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은 분명 험난하고 지독한 곳을 건너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거기에는 새하얀 목련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안개 속에서 료안에게 외쳤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그는 자신 또한 료안이라고 말했는데, 료안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웃으며 자신들이 서 있는 고원의 평평함에 대해 얘기했다.
"이곳은 정말로 평평하군요."
"네, 평평합니다. 하지만 이 평평함은 험준함에 대한 평평함입니다. 진정한 평평함은 아닙니다." - P50

"얻어맞아 팅팅 부은 얼굴이 미워서 내가 ‘이딴 짓 하지 말고,
하던 대로 글이나 열심히 써‘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글쓴다고인생이 가만히 놔둘 것 같니?‘라면서 흘겨보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그래도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것보다는 낫잖아. 해도 안 되는일, 질 게 뻔한 일을 왜 하고 있어?‘라고 했더니 이렇게 대답했어요. ‘버티고 버티다가 넘어지긴 다 마찬가지야. 근데 넘어진다고 끝이 아니야. 그다음이 있어. 너도 KO를 당해 링 바닥에 누워 있어보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넘어져 있으면 조금 전이랑 공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져. 세상이 뒤로 쑥 물러나면서 나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이 세상에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와. 나한테로.‘ 무슨 바람이냐고 물었더니 ‘세컨드윈드‘라고 하더라구요. 동양 챔피언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흉내내서 젠체하는 거였는데, 나중에 그 ‘두번째 바람‘이라는 말이 두고두고 생각이 나더군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렇게 기억하고 있지요."
맞다. 그랬다. 그랬던 적이 있었다. - P60

아빠는 제가 쓴 문장들에 줄을 그으면서 말했습니다. 너는 어떤 생각이든 할 수 있어. 하지만 이건 네가 아니야. 너는 이 생각들에 줄을 긋는 사람이야. 네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 겁먹지말고 가만히 지켜봐. 그다음에 너는 그 생각에 줄을 그어 지울 수있어. 지금은 공책에 써서 지우지만, 나중에는 머릿속에서부터 지울 수 있어. 어떤 생각을 지우고 어떤 생각을 남길지는 네가 선택하는 거야. 마음껏 생각하고 그중에서 가장 좋은 생각을 선택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그게 너의 미래가 될 거야. 그 소설가가 "모든 글‘쓰기‘는 글‘짓기‘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저는 아빠의 그 말을 떠올렸어요. 그렇게 수많은 생각들을 받아 적고 또 지워가면서 십대를 보냈습니다. 차츰 저는 제 머리를 라디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끌 수 없는 라디오 같은 것 말이에요. 거기에서는 온갖 방송들이 흘러나오니까 마음에 드는 방송을 찾아 들으면 되는 것이죠. 어쩌면 이건 선생님의 달 이야기와 같은 얘기일 수도있어요. - P86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어요. 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달을 향해 걷는 것처럼 희망의 방향만 찾을 수 있다면, 이라고. 그래서 저는 치매에 걸려 우연히 떠오른 생각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 아빠의 마음을, 마치 치매에 걸린 것처럼 사전 경고도 없이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는 신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처럼 살아보기로 한 거예요.  - P97

아내의 옛 책을 찾은 건 한 달 뒤, 제작팀과 함께 몽골로 떠날무렵이었다. 책이 두툼하게 부풀어올랐고 페이지가 바랬지만, 새책보다 정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 꾸린 여행 가방에 그 책을 밀어넣었다. 정미가 죽은 뒤로 마음의 가장자리는 매 순간 조금씩 시간에 쏠려 과거로 떨어지고 있었다. - P103

"글쎄. 난 세상은 점점 좋아진다고 생각해. 지금 슬퍼서 우는 사람에게도 우리는 모든 걸 이야기로 만들 수 있으니까. 이야기덕분에 만물은 끝없이 진화하고 있어. 하지만 난 비관주의자야.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비관주의가 도움이 돼. 비관적이지 않으면 굳이 그걸 이야기로 남길필요가 없을 테니까. 이야기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인생도 바꿀 수 있지 않겠어? 누가 도와주는 게 아니야. 이걸 다 우리가 할 수 있어. 우리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어. 그게 나의 믿음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찾아와 그것도 자주. 모든 믿음이 시들해지는 순간이 있어. 인간에 대한 신뢰도 접어두고 싶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때가 그럴때가 바로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 아무리 세찬 모래 폭풍이라고 할지라도 지나간다는 것을 믿는, 버스안의 고개 숙인 인도 사람들처럼. 그건 그 책을 읽기 전부터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였어.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금도 책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그분들은 왜 그렇게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할까? 나는왜 같은 이야기를 읽고 또 읽을까?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된 거야. 그 이유를."
"이유가 뭔데?"
"언젠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되기 때문이지." - P120

 의사가 시키는 대로 병상에 누워 있던 그는 간호사가 그의 왼팔에 수액 바늘을 꽂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장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정미는 새벽별처럼 짧은 시간 동안 지구에서 살다가 마치 원래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사라졌다. 분명 서로의 육체에 가닿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시절이 두 사람에게도 있었건만, 그리고 그때는 거기 정미가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모든 게 의심스러워졌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다른 모든 생명들에게 그랬듯 그들의 인생에도 시간의 폭풍이 불어닥쳤고, 그렇게 그들은 겹겹이 쌓인 깊은 시간의 지층 속으로 파묻히고 있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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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스가 설명하는 방식은 복권추첨과 비슷하다. 무성생식을하는 것은 번호가 같은 복권을 많이 갖고 있는 것과 같다. 당첨 확률을 높이려면 번호가 다른 복권을 여러 장 갖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후손이 변형되거나 색다른 환경에 처하기 쉬울 때, 성은 종뿐 아니라 개체에게도 유리하다.
윌리엄스는 특히 진디나 단성생식을 하는 윤충에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수세대에 걸쳐 단 한 번 성을 가진다. 진디는 여름에 장미 덤불 속에서 번식하고, 단성생식을 하는 윤충은 거리의 웅덩이에서 번식한다. 그러나 여름이 가면 진디나 단성생식을 하는 윤충의 마지막세대는 완전히 유성생식을 하게 된다. 그들은 암컷과 수컷을 낳고 새끼들은 서로의 짝을 찾아 교미하여 튼튼한 자손이 더 좋은 조건이 돌아올 때까지 딱딱한 포낭에 싸여 겨울이나 가뭄을 이겨내도록한다. 윌리엄스가 볼 때 이것은 복권추첨 이론Lottery theory과 맞아떨어졌다. 주변 조건이 우호적이고 예측 가능할 때는 되도록 빨리 생식하는 것이 좋다. 무성생식의 방법으로 그러나 이런 아늑한 세계가 파괴되어, 다음 세대의 진디나 윤충들이 새로운 거주지를 찾거나 예전의 거주지가 원상태로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할 때에는, 서로다른 다양한 자손들을 낳고 그중 하나가 적자로 살아남기를 바라는것이 유리했다. - P101

진보의 사다리라는 낡은 개념이 아직도 목적론의 형태로 남아 있다는 말이다. 진화는 종들에게 이롭기 때문에 종들은 진화가 더 빨리 진행되도록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진화의 특징은 변화가 아닌 안정이다. 성, 유전자 수리, 후세에게 결점 없는 정자와 난자를 남겨주기 위해 고등동물들이 지닌 선별 메커니즘과 같은 이 모든 것들이 변화를 막기 위한 수단이다. 인간이 아니라 실러캔스가 유전자체계의 승리자이다. 실러캔스는 유전형질을 이루는 화학물질에 가해지는 끊임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수백만 세대 동안 원래 형태를계속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성에 대해 낡은 변절자 가설은 성이 진화를 가속화하는 작용을 한다고 했다. 이 모델은 돌연변이가 다양성의 근원이기 때문에 생명체들이 돌연변이 발생률을 꽤 높게 유지하려 할 것이고, 나쁜 돌연변이를 아주 잘 골라낸다고 했다. 그렇지만 윌리엄스는 어떤 생물이라도 돌연변이 발생률을 되도록 최소화하려는 행동 이외의 짓을 한다는 증거는 발견된 적이 없다고 했다. 모든 생물은 돌연변이 발생률을 0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진화는 돌연변이 방지의 실패에 달려 있다. - P109

붉은 여왕 이론은 세상이 필사적인 경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세상은 정말로 계속 변화한다. 그렇지만 방금 전에는 종들이 몇 세대 동안 안정적이며 좀처럼 변화를 겪지 않는다고 하지 않있는가? 그렇다. 붉은 여왕 이론의 핵심은 그녀가 계속 달리고 있지만 항상 같은 장소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결국 시작한 지점으로 되돌아온다. 변화는 있지만 발전은 없다.
붉은 여왕 이론에 따르면 성은 더 커지거나, 더 잘 위장하거나, 더 추위를 잘 견디거나, 더 잘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생물의 세계에 적응하는 것과 아무 관계가 없다. 성의 존재 이유는 반격하는 적과 싸우는 것이 전부이다.
생물학자들은 너무 이른 죽음에 대한 물리적 원인만을 과대평가했지, 생물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화를 설명하는대부분의 글에서 가뭄, 서리, 바람, 기근은 생존의 거대한 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런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낙타의혹, 북극곰의 털, 술통 같은 윤형동물의 고온저항성 몸 등과 같은 물리적인 적응의 신비는 진화의 위대한 성과 중 하나로 여겨진다. 성에 대한 최초의 생태학 이론들은 모두 물리적 환경에 대한 이러한 적응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렇지만 뒤엉킨 강둑 이론과 함께 다른 주제가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붉은 여왕의 행군에서 이는 압도적인 음색을 갖는다. 사실 동물을 죽이거나 생식을 억제하는 요소가 물리적 요인일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기생동물, 경쟁자, 그리고 육식동물 같은 다른 동물이 다. 포화된 연못에서 굶고 있는 물벼룩은 경쟁의 희생양이지 식량 부족의 희생양은 아니다. 대체로 육식동물과 기생동물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세상 대부분의 죽음을 일으킨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은 보통 곰팡이로 인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청어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보통 더 큰 물고기에게 잡아먹히거나 그물에 걸려서이다. 무엇이 몇 세기 전에 당신 조상들을 죽였는가? 천연두, 결핵, 폐렴, 전염병, 성홍열, 설사 등이었다. 사고나 기근이 사람들을 약화시켰지만, 감염은 그들을 죽인다. 부유층의 사람들 중 노령이나, 암, 심장마비 등으로 죽은 이들도 있었지만 그 수는 적었다. - P112

기생생물은 육식동물보다 두 가지 이유에서 더 파괴적인 효과를나타낸다. 하나는 그들이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자신들과 거대한 백상어 외에는 포식자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아주 많은 기생생물을 가지고 있다. 토끼가 담비, 족제비, 여우, 매, 개와 사람 등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더 많은 토끼가 이, 벼룩, 모기, 촌충, 점액종 바이러스에게 죽는다.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 이유의 원인이다. 바로 포식자는 먹이보다 덩치가 크지만, 기생생물은대체로 숙주보다 작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생생물의 생존기간이 짧아서 주어진 시간 동안 숙주보다 더 많은 세대를 거친다는 의미이다. 내장 속의 박테리아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인류가 유인원에서부터 진화해온 전체 세대의 6배를 거친다. 그 결과 숙주보다 더빨리 번식하여 숙주의 개체수를 감소시키거나 조절할 수 있다. 포식자는 단지 먹이가 풍부한가에 따라 많아졌다 적어졌다 할 뿐이다.
기생생물과 숙주는 아주 친밀한 진화관계를 맺고 있다. 기생생물의 공격이 더 효과적일수록(더 많은 숙주를 침범하거나 하나의 숙주로부터 더 많은 자원을 얻을수록), 숙주의 생존 기회는 방어책을 구축할수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숙주가 잘 방어할수록 이 방어책을 이겨낼 수 있는 기생생물이 자연선택될 것이다. 그렇기에 이익은 항상 한쪽에서 다른 쪽 사이를 오간다. 위기가 닥치면 닥칠수록 숙주와 기생생물 둘 다 힘을 다해서 싸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결코 승리 없이 일시적인 휴식만을 얻는 진정한 붉은 여왕의 세계이다. - P114

또한 변화가 가득한 게 성의 세계이기도 하다. 성은 매 세대 유전자를 바꿔야 할 훌륭한 동기로 작용하는데, 그것이야말로 성의 역할이다. 이전 세대에서 특정 유전자들이 기생생물의 공격을 잘 방어해냈다면, 그것이야말로 다음 세대에서 동일한 유전자 조합을 피해야하는 가장 좋은 이유이다. 다음 세대가 돌아올 때쯤이면, 기생생물들은 전 세대에서 가장 우수했던 방어에 대한 해답을 알아낼 것이기때문이다. 마치 운동과 같다. 체스나 축구에서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라도 상대방이 그 해법을 터득하면 더 이상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공격의 모든 혁신은 곧 방어의 혁신에 의해 무마된다. - P115

그렇지만 진화에서는 진화 속도가 느린것들이 빠른 것들보다 유전자를 더 많이 섞는다. 세대의 길이와 재조합 정도의 연관성에 대한 오스틴 버트의 발견은 붉은 여왕이 작용한다는 증거이다. 기생생물이 대항할 것을 염두에 두면 세대가 길수록 유전자의 재조합이 많이 일어나는 편이 좋다.  - P121

그렇지만 붉은 여왕의 경우는 이보다 더 신비스럽고 강력하다. 성교를 거쳐 태어난 자손이 자신의 클론보다 더 생존할 가능성이 크다. 성의 이점은 단일세대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이는 한 세대에공통적인 어떠한 자물쇠라도 이에 맞는 열쇠가 기생생물 사이에서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몇 세대 후에는 반드시 피해야 할자물쇠가 되는 것이다. 그때쯤이면 이에 맞는 열쇠가 흔할 테니 말이다. 독특한 모양의 자물쇠가 매우 유리하게 된다.
유성생식을 하는 좋은 무성생식 종에게는 불가능한 자물쇠의 도서관에 의존할 수 있다. 이 도서관을 다른 말로 하면 이형접합체로異型接合體, 혹은 다형多型 현상인데, 거의 비슷한 뜻이다. 이것은 근친교배를 거듭하면 잃게 되는 자원이다. 즉 대부분의 개체군(다형현상)과 모든 개체(이형접합체)에게서 한순간에 동일 유전자의 다양한 형태가 발견된다는 의미이다. 서양인의 ‘다형화‘된 푸른색과 갈색 눈동자는 좋은 예이다. 갈색 눈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푸른 눈동자의 열성 유전자도 지니므로, 이들은 이형접합체이다. 이런 다형현상은 순수 다윈론자들에게는 성만큼이나 의문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이는 한 유전자가 다른 유전자와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갈색 눈이 푸른 눈보다 조금이라도 우성이면(더 정확히 말해서 정상 유전자가 겸상적혈구빈혈증 유전자보다 우성이라면), 갈색 눈은 푸른 눈을 멸종시켰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이런 다양한 형태의 유전자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일까? 왜 이렇게 이형접합체가 다양한 것일까? 겸상적혈구빈혈증의 경우에는 이 유전자가 말라리아를 퇴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형접합체(정상 유전자 하나와 겸상적혈구 유전자 하나를 지닌 개체들은 말라리아가 만한 곳에서 정상 유전자를 지닌 개체들보다 더 유리하다. 하지만 동형접합체들(두 개의 정상 유전자나 겸상적혈구 유전자를 지닌 개체들)은각각 말라리아나 겸상적혈구빈혈증에 시달린다. - P122

 해밀턴이 말한 대로 반反기생성 적응은 끊임없는 퇴화이다."
무성생식 종에서는 불리한 유전자가 멸종해버리지만, 유성생식 종에서는 그저 희귀해질 뿐이고, 그랬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 해밀턴은 "우리 이론에서 성의 핵심은 지금은 쓸모없지만 나중에는 유하리라 예상되는 유전자를 저장한다는 데 있다. 성은 끊임없이 유전자를 조합하려 하고, 불필요한 것이 필요하게 될 때까지 기다린다"고 적었다. 질병 저항성에는 영구적인 이상 상황이 존재할 수 없다. 비영구적인 퇴화 현상이 돌고 돌 뿐이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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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을 볼때마다 나는 1999년에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생각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유체 이탈, 도플갱어, 예지몽, 인체자연발화, 공중부양 등등 불가사의한 능력이나 현상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정기 구독하던 어린이 잡지에 매달 그런 기사가 한 꼭지는 실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회 전반적으로도 역술이나 점, 단학 따위가 판을 치고 있었다. 한강 다리가 무너지거나 IMF 사태로 대량 실직이 일어나는 등예측 불허의 현실 속에서 다들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 때라 그런 비과학적인 말들에서 위안을 찾으려고 했던 모양이다. - P9

그러다가 2012년 ‘춤추는 말의 숫자에 달린 원이 아홉개가 되는 때, 고요한 아침으로부터 종말이 올 것‘이라는 그의 예언시가 다시 주목을 받았다. 그 예언을 싸이의 <강남스타일> 유튜브 조회수가 십억 회가 넘어가면 지구 종말이 온다는 의미로 해석했기 때문이었는데, 예언이라는 게 이런 식으로 이현령비현령의 사후 추정이라는 걸 이보다 잘 보여주는 예는 없을 것이다.
말춤이라서 말세인가? 말장난을 하려는 게 아니다. 소설가로서 나는 예언의 내용보다는 그 형식이 언어여야만 한다는 게 더 흥미롭다. 어떤 예언가가 환상 속에서 미래의 뭔가를 봤다고 해도 그는 그것을 자신의 지식 수준에 맞춰 언어로 표현해야만 한다. 실제로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면 모를까, 그걸 언어로 변환한 이상 그 진의는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게다가 번역까지된다면 왜곡은 피할 길이 없다. 결국 예언은 그 형식 때문에 빗나갈 가능성이 많은 셈이다.  - P10

"그 한 문장으로 판매금지가 결정될 수 있단 말인가요?"
"군부가 판매금지를 시킬 때는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요.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요. 그게 독재정권이 하는 일입니다.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 찾아야 해요. 정권이 싫어하는 게 뭔지를 그렇게 독재정권하의 사람들은 스스로 내적 검열관을 만들어가는 거예요. 그런 탓에 판매금지된 책을 구해 읽어보면 가끔 어리둥절할 때가 있어요.  - P16

"과거는 제가 분명히 겪은 일이지만, 앞으로 이 친구와 결혼한다는 건 가능성일 뿐이잖아요."
나는 그 이야기가 기억나지 않았지만 지민은 그렇게 말했다고한다.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미래를 기억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그건 지민씨의 엄마가 소설에 쓴 말이에요. 소설 속 연인은 두번의 시간여행을 통해 시간이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시간이 없으니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어요. 오직 이 순간의 현재만 존재하죠. 그럼에도 인간은 지나온 시간에만 의미를 두고 과거에서 현재의 원인을 찾습니다. 시간이 20세기에서 21세기로 흐르든, 19세기로 흐르든 마찬가지예요. 안타까운 건 이런 멋진 소설을 쓰고서도 지민씨의 엄마가 이십 년 뒤의 지민씨를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에요. 가장 괴로운 순간에 대학생이 된 딸을 기억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선택은 달라졌을 겁니다. 용서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기억할 때 가능해집니다. 그러니 지금 미래를 기억해, 엄마를 불행에 빠뜨린 아버지와 그 가족들을 용서하길 바랍니다." - P29

1999년 여름, 1학기 종강파티가 끝나고 지민이 내게 자신은곧 죽을 사람이라고 말할 때만 해도 나 역시 이런 미래를 상상하지 못했다. 어릴 때 내가 상상한 미래는 지구 멸망이나 대지진, 변이 바이러스의 유행이나 제3차세계대전 같은 끔찍한 것 아니면 우주여행과 자기부상열차, 인공지능 등의 낙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1999년에 내게는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이 있었다. 미래를 기억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과 일어날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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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그녀를 잠식했다. (수전은 이런 감정이 어리석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분노를 느꼈다.) 그녀는 포로였다. (수전은 이 생각도 살펴보았다. 이것이 우스꽝스러운 생각이라고 속으로 되뇌었지만 소용없었다.) 매슈에게 반드시 말해야 했다. 하지만 뭘? 수전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감정, 그녀 스스로 경멸하는 감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감정들이 너무나 강렬해서 떨쳐버릴 수 없었다.
방학이 또 다가왔다. 이번에는 거의 두 달이나 되는 방학이었다. 수전은 의식적으로 차분하고 점잖은 태도를 유지하느라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욕실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앉아서,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아니면 평소에 비어 있는 여분의 방으로 올라갈 때도 있었다. 그녀가 거기에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이 "엄마, 엄마"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도 그녀는 죄책감을 느끼며 침묵을 지켰다. 혼자서 정원 끝까지 갈때도 있었다. 거기서 그녀는 천천히 흘러가는 갈색 강을 바라보았다. 강물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존재 속으로, 혈관 속으로 강을 받아들였다.
그러고 나서 수전은 다시 아내이자 엄마가 되어 식구들에게돌아왔다. 미소를 잃지 않고 책임감 있는 모습으로. - P296

호텔 방은 평범한 익명의 장소였다. 수전이 원하는 바로 그런곳. 수전은 가스히터에 1실링을 넣어 작동시킨 뒤, 더러운 창문을 등진 더러운 안락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혼자였다. 자신을 짓누르던 압박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도로의 자동차 소리가 아주 크게 들리더니 곧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가 살짝 잠이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배인인 미스 타운센트가 직접 찻잔을 들고 와 있었다. 수전이 너무 오랫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아서 혹시 어디가 아픈가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미스 타운센드는 쉰 살의 고독한 여성이었다. 최대한 정직하게이 호텔을 운영하고 있는 그녀는 수전에게서 자신을 이해해주는 동료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래서 방에 남아 수전과 이야기를 나눴다. 수전은 몸이 아프다는 거짓말을 자신이 더욱더 환상적으로 꾸며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리치먼드의 큰 집, 부자 남편, 네 아이라는 조건에 맞는 이야기를 꾸며내려고 하다 보니 이야기가 점점 황당해졌다. 그 대신 수전이 이렇게 말했다면 어떨까.
‘미스 타운센드, 저는 몇 시간 동안 혼자 있고 싶어서 이 호텔을 찾아왔어요. 내가 있는 곳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완전히 혼자있고 싶어서요."수전은 머릿속으로만 이 말을 하면서, 노처녀인 미스 타운센드의 얼굴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표정을 역시 머릿속으로만 그려보았다. "미스 타운센드, 우리 네 아이와 남편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아요. 이해하시겠어요? 그런데 당신 눈에서 히스테리의 기운이 번들거리고 있네요. 오로지 외로움을 간신히 참고 있는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눈빛이죠. 그걸 보니, 제 삶이 곧 당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삶 그대로라는 걸 알겠어요. 하지만요 미스 타운센드, 저는 그런 삶을 전혀 원하지 않아요. 원하신다면 제 삶을 가져가세요, 미스 타운센드, 저는 당신처럼 이 세상에서 철저히 혼자였으면 좋겠어요. 미스 타운센드, 일곱 악마가 저를 포위하고 있어요, 미스 타운센드, 그 악마가 쫓아올 수 없는 이 호텔에 머무르게 해주세요 •••••." 수전은 이런 말 대신 단순히 빈혈이 있다고만 말했다. - P304

낮 12시였다. 수전은 자유였다. 그녀는 안락의자에 앉았다. 그냥 앉았다. 눈을 감고 앉아서 혼자가 되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문에서 노크소리가 나자 그녀는 짜증이 났다. 짜증을 숨길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프레드였다. 그녀의 지시대로 5시가 되었다고 알리러 온 것이다. 프레드는 날카롭고 작은 눈으로 방을 한번 훑어보았다. 가장 먼저 침대, 흐트러진 흔적이 전혀 없었다. 마치 이 방에 아무도 없었던 것 같았다. 수전은 프레드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뒤, 모레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는 그곳을 떠났다. 그녀는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을 재우고, 남편과 자신이 먹을 저녁식사를 다시 요리했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고 돌아온 소피를 반갑게 맞았다. 이 모든 일을 수전은 유쾌하게, 기꺼이 했다. 하지만 그동안 내내 그 호텔 방을 생각하며, 온 마음으로 그곳을 갈망하고 있었다. - P317

이 방에서 수전이 뭘 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충분히쉬고 나면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양팔을 쭉 뻗고 미소를지으며 밖을 내다보았다. 익명의 존재가 된 이 순간이 귀중했다. 여기서 그녀는 네 아이의 어머니, 매슈의 아내, 파크스 부인과 소피트라우브의 고용주인 수전 롤링스가 아니었다. 친구, 교사, 상인 등과 이런저런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수전 롤링스가 아니었다. 정원이 딸린 크고 하얀 집의 안주인도 아니고, 이런저런 행사에딱 맞게 차려입을 수 있는 다양한 옷을 갖고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는 존스 부인이고 혼자였다. 그녀에게는 과거도 미래도없었다. 오랫동안 결혼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여러 책임들을 수행한 내가 지금은 여기에 있어.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언제나 똑같아. 하지만 가끔은 매슈 롤링스의 아내로서 수행해야 하는 역할들 외에는 내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래, 난 지금 여기에 있어. 만약 다시는 식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난 여기에 있을 거야……정말 이상하지!
그녀는 창턱에 몸을 기대고 거리를 내려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느꼈다.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녀는 거리 저편의 쓰러져가는 건물들, 축축하고 우중충하지만 가끔 파랗게개기도 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건물이나 하늘을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텅 빈 상태로 다시 의자에 앉았다. 머릿속이 하얀 백지 같았다. 가끔은 아무 말이나 소리 내어 말하기도 했다. 아무 의미 없는 감탄사 같은 것. 그다음에는 얄팍한 카펫의 꽃무늬나 초록색 새틴 이불의 얼룩에 대해 한마디논평을 덧붙였다. 하지만 한없이 공상에 잠기며, 아니 이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에 잠기고, 방황하고, 깜깜하게 어두워져서 공허함이 피처럼 혈관을 따라 즐겁게 도는 것을 느끼며 보내는 시간이 가장 많았다. - P318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약 네 시간이었다. 그녀는 즐겁게, 어둡게 달콤하게 그 시간을 보내며 아주아주 부드럽게 강변을 향해 미끄러졌다. 그러다 딱히 의식을 차리지 않은 상태로 의자에서일어나 얄팍한 카펫을 문으로 밀고, 창문이 단단히 닫혔는지 확인하고, 벽난로 미터기에 2실링을 넣은 뒤 가스 밸브를 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이 방의 딱딱한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서는 퀴퀴한 냄새, 땀과 섹스의 냄새가 났다.
초록색 새틴 이불 위에 똑바로 누워 있다 보니 다리가 싸늘해졌다. 그녀는 일어나서 서랍장 맨 아래 칸에서 개켜져 있는 담요를 찾아내 꼼꼼히 다리를 덮었다. 그렇게 누워서 가스가 작게 쉭쉭거리며 방 안으로, 그녀의 허파 안으로 뇌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어두운 강물로 떠갔다.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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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학자들은 수년 동안 좋은 돌연변이에 관심을 집중해왔으며, 마치 대학과 산업체가 좋은 아이디어를 교차수정하는 것처럼, 성이 집단 안에 좋은 돌연변이를 퍼뜨리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밖에서 새로운 기술 혁신을 끌어오기 위해서 기술에 ‘성‘이 필요하듯이, 단지 자신의 발명에만 의존하고 있는 동물이나 식물은 혁신이 느릴 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다른 동물이나 식물의 발명을 구걸하거나훔치거나 빌려와 서로의 발명품의 복사본을 자신의 유선자와 함께 지니는 것이다. 벼에서 높은 수확과 짧은 줄기, 그리고 병충해에 대한 내성을 함께 얻고자 하는 식물육종가들은 마치 다량의 서로 다른 발명품을 다루는 생산자처럼 행동한다. 무성식물을 다루는 육종가는 동일 계열 안에서 서서히 축적되는 새로운 발명을 기다려야 한다. 흔히 아는 보통 버섯이 지난 300여 년 동안 양식되어오면서 거의 변하지 않은 이유는 버섯에 성이 없어서 선택적 육종이 가능하지않았기 때문이다. - P87

성의 유전자 조합의 파괴는 거의 성의 정의라고까지 할 수 있다. 유전학자들이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은 성이 ‘연관, 불평형‘을 감소시킨다는 것이다. 이 말은 만약 재조합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파란 눈과 금발의 유전자처럼 서로 연관된 유전자들은 언제나 함께 붙어다닐 것이기 때문에, 파란 눈과 갈색 머리를 지닌 사람이나 갈색눈과 금발을 지닌 사람이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성 덕분에 연관된 것끼리 끊임없이 상승 효과를 일으키는 일은 좀처럼 없다. 성은 ‘부서진 것이 아니면 손대지 말라‘는 지엄한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성은 무작위성을 증가시킨다. - P89

‘뮐러의 톱니바퀴 Müller‘s Ratchet‘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이론에 대한 간단한 예는 다음과 같다. 어항에 열마리의 물벼룩이 있다고 하자. 그중 한 마리만 완전하게 돌연변이와 무관하고나머지 다른 물벼룩들은 하나 혹은 두서너 개의 작은 결함을 지니고있다. 평균적으로 각 세대에서 다섯 마리만이 물고기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자손을 낳는다. 결함이 없는 물벼룩이 자손을 낳을 수 없는확률은 50퍼센트다. 마찬가지로 가장 결함이 많은 물벼룩도 같은확률을 가지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결함이 없는 물벼룩이 일단 죽고 나면 어항 내에 다시 결함이 없는 물벼룩이 생기는 유일한 방법은 매우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지만, 결함이 하나 있는 물벼룩이 돌연변이를 교정할 수 있는 다른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것이다.
자신의 유전자 어디엔가 하나의 결합을 가지고 있는 물벼룩이 유전자 다른 곳에 돌연변이를 또 일으키면 도리어 두 개의 결함을 지닌물벼룩이 쉽게 만들어진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혈통들을 무작위로 잃게 되면 집단 내의 결함 평균 수치는 점점 증가하게 된다. 마치한쪽 방향으로는 잘 돌아가지만 다른 방향으로는 잘 돌지 않는 톱니바퀴마냥 유전적 결함도 불가피하게 축적되는 것이다. 톱니바퀴가도는 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완벽한 물벼룩이 성을 가지는 것이며, 결함이 없는 자신의 유전자를 죽기 전에 다른 물벼룩에게 물려주는 길뿐이다.
뮐러의 톱니바퀴 이론은 복사기를 이용하여 어떤 서류의 복사본의 복사본의 복사본을 만들 때 적용된다. 단계적으로 연속하여 복사할 때마다 복사본의 질은 점점 떨어지게 된다. 때묻지 않은 원본을잘 지키고 있어야만 깨끗한 복사본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원본을 복사본들과 함께 파일에 보관하는데, 파일에 복사본이 한 장밖에 없을 경우에만 복사본을 더 만든다고 가정해보자. 복사를 위해 파일에있는 복사본을 쓸 수도 있고 원본을 쓸 수도 있다. 일단 원본을 잃고나면, 최선의 복사본이라도 이전의 복사본만큼 좋지 않다. 그러나 최악의 복사본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그것을 복사하게 되면 언제나 그보다 더 나쁜 복사본을 만들게 된다. - P90

만약 뮐러의 톱니바퀴가 큰 생물에게만 문제가 된다면, 왜 그렇게 많은 작은 생물들이 성을 지니고 있는가? 더구나 톱니바퀴를 멈추게 하는 데는 단지 간헐적으로 성을 지니기만 하면 되는데 말이다. 톱니바퀴를 멈추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많은 동물들이 하나같이 무성생식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어려움을 알고 있던 모스크바근교 포스치노에 있는 컴퓨터연구센터의 알렉세이 콘드라쇼프Alexey Kondrashov는 1982년에 뮐러의 톱니바퀴 이론에 반대되는이론을 찾아냈다. 콘드라쇼프는 무성생식 생물 집단에서는 생물체가 돌연변이 때문에 죽게 될 때마다 그 하나의 개체가 사라질 뿐임을 지적했다. 그런데 유성생물 집단에서 어떤 개체는 돌연변이를 많이 가지고 태어나며, 어떤 개체는 거의 돌연변이를 가지지 않은 채태어난다. 이때 돌연변이를 많이 지닌 개체가 죽게 되면, 성은 톱니바퀴를 거꾸로 돌리면서 돌연변이를 제거하는 셈이다. 대부분의 돌연변이는 해로운 것이니, 이것은 크나큰 이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방법으로 돌연변이를 없애는가? 그냥 교정을 잘 봐서 돌연변이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콘드라쇼프는 왜 이런 방법이 이치에 맞는지 기발한 설명을 제안했다. 교정을 완벽하게 하려면 완벽에 가까워질수록 비용이 급격하게 높아진다. 마치 수익체감의 법칙과 같다. 실수를 약간 허용하는 대신 성을 가짐으로써 돌연변이를 제거하는 것이 아마도 더 싸게 들 것이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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