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하면 더글러스의 명제는 자리들, 혹은 그 자리에 배정된 사람들이나 사물들의 상대성과 상호의존성을 가정한다. 하지만 이런 가정이야말로 차별을 은폐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핵심 요소이다. 실제로는 여성의 사회적 성원권을 부정하면서도, 음양론에 의거하여 여성과 남성에게 대칭적이고 상호보완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좋은 예이다. 공간적인 차원에서 이 세계관은 여성에게 안을 남성에게 밖을 할당한다. 그러면서 여성이 집 밖을 마음대로 나다니는 것을 금기시한다. 하지만 여성의 자리가 집 안이라는 말이 곧 집이 여성에게 속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성은 공적으로성원권이 없기 때문에 사적인 공간을 가질 수도 없다. 다만 남성의 사적 공간인 집에 그의 소유물의 일부로서 속해 있을 뿐이다. ‘삼종지도‘와 호주제 (성균관 유생들의 격렬한 반발 속에서 2005년에야 폐지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뿌리 깊게 남아 있는, 혼자 사는 여자에 대한 편견과 낙인은 안밖의 구별이 결코 대칭적이지 않으며, ‘집 안에 있다‘는 것은 곧 ‘남자의 지배 아래 있다‘는 뜻임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이 이데올로기적 구별의 핵심적 기능은 여자가 자기 집을 갖는 것 자기 이름으로 된 재산과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 것을 막는 데 있다. 가부장주의란 남자만이 집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또한 주인=남자들이 모여서 사회를 이룬다는 생각이다. 가부장주의는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 ‘집구석에 처박혀 있지 않고‘ ‘싸돌아다니는 여자에 대한 혐오 담론 속에서 확인된다. - P75
여성이라는 범주에 언제나 붙어 다니는 더러움과 오염의 관념 그에 따라 여성은 더러운 여성과 깨끗한 여성으로 나누어진다 을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여성은 신발이나 밥그릇과 같은 방식으로 더러워지지 않는다. 즉 그 자체로는 더럽지 않지만 제자리에서 벗어나면 더럽다고 여겨지는 게 아니다. 가부장제도 하에서 여성은 사회안에 어떤 적법한 자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여성은 단지 스스로를 비가시화한다는 조건으로, 물리적인 의미에서 사회 안에 머무르는 것을허락받고 있을 뿐이다.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면서 동등한 사람으로서 사회 안에 현상하려는 순간이 허락은 철회된다. 여성이 보이기시작하자마자 사회는 여성이 잘못된 장소에 있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잘못 인쇄된 글자처럼, 여성의 존재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말하면 여성은 장소를 더럽히는 존재로서만 사회 안에 현상할 수 있다. ‘깨끗한 여성이란 보이지 않는 여성이다. 깨끗한 여성과 더러운 여성의 차이는 노예와 아웃카스트의 차이와비슷하다. 아웃카스트와 달리 노예는 더럽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노예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 P78
남북전쟁이후 미국의 흑인들은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일종의 아웃카스트를 형성하였다. 그들은 더러운 존재로 재규정되었고, 공간적으로 격리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백인 여자들은 그 후에도 여전히 흑인 도우미에게 가사와 육아를 맡겼다.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1962년 미시시피 잭슨을 배경으로 인종차별과 싸우는 세 여성의 모습을 그린 소설 『헬프』에 해답의 실마리가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흑인 가정부들은 오염된 존재로 취급된다. 남부 전역에서 인종차별 반대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던 시기이지만, 버스에서 흑백 분리가 사라진 것을 제외하면 그들의 일상은 여전히 짐 크로우 법의 지배 아래 있다. 백인 가정에 일하러 가서도 언제나 뒷문으로 드나들어야 하고, 별도의 화장실을써야 한다. 하지만 그들도 제복을 입으면 백인 전용 상점에 들어갈 수있다. 제복은 종속의 표지이기 때문이다. 개의 목줄이 주인의 존재를 알리듯이, 흰 앞치마와 모자는 그들을 심부름 보낸 백인 고용주의 존재를 알린다. 그들이 독립적인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백인의 대리인으로서와 있는 한, 다른 백인들은 그들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있다. 말하자면 제복의 가시성이 그들의 흑인성을 비가시화하는 것이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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