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가 빵집에서 나타나더니 사뿐히 갓돌을 벗어나 곧장 그를 향해 온다. 푸들이 자갈길에 쪼그려 오줌을 누고, 소녀는 사뿐히 왼쪽으로 틀어 개를 피한다. 그녀는 두 번째로 베르너에게 다가오면서, 입술을 부드럽게 움직여 혼잣말로 되, 트루아, 카트르 - 숫자를 센다. 베르너가 그녀 콧등의 주근깨를 셀 수 있을 정도로, 그녀 배낭속 빵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가까이 오고 있다. 안개가 뿜어낸  100만 개의 물방울이 그녀의 모직 원피스 보풀과 머리칼을 따라 구슬처럼 맺히고, 빛은 그녀에게 은테를 두른다.
그는 못 박힌 듯 서 있다. 지나갈 때 보이는 그녀의 길고 창백한목은 베르너로선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냘퍼 보인다.
그녀는 그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그녀의 머릿속엔 아침 말고 다른 어떤 것도 없는 건가 싶다. 그는 생각한다. 이것이 술포르타에서 늘 가르쳤던 순수일 거야.
그는 벽에 등을 밀듯이 붙인다. 그녀의 지팡이 끝이 그의 부츠코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간다. 그렇게 그녀는 원피스 자락을 가볍게 흔들면서 지팡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지나가고, 그는 그녀가 계속해서 길을 걸어가는 것을, 그러다 마침내 안개 속에 파묻힐 때까지 지켜본다. - P290

우리는 모두 단 하나의 세포에서 생겨난다. 티끌보다도 작은, 아니, 훨씬 더 작은 세포에서 나뉘고, 증식하고, 더해지고 덜어지면서, 물질의 주체는 바뀌고, 원자들이 흘러들어 가고 나오며, 분자들이 빙글빙글 돌고, 단백질이 서로 합쳐지며, 미토콘드리아는 산화명령을 보낸다. 우리 존재는 미세한 전기가 모이면서 시작된다. 폐, 뇌, 심장. 사십 주 후에 6조나 되는 세포들이 죔쇠 같은 우리 어머니의 산도(産道)에서 뭉개지면서 우리는 울부짖는다. 그런 후 세계가 우리에게 들어서기 시작한다. - P368

그녀는 생각한다. 매시간, 전쟁을 과거의 기억으로 간직할 뿐인누군가가 세상 밖으로 떨어져 나가고 있다.
우리는 풀 속에서 다시 일어설 것이다. 꽃 속에서, 노래 속에서.
미셸이 그녀의 팔을 잡고 그들은 함께 오솔길을 따라 구불구불내려가서 퀴비에 거리로 향하는 문을 지난다. 그녀는 빗물 배수관하나, 빗물배수관둘, 셋, 넷을 지나고, 집에 도착하자 말한다. "여기서 그냥 가도 돼, 미셸 집까지 잘 찾아갈 수 있지?"
"당연하죠."
"그럼 다음 주에 보자."
그는 할머니의 한쪽 뺨에 입을 맞춘다. "다음 주에 봐요, 할머니."
그녀는 손자의 발소리가 희미해질 때까지 귀 기울인다. 이윽고 차들의 한숨 소리와 기차들이 덜거덕거리는 소리와 추위 속에서 발을 재는 모든 사람의 소리만 가득 찬다. - P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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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케이블 전선을 따라가다가 마침내 마이크가 손에 들어왔음을 확실히 알게 된다.
눈을 감은 것과 실명상태는 전혀 다를 것이다. 하늘이 있고 얼굴이 있고 건물이 있는 세상 아래 그보다 원초적이고 오래된 세계가 존재한다. 편평한 지표면이 무너지고 여울이 리본을 그리며 허공에 흐르는 소리가 나는 세계다. 마리로르는 길에서 높이 솟은 다락방에 앉아서 3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습지에서 백합들이 스치는 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미국인들이 농장 들판을 허둥지둥 가로질러서,
거대한 대포를 생말로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쪽으로 겨누는 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지하실 허리케인 램프 주위에서 여러 가족이 홀짝홀짝 우는 소리를, 까마귀들이 어떤 무더기 사이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소리를, 파리들이 도랑에 버려진 시체들 위로 내려앉는 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타마린드가 떨리고 어치들이 깍깍대며 듄 그래스가 불에 타는 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엄청나게 큰 주먹 같은 화강암이 지각 깊숙이 묻혀 있고, 그 위에 생말로가 놓여 있으며, 바다가 사방에서 몰려와 물어뜯어 대고, 외곽 섬들은 소용돌이치는 조수에맞서 굳건히 버티고 있음을 느낀다. 그녀는 젖소들이 돌구유 속 물을 마시고 돌고래들이 도버 해협의 초록빛 바닷물 위로 뛰어오르는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죽은 고래들의 뼈가 해저 5리에서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 고래들의 골수는 태양이 보내는 빛의 입자를 단한 번도 볼 일이 없을 생물들의 도시에 한 세기를 날 양식을 줄 것이다. 그녀는 동굴 속 달팽이들이 바윗돌 위로 제 몸을 질질 끌어 올리는 소리를 듣는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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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순신 개인사에 있어서 3대 대첩을 꼽는다면 한산도대첩(1592.7.8)과 명량대첩 (1597.9.16) 그리고 노량해전(1598.11.19)이다.
이순신의 한산도대첩은 임진왜란의 전쟁 향방을 바꿨다. 명량해전 역시 기적 같은 승리였고 정유재란의 전쟁 양상을 바꿨다. 그러나 노량해전은 승패 여부로 인해 전쟁의 양상이 바뀌지는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전쟁은 어차피 끝나게 되어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침략 전쟁에서 실패하고 자국으로 돌아가려는 일본군을 이순신이 돌려보내지 않겠다며 길을 막고 벌인 전투가 노량해전이었다.
또한 노량해전은 전투 규모만 따지자면 한산도대첩과 명량대첩을 합친 것보다도 규모가 컸다. 임진왜란사를 뛰어넘어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역사상 최대의 해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할 때마다 꼼꼼하고 객관적인 기록을 남겼다. 수하들의 잘잘못을 낱낱이 기록하는 한편 이름 없는 노비 출신이 공을 세워도 이를 빠짐없이 기록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순신이 싸워왔던 전투들은 이순신이 조선 조정에 올려 보낸 장계와 <난중일기> 등을 통해 양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노량해전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아니, 남기지 못했다. - P348

분명히 노량해전은 기존에 이순신이 싸워온 방식과는 많이 달랐다. 명량해전 이전의 이순신은 전투 중에도 철저한 아웃복싱을 선호했고, 지형을 이용한 장거리 함포 사격을 통해 대부분 우위를 가져왔다. 다만 명량해전에서는 겁을 먹고 물리서는 아군들에게 보란 듯이 1척의 판옥선으로 수십 척의 일본의 전함들과 맞서서 오전 내내 버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노량해전에서는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달랐다. 전투의 승리가목적이 아닌 우리 강토를 침략했다가 돌아가는 외적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는 게 목적인 전투였기에, 애초에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작전 따위는 성립되지 않았다. 조선군들 눈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일본군도그것을 느꼈을 것이고 두려웠을 것이다.
일본군 역시 지금껏 이순신 함대를 보기만 하면 도망다니던 때와는 달랐다. 함대 수가 무려 500척에 달하기도 했지만 자신들이 이곳에서 물러서면 고니시의 1만5천군이 전멸당할 상황이었고, 이 전투에서 이겨야만 자신들도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바다 위에 생사를건 처절한 싸움이 전개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각자 분명했다. - P359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전사‘

‘대장선이 멀쩡한데 어찌 사령관이 전사했단 말인가?‘
믿기지 않았다. 누군가 울기 시작했다. 울음은 전염성이 있다.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판옥선의 갑판에서 엎드려 울었고 갯벌에서 무릎을 꿇은채 울었다.
7년간 조선인들을 몸서리치게 했던 지옥 같은 전쟁이 비로소 끝났는데, 그는 죽어버렸다. 나라를 구했고 백성을 살려놓은 이가 죽어버린 것이다. 묘한 감정에 북받쳐 울었다.
이순신의 전사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고금도를 비롯한 인근 완도의 여러 섬 주민들은 대성통곡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근방의 강진과 해남, 진도의 주민들까지 하늘을 원망하며 울었다.
진린 역시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에 땅바닥을 뒹굴며 곡을 하였다.
"어른께서 오셔서 나를 구해준 것으로 알았는데 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명나라 군사들도 함께 소리 내어 울었다.

이순신의 시신은 판옥선에서 내려졌다. 진린이나 이순신의 측근 제장들은 시신으로 누워 있는 이순신의 모습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건 상식이다. 보지 않고는 믿기 어려웠을 것이기에, 그리고 역사에남을 영웅의 마지막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이순신의 영구는 마지막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던 고금도에 묻혔다.
이순신의 사망 소식에 남도 백성들은 모두들 흰옷을 입었고 입에 고기를 대지 않았다.

이순신의 시신은 20여일 후 가족들이 있는 아산으로 옮겨졌다. 전라도 완도의 고금도에서 충청도 아산에 이르기까지 운구 행렬이 움직이는곳마다 백성들의 통곡이 이어졌고, 수많은 백성들이 수레를 붙잡고 울어 행렬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 P365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들은 각 진영에서 통곡을 그치지 않았는데, 마치 자기 부모가 세상을 떠난 듯 슬퍼했다. 그의 영구 행렬이 지나는 곳에서는 모든 백성이 길가에 나와 제사를 지내면서 울부짖었다.
"공께서 우리를 살려주셨는데, 이제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수많은 백성이 영구를 붙들고 울어 길이 막히고 행렬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징비록》

아무것도 모르는 늙은이나 어린이들까지도 많이 나와 울었으니, 백성들에게 이와 같은 동정을 얻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었을까.
<이덕형의 장계> - P367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그 아들 히데요리를 받들었던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했던 동군이 일본의 패권을 두고 싸웠던 세키가하라전투(1600)가 한창이었다.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승리하면서 에도막부가 들어서게 된다.
세키가하라전투에서 서군이 패한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고니시와시마즈군의 세력 약화였다. 가장 용맹하다는 시마즈군의 병력 중 겨우2,000명만 가담할 정도로 세키가하라전투에서 역할이 미미했다. 이순신과 노량에서 격돌하며 엄청난 병력 손실을 당했으니 도리가 없었다.
소수의 시마즈군 병력이 다수의 동군을 돌파해 자신들의 근거지인 규슈서남부의 사쓰마번까지 후퇴한 시마즈의 퇴각은 지금도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다룬다. 에도막부가 시마즈를 끝까지 공격했지만 시마즈는 끝내 그 공격을 버텼고, 에도막부도 시마즈 가문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막부는 임진왜란 당시 반침략 세력이었음을 내세우며 조선과 통상을 원했다. 조선은 일본의 에도 막부가 원할 때 통신사를 파견하였고, 광해군은 기유약조(1609)를 체결해주어 부산포에 왜관을 설치하고일본과의 통교를 허락하였다. 이렇게 조선과 일본은 전쟁의 상흔을 서로간에 씻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훗날 시마즈 가문의 사쓰마번이 조슈번과 연계하여 에도막부를 타도하면서 메이지 유신을 이끌어내었고, 그들이 정한론(한반도 정벌과 대륙 진출)의 선두주자가되어 강화도조약(1876)을 체결하며 조선을 또다시 침략했던 중심 세력이 되었으니, 역사가 참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있겠다. 지금까지도 이들은 일본 내 가장 극우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 - P386

또한 이순신에 대한 그 어떤 평가나 기록보다도 우리의 가슴을 가장 뜨겁게 하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 해군의 다짐이다.

"해군의 다짐.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P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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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국가 2024-07-18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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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란 병자호란 미국에서 일어남
 

1597년 명나라와 일본의 휴전 협상이 실패로 끝나고 누가 보더라도 일본의 재침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와중에 요시라가 은밀히 김응남에게 속삭였다.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가 지금 대마도까지 와 있습니다. 언제 부산으로 건너올지 모르는 상황이지요.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를 요격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건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하는 고니시 장군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
이순신은 이것이 요시라의 간계임을 알았다. 아니 설령 일본이 파놓은함정이 아니더라도 대마도에서 부산으로 건너오는 가토를 요격하는 것은불가능했다. 가토가 언제 건너오는지도 알 수 없을 뿐더러 부산과 대마도사이에는 섬도 없고 함대의 정박지도 없었다. 판옥선이 바다 위에 며칠이고 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부산 앞바다는 파도도 높았다. 그리고 부산은 적의 전진 기지였다. 적의 대병력을 등 뒤에 두고 언제 올지모르는 적을 기다렸다 요격하라? 그것도 바다에서? 그럼에도 이순신은조정의 명을 받들어 부산 앞바다까지 출정을 감행했다.
이순신 역시 당시 조정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 명령을 받들지않는다면 자신이 파직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나라의 운명이 걱정되기에, 이순신은 휘하의 병들에게 한없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부산 앞바다로 나아갔다. 못난 임금 때문에 이 험한 전장에서 안 해도 되는 고생을해야 하는 병졸들을 바라보며 고뇌했을 이순신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이순신은 선조의 출정 명령이 불가함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출정을강행하였다. 그럼에도 선조는 이순신이 가토를 요격하지 않았다며 이순신을 매섭게 탓하고 나섰다. - P244

다음은 원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이다.

다만 수륙의 일을 헤아려 말한다면 우리나라의 위무는 오로지 수군에달려 있습니다. (중략) 원하건대 조정에서 수군으로서 바다 밖에서 맞아 공격해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이 없게될 것입니다. 이는 신(원균)이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바다를 지키고 있어서 이런 일을 잘 알기 때문에 이제 감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우러러 아룁니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2일>

원균의 속셈은 뻔했다.
이순신 대신 자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준다면 주상 전하의 뜻을 받들어 부산 앞바다에 나아가 대마도발 가토의 증원군과 보급품을 막아 우리 수군의 위엄을 보이겠노라는 것이었다.
원균의 장계가 있고 며칠 뒤, 이번에는 윤두수가 한술 더 뜬다.

이순신의 죄상은 임금께서도 이미 통촉하시지만 이번 일은 나라의 인심이 모두 분노해 하고 있으니, (중략)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꾸는 것이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이순신을 체직시켜야 할듯합니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7>

원균은 윤두수와 사돈지간이었고, 윤두수는 선조와 사돈관계였다. - P250

이순신을 잡아올 때 원균과 교대한 뒤에 잡아올 것으로 말해 보내라. 또이순신이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대치하여 있다면 잡아오기에 온당하지 못할 것이니, 전투가 끝난 틈을 타서 잡아올 것도 말해 보내라.
<선조실록 1597년 2월 6일>

선조는 혹시 모를 이순신의 반발을 분명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순신을 파직하기 전에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미리 원균을 임명하고 한산도의 병력을 이순신으로부터 원균이 인수인계받을 수 있도록 명하는 꼼꼼함을 보였다.
1597년 2월 6일 이순신에 대한 파직 명령이 내려졌다. 그 명을 받은 선전관이 한산도까지 내려오는 데 10일 정도 걸렸다. 이때 이순신은 선조의 지시대로 부산 앞바다에 나가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 P252

우의정 정탁이 이순신을 살려 보고자 장문의 글을 선조에게 올렸다.

신구차伸求箚.

우의정 정탁은 엎드려 아닙니다.

이 모(이순신)는 몸소 큰 죄를 지어 죄명조차 무거우나 성상께서는 얼른극형을 내리시지 않으시고 두둔하여 문초하시다가 그 뒤에 엄격히 추궁하도록 허락하시니 (중략) 성상께서 인을 베푸시는 한 가닥 생각으로혹시나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으시고자 바라심에서 하심이라 신은 이에 감격함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중략) 이 모는 참으로 장수의 재질이 있으며, 수륙전에도 못하는 일이없으므로 이런 인물은 과연 쉽게 얻지 못할 뿐더러, 이는 변방 백성들의 촉망하는 바요, 왜적들이 무서워하고 있는데, 만일 죄명이 엄중하다는 이유로 조금도 용서해줄 수가 없다고 하고, 큰 벌을 내리기까지 한다면 공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 내키지 않을 것이요, 능력이 있는 자도스스로 더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은혜로운 하명으로 문초를 덜어주셔서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보람 있게 하시면 성상의 은혜를 천지 부모와 같이 받들어 목숨을 걸고 갚으려는 마음이 반드시 저 명실 장군만 못지않을 것입니다. - P256

이순신이 의금부에서 풀려난 바로 다음날부터 전장인 남해 바다를 향해 떠나가는 백의종군 길이 시작되었다. 두번째 백의종군이었다.
목숨은 부지했지만 한 달여의 옥고를 치른 불편한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이순신이 가는 길목마다 많은 백성들이 이순신을 배웅하러 나왔다. 이순신은 자신보다 전란에 시달린 백성들을 위로했다. 백성들은 이순신이 당한 고초를 다 안다는 듯이 목메어 울었고 이순신의 무운장구를빌었다.
백의종군 길 이틀 만에 이순신은 자신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충남 아산에 당도했다. 아산에서 쉬는 동안 이순신은 불길한 꿈을 꾸었다.

4월 11일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몹시 번잡스러워서 이루다 말할 수없었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무엇에 홀린 듯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없으니 이 무슨 조짐일까. 병환 중인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흘렀다. 종을 보내서 어머니의 소식을 알아오게 하였다.
<난중일기>

이순신의 효심은 대단했다. 《난중일기>에도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백 번이 넘게 나온다. 이순신의 어머니 변 씨는 아들을 전장으로 떠나보낼 때면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어서 가서 나라의 원수를 크게 갚아라."
이순신에게 어머니는 하늘과 같은 존재였다.
어머니의 소식을 알아보라고 보냈던 종이 돌아와 어머니의 부음을 전했다. 불길한 꿈을 꾼 그날이 바로 이순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었다. 여수에 계셨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마당에 주저앉아대성통곡을 했다.

4월 13일,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난중일기> - P258

이후 일본군이 조선에 한양을 내어주고 남해안으로 후퇴하면서 명과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은 본격화되었다. 심유경은 고니시와 함께 일본에건너가 도요토미히데요시를 만났다. 이때 도요토미는 심유경에게 일곱가지의 요구사항을 내밀었다.

첫째 명나라 황제의 공주를 일본 국왕의 후비로 삼는다.
둘째 명나라와 일본 간의 무역을 재개하여 선과 상선을 왕래하도록 한다.
셋째 명나라와 일본 양국의 전권 대신이 통교를 서약하는 문서를 교환한다.
넷째 조선의 4도를 일본에 할양한다.
다섯째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일본에 볼모로 보낸다.
여섯째일본은 포로가 된 조선의 두 왕자와 대신을 송환한다.
일곱째 조선의 중신이 일본에 영원한 항복을 서약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사항은 명나라로서 단 하나도 받아들일 수없는 내용이었다. 심유경은 난감했다. 이 내용을 고스란히 명나라로 가져갔다가는 자기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명나라에서도 심유경에게 재촉을 하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항복문서를 어서 받아 오라.‘
심유경은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거짓 항복문서를 만들어 명나라 황제에게 바쳤다. 그리고 명 황제는 일본 측에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첫째 조선에서 완전히 철병할 것.
둘째 조선의 두 왕자를 송환할 것.
셋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공식적으로 조선 침략에 대해 사과할 것.

이러한 황제의 요구서를 일본으로 가져갔다가는 고니시 역시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답을 찾지 못했던 심유경과 고니시는 서로 시간만 질질끌었고, 그러다 보니 조선에서의 전쟁은 4년간의 휴전 아닌 휴전이 유지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 명나라 황제는 자신이 심유경에게 속았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이로 인해 당시 조선에 출병을 주장했던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이 감옥에 갇혀 죽었고, 심유경 역시 목이 잘리고 말았다. - P271

일본의 첩보선과 보급선을 쫓다 실패한 조선군은 간신히 배를 돌려 가덕도에 함대를 정박시켰다. 갈증에 지친 400여 명의 조선군들이 대오를지키지 않고 물을 찾아 가덕도에 급히 내렸다. 그러나 가덕도에는 벌써 일본군이 매복 중이었다. 놀란 원균은 가덕도에 내린 400여 명의 조선군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순신과 모든 게 비교되는 원균이었다. 과거 이순신도 항해 중 가덕도에 물을 뜨기 위해 5명의 수군을 내려 보냈고 그곳에 매복 중이던 일본군에게 한 명이 죽고 4명이 포로로 잡혔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4명의 포로를 구출하기 위해 함대로 가덕도를 포위하여 일본군을 압박하였고, 일본은 4명의 조선 수군을 이순신에게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4명의 아군을 살리겠다고 전군을 동원하여 섬을 포위하고 무력 시위를했던 이순신과 달리 먼저 살겠다고 400여 명의 전우를 버린 채 도망가는원균, 이런 차이가 전두를 함께 수행하던 휘하 장수들과 군사들의 사기에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했다. 이 같은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에게 쓴 편지가 의미심장하다.
‘수군은 오래지 않아 패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디서 죽을지 모르겠습니다.‘ - P282

이순신은 진주에 머물던 중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되었다.

임금은 이와 같이 이르노라.
생각하건대 그대의 명성은 일찍이 수사로 임명되던 그날부터 드러났고, 그대의 공로와 업적은 임진년의 큰 승첩이 있은 후부터 크게 떨쳐 변방의 군사들은 마음속으로 그대를 만리장성처럼 든든하게 믿어왔었는데, 지난번에 그대의 직책을 교체시키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이고 백의종군하도록 했던 것은 역시 나의 모책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며, 그 결과 오늘의 이런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 중 일부 - P296

이순신도 한 가정의 아버지였다. 자식을 잃은 아픔이 하룻밤으로 치유될 리 만무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이가 이순신뿐이었으랴, 이순신은 부하들 앞에서 자식을 잃은 아비의 슬픔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나는 내일이 막내 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이 되는 날인데도 마음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난중일기 1597년 10월 16일>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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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제해권을 장악하지 못했다면, 일본 수군은 서해 바다를 돌아서 한강을 타고 한양으로, 예성강을 타고 개성으로,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으로의 군대 충원과 보급이 가능했을 것이다. 일본군은 압록강을 타고들어가 의주에 있는 선조가 명나라로 도망가는 길을 막았을 것이고 조선의 임금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해전에서 조선군의 승리가 일본 육군의 발을 묶었고 전쟁의 양상을 바꿔버린 것이었다.

임진년 9월에 치러진 부산포해전 이후 전라좌수영의 수군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추수기 수확에 힘써야 했다. 세액 3분의 1이 곡창지대인 호남에서 충당되었던 조선이었다. 전쟁으로 전 국토가 유린당한 상태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호남의 쌀을 수확하는 것은 전투의 승리만큼 중요한 일이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겨울이 찾아오면서 처참했던 임진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 P187

전쟁이 발발했던 1592년 4월은 양력으로 5월 후반이었다. 모내기를해야 할 때에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의 토지 결수는 대략 150만 결 정도였다. 그런데 전쟁통에 경복궁이 점령당하며 토지대장인 양안이 소실되었고 토시 결수 기록도 죄다 사라졌다. 훗날 광해군이양전 사업을 시작하여 다시 양안을 만들었는데, 토지 결수가 채 30만 결에못 미쳤다. 전쟁으로 전 국토 70% 이상의 농경지가 황폐화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휴전에 찬성할 수 없었다. 일본군이 완전히철수하지 않은 채 남해안에 왜성을 쌓고 웅크리고 있는 상태에서 조선 조정은 도저히 휴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와 일본의 휴전에 대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곧이어 명나라 심유경과 일본군 고니시가 주도하는 강화협상이 진행되었다. 물론조선은 강화협상에 반대하였지만 명나라는 조선의 의견을 무시한 채 협상에 임했다.
명나라와 일본의 요구 조건은 너무 달랐다. 명나라의 주장은 일본군의항복과칠군이었고, 일본의 주장은 조선 영토 분할 등이었기에 협상 조건이 서로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그러자 심유경과 고니시는 명나라와 일본 양국을 모두 속이는 밀실협상을 전개하였다.
그 과정 중 조선에는 일본군의 한양 철수와 함경도에서 잡힌 임해군과 순화군의 석방이라는 선물이 주어졌다. 대신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할때 조선군의 움직임이 통제되어야 했다.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일본사>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일본군이 한양에서 후퇴할 때 조선이 추격전을 전개했더라면 전멸을면치 못했을 것이다.‘ - P208

어떤 사람이 황진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충청도 병마사이니 경상도 진주성 수비와 직접 관계가 없소. 나와 밖에서 싸웁시다."
하니 황진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김천일과 더불어 약속을 하였으니 죽을지언정 그 약속을 저버릴 수 없소."

<선조수정실록》위 사료의 어떤 사람은 곽재우였다. 죽음의 공간이 될 수 있었던 진주성에 들어가기를 거부했고, 후방에서 구원과 교란 작전조차 하지 않았던 권율과 곽재우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전략 전술 차원에서 입장의 차이는 있을 수 있고, 어떤 행동이 국익에도움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진주성으로 피난한 6만여 명의 백성을 외면했던 이들을, 그 백성을 지키고자 아무 연고도 없는 진주성에 모여들어 장렬히 싸우다 죽어간 이들보다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9일 만에 점령했지만 전쟁 동력을 크게 상실했다.
진주성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일본군 3만 이상의 사상자가 생겨났던 것이다. 진주성을 점령하고도 일본군은 호남을 공격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황진을 비롯한 진주성 주민들의 처절한 저항으로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할 때까지 4년간 휴전이 유지될 수 있었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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