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계엄령 선포는 한국의 국내문제이며,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결정해야 할 일이라는 입장을 표했지만, 미리 전달받은 특별선언문에서닉슨의 ‘중공‘ 방문을 특별조치의 동기처럼 서술한 부분을 삭제해달라는 요구로 불쾌감을 표시했다. 발표를 몇 시간 앞둔 최종점검회의 중미국의 요구를 보고받은 박정희는 박정희대로 "미국놈들이 안 그랬으면 내가 뭐가 답답해서...우리가 거짓말했나..." 라며 불쾌해했다.
하지만 국내의 반발도 상당할 텐데 미국과 불편한 관계에 빠지는 것을피하자는 참모들의 건의로 이 대목을 삭제했다. 일본도 비슷한 반응을보였다. 일본 역시 일본-중 수교와 다나카 총리의 ‘중공‘ 방문이 박정희 친위 쿠데타의 빌미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박정희는 자신이 볼 때 유신을 단행하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인 미국, 일본의 대중국 수교 문제를 특별선언문에서 빼게 된 것에 대해 유신이 뼈다귀 빠져 흐물흐물한 ‘곤냐쿠‘가 되었다고 일본 말로 중얼거렸다고 한다. 박정희에게는 흐물흐물한 ‘곤냐쿠‘였지만 그 ‘곤냐큐‘에 민중들은 멍들고 질식당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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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문

<한겨레>에 ‘유신과 오늘‘ 을 1년 반에 걸쳐 연재하게 된 것은 이만열 선생님 덕분이었다. 2011년 3월, 선생님은 몇몇 후배 한국사학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2012년이 유신 40년이자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이고, 여당 후보로 박근혜가 유력한데 현대사 전공자들이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냐는 말씀을 하셨다. 역사학자로서의 시대적 사명을 준엄하게 환기하는 대선배의 꾸짖음 앞에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 P10

 누군가에게 박정희는 ‘아, 박정희!‘ 이지만,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악, 박정희!‘ 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1970년대는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시작되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 1970년대는 평화시장에서 타오른 전태일의 불길로 시작된다. 평화시장이라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세월을 보냈어도 사장의 역사와 시다의 역사가 쉽게 하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똑같은 1970년대를 보냈어도 강남 땅값이 10~20원 하던 시절 1만 평, 10만 평 땅을 사놓은사람과 전셋값도 없어 절절매는 사람의 한국 현대사는 말죽거리 신화와말죽거리 잔혹사만큼 거리가 멀다. 박정희를 숭배하는 자들은 정작 박정희가 실시한 평준화나 그린벨트나 의료보험을 때려 부수려하고 박정희를 비판하는 민주 세력은 이를 지키려고 하는 것을 보면 40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 P24

1971년 4월의 제7대 대통령 선거와 5월의 제8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박정희에게 큰 충격이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김대중의 거센 도전을 받아 상당히 고전했고,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여당인 공화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야당인 신민당이 의석을 크게 늘리며 개헌 저지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제 헌법 절차에 따라 정상적인방법으로 박정희가 대통령직 네 번째 임기에 도전하는 길은 완전히 막혀버린 것이다. 3선 임기가 다하는 1975년, 박정희는 여당의 후계자에게든 야당의 도전자에게든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고 물러날 수밖에 없게되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야당에 정권을 내준다는 것은 꿈도 꿔본 적이없고, 집권 세력 안에서도 2인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집권 세력 안에서 김종필이 2인자로 부상하는 것을 막으려공화당 안에 백남억, 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등을 주축으로 한 4인 체제‘를 구축했다.  - P31

야당인 신민당은 1971년 대통령 선거와 총선거를 통해 만만치 않은세력을 과시했지만, 정통 보수야당 한민당의 맥을 계승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울 정도로 강한 보수성을 띠고 있었다. 한국의 야당은 계급적 기반에서 집권여당과 차별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권력의 배분 과정에서 배제된 정치세력의 집합체였다. 이런 역사적 뿌리와이념적 동질성 때문에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인 ‘사쿠라‘가 만발할수 있었고, 야당의 당수였던 유진산은 ‘왕사쿠라‘로 불리곤 했다. 유신전야의 신민당은 진산파와 반진산파가 따로따로 전당대회를 치를 만큼분열되어 있어 대중의 기대에 걸맞게 박정희 정권을 견제하거나 수권세력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 박정희는 이런 야당과 의회를 "민족적 사명감을 저버린 무책임한 정당과 그 정략의 희생물이 되어온 대의 기구"라고 조롱했다.
이처럼 보수적이고 분열된 야당은 시민사회의 각 세력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20년이 지나고,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후 두 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마무리되어갈 즈음 한국 사회는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 P33

 박정희는 베트남은 한국전쟁의 제2전선이라며 5만 대군을 보냈는데, 김일성은 기백 명의 게릴라로 한반도를 베트남전쟁의 제2전선으로 만들어 주월한국군을 철수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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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폴 성당은 약 12에이커나 되은 넓고 탁 트인 광장에 서 있었는데, 이 광장은 원래 취지에서는 다소 벗어난 묘지 및 시장 역할을했다. 평일에는 이 광장에 인쇄업자와 서적상들의 점포가 늘어서 있었다. 언어에 대한 본능적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젊은이를 매혹시키는광경이었을 것이다. 인쇄된 책은 100년 전부터 이미 존재했지만 어디까지나 사치품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들이 처음으로 인쇄된 책이 약간의 여분의 소득이 있는 사람들도 가질 수 있는 물품이 되었다. 마침내 보통사람들도 지식과 교양을 습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치세에 런던에서는 7,000종 이상의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들은 대중을 즐겁게 하는 전혀 새로운 방법을 실험하는 한세대의 극작가들이 흡수해서 번안하거나 그 밖의 다른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는 원료의 보고였다. 이것이 바로 재능이 있고 또 준비를갖춘 셰익스피어가 걸어들어간 세계였다. 그는 아마 자신이 천국을찾아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P61

우리는 셰익스피어가 런던에 처음 온 때가 언제인지 모른다. 1585년부터 1592년까지 그가 어디 있었는지는 그의 전기에조차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 시기는 그가 스트랫퍼드를 떠나서(아내와 가족을버려둔 채 떠난 듯하다) 배우와 극작가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힌 시기이다. 하지만 그가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져있지 않다. 문학사에 이처럼 매력적인 공백, 그것을 메우려는 열의에 넘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공백은 아마 없을 것이다. - P66

단 하나의 예외인 글로브 극장을 제외한 런던의 모든 다른 극장들도 수입을 보전하기 위해서 다른 오락의 장소로 대여되었다. 특히 동물을 괴롭히는 놀이가 흔히 행해지곤 했다. 동물 괴롭히기는 영국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영국이 이 놀이의 본고장으로 인식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화이트홀에서 자주 곰을 괴롭히는 놀이를 벌여 외국에서 온 손님들을 접대하곤 했다. 고전적인 형태의 이 놀이는 곰한 마리를 링 안에 넣고(때로는 기둥에 줄로 묶어놓기도 했다) 맹견몇 마리로 하여금 곰을 공격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곰은 값이많이 나갔으므로 황소나 말 같은 다른 동물이 곰 대신 사용되기도했다. 한 가지 변형은 침팬지 한 마리를 말 등에 태우고 개들로 하여금 그 둘을 모두 공격하게 하는 것이었다. 마구 뛰는 말 등에서 죽지않으려고 단단히 매달려 소리를 지르는 원숭이를 밑에서 뛰어오르며 공격하는 개들을 보고 사람들은 무척 재미있어했다. ‘파우스투스 박사(Doctor Faustus)」 공연을 보고 눈물을 흘리던 관객이 같은 장소에와서 어쩔 수 없는 처지의 동물들이 참혹하게 죽어가는 광경을 보고즐거워했다는 사실이 그 어떤 말보다도 당시의 시대상을 더 잘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피드 - P83

여성 연기자들을 꺼리는 이런 관행은 북유럽의 전통이었다.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여성 역할을 여자 배우들이 연기했다. 유럽을 여행하던 영국인들은 이것을 보고 놀라곤 했다. 그들은 여자들이 무대에서도 실제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자의 역을 훌륭히 해낼 수 있다는 사실에 정말로 놀랐던 듯하다. 셰익스피어는 여성주인공들 뜻대로 하세요」의 로잘린드 「십이야(Twelfth Night)」의 바이올라 등 - 로 하여금 소년으로 가장하게 함으로써, 즉 여자역을 맡은 소년이 소년 역을 하도록 하여 성의 구분을 혼동시킴으로서 최대 효과를 이끌어냈다. - P89

덧붙여 말하자면, 희곡은 작가가 아니라 극단의 소유물이었다. 완성된 희곡은 무대 상연을 허가하는 연회 국장의 도장을 받은 다음극단이 가지고 있어야 했다. 흔히 셰익스피어가 죽으면서 남긴 유품가운데 희곡 원고나 프롬프터용 대본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곤 하지만, 사실은 그런 유품이 있었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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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익스피어가 태어날무렵부터 1642년 청교도 혁명으로 극장들이 폐쇄될 때까지 런던에서무대에 올려진 것으로 추산되는 약 3,000편의 희곡들 중 80퍼센트는 제목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희곡은 230편 가량만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그중 38편이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다.
전체의 약 15퍼센트나 된다. 놀라울 정도로 높은 비율이다.
우리가 인간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적다고 느낄 수있는 것은 그의 작품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의 희극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천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단시들만이 전해졌다면, 그를 아주 검은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을 보고 우리는 그를우아한 사람, 지적인 사람, 철학적인 사람, 우울한 사람, 책략에 능한 사람, 신경질적인 사람, 쾌활한 사람, 사랑이 넘치는 사람 등으로도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작가로서 셰익스피어는 이 모두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셰익스피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거의 알지 못한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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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찾아서

버킹검과 도스의 2대 공작인 리처드 플랜태저넷 템플 누전트 브리지즈 챈도스 그렌빌은 1839년에 엄청난 돈을 물려받기 전까지는 대체로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사생아의 아버지가 되었고 가끔 하원에서 곡물법(곡물 수입에 중세를 부과한 법률로 1846년에 폐지되었음/역주)폐지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으며, 일찌감치 배관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버킹엄셔 스토에 있던 그의 집에는 영국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이 9개나 있었다.) 그는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게 되리라는 전망과 유난히 긴 이름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내세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작위와광대한 부동산을 상속한 후, 그는 그 재산을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에 투자함으로써 불과 9년 만에 몽땅 날려버려 그의 동료들 그리고아마 그 자신까지도 놀라게 했다. - P9

 그가 스트랫퍼드의 아내와 세 어린자녀들을 떠난 후 런던에서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극작가로 성공하기까지의 중요한 8년 동안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에 관한기록은 전혀 없다. 그가 인쇄물에서 희곡작가로 맨 처음 언급된 1592년은 그의 생애가 이미 반 이상 흘러간 때였다.
다른 시기에도 그는 전자(電子)처럼 종잡을 수 없는 존재이다. 즉 언제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존재인 것이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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