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돼. 자넨 어린애처럼 굴고 있어."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낫죠. 조카 손녀를 생각해 보세요. 마리로르를 생각해 보시라고요."
커튼은 펄럭이고 서류들은 바스락거리며 두 어른은 서재에서 맞서 버틴다. 작은할아버지의 방문 바로 앞까지 살금살금 간 마리로르 손이 문틀에 닿기 직전이다. 마네크 부인이 말한다.
"죽기 전에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껴 보고 싶지 않으세요?"
"마리는 곧 열네 살이 돼, 마네크. 그리 어리지 않은 나이야, 전쟁통에는 그래. 열네 살짜리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열네 살이 어린 나이가 되는 거야 내가 바라는건....."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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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얼굴을 개인이 맡은 역할이나 그 역할에 대한 그사람 고유의 해석, 혹은 연기를 통해 그가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자기 이미지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얼굴은 그처럼 개별적이고 가시적인 것이 아니다. 얼굴은 결코 가면과 분리될 수 없으면서도 가면의 뒤에 있다고 상상되는 무엇이다. 어떤 사람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리고 그가 만들어내는 것이 가면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그 가면을 굳이 벗기려 하지 않을 때, 나아가 그의 연기에 호응하면서 그가 가면을 완성하도록 도와주고, 실수로 가면이 벗겨지더라도 못 본 체할 때, 한마디로 그의 가면 뒤에 있는 ‘신성한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할 때 그 사람은 얼굴을 갖게 된다.
고프먼은 얼굴을 유지하는 것이 상호작용의 목표라기보다는 조건이라고 말한다. 상호작용의 목표들 의견을 나누고 협력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등은 보통 서로 얼굴을 잃지 않고 또 잃지 않게 하려는 노력속에서 진행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사회 안에서 행위자로서 목표지향적인 활동을 수행하는 동시에, 사람으로서 서로를 인정하는 의례를 수행한다. 이는 총체로서의 사회가 구조 structure와 상호작용 질서interaction order로 이원화되어 있음을 함축한다. ‘구조‘가 지위와 역할의할당 및 (베버적 의미에서) 자본의 분배와 관련된다면, 상호작용 질서는 성원권의 인정과 관련된다. 현대 사회는 구조의 면에서 불평등한 개인들이 상호작용의 질서 안에서는 평등하다고 가정한다. 즉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자본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은 사람으로서 평등하다. 상호작용 의례는 바로 이 점을 확인한다. - P90

왼쪽의 항목들을 ‘전통 사회‘에 오른쪽의 항목들을 ‘현대 사회‘에 커속시킨다면, 우리는 이것을 현대화가 개인의 정체성에 미친 영향의 대차대조표로 읽을 수 있다. 버거는 우리가 명예의 세계를 떠나 존엄의 세계로 옮겨왔다고 말한다. 이 변화는 일견 바람직해 보인다. 명예는 그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주어지지만, 존엄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존엄의 관념은 위계를 부정하고 우리를 평등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평등은 벌거벗은 인간들의 평등, 역할의 갑옷을 벗고 사적인 공간으로물러난 고독한 개인들의 평등이다. 그들은 자유를 갈망하며 규범에 저항한다. 그러나 그 자유는 좌표의 상실이라는 대가를 치르고서만 얻어질 수 있다.
이 도표가 현실의 차이가 아니라, 가치의 대립을 나타낸다는 점에 주의하도록 하자, 규범과 자유의 대립은 현대인이 규범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여전히 규범을 지키면서도 자신의 행위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옷을 입은 인간과 벌거벗은 인간의 대립은 현대인이 옷을 입은 자기, 즉 남들에게 보여지는공적인 자기를 진짜 자기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P96

모욕을 명예의 훼손으로 정의할 때, 이런 문제들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명예훼손은 주로 평판이나 위신의 손상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협소한 개념이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법적으로 모욕 또는 명예훼손이 성립하려면, 행위의 ‘공연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즉 가해자와 피해자외에 그 행위를 보거나 들은 제삼자가 있어야 한다. 둘만 있는 자리에서 욕설을 한 것은 모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 사회학 연구에서모욕이라는 키워드를 거의 발견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사회학은 모욕을 개념이 아니라 현상으로만, 즉 인종차별이나 성폭력의 장면들을 구성하는 요소로만 다룬다. 현상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개념이 그것을 포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욕을 더 포괄적으로 정의하려면 그것을 존엄과 연관시키면서도, 감정처럼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처럼 객관적으로 기술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상호작용 의례에 대한 고프먼의 논의는 이러한 - P104

1) 모욕에 대한 학술적인 접근은 지금까지 주로 법학 분야에서 이루어졌는데, 대부분 모욕에 대한 사법적 제재와 표현의 자유의 충돌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최근에는 ‘사이버 모욕죄‘가 커다란 논쟁거리였다. 사이버 모욕죄의 신설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인터넷의 익명성을이용한 공격성 표출이 위험 수위에 이르렀음을 지적한다. 한편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법이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정치적으로 악용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정치인에 대한 조롱은 그의 인격이 아니라 그가 수행하는 공적 역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존엄에 대한 공격으로서의 모욕과 구별되어야 한다. 정치인에게 달걀을 던지거나 그를 본딴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태우는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공적인 의견을 표현하는 이러한 퍼포먼스에서, 달걀에 맞고 불타는 것은치가의 ‘얼굴‘이 아니라 그가 입은 역할의 옷이다. 물론 우리는 가면에 대한 의례를 통하여 얼굴에 대한 존중을 표현한다. 하지만 정치인의 경우, 그의 공적 가면 뒤에 있는 것은 얼굴이라기보다 목소리들voices이다. 정치인은 타인의 목소리로 말하는 자인 것이다. 유권자들은 나쁜 정치인의 가면을 찢으면서, 그가 실제로 누구의 목소리로 말하는지 폭로하고자 한다. - P107

혹자는 이러한 변화를 세계의 탈주술화Entzauberung der Welt 와 연결시키려 할 것이다. 고프먼의 정의에 따르면, 의례란 "한 개인이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 대상에 대한 자신의 존경과 경의를 그것 자체 혹은 그것의대표자에게 표현하는 형식적이고 관례화된 행위" 이다. 그런데 오랜 합리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사는 세계는 주술로부터 풀려났으며, 그결과 신이나 정령 같은 전통적인 숭배의 대상들은 그 절대적인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것이 개인이다. 인격human personality은 한때 신성시되었던 모든 것이 광휘를 잃은 시대에 여전히 신성하게 여겨지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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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더글러스의 명제는 자리들, 혹은 그 자리에 배정된 사람들이나 사물들의 상대성과 상호의존성을 가정한다. 하지만 이런 가정이야말로 차별을 은폐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핵심 요소이다. 실제로는 여성의 사회적 성원권을 부정하면서도, 음양론에 의거하여 여성과 남성에게 대칭적이고 상호보완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좋은 예이다. 공간적인 차원에서 이 세계관은 여성에게 안을 남성에게 밖을 할당한다. 그러면서 여성이 집 밖을 마음대로 나다니는 것을 금기시한다. 하지만 여성의 자리가 집 안이라는 말이 곧 집이 여성에게 속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성은 공적으로성원권이 없기 때문에 사적인 공간을 가질 수도 없다. 다만 남성의 사적 공간인 집에 그의 소유물의 일부로서 속해 있을 뿐이다. ‘삼종지도‘와 호주제 (성균관 유생들의 격렬한 반발 속에서 2005년에야 폐지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뿌리 깊게 남아 있는, 혼자 사는 여자에 대한 편견과 낙인은 안밖의 구별이 결코 대칭적이지 않으며, ‘집 안에 있다‘는 것은 곧 ‘남자의 지배 아래 있다‘는 뜻임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이 이데올로기적 구별의 핵심적 기능은 여자가 자기 집을 갖는 것 자기 이름으로 된 재산과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 것을 막는 데 있다.
가부장주의란 남자만이 집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또한 주인=남자들이 모여서 사회를 이룬다는 생각이다. 가부장주의는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 ‘집구석에 처박혀 있지 않고‘ ‘싸돌아다니는 여자에 대한 혐오 담론 속에서 확인된다. - P75

여성이라는 범주에 언제나 붙어 다니는 더러움과 오염의 관념 그에 따라 여성은 더러운 여성과 깨끗한 여성으로 나누어진다 을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여성은 신발이나 밥그릇과 같은 방식으로 더러워지지 않는다. 즉 그 자체로는 더럽지 않지만 제자리에서 벗어나면 더럽다고 여겨지는 게 아니다. 가부장제도 하에서 여성은 사회안에 어떤 적법한 자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여성은 단지 스스로를 비가시화한다는 조건으로, 물리적인 의미에서 사회 안에 머무르는 것을허락받고 있을 뿐이다.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면서 동등한 사람으로서 사회 안에 현상하려는 순간이 허락은 철회된다. 여성이 보이기시작하자마자 사회는 여성이 잘못된 장소에 있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잘못 인쇄된 글자처럼, 여성의 존재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말하면 여성은 장소를 더럽히는 존재로서만 사회 안에 현상할 수 있다. ‘깨끗한 여성이란 보이지 않는 여성이다.
깨끗한 여성과 더러운 여성의 차이는 노예와 아웃카스트의 차이와비슷하다. 아웃카스트와 달리 노예는 더럽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노예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 P78

 남북전쟁이후 미국의 흑인들은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일종의 아웃카스트를 형성하였다. 그들은 더러운 존재로 재규정되었고, 공간적으로 격리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백인 여자들은 그 후에도 여전히 흑인 도우미에게 가사와 육아를 맡겼다.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1962년 미시시피 잭슨을 배경으로 인종차별과 싸우는 세 여성의 모습을 그린 소설 『헬프』에 해답의 실마리가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흑인 가정부들은 오염된 존재로 취급된다. 남부 전역에서 인종차별 반대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던 시기이지만, 버스에서 흑백 분리가 사라진 것을 제외하면 그들의 일상은 여전히 짐 크로우 법의 지배 아래 있다. 백인 가정에 일하러 가서도 언제나 뒷문으로 드나들어야 하고, 별도의 화장실을써야 한다. 하지만 그들도 제복을 입으면 백인 전용 상점에 들어갈 수있다. 제복은 종속의 표지이기 때문이다. 개의 목줄이 주인의 존재를 알리듯이, 흰 앞치마와 모자는 그들을 심부름 보낸 백인 고용주의 존재를 알린다. 그들이 독립적인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백인의 대리인으로서와 있는 한, 다른 백인들은 그들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있다. 말하자면 제복의 가시성이 그들의 흑인성을 비가시화하는 것이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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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 이게 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
소년들은 책상 위로 몸을 웅크린다. 누구도 손을 들지 않는다. 하우프트만은 책상 사이를 성큼성큼 걷는다. 베르너는 근육 하나 씰룩대지 않으려고 애쓴다.
"페닝."
"엔트로피는 한 체계 안에서 일어나는 무작위, 혹은 무질서의 정도를 말합니다. 선생님." 박사가 따뜻하면서 동시에 냉담한 시선으로 자신을 주시하자 베르너는 가슴이 쿵 띈다. "무질서, 여러분은교장이 말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또한 방장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질서를 사수해야 한다는 말 말이다. 제군들, 인생은혼돈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혼돈에 대한 질서를 상징한다. 유전자에 대해서도 우리는 종의 진화에 질서를 부여한다. 열등 인자, 제어하기 어려운 것, 찌꺼기를 걸러 낸다. 이는 총통의 위대한 계획, 지금껏 인류가 착수한 가운데 가장 위대한 계획이다."
하우프트만은 흑판에 쓴다. 사관생들은 그가 쓰는 말을 노트에적는다. 폐쇄계의 엔트로피는 결코 감소하지 않는다. 모든 과정은 붕괴 법칙을 따라야 한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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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상대방은 나를 ‘무시‘할 수있다. 즉 나의 신호에 화답하지 않고,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행동할 수 있다. 상호작용의 의례는 언제나 위반과 중단의 가능성을 내포하며, 그 때문에 문화적 코드의 단순한 실행-국지적 활성화‘ -로 간주될 수 없다. 의례의 사슬을 구성하는 행위들 하나하나는 질문이자 요구이며, 초대이자 도전이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인정투쟁‘의 계기들을 구성하는 것이다. 사회의 경계는 이 나날의 인정투쟁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그어진다. - P59

인정투쟁이라는 단어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대한 헤겔의 논의와거의 자동적으로 결부되는 경향이 있다. 정신현상학, 4장에 나오는이 이야기는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해설을 통해서 널리 알려졌는데,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타사의 인정을 욕구한다는 점에서 다른동물과 구별된다. 인간은 모든 동물에게 공통된 자기 보존의 욕구를 극복하고 이 인간적인 욕구를 따를 때, 즉 타자의 인정을 위해 생명을 걸때 비로소 자신을 인간으로 확증한다. 이러한 생사를 건 위신투쟁이 없었다면 역사가 개시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죽은 자로부터 인정을받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인간적 현실이 인정된 현실로 구성되기 위해서, 최초의 두 인간 중 한 명은 타자에 의해서 인정받지 않은 채 타자를인정해야 한다. 즉 인간은 최초의 상태에서부터 필연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주인이거나 노예이다. 하지만 여기서 변증법이 시작된다. 주인은 노예의 인정을 받지만, 그가 획득한 인정은 그에게 무가치한 것이다. 그의 욕구는 그가 인정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의 인정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노예는 타자(주인)를 인정한다. 따라서 상호 인정이 발생하기 위해서 노예는 단지 스스로를 이 타자에게 강요해서 그로부터 승인받기만 하면 된다. 주인은 노동하도록 노예를 강요한다. 그러나 노동하는 과정에서 노예는 자연을 지배하게 된다. 노예는 이제 자신의 노동에 의해 변화된 기술적 세계에서 군림한다. 노예는세계를 변화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그와 더불어 해방투쟁을위한 새로운 객관적 조건들을 창조해낸다. - P60

그렇다 하더라도 노예의 존재는 인정투쟁에서 여전히 중요하다. 패터슨은 노예제도와 명예에 집착하는 문화 - 플라톤을 따라 그가 타이모크라시timocracy 라고 부른 것ㅡ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우월해지려는 욕망, 권위에 대한 복종, 관직에 대한 야망, 군인다움에 대한 숭상, 금전에 대한 집착 등이 플라톤이 생각했던 타이모크라틱한 인간형의 특징이었다." 대규모의 노예제도가 존재하는 사회에서는어김없이 타이모크라틱한 문화와 인간형이 발달한다.  - P61

4) Orlando Patterson. 같은 책, p. 386, note 14. 우월해지려는 욕망, 권위에 대한 복종, 관직에 대한 야망.....… 이런 묘사를 읽다보면 나의 머릿속에는 막연하게 어떤 초상화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 초상화는 고대 그리스인이 아니라 한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경상도 출신이고 강남에 거주하며 한나라당에 투표하는 60대 남자. 한국의 경상도는 미국 남부만큼이나 타이모크라틱한 것 같다. ‘사나이다움‘에 대한 자부심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경상도는 ‘양반 문화‘가 뿌리 깊은 곳이다. 한국이 노예제 사회였다는 제임스 팔레 교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양반 노릇을 하려면 종이 있어야하고, 양반 의식이란 ‘아랫것들‘과 자신을 구별하는 태도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미국남부의 타이모크라틱한 정서는 남북전쟁이 끝난 후 KKK단의 결성으로 표출된 바 있다. 경상도가 언제나 한나라당 - 지금은 새누리당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다시 어떤 이름으로 바뀔지모르지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광주학살을 주도했고 또 은폐했던 세력에 몰표를 주는 데에는 ‘지역감정‘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좀더 깊은 정치인류학적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 P61

한편, 우리는 사회적 성원권의 부여가 문화적 자격을 요구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문화적 지식이나 사회화 과정을 통해 습득된다고 여겨지는) 상호작용의 기술이 부족한 사람은 실제로 사회라는무대 위에서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하지이것은 그에게 특별한 도움이 필요함을 의미할 뿐이지, 그에게 사회 구성원의 자격이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사회적 성원권을 요구하는 데는 어떤 자격도 필요하지 않다. 물리적인미에서 사회 안에 이미 들어와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사회적 성원권은 사회성 sociability과 별개임을 인식해한다. ‘히키코모리‘에게도 사회적 성원권을 보장해야 하듯이, 외국인에게 사회적 성원권을 부여하는 데 ‘동화‘나 ‘적응‘을 조건으로 내걸어서안 된다.
외국인이 일단 사람으로서 환대의 권리를 누리다가, 일정 기간이 경과하고 어떤 조건들이 갖추어지면 사회적 성원권을 얻는다는 생각환대의 행위 바깥에서 사회적 성원권에 대해 말할 수 있음을 전제한하지만 사회적 성원권이 법적 지위와 다른 것이라면, 사실상 우리는 타인의 환대 속에서만 자신의 사회적 성원권을 확인할 수 있다. - P65

외국인이라는 꼬리표는 스티그마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외국인이 그 자체로 낙인찍힌 범주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외국인들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면서, 그들이 우리 문화의 장점들을 제대로 평가해주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이상적인 외국인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한에서이다. 돈 많고, 교양 있고, "원더풀"이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 그들이 이런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는 게 판명된다면, 가령 그들이 돈도 없고, 교양도 없는 데다 남의 나라에 와서도 자기네 방식을 고집한다면, 게다가 금방 돌아가지 않고 눌러앉아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우리의‘ 여자들을건드린다면, 그들에게 주어졌던 환대는 철회될 것이다. 스티그마가 있는 개인이 그에게 추천되는 특정한 행동 노선 line of action에서 벗어났을때처럼 말이다. 즉 외국인에게 주어지는 환대 혹은 사회적 성원권은 조건적이다. 환대와 사회적 성원권을 구별하는 사람은 결국 조건적 환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 P69

[순수와 위험]에서 더글러스는 더러움을 자리place에 대한 관념과 연결시켰다.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신발은 그 자체로는 더럽지 않지만 식탁 위에 두기에는 더럽다. 음식이 그 자체로 더러운 건 아니지만, 밥그릇을 침실에 두거나 음식을 옷에 흘리면 더럽다. 마찬가지로 목욕 도구를 옷장에 두거나 옷을 의자에 걸어두는 것, 집밖에서 쓰는 물건을 실내에 두는 것, 위층의 물건을 아래층에 두는 것, 겉옷이 있어야 할 자리에 속옷이 나와 있는 것 등은 더럽다."
더글러스의 통찰은 동물이나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집밖에서 키우는 돼지나 오리가 집 안에 들어오면 더럽다. 마찬가지로 흑인이 백인 전용 구역에 들어가거나, 여자가 남성을 위한 공간에 들어가는 것은 더럽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더러움이 단지 자리의이탈에서 비롯되는 혼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흑인 전용구역에 들어간 백인은 자신이 오염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을 느낀다. 반면에 백인 전용 구역에 들어간 흑인은 그 자신이 오염원이다. 이는 더러움과 오염의 관념을 단순히 "체계적인 질서화와 분류의 부산물""로간주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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