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이 제해권을 장악하지 못했다면, 일본 수군은 서해 바다를 돌아서 한강을 타고 한양으로, 예성강을 타고 개성으로,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으로의 군대 충원과 보급이 가능했을 것이다. 일본군은 압록강을 타고들어가 의주에 있는 선조가 명나라로 도망가는 길을 막았을 것이고 조선의 임금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해전에서 조선군의 승리가 일본 육군의 발을 묶었고 전쟁의 양상을 바꿔버린 것이었다.

임진년 9월에 치러진 부산포해전 이후 전라좌수영의 수군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추수기 수확에 힘써야 했다. 세액 3분의 1이 곡창지대인 호남에서 충당되었던 조선이었다. 전쟁으로 전 국토가 유린당한 상태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호남의 쌀을 수확하는 것은 전투의 승리만큼 중요한 일이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겨울이 찾아오면서 처참했던 임진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 P187

전쟁이 발발했던 1592년 4월은 양력으로 5월 후반이었다. 모내기를해야 할 때에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의 토지 결수는 대략 150만 결 정도였다. 그런데 전쟁통에 경복궁이 점령당하며 토지대장인 양안이 소실되었고 토시 결수 기록도 죄다 사라졌다. 훗날 광해군이양전 사업을 시작하여 다시 양안을 만들었는데, 토지 결수가 채 30만 결에못 미쳤다. 전쟁으로 전 국토 70% 이상의 농경지가 황폐화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휴전에 찬성할 수 없었다. 일본군이 완전히철수하지 않은 채 남해안에 왜성을 쌓고 웅크리고 있는 상태에서 조선 조정은 도저히 휴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와 일본의 휴전에 대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곧이어 명나라 심유경과 일본군 고니시가 주도하는 강화협상이 진행되었다. 물론조선은 강화협상에 반대하였지만 명나라는 조선의 의견을 무시한 채 협상에 임했다.
명나라와 일본의 요구 조건은 너무 달랐다. 명나라의 주장은 일본군의항복과칠군이었고, 일본의 주장은 조선 영토 분할 등이었기에 협상 조건이 서로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그러자 심유경과 고니시는 명나라와 일본 양국을 모두 속이는 밀실협상을 전개하였다.
그 과정 중 조선에는 일본군의 한양 철수와 함경도에서 잡힌 임해군과 순화군의 석방이라는 선물이 주어졌다. 대신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할때 조선군의 움직임이 통제되어야 했다.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일본사>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일본군이 한양에서 후퇴할 때 조선이 추격전을 전개했더라면 전멸을면치 못했을 것이다.‘ - P208

어떤 사람이 황진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충청도 병마사이니 경상도 진주성 수비와 직접 관계가 없소. 나와 밖에서 싸웁시다."
하니 황진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김천일과 더불어 약속을 하였으니 죽을지언정 그 약속을 저버릴 수 없소."

<선조수정실록》위 사료의 어떤 사람은 곽재우였다. 죽음의 공간이 될 수 있었던 진주성에 들어가기를 거부했고, 후방에서 구원과 교란 작전조차 하지 않았던 권율과 곽재우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전략 전술 차원에서 입장의 차이는 있을 수 있고, 어떤 행동이 국익에도움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진주성으로 피난한 6만여 명의 백성을 외면했던 이들을, 그 백성을 지키고자 아무 연고도 없는 진주성에 모여들어 장렬히 싸우다 죽어간 이들보다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9일 만에 점령했지만 전쟁 동력을 크게 상실했다.
진주성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일본군 3만 이상의 사상자가 생겨났던 것이다. 진주성을 점령하고도 일본군은 호남을 공격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황진을 비롯한 진주성 주민들의 처절한 저항으로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할 때까지 4년간 휴전이 유지될 수 있었다. - P2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