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명나라와 일본의 휴전 협상이 실패로 끝나고 누가 보더라도 일본의 재침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와중에 요시라가 은밀히 김응남에게 속삭였다.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가 지금 대마도까지 와 있습니다. 언제 부산으로 건너올지 모르는 상황이지요.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를 요격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건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하는 고니시 장군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 이순신은 이것이 요시라의 간계임을 알았다. 아니 설령 일본이 파놓은함정이 아니더라도 대마도에서 부산으로 건너오는 가토를 요격하는 것은불가능했다. 가토가 언제 건너오는지도 알 수 없을 뿐더러 부산과 대마도사이에는 섬도 없고 함대의 정박지도 없었다. 판옥선이 바다 위에 며칠이고 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부산 앞바다는 파도도 높았다. 그리고 부산은 적의 전진 기지였다. 적의 대병력을 등 뒤에 두고 언제 올지모르는 적을 기다렸다 요격하라? 그것도 바다에서? 그럼에도 이순신은조정의 명을 받들어 부산 앞바다까지 출정을 감행했다. 이순신 역시 당시 조정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 명령을 받들지않는다면 자신이 파직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나라의 운명이 걱정되기에, 이순신은 휘하의 병들에게 한없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부산 앞바다로 나아갔다. 못난 임금 때문에 이 험한 전장에서 안 해도 되는 고생을해야 하는 병졸들을 바라보며 고뇌했을 이순신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이순신은 선조의 출정 명령이 불가함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출정을강행하였다. 그럼에도 선조는 이순신이 가토를 요격하지 않았다며 이순신을 매섭게 탓하고 나섰다. - P244
다음은 원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이다.
다만 수륙의 일을 헤아려 말한다면 우리나라의 위무는 오로지 수군에달려 있습니다. (중략) 원하건대 조정에서 수군으로서 바다 밖에서 맞아 공격해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이 없게될 것입니다. 이는 신(원균)이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바다를 지키고 있어서 이런 일을 잘 알기 때문에 이제 감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우러러 아룁니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2일>
원균의 속셈은 뻔했다. 이순신 대신 자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준다면 주상 전하의 뜻을 받들어 부산 앞바다에 나아가 대마도발 가토의 증원군과 보급품을 막아 우리 수군의 위엄을 보이겠노라는 것이었다. 원균의 장계가 있고 며칠 뒤, 이번에는 윤두수가 한술 더 뜬다.
이순신의 죄상은 임금께서도 이미 통촉하시지만 이번 일은 나라의 인심이 모두 분노해 하고 있으니, (중략)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꾸는 것이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이순신을 체직시켜야 할듯합니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7>
원균은 윤두수와 사돈지간이었고, 윤두수는 선조와 사돈관계였다. - P250
이순신을 잡아올 때 원균과 교대한 뒤에 잡아올 것으로 말해 보내라. 또이순신이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대치하여 있다면 잡아오기에 온당하지 못할 것이니, 전투가 끝난 틈을 타서 잡아올 것도 말해 보내라. <선조실록 1597년 2월 6일>
선조는 혹시 모를 이순신의 반발을 분명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순신을 파직하기 전에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미리 원균을 임명하고 한산도의 병력을 이순신으로부터 원균이 인수인계받을 수 있도록 명하는 꼼꼼함을 보였다. 1597년 2월 6일 이순신에 대한 파직 명령이 내려졌다. 그 명을 받은 선전관이 한산도까지 내려오는 데 10일 정도 걸렸다. 이때 이순신은 선조의 지시대로 부산 앞바다에 나가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 P252
우의정 정탁이 이순신을 살려 보고자 장문의 글을 선조에게 올렸다.
신구차伸求箚.
우의정 정탁은 엎드려 아닙니다.
이 모(이순신)는 몸소 큰 죄를 지어 죄명조차 무거우나 성상께서는 얼른극형을 내리시지 않으시고 두둔하여 문초하시다가 그 뒤에 엄격히 추궁하도록 허락하시니 (중략) 성상께서 인을 베푸시는 한 가닥 생각으로혹시나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으시고자 바라심에서 하심이라 신은 이에 감격함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중략) 이 모는 참으로 장수의 재질이 있으며, 수륙전에도 못하는 일이없으므로 이런 인물은 과연 쉽게 얻지 못할 뿐더러, 이는 변방 백성들의 촉망하는 바요, 왜적들이 무서워하고 있는데, 만일 죄명이 엄중하다는 이유로 조금도 용서해줄 수가 없다고 하고, 큰 벌을 내리기까지 한다면 공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 내키지 않을 것이요, 능력이 있는 자도스스로 더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은혜로운 하명으로 문초를 덜어주셔서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보람 있게 하시면 성상의 은혜를 천지 부모와 같이 받들어 목숨을 걸고 갚으려는 마음이 반드시 저 명실 장군만 못지않을 것입니다. - P256
이순신이 의금부에서 풀려난 바로 다음날부터 전장인 남해 바다를 향해 떠나가는 백의종군 길이 시작되었다. 두번째 백의종군이었다. 목숨은 부지했지만 한 달여의 옥고를 치른 불편한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이순신이 가는 길목마다 많은 백성들이 이순신을 배웅하러 나왔다. 이순신은 자신보다 전란에 시달린 백성들을 위로했다. 백성들은 이순신이 당한 고초를 다 안다는 듯이 목메어 울었고 이순신의 무운장구를빌었다. 백의종군 길 이틀 만에 이순신은 자신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충남 아산에 당도했다. 아산에서 쉬는 동안 이순신은 불길한 꿈을 꾸었다.
4월 11일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몹시 번잡스러워서 이루다 말할 수없었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무엇에 홀린 듯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없으니 이 무슨 조짐일까. 병환 중인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흘렀다. 종을 보내서 어머니의 소식을 알아오게 하였다. <난중일기> 이순신의 효심은 대단했다. 《난중일기>에도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백 번이 넘게 나온다. 이순신의 어머니 변 씨는 아들을 전장으로 떠나보낼 때면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어서 가서 나라의 원수를 크게 갚아라." 이순신에게 어머니는 하늘과 같은 존재였다. 어머니의 소식을 알아보라고 보냈던 종이 돌아와 어머니의 부음을 전했다. 불길한 꿈을 꾼 그날이 바로 이순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었다. 여수에 계셨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마당에 주저앉아대성통곡을 했다.
4월 13일,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난중일기> - P258
이후 일본군이 조선에 한양을 내어주고 남해안으로 후퇴하면서 명과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은 본격화되었다. 심유경은 고니시와 함께 일본에건너가 도요토미히데요시를 만났다. 이때 도요토미는 심유경에게 일곱가지의 요구사항을 내밀었다.
첫째 명나라 황제의 공주를 일본 국왕의 후비로 삼는다. 둘째 명나라와 일본 간의 무역을 재개하여 선과 상선을 왕래하도록 한다. 셋째 명나라와 일본 양국의 전권 대신이 통교를 서약하는 문서를 교환한다. 넷째 조선의 4도를 일본에 할양한다. 다섯째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일본에 볼모로 보낸다. 여섯째일본은 포로가 된 조선의 두 왕자와 대신을 송환한다. 일곱째 조선의 중신이 일본에 영원한 항복을 서약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사항은 명나라로서 단 하나도 받아들일 수없는 내용이었다. 심유경은 난감했다. 이 내용을 고스란히 명나라로 가져갔다가는 자기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명나라에서도 심유경에게 재촉을 하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항복문서를 어서 받아 오라.‘ 심유경은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거짓 항복문서를 만들어 명나라 황제에게 바쳤다. 그리고 명 황제는 일본 측에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첫째 조선에서 완전히 철병할 것. 둘째 조선의 두 왕자를 송환할 것. 셋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공식적으로 조선 침략에 대해 사과할 것.
이러한 황제의 요구서를 일본으로 가져갔다가는 고니시 역시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답을 찾지 못했던 심유경과 고니시는 서로 시간만 질질끌었고, 그러다 보니 조선에서의 전쟁은 4년간의 휴전 아닌 휴전이 유지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 명나라 황제는 자신이 심유경에게 속았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이로 인해 당시 조선에 출병을 주장했던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이 감옥에 갇혀 죽었고, 심유경 역시 목이 잘리고 말았다. - P271
일본의 첩보선과 보급선을 쫓다 실패한 조선군은 간신히 배를 돌려 가덕도에 함대를 정박시켰다. 갈증에 지친 400여 명의 조선군들이 대오를지키지 않고 물을 찾아 가덕도에 급히 내렸다. 그러나 가덕도에는 벌써 일본군이 매복 중이었다. 놀란 원균은 가덕도에 내린 400여 명의 조선군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순신과 모든 게 비교되는 원균이었다. 과거 이순신도 항해 중 가덕도에 물을 뜨기 위해 5명의 수군을 내려 보냈고 그곳에 매복 중이던 일본군에게 한 명이 죽고 4명이 포로로 잡혔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4명의 포로를 구출하기 위해 함대로 가덕도를 포위하여 일본군을 압박하였고, 일본은 4명의 조선 수군을 이순신에게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4명의 아군을 살리겠다고 전군을 동원하여 섬을 포위하고 무력 시위를했던 이순신과 달리 먼저 살겠다고 400여 명의 전우를 버린 채 도망가는원균, 이런 차이가 전두를 함께 수행하던 휘하 장수들과 군사들의 사기에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했다. 이 같은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에게 쓴 편지가 의미심장하다. ‘수군은 오래지 않아 패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디서 죽을지 모르겠습니다.‘ - P282
이순신은 진주에 머물던 중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되었다.
임금은 이와 같이 이르노라. 생각하건대 그대의 명성은 일찍이 수사로 임명되던 그날부터 드러났고, 그대의 공로와 업적은 임진년의 큰 승첩이 있은 후부터 크게 떨쳐 변방의 군사들은 마음속으로 그대를 만리장성처럼 든든하게 믿어왔었는데, 지난번에 그대의 직책을 교체시키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이고 백의종군하도록 했던 것은 역시 나의 모책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며, 그 결과 오늘의 이런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 중 일부 - P296
이순신도 한 가정의 아버지였다. 자식을 잃은 아픔이 하룻밤으로 치유될 리 만무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이가 이순신뿐이었으랴, 이순신은 부하들 앞에서 자식을 잃은 아비의 슬픔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나는 내일이 막내 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이 되는 날인데도 마음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난중일기 1597년 10월 16일>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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