신앙에 둔 종교 운동일 뿐입니다. 게다가 과학과 종교를동시에 왜곡하는 문제 많은 운동입니다. 잘못된 신앙 행태를 조장하고, 기독교의 핵심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죠. 저는 한국의 기독교계가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이 주는 미망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주장합니다. - P415

첫째,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이 오류이면 창조론은 저절로 정당성이 증명된다?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론 모두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아주 편향적인 흑백 논리에 빠져 있습니다. 갑이라는 이론이 특정한 사례를 해명하지 못한다면, 을이라는 이론이 옳다는 논리이죠. 진화론이 설명하지 못하니까창조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들은 종교와 과학이 하나의 링위에서 경쟁하고 있다고 보고, 과학에서 발견된 오류를 자신들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증거로 이해합니다.
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의 주장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제대로 된 과학 이론으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론 비판에 열을 올립니다.  - P418

둘째, 목회적인 차원에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 현장에서 보면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의 주장에 대해 대부분 교인들은 환영하고 안도합니다. 왜 그럴까요? 한국 교회가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의 주장을 제대로 평가를 할 능력이 부족한 것도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원인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과학에 대해 가지고있는 피해 의식과 두려움입니다. 과학이 이 시대의 사제가 된 이래,
종교는 열등한 것이고 신앙 지식은 유사 지식이라는 의식이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듣고 싶은 소리가 들립니다. "자,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이 진짜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신앙의 적인 진화론은 과학적으로 오류라고 증명되었습니다. 성서는 과학적으로도 사실입니다." 그동안 신앙을 왜소하게 만들었던 과학, 그것을 ‘과학자‘가 와서 그렇지 않다고 시원하게 반박하니 얼마나 신이 납니까? 우리의 신앙이 과학적으로도 확고한 기반을 가지고 있다고 기뻐합니다.
- P419

이런 까닭에 오늘날 신학계에는 유물론적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진화론을 가지고 씨름하는 신학자는 많지만, 지적 설계론을 가지고 기독교 신학을 전개하는 신학자는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애시당초 신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으니까요.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의논지를 따르면, 신은 역사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일회성 창조로 끝이 납니다. 신의 활동 여지를 아주 없애 버리죠. 활동을 멈춘 신은 더 이상 기독교의 신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희망의 근원은 창조과학이 말하듯이, 태초의 창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 역사가 열려 있다는 약속에 있죠. 이것을 신학적으로 ‘종말론적 개방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이 들어서는 순간 계속 창조와 궁극적 창조를 사고하는 기독교 신학은 중단됩니다.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의 주장이 함축하고 있는 이런 신학적인 문제 때문에, 그리고 기독교 신학을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저는 이들의 논의를 더 심각하게비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 P425

를 해김 선생님이나 장 선생님 모두 한국 교회는 왜 창조과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지 궁금해 하셨죠. "한국 교회에서 복음주의와근본주의의 경계가 모호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이런 말씀도 하셨죠. 복음주의와 근본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다소 정교한 논의가 필요한데, 그냥 간단히 말씀드리죠. (제가 대학원에서 개설한 과목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한국 교회에서 말하는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와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궁금해 하셨던, 한국 교회가 창조과학에 환호하는 이유를 금방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보수주의적 신앙과 창조과학의 주장 사이에 ‘선택적 친화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과학은 미국의 근본주의 흐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근본주의나 보수주의 성향의 교회에서 환영받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죠. 한마디로서로 잘 맞는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창조과학은 보수적인 교회나신앙인들이 ‘듣기 원하는 바로 그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한국 교회의 보수주의 성향을 생각하면, 문득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초기 한국 교회를 지배하던 신학이, 바로 20세기 초 근본주의 - 현대주의 논쟁을 경험한미국 교회를 보고 오히려 보수 반동으로 되돌아선 사람들과 선교사들에 의해 형성되었으니, 이런 결과는 당연하죠.
- P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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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을 공기는 아름다웠고, 땀에 젖은 건장하고 젊은 몸뚱이들은 다리에 진흙을 묻히고 공을 이마로 받으려고 온몸을 내던지곤 했다. 골이 들어갔을 때의 환호, 무릎을 꺾고 주저앉는 골키퍼 집으로 걸어가면서 헨리가 올리브의 손을 잡던 날들이 있었다. 이런 날들은 기억할 수 있었다. 중년의 그들 전성기의 그들. 그들은 그 순간을 조용히 기뻐할 줄 알았을까? 필시 그렇지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정작 인생을 살아갈 때는 그 소중함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올리브는 지금은 그 추억을 건강하고 순수한 것으로 간직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축구장에서의 그 순간들이 올리브가 지녔던 가장 순수한 추억들인지도모른다. 순수하지 않은 다른 추억들도 있었으니까. - P292

"그러니까, 헨리가 말은 알아들을 수 있나?" 몇 분 후에 몰리가 물었다.
올리브에게 이 말은 누가 바닷가재 부표를 휘둘러 가슴뼈를툭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올리브는 간단하게만 대답했다. "어떤 날은 내 생각엔 그런 거 같아." 거짓말을 해야 해서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올리브가 화난 것은 몰리의 질문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올리브는 지금 멍청하게 제 곁에 앉아 있는 이여자에게 말하고 싶었다. 지난주 퍽 따뜻했던 그날, 헨리에게 개를 데려갔고, 헨리를 주차장으로 데리고 나와 개가 헨리의 손을핥았던 일을.
- P299

그녀는 오늘 왜 여기에 왔던가? 헨리가 에드 보니의 장례식에 꼭 가보라고 했을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니, 그녀는 누군가의 깊은 슬픔을 보며 자신의 어두운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비쳐들기를 바라며 왔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로 가득한 오래된 집은그녀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 P310

사람들은 그럭저럭 살아낸다. 올리브는 생각한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올리브는 깊은 숨을 내쉬떠나무 의자에서 자세를 고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사실이아니기도 하니까. 불과 일 년 전 새 방의 굽도리 널에 필요한 치수를 재려고 무릎을 꿇고 자를 들고 엎드린 다음 그녀가 받아 적도록 수치를 불러주던 헨리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리고 일어서던 키 큰 헨리를, "됐어, 올리. 개들을 오줌 누이고 시내로 가자구." 그리고 차를 탔었지. 무슨 얘기를 했더라? 아아, 올리브는얼마나 기억하고 싶었던가. 그러나 기억할 수 없었던가. 시내로들어간 다음, 목재 가게에 갔다가 우유와 주스가 필요해서 들렀던 ‘숍 앤 세이브‘의 주차장에서 올리브는 차에 있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걸로 두 사람의 인생은 끝이었다. 헨리는 차에서나와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고, 다시는 집으로이어지는 자갈길을 걷지 못했고, 다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저 가끔씩 그 커다란 청록색 눈으로 병원 침대에서 올리브를 멀거니 바라볼 뿐. - P313

 헨리는 이렇게 말하겠지. "오, 그렇지 않아, 올리. 내겐당신이 예쁘기만 한걸." 그러나 헨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떤 날은 휠체어에 앉아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올리브는 매일차를 몰고 가서 그의 곁을 지킨다. 당신은 성녀야, 몰리 콜린스는 그렇게 말했다. 맙소사, 멍청한 여자 같으니. 그녀는 삶이 두려운 늙은 여자일 뿐이다. 요즘 올리브가 아는 거라곤 해가 떨어지면 잘 시간이라는 사실뿐이다. 사람들은 그럭저럭 살아낸다는그 말, 올리브는 확신하지 못한다. 거기에도 여전히 파도는 있지, 올리브는 생각한다. -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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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으로는 현대 과학을 부정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입장은 다시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뉩니다. 지구의 나이가 1만년 내외라고 믿는 ‘젊은 지구 창조론(Young Earth Creationism)‘은 진화생물학을 비롯한 모든 현대 과학을 부정합니다. 반대로 우주의 나이가 현대 천체 물리학과 우주론이 말하듯 137억 년 정도 되었다고 여기는 오랜 지구 창조론 (Old Earth Creationism)‘이나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 Theory)‘은 지질학과 천문학, 물리학 등 현대 과학의성과를 전부 수용하지만 오직 진화론만을 부정합니다. 이들은 종 안에서 변이가 발생하는 것을 ‘소진화(小進化)‘로,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새로운 종이 만들어지는 것을 ‘대진화(大進化)‘로 규정하면서 진화를 세분합니다. 그리고 소진화는 받아들이지만 대진화는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이런 템플턴 재단의 지원에 대해 종교계는 상당히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과학자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죠. 상당수의 과학자들이 이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반면, 장 선생님께서 편지에 쓴 윌슨과 데닛의 언급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과학계의 사람들은 그 엄청난 상금 뒤에 숨어 있는 의도를 살짝 불순하게 보죠.
저는 템플턴 재단의 시도가 돈의 힘으로 학문 분야를 새롭게 확립한 근대 이후 최초의 사례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들의 지원이 종교를 긍정적으로 조명하는 데 집중하는 것에 대한 평가는 일단 접어두더라도, 자본이 지식 시장을 의도적으로 재편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는 우려를 표합니다. 자본에 의한 지식 생산은참여자의 의지와 별개로 늘 자본 공급자의 의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죠. 결국 지식 담론의 왜곡 가능성이나, 지성의 자율성과비판성이 침해받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죠. - P260

지동설이 기독교가 마주친 제1의 파도였다면, 진화론은 제2의 파도, 정신분석학은 제3의 파도였고, 인지과학과 뇌과학은 이제 기독교가 마주치는 제4의 파도가 될 것입니다. 지동설이 인간이 사는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서 끌어내리고, 진화론이 인류를 생명 세계의 정점에서 쫓아내고, 정신분석학이 무의식을 통해 인간의 정신과 의식을 다소 위축시켰죠. 제생각에 아마도 이 네번째 파도가 쓰나미 같은 가장 큰 충격을 가져올 겁니다. 제4의 파도는 신에 대한 믿음이나종교적 경험을 자연주의적 방식으로 설명하면서 기독교의 핵인 신과 영혼 등을 해체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죠. 상당수의 신학자들이이 분야의 작업을 주목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기독교의 과학 논의에서 중심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한논의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 P266

이렇게 볼 때, 유신론적 과학의 전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엄청난 능력과 지성을 가진 초월적이며 인격적인 존재인 신이 특정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설계하고 창조했으며, 인간이 등장할때까지 이 세계의 형성 과정에 직접 개입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의 설계와 창조의 개념을 과학에 적용하는 게 정당하다는것입니다.
유신론적 과학의 이런 전제는 다음과 같은 신앙 태도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가설을 세우고 시험하고, 어떤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거나, 혹은 다양한 가설들의 개연성을 평가할 때, 자신이 아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지식에는당연히 신학적 진술도 포함됩니다. 따라서 창조론자에게 성서는 과학 텍스트이며, 성서의 진술은 ‘참 과학(true science)‘입니다. - P274

호트에 따르면, 종교와 과학 사이의 갈등은 양쪽 모두 우주와 그안에 있는 생명을 오직 한 차원에서만 이해하려는 문자주의적 독법을 강요할 때 발생합니다. 그는 창조 vs. 진화 논쟁도 바로 두 문자주의의 대립으로 봅니다. 이 논쟁 양극단에 있는 두 문자주의가 바로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라는 ‘성서적 문자주의‘와 진화 생물학이라는 ‘우주적 문자주의‘입니다. 두 문자주의 모두 우주와 생명을 펼면적으로 이해하는 1차원적 독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각기 ‘교리주의적 환원‘과 ‘물리주의적 환원‘을 그 본질로 하고 있기때문입니다. 저는 교리주의적 환원을 특징으로 하는 독법을 ‘종교적문자주의‘라고, 물리주의적 환원을 속성으로 하는 독법을 ‘과학적문자주의‘라고 부릅니다.
먼저 호트가 ‘성서적 문자주의‘라고 부르는 종교적 문자주의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만 하죠. 종교적 문자주의는 자연에 대한 지식을문자주의적 성서 이해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특정한 신학적 이해로환원시킵니다. 이것은 자연의 겉모습에서 나타나는 설계에만 관심을 갖고, 그 이면으로 뚫고 들어가 생명의 기나긴 투쟁이라는 복잡다단한 진화 이야기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종교적 사고일 뿐입니다. 이런 신학적 독법은 다윈이 그린 생명에 대한 큰 그림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호트는신앙심 깊은 기독교인들이 취하는 반(反)다원주의적 행보는 자연의깊이로부터 도망치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합니다. - P278

 하지만 거다 러너 (Gerda Lerner) 같은 페미니스트 역사학자는 가부장제가 종교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가부장제는 무엇보다 권력과 소유의 분배를 둘러싼 성차 정치의산물이라고 봅니다. 물론 역사 속에서 가부장제에 종교가 깊이 연루되기도 했습니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원인이 아닌 결과였을 뿐이죠.
게다가 역사 속에서 종교는 가부장제의 보루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타파에 현저히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중세 마녀 사냥이 가부장제와 종교적 광기의 끔찍한 결탁을 보여 준다면, 유대교의가부장적 관습을 어기고 여성들도 제자로 받아들였던 예수는 종교가 어떻게 양성 평등의 전망을 열어 주었는지를 보여 주죠. 가부절제는 거대한 사회적 제도이고, 종교는 그 속에서 제도를 강화하게파열시키는 하나의 요소일 뿐입니다. - P308

불교와 기독교가 대폭발 이론을 비롯한 우주론들을 채택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이렇게 서로 사뭇 다릅니다. 이는 불교와 기독교의 실재판과 시간관, 그리고 궁극적 실재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시간이든 공간이든 물질이든 실재하는 것은 없으며 다만 공(空), 즉 무한히 서로 얽힌 상호연기(相互緣起)의 관계만이 있다고 봅니다. 반대로 기독교는 비록 고전적 실재론에서 비판적 실재론으로 돌아서기는 했지만, 여전히 시간, 공간, 물질의 실재성을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또 불교는 우주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는 순환적 시간관을갖고 있는 반면, 기독교는 우주는 단 한 번만 생성하고 소멸한다는직선적 시간관을 갖고 있죠. 그리고 이 모든 차이는 결국 모든 존재의 근본인 궁극적 실재를 비인격적인 우주적 원리로 보느냐 아니면인격적인 신으로 보느냐 하는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이기도 하죠. 불교는 궁극적 실재를 비인격적으로 보기에 창조자 따위를 인정하지않으며 따라서 창조자의 의도나 목적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반면에기독교는 궁극적 실재를 인격적 신으로 보기 때문에 창조주의 창조의도와 목적이 무엇인지, 창조주가 우연으로 가득한 이토록 무심한우주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하는 문제들과 씨름합니다.
- P334

 1953년에 미국의 생화학자 스탠리 밀러(Stanley L. Miller, 1930~2007년)와 그 스승인 해럴드 유리(Harold C. Urey, 1893~1981년)가 원시 지구의 대기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무기물이 들어 있는 플라스크 속에서 유기물을 합성해 낸 실험. 생명의 기원 문제 자체를 해결한 건 아니었지만, 생명이 무기물로부터 저절로 생겨날 수 있는 가능성을 입증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창조과학자들은 이 실험은 단지 특정 조건에서 유기물을 합성한 것일 뿐,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는 바가 없다고 비판한다. -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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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종교적‘이라는 용어 자체에도 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적‘이라는 표현은 대개 신성함, 근원적 깊이, 존재 자체……… 이런 것들을 망라하는 포괄적 개념으로 쓰이죠. 하지만 ‘종교‘라는 용어가 실제로는 특정 전통으로 구체화된 제도 종교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오해를 사기 십상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마치 종교적 신앙을 고백한 것처럼 오해를 받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하지만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아인슈타인은 다만 스스로 ‘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종교인들을 향해, 넓은 의미에서 보면 자신도어느 종교인들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종교적일 수 있다고 말한것뿐입니다. 아마 아인슈타인은 ‘종교적‘이라는 표현에 그리 만족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인간과 과학을 한없이 겸손하게 만드는 자연의위대한 신비는 ‘종교적‘이라는 표현으로도 다 담아내기 힘들 정도로 깊기 때문이죠. - P180

제 생각에 그 역사적 맥락이란 곧 우리가 말하는 ‘과학‘은 어디까지나 ‘서구 근대 과학‘의 수입품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나라 같은비서구 사회에서 근대 과학은 처음부터 서구의 팽창과 궤적을 같이해 왔습니다. 근대 과학은 비서구 세계가 서구적 근대성 모형에 따라 대대적인 근대화와 서구화를 겪기 시작하면서 도입된 것이죠. 물론 시대와 지역을 넘어서는 과학의 보편성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과학을 둘러싼 담론들이 특수한 역사적 맥락을 지닌다는 점도 역시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의 경우 종교와 과학 논의에서 유독 기독교가 두드러진 역할을 하는 것은 기독교와 근대 과학이 서구의 근대성과 더불어 세계로 확장되어 온 역사적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⅕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롭게 형성되던 근대라는 무대에서가장 유리한 입지를 선점한 것은 바로 서구 종교인 기독교였기 때문이죠. - P193

다만 한 가지만 짚어 두도록 하겠습니다. 가만히 보시면 제가 제시한 기독교 이외 종교들이 과학을 대하는 유형들에서 오늘날의 종교와 과학 양쪽 논객들이 제시하는 관계 유형과 비교해 특정한 관계유형이 있거나 없거나 하는 것 등의 차이가 보이실 겁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를 중심으로 종교와과학의 관계 유형을 정리한 대표적 학자인 이언 바버는 갈등, 독립, 대화, 통합의 네 가지 관계 유형을 제시하는데요. 제가 제시한 기독교 이외 종교들의 과학과의 관계 유형에서는 종교와 과학의 적극적인 만남을 시도하는 대화나 통합 유형이없습니다.
그 이유는 비교적 간단합니다. 대화와 통합이란 충분히 긴 시간동안 많은 논의가 축적된 후에야 비로소 시도될 수 있는 것인데, 서구에서 오래 진행되어 온 논의가 있었기에 한국의 기독교는 비교적충분히 준비된 토대 위에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었지만, 다른 종교들은 대개 모든 논의를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논의가 이제야막 싹트던 단계에 불과했기에 대화와 통합은 아직 시기상조였던 셈이죠. 물론 오늘날의 종교, 특히 불교 같은 종교는 과학과의 만남에아주 적극적입니다. 불교도들은 과학과의 대화와 통합을 추구하는다양한 논의를 국내외에서 펼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불교 등 일부 종교의 일이고, 또 비교적 최근의 일일 뿐, 적어도 근대 이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대부분의 종교들에서는 대화와 통합을 위한 시도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 P198

두 분 선생님은 2006년에 출간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과, 데닛의 ‘주문 깨기』, 그리고 윌슨의 『생명의 편지」까지 보셨으니 이들의 대화가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최근 1~2년은 진화론의 대가들이 저마다 종교에 대한 책들을 출간했던 아주 흥미로운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사실은 종교의 기원 · 유지 · 기능에 대해 모두 생각이 조금씩다르다는 점일 겁니다. 이론적으로 볼 때 이 차이 중 어떤 것은 아주미묘해서 전문가들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기도 하죠.
윌슨이 데닛의 말을 이렇게 받습니다. "저는 리처드(도킨스), 당신(테닛), 그리고 나의 차이를 이렇게 규정하고 싶소. 리처드는 종교와전쟁을 벌이는 전사이고, 당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를 재고하게만드는 영리한 전략가이며, 나는 생태 문제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풀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실용주의자이죠." 이런 성격 규정이 맘에 들었는지 데닛이 맞장구를 치더군요. "이 얼마나 절묘한 분업입니까!" - P232

 휘그적 역사 해석은 원래 영국의 역사를 해석하는 역사관으로, 영국의 역사를 자유를 위한 영국인들의 위대한 투쟁사로 그린다. 본디 자유로운 공동체였던 영국이 노르만족의 정복 이후 그 자유를 잃었다가 17~19세기의 혁명과 투쟁과 자유주의적 개혁을 통해 모범적인 의회 민주주의를 실현한 자유 국가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형성된 과학적 사고가 기독교의 영향으로 몰락한 후, 1000년 후 과학 혁명과 과학자들의 투쟁과 연구를 통해 자유로운 연구가 가능한 현대 과학 체계가 만들어졌다는 칼 세이건과 에드워드 윌슨 같은 일부 과학자들의 관점 역시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한 휘그적 역사 해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대표 저술인 ‘코스모스』나 『통섭』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 P249

서구 사회에서 근대 이전까지 과학은 자율성을 지녔지만, 종속되어 있었죠. 당시에는 오늘처럼 과학(Science)이란 이름에 대응하는 지적 분야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학문적 방범도 오늘날의 과학적 방법과도 달랐습니다. 또한 비록 의학이나 수학과 같은 근대 과학의 하위 분야에 해당하는 분야가 몇 개 있었지만, 물리학, 화학, 지질학, 생물학에 해당하는 분야로 분화되지도않았죠. 모두 ‘자연 철학 분야에 더 넓게는 철학에 속해 있었습니다. 현대 물리학자들이 위대한 과학자라고 칭송하는 아이작 뉴턴역시 자신을 자연 철학자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의 대표작인 ‘프린키피아』의 원제 역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Principia Mathematica)』였죠.
기독교가 지배 종교였던 서구에서 자연 철학은 오랫동안 기독교의 진리를 보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기독교 사제들과 신학자들 그리고 교인들에게 자연에 대한 탐구는, 즉 오늘날의 과학자들이하고 있는 작업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자연에 대한 탐구가 신이 만든 세계를 이해하는 길이었기 때문이죠.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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