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가 빵집에서 나타나더니 사뿐히 갓돌을 벗어나 곧장 그를 향해 온다. 푸들이 자갈길에 쪼그려 오줌을 누고, 소녀는 사뿐히 왼쪽으로 틀어 개를 피한다. 그녀는 두 번째로 베르너에게 다가오면서, 입술을 부드럽게 움직여 혼잣말로 되, 트루아, 카트르 - 숫자를 센다. 베르너가 그녀 콧등의 주근깨를 셀 수 있을 정도로, 그녀 배낭속 빵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가까이 오고 있다. 안개가 뿜어낸  100만 개의 물방울이 그녀의 모직 원피스 보풀과 머리칼을 따라 구슬처럼 맺히고, 빛은 그녀에게 은테를 두른다.
그는 못 박힌 듯 서 있다. 지나갈 때 보이는 그녀의 길고 창백한목은 베르너로선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냘퍼 보인다.
그녀는 그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그녀의 머릿속엔 아침 말고 다른 어떤 것도 없는 건가 싶다. 그는 생각한다. 이것이 술포르타에서 늘 가르쳤던 순수일 거야.
그는 벽에 등을 밀듯이 붙인다. 그녀의 지팡이 끝이 그의 부츠코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간다. 그렇게 그녀는 원피스 자락을 가볍게 흔들면서 지팡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지나가고, 그는 그녀가 계속해서 길을 걸어가는 것을, 그러다 마침내 안개 속에 파묻힐 때까지 지켜본다. - P290

우리는 모두 단 하나의 세포에서 생겨난다. 티끌보다도 작은, 아니, 훨씬 더 작은 세포에서 나뉘고, 증식하고, 더해지고 덜어지면서, 물질의 주체는 바뀌고, 원자들이 흘러들어 가고 나오며, 분자들이 빙글빙글 돌고, 단백질이 서로 합쳐지며, 미토콘드리아는 산화명령을 보낸다. 우리 존재는 미세한 전기가 모이면서 시작된다. 폐, 뇌, 심장. 사십 주 후에 6조나 되는 세포들이 죔쇠 같은 우리 어머니의 산도(産道)에서 뭉개지면서 우리는 울부짖는다. 그런 후 세계가 우리에게 들어서기 시작한다. - P368

그녀는 생각한다. 매시간, 전쟁을 과거의 기억으로 간직할 뿐인누군가가 세상 밖으로 떨어져 나가고 있다.
우리는 풀 속에서 다시 일어설 것이다. 꽃 속에서, 노래 속에서.
미셸이 그녀의 팔을 잡고 그들은 함께 오솔길을 따라 구불구불내려가서 퀴비에 거리로 향하는 문을 지난다. 그녀는 빗물 배수관하나, 빗물배수관둘, 셋, 넷을 지나고, 집에 도착하자 말한다. "여기서 그냥 가도 돼, 미셸 집까지 잘 찾아갈 수 있지?"
"당연하죠."
"그럼 다음 주에 보자."
그는 할머니의 한쪽 뺨에 입을 맞춘다. "다음 주에 봐요, 할머니."
그녀는 손자의 발소리가 희미해질 때까지 귀 기울인다. 이윽고 차들의 한숨 소리와 기차들이 덜거덕거리는 소리와 추위 속에서 발을 재는 모든 사람의 소리만 가득 찬다. - P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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