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한편으로는 현대 과학을 부정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입장은 다시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뉩니다. 지구의 나이가 1만년 내외라고 믿는 ‘젊은 지구 창조론(Young Earth Creationism)‘은 진화생물학을 비롯한 모든 현대 과학을 부정합니다. 반대로 우주의 나이가 현대 천체 물리학과 우주론이 말하듯 137억 년 정도 되었다고 여기는 오랜 지구 창조론 (Old Earth Creationism)‘이나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 Theory)‘은 지질학과 천문학, 물리학 등 현대 과학의성과를 전부 수용하지만 오직 진화론만을 부정합니다. 이들은 종 안에서 변이가 발생하는 것을 ‘소진화(小進化)‘로,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새로운 종이 만들어지는 것을 ‘대진화(大進化)‘로 규정하면서 진화를 세분합니다. 그리고 소진화는 받아들이지만 대진화는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이런 템플턴 재단의 지원에 대해 종교계는 상당히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과학자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죠. 상당수의 과학자들이 이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반면, 장 선생님께서 편지에 쓴 윌슨과 데닛의 언급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과학계의 사람들은 그 엄청난 상금 뒤에 숨어 있는 의도를 살짝 불순하게 보죠.
저는 템플턴 재단의 시도가 돈의 힘으로 학문 분야를 새롭게 확립한 근대 이후 최초의 사례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들의 지원이 종교를 긍정적으로 조명하는 데 집중하는 것에 대한 평가는 일단 접어두더라도, 자본이 지식 시장을 의도적으로 재편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는 우려를 표합니다. 자본에 의한 지식 생산은참여자의 의지와 별개로 늘 자본 공급자의 의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죠. 결국 지식 담론의 왜곡 가능성이나, 지성의 자율성과비판성이 침해받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죠. - P260

지동설이 기독교가 마주친 제1의 파도였다면, 진화론은 제2의 파도, 정신분석학은 제3의 파도였고, 인지과학과 뇌과학은 이제 기독교가 마주치는 제4의 파도가 될 것입니다. 지동설이 인간이 사는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서 끌어내리고, 진화론이 인류를 생명 세계의 정점에서 쫓아내고, 정신분석학이 무의식을 통해 인간의 정신과 의식을 다소 위축시켰죠. 제생각에 아마도 이 네번째 파도가 쓰나미 같은 가장 큰 충격을 가져올 겁니다. 제4의 파도는 신에 대한 믿음이나종교적 경험을 자연주의적 방식으로 설명하면서 기독교의 핵인 신과 영혼 등을 해체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죠. 상당수의 신학자들이이 분야의 작업을 주목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기독교의 과학 논의에서 중심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한논의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 P266

이렇게 볼 때, 유신론적 과학의 전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엄청난 능력과 지성을 가진 초월적이며 인격적인 존재인 신이 특정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설계하고 창조했으며, 인간이 등장할때까지 이 세계의 형성 과정에 직접 개입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의 설계와 창조의 개념을 과학에 적용하는 게 정당하다는것입니다.
유신론적 과학의 이런 전제는 다음과 같은 신앙 태도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가설을 세우고 시험하고, 어떤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거나, 혹은 다양한 가설들의 개연성을 평가할 때, 자신이 아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지식에는당연히 신학적 진술도 포함됩니다. 따라서 창조론자에게 성서는 과학 텍스트이며, 성서의 진술은 ‘참 과학(true science)‘입니다. - P274

호트에 따르면, 종교와 과학 사이의 갈등은 양쪽 모두 우주와 그안에 있는 생명을 오직 한 차원에서만 이해하려는 문자주의적 독법을 강요할 때 발생합니다. 그는 창조 vs. 진화 논쟁도 바로 두 문자주의의 대립으로 봅니다. 이 논쟁 양극단에 있는 두 문자주의가 바로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라는 ‘성서적 문자주의‘와 진화 생물학이라는 ‘우주적 문자주의‘입니다. 두 문자주의 모두 우주와 생명을 펼면적으로 이해하는 1차원적 독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각기 ‘교리주의적 환원‘과 ‘물리주의적 환원‘을 그 본질로 하고 있기때문입니다. 저는 교리주의적 환원을 특징으로 하는 독법을 ‘종교적문자주의‘라고, 물리주의적 환원을 속성으로 하는 독법을 ‘과학적문자주의‘라고 부릅니다.
먼저 호트가 ‘성서적 문자주의‘라고 부르는 종교적 문자주의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만 하죠. 종교적 문자주의는 자연에 대한 지식을문자주의적 성서 이해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특정한 신학적 이해로환원시킵니다. 이것은 자연의 겉모습에서 나타나는 설계에만 관심을 갖고, 그 이면으로 뚫고 들어가 생명의 기나긴 투쟁이라는 복잡다단한 진화 이야기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종교적 사고일 뿐입니다. 이런 신학적 독법은 다윈이 그린 생명에 대한 큰 그림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호트는신앙심 깊은 기독교인들이 취하는 반(反)다원주의적 행보는 자연의깊이로부터 도망치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합니다. - P278

 하지만 거다 러너 (Gerda Lerner) 같은 페미니스트 역사학자는 가부장제가 종교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가부장제는 무엇보다 권력과 소유의 분배를 둘러싼 성차 정치의산물이라고 봅니다. 물론 역사 속에서 가부장제에 종교가 깊이 연루되기도 했습니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원인이 아닌 결과였을 뿐이죠.
게다가 역사 속에서 종교는 가부장제의 보루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타파에 현저히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중세 마녀 사냥이 가부장제와 종교적 광기의 끔찍한 결탁을 보여 준다면, 유대교의가부장적 관습을 어기고 여성들도 제자로 받아들였던 예수는 종교가 어떻게 양성 평등의 전망을 열어 주었는지를 보여 주죠. 가부절제는 거대한 사회적 제도이고, 종교는 그 속에서 제도를 강화하게파열시키는 하나의 요소일 뿐입니다. - P308

불교와 기독교가 대폭발 이론을 비롯한 우주론들을 채택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이렇게 서로 사뭇 다릅니다. 이는 불교와 기독교의 실재판과 시간관, 그리고 궁극적 실재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시간이든 공간이든 물질이든 실재하는 것은 없으며 다만 공(空), 즉 무한히 서로 얽힌 상호연기(相互緣起)의 관계만이 있다고 봅니다. 반대로 기독교는 비록 고전적 실재론에서 비판적 실재론으로 돌아서기는 했지만, 여전히 시간, 공간, 물질의 실재성을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또 불교는 우주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는 순환적 시간관을갖고 있는 반면, 기독교는 우주는 단 한 번만 생성하고 소멸한다는직선적 시간관을 갖고 있죠. 그리고 이 모든 차이는 결국 모든 존재의 근본인 궁극적 실재를 비인격적인 우주적 원리로 보느냐 아니면인격적인 신으로 보느냐 하는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이기도 하죠. 불교는 궁극적 실재를 비인격적으로 보기에 창조자 따위를 인정하지않으며 따라서 창조자의 의도나 목적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반면에기독교는 궁극적 실재를 인격적 신으로 보기 때문에 창조주의 창조의도와 목적이 무엇인지, 창조주가 우연으로 가득한 이토록 무심한우주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하는 문제들과 씨름합니다.
- P334

 1953년에 미국의 생화학자 스탠리 밀러(Stanley L. Miller, 1930~2007년)와 그 스승인 해럴드 유리(Harold C. Urey, 1893~1981년)가 원시 지구의 대기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무기물이 들어 있는 플라스크 속에서 유기물을 합성해 낸 실험. 생명의 기원 문제 자체를 해결한 건 아니었지만, 생명이 무기물로부터 저절로 생겨날 수 있는 가능성을 입증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창조과학자들은 이 실험은 단지 특정 조건에서 유기물을 합성한 것일 뿐,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는 바가 없다고 비판한다. -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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