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서문

<한겨레>에 ‘유신과 오늘‘ 을 1년 반에 걸쳐 연재하게 된 것은 이만열 선생님 덕분이었다. 2011년 3월, 선생님은 몇몇 후배 한국사학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2012년이 유신 40년이자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이고, 여당 후보로 박근혜가 유력한데 현대사 전공자들이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냐는 말씀을 하셨다. 역사학자로서의 시대적 사명을 준엄하게 환기하는 대선배의 꾸짖음 앞에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 P10

 누군가에게 박정희는 ‘아, 박정희!‘ 이지만,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악, 박정희!‘ 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1970년대는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시작되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 1970년대는 평화시장에서 타오른 전태일의 불길로 시작된다. 평화시장이라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세월을 보냈어도 사장의 역사와 시다의 역사가 쉽게 하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똑같은 1970년대를 보냈어도 강남 땅값이 10~20원 하던 시절 1만 평, 10만 평 땅을 사놓은사람과 전셋값도 없어 절절매는 사람의 한국 현대사는 말죽거리 신화와말죽거리 잔혹사만큼 거리가 멀다. 박정희를 숭배하는 자들은 정작 박정희가 실시한 평준화나 그린벨트나 의료보험을 때려 부수려하고 박정희를 비판하는 민주 세력은 이를 지키려고 하는 것을 보면 40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 P24

1971년 4월의 제7대 대통령 선거와 5월의 제8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박정희에게 큰 충격이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김대중의 거센 도전을 받아 상당히 고전했고,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여당인 공화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야당인 신민당이 의석을 크게 늘리며 개헌 저지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제 헌법 절차에 따라 정상적인방법으로 박정희가 대통령직 네 번째 임기에 도전하는 길은 완전히 막혀버린 것이다. 3선 임기가 다하는 1975년, 박정희는 여당의 후계자에게든 야당의 도전자에게든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고 물러날 수밖에 없게되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야당에 정권을 내준다는 것은 꿈도 꿔본 적이없고, 집권 세력 안에서도 2인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집권 세력 안에서 김종필이 2인자로 부상하는 것을 막으려공화당 안에 백남억, 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등을 주축으로 한 4인 체제‘를 구축했다.  - P31

야당인 신민당은 1971년 대통령 선거와 총선거를 통해 만만치 않은세력을 과시했지만, 정통 보수야당 한민당의 맥을 계승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울 정도로 강한 보수성을 띠고 있었다. 한국의 야당은 계급적 기반에서 집권여당과 차별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권력의 배분 과정에서 배제된 정치세력의 집합체였다. 이런 역사적 뿌리와이념적 동질성 때문에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인 ‘사쿠라‘가 만발할수 있었고, 야당의 당수였던 유진산은 ‘왕사쿠라‘로 불리곤 했다. 유신전야의 신민당은 진산파와 반진산파가 따로따로 전당대회를 치를 만큼분열되어 있어 대중의 기대에 걸맞게 박정희 정권을 견제하거나 수권세력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 박정희는 이런 야당과 의회를 "민족적 사명감을 저버린 무책임한 정당과 그 정략의 희생물이 되어온 대의 기구"라고 조롱했다.
이처럼 보수적이고 분열된 야당은 시민사회의 각 세력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20년이 지나고,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후 두 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마무리되어갈 즈음 한국 사회는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 P33

 박정희는 베트남은 한국전쟁의 제2전선이라며 5만 대군을 보냈는데, 김일성은 기백 명의 게릴라로 한반도를 베트남전쟁의 제2전선으로 만들어 주월한국군을 철수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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