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가 그녀를 잠식했다. (수전은 이런 감정이 어리석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분노를 느꼈다.) 그녀는 포로였다. (수전은 이 생각도 살펴보았다. 이것이 우스꽝스러운 생각이라고 속으로 되뇌었지만 소용없었다.) 매슈에게 반드시 말해야 했다. 하지만 뭘? 수전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감정, 그녀 스스로 경멸하는 감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감정들이 너무나 강렬해서 떨쳐버릴 수 없었다.
방학이 또 다가왔다. 이번에는 거의 두 달이나 되는 방학이었다. 수전은 의식적으로 차분하고 점잖은 태도를 유지하느라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욕실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앉아서,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아니면 평소에 비어 있는 여분의 방으로 올라갈 때도 있었다. 그녀가 거기에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이 "엄마, 엄마"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도 그녀는 죄책감을 느끼며 침묵을 지켰다. 혼자서 정원 끝까지 갈때도 있었다. 거기서 그녀는 천천히 흘러가는 갈색 강을 바라보았다. 강물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존재 속으로, 혈관 속으로 강을 받아들였다.
그러고 나서 수전은 다시 아내이자 엄마가 되어 식구들에게돌아왔다. 미소를 잃지 않고 책임감 있는 모습으로. - P296

호텔 방은 평범한 익명의 장소였다. 수전이 원하는 바로 그런곳. 수전은 가스히터에 1실링을 넣어 작동시킨 뒤, 더러운 창문을 등진 더러운 안락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혼자였다. 자신을 짓누르던 압박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도로의 자동차 소리가 아주 크게 들리더니 곧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가 살짝 잠이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배인인 미스 타운센트가 직접 찻잔을 들고 와 있었다. 수전이 너무 오랫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아서 혹시 어디가 아픈가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미스 타운센드는 쉰 살의 고독한 여성이었다. 최대한 정직하게이 호텔을 운영하고 있는 그녀는 수전에게서 자신을 이해해주는 동료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래서 방에 남아 수전과 이야기를 나눴다. 수전은 몸이 아프다는 거짓말을 자신이 더욱더 환상적으로 꾸며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리치먼드의 큰 집, 부자 남편, 네 아이라는 조건에 맞는 이야기를 꾸며내려고 하다 보니 이야기가 점점 황당해졌다. 그 대신 수전이 이렇게 말했다면 어떨까.
‘미스 타운센드, 저는 몇 시간 동안 혼자 있고 싶어서 이 호텔을 찾아왔어요. 내가 있는 곳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완전히 혼자있고 싶어서요."수전은 머릿속으로만 이 말을 하면서, 노처녀인 미스 타운센드의 얼굴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표정을 역시 머릿속으로만 그려보았다. "미스 타운센드, 우리 네 아이와 남편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아요. 이해하시겠어요? 그런데 당신 눈에서 히스테리의 기운이 번들거리고 있네요. 오로지 외로움을 간신히 참고 있는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눈빛이죠. 그걸 보니, 제 삶이 곧 당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삶 그대로라는 걸 알겠어요. 하지만요 미스 타운센드, 저는 그런 삶을 전혀 원하지 않아요. 원하신다면 제 삶을 가져가세요, 미스 타운센드, 저는 당신처럼 이 세상에서 철저히 혼자였으면 좋겠어요. 미스 타운센드, 일곱 악마가 저를 포위하고 있어요, 미스 타운센드, 그 악마가 쫓아올 수 없는 이 호텔에 머무르게 해주세요 •••••." 수전은 이런 말 대신 단순히 빈혈이 있다고만 말했다. - P304

낮 12시였다. 수전은 자유였다. 그녀는 안락의자에 앉았다. 그냥 앉았다. 눈을 감고 앉아서 혼자가 되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문에서 노크소리가 나자 그녀는 짜증이 났다. 짜증을 숨길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프레드였다. 그녀의 지시대로 5시가 되었다고 알리러 온 것이다. 프레드는 날카롭고 작은 눈으로 방을 한번 훑어보았다. 가장 먼저 침대, 흐트러진 흔적이 전혀 없었다. 마치 이 방에 아무도 없었던 것 같았다. 수전은 프레드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뒤, 모레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는 그곳을 떠났다. 그녀는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을 재우고, 남편과 자신이 먹을 저녁식사를 다시 요리했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고 돌아온 소피를 반갑게 맞았다. 이 모든 일을 수전은 유쾌하게, 기꺼이 했다. 하지만 그동안 내내 그 호텔 방을 생각하며, 온 마음으로 그곳을 갈망하고 있었다. - P317

이 방에서 수전이 뭘 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충분히쉬고 나면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양팔을 쭉 뻗고 미소를지으며 밖을 내다보았다. 익명의 존재가 된 이 순간이 귀중했다. 여기서 그녀는 네 아이의 어머니, 매슈의 아내, 파크스 부인과 소피트라우브의 고용주인 수전 롤링스가 아니었다. 친구, 교사, 상인 등과 이런저런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수전 롤링스가 아니었다. 정원이 딸린 크고 하얀 집의 안주인도 아니고, 이런저런 행사에딱 맞게 차려입을 수 있는 다양한 옷을 갖고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는 존스 부인이고 혼자였다. 그녀에게는 과거도 미래도없었다. 오랫동안 결혼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여러 책임들을 수행한 내가 지금은 여기에 있어.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언제나 똑같아. 하지만 가끔은 매슈 롤링스의 아내로서 수행해야 하는 역할들 외에는 내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래, 난 지금 여기에 있어. 만약 다시는 식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난 여기에 있을 거야……정말 이상하지!
그녀는 창턱에 몸을 기대고 거리를 내려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느꼈다.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녀는 거리 저편의 쓰러져가는 건물들, 축축하고 우중충하지만 가끔 파랗게개기도 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건물이나 하늘을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텅 빈 상태로 다시 의자에 앉았다. 머릿속이 하얀 백지 같았다. 가끔은 아무 말이나 소리 내어 말하기도 했다. 아무 의미 없는 감탄사 같은 것. 그다음에는 얄팍한 카펫의 꽃무늬나 초록색 새틴 이불의 얼룩에 대해 한마디논평을 덧붙였다. 하지만 한없이 공상에 잠기며, 아니 이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에 잠기고, 방황하고, 깜깜하게 어두워져서 공허함이 피처럼 혈관을 따라 즐겁게 도는 것을 느끼며 보내는 시간이 가장 많았다. - P318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약 네 시간이었다. 그녀는 즐겁게, 어둡게 달콤하게 그 시간을 보내며 아주아주 부드럽게 강변을 향해 미끄러졌다. 그러다 딱히 의식을 차리지 않은 상태로 의자에서일어나 얄팍한 카펫을 문으로 밀고, 창문이 단단히 닫혔는지 확인하고, 벽난로 미터기에 2실링을 넣은 뒤 가스 밸브를 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이 방의 딱딱한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서는 퀴퀴한 냄새, 땀과 섹스의 냄새가 났다.
초록색 새틴 이불 위에 똑바로 누워 있다 보니 다리가 싸늘해졌다. 그녀는 일어나서 서랍장 맨 아래 칸에서 개켜져 있는 담요를 찾아내 꼼꼼히 다리를 덮었다. 그렇게 누워서 가스가 작게 쉭쉭거리며 방 안으로, 그녀의 허파 안으로 뇌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어두운 강물로 떠갔다. - P3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