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분도 잘 아시겠지만, 과학은 이런 식으로 굴러가지 않습니다.
김 선생님도 지적하셨듯이 과학은 기본적으로 집단적인 작업이지않습니까? 어떤 주제를 연구하는 일군의 과학자 공동체가 있고, 그사람들이 공유하는 문제, 해답, 풀이 방식이 존재합니다. 이건 꼭 과학 철학자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죠. 그래서 만일 어떤 이들이,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기존의 과학 이론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면, 기본적인 규칙을 잘 지켜서 해야합니다.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믿고 받아들이는 진화론을 일개 대학원생이 하루 이틀 공부하고 대본을 달달 외워 선량한 교인들을 상대로 "아멘 할렐루야‘를이끌어내는 행위는 열성적 종교 행위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과학자들이 대중들과 소통하는 정상적인 방식은 아닙니다. - P379

과학에 대해 사람들이 자주 혼동하는 몇 가지가 있는 듯해요. 과학의 본질은 ‘내용‘이 아니라 ‘절차‘ 또는 ‘방법‘인데, 사람들은 자꾸 내용에 대해서만 물어요. "공룡과 인간이 같은 시대에 살았다는 주장이 과학이냐?", "외계인이 사람을 납치해 간다는 주장이 과학이냐?", "B형 남자는 성질이 더럽다는데 그게 과학적 사실이냐?"
등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 어떤 내용을담은 주장도 원칙적으로 제지당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이 모든 것이 과학이라고 해도 경찰에 연행되지는 않지요. (갈릴레오 때까지만 해도로마 가톨릭 교리에 반하는 주장을 하면 끌려가기도 하고 심지어 화형도 당했으니까 세상 많이 좋아진 셈이지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주장들이 과학자 공동체의 인정을 받지는 못합니다. 과학자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런 주장들이과학적 절차나 방법을 거쳐서 나온 것인가 하는 것이죠. 누구나 참신하고 엉뚱한 주장을 할 수는 있겠지만, 과학자 공동체는 그 주장의 내용보다 그 주장이 나온 절차를 문제 삼습니다. 물론 그 절차에대해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겠죠. 20세기 과학 철학의 역사 속에 등장한 귀납주의, 가설 연역주의, 반증주의, 패러다임 이론 등은바로 그 절차에 관한 논쟁의 결과물들입니다. - P381

김 선생님도 지적하셨듯이, ‘지적설계론‘라는 용어 자체는 1989년에 사상과 윤리 재단이 출간한 「판다와 사람에 관하여』에 처음 공식적으로 등장합니다. 이 책은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용으로 씌어졌는데, 「창세기」의 구절들을 직접적으로 인용하는 창조과학의 방식과는 달리, 성서를 참조하지 않으면서 ‘창조‘나 ‘창조론‘ 등의 용어들을 ‘지적 설계(ID)‘ 같은 탈기독교적 용어로 대체하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현명한 선택이었죠. 이 책의 저자들은 지적 설계론이 "생명의 다양한 형태들이 본래의 특성을 가진 상태에서 갑자기 지적 행위자(intelligent agent)에 의해 시작되었다."라고 주장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적인 행위자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공립 학교 교과서의 최소요건 중 하나 - "특정 종교의 확립에 기여해서는 안 된다." 를 만족시키려 했습니다. 이때부터 출판사는 여러 자원들을 동원해 교육위원회들이 이 책을 교과서로 택할 수 있도록 홍보와 로비를 펼치기시작합니다. - P393

서두가 길었습니다. 그럼 제가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을 비롯해창조 vs. 진화 논쟁을 어떻게 보는지 먼저 밝히죠. 우선 저는 기독교에는 진화론에 대한 입장이 거부에서 수용까지 다양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창조 vs. 진화 논쟁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죠.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 운동이 양자택일을강요하고 있죠. 이들은 본질적으로 과학 운동이 아닙니다. 과학계밖, 종교계 안에 있는 제 입장에서 봤을 때 이 운동은 뿌리도 동인因)도 기독교 신앙에 둔 종교 운동일 뿐입니다. 게다가 과학과 종교를동시에 왜곡하는 문제 많은 운동입니다. 잘못된 신앙 행태를 조장하고, 기독교의 핵심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죠. 저는 한국의 기독교계가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이 주는 미망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주장합니다. - P415

첫째,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이 오류이면 창조론은 저절로 정당성이 증명된다?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론 모두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아주 편향적인 흑백 논리에 빠져 있습니다. 갑이라는 이론이 특정한 사례를 해명하지 못한다면, 을이라는 이론이 옳다는 논리이죠. 진화론이 설명하지 못하니까창조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들은 종교와 과학이 하나의 링위에서 경쟁하고 있다고 보고, 과학에서 발견된 오류를 자신들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증거로 이해합니다.
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의 주장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제대로 된 과학 이론으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론 비판에 열을 올립니다.  - P418

둘째, 목회적인 차원에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 현장에서 보면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의 주장에 대해 대부분 교인들은 환영하고 안도합니다. 왜 그럴까요? 한국 교회가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의 주장을 제대로 평가를 할 능력이 부족한 것도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원인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과학에 대해 가지고있는 피해 의식과 두려움입니다. 과학이 이 시대의 사제가 된 이래,
종교는 열등한 것이고 신앙 지식은 유사 지식이라는 의식이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듣고 싶은 소리가 들립니다. "자,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이 진짜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신앙의 적인 진화론은 과학적으로 오류라고 증명되었습니다. 성서는 과학적으로도 사실입니다." 그동안 신앙을 왜소하게 만들었던 과학, 그것을 ‘과학자‘가 와서 그렇지 않다고 시원하게 반박하니 얼마나 신이 납니까? 우리의 신앙이 과학적으로도 확고한 기반을 가지고 있다고 기뻐합니다.
- P419

이런 까닭에 오늘날 신학계에는 유물론적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진화론을 가지고 씨름하는 신학자는 많지만, 지적 설계론을 가지고 기독교 신학을 전개하는 신학자는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애시당초 신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으니까요.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의논지를 따르면, 신은 역사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일회성 창조로 끝이 납니다. 신의 활동 여지를 아주 없애 버리죠. 활동을 멈춘 신은 더 이상 기독교의 신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희망의 근원은 창조과학이 말하듯이, 태초의 창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 역사가 열려 있다는 약속에 있죠. 이것을 신학적으로 ‘종말론적 개방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이 들어서는 순간 계속 창조와 궁극적 창조를 사고하는 기독교 신학은 중단됩니다.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의 주장이 함축하고 있는 이런 신학적인 문제 때문에, 그리고 기독교 신학을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저는 이들의 논의를 더 심각하게비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 P425

를 해김 선생님이나 장 선생님 모두 한국 교회는 왜 창조과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지 궁금해 하셨죠. "한국 교회에서 복음주의와근본주의의 경계가 모호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이런 말씀도 하셨죠. 복음주의와 근본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다소 정교한 논의가 필요한데, 그냥 간단히 말씀드리죠. (제가 대학원에서 개설한 과목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한국 교회에서 말하는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와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궁금해 하셨던, 한국 교회가 창조과학에 환호하는 이유를 금방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보수주의적 신앙과 창조과학의 주장 사이에 ‘선택적 친화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과학은 미국의 근본주의 흐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근본주의나 보수주의 성향의 교회에서 환영받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죠. 한마디로서로 잘 맞는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창조과학은 보수적인 교회나신앙인들이 ‘듣기 원하는 바로 그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한국 교회의 보수주의 성향을 생각하면, 문득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초기 한국 교회를 지배하던 신학이, 바로 20세기 초 근본주의 - 현대주의 논쟁을 경험한미국 교회를 보고 오히려 보수 반동으로 되돌아선 사람들과 선교사들에 의해 형성되었으니, 이런 결과는 당연하죠.
- P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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