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은 분명 험난하고 지독한 곳을 건너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거기에는 새하얀 목련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안개 속에서 료안에게 외쳤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그는 자신 또한 료안이라고 말했는데, 료안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웃으며 자신들이 서 있는 고원의 평평함에 대해 얘기했다. "이곳은 정말로 평평하군요." "네, 평평합니다. 하지만 이 평평함은 험준함에 대한 평평함입니다. 진정한 평평함은 아닙니다." - P50
"얻어맞아 팅팅 부은 얼굴이 미워서 내가 ‘이딴 짓 하지 말고, 하던 대로 글이나 열심히 써‘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글쓴다고인생이 가만히 놔둘 것 같니?‘라면서 흘겨보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그래도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것보다는 낫잖아. 해도 안 되는일, 질 게 뻔한 일을 왜 하고 있어?‘라고 했더니 이렇게 대답했어요. ‘버티고 버티다가 넘어지긴 다 마찬가지야. 근데 넘어진다고 끝이 아니야. 그다음이 있어. 너도 KO를 당해 링 바닥에 누워 있어보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넘어져 있으면 조금 전이랑 공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져. 세상이 뒤로 쑥 물러나면서 나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이 세상에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와. 나한테로.‘ 무슨 바람이냐고 물었더니 ‘세컨드윈드‘라고 하더라구요. 동양 챔피언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흉내내서 젠체하는 거였는데, 나중에 그 ‘두번째 바람‘이라는 말이 두고두고 생각이 나더군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렇게 기억하고 있지요." 맞다. 그랬다. 그랬던 적이 있었다. - P60
아빠는 제가 쓴 문장들에 줄을 그으면서 말했습니다. 너는 어떤 생각이든 할 수 있어. 하지만 이건 네가 아니야. 너는 이 생각들에 줄을 긋는 사람이야. 네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 겁먹지말고 가만히 지켜봐. 그다음에 너는 그 생각에 줄을 그어 지울 수있어. 지금은 공책에 써서 지우지만, 나중에는 머릿속에서부터 지울 수 있어. 어떤 생각을 지우고 어떤 생각을 남길지는 네가 선택하는 거야. 마음껏 생각하고 그중에서 가장 좋은 생각을 선택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그게 너의 미래가 될 거야. 그 소설가가 "모든 글‘쓰기‘는 글‘짓기‘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저는 아빠의 그 말을 떠올렸어요. 그렇게 수많은 생각들을 받아 적고 또 지워가면서 십대를 보냈습니다. 차츰 저는 제 머리를 라디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끌 수 없는 라디오 같은 것 말이에요. 거기에서는 온갖 방송들이 흘러나오니까 마음에 드는 방송을 찾아 들으면 되는 것이죠. 어쩌면 이건 선생님의 달 이야기와 같은 얘기일 수도있어요. - P86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어요. 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달을 향해 걷는 것처럼 희망의 방향만 찾을 수 있다면, 이라고. 그래서 저는 치매에 걸려 우연히 떠오른 생각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 아빠의 마음을, 마치 치매에 걸린 것처럼 사전 경고도 없이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는 신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처럼 살아보기로 한 거예요. - P97
아내의 옛 책을 찾은 건 한 달 뒤, 제작팀과 함께 몽골로 떠날무렵이었다. 책이 두툼하게 부풀어올랐고 페이지가 바랬지만, 새책보다 정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 꾸린 여행 가방에 그 책을 밀어넣었다. 정미가 죽은 뒤로 마음의 가장자리는 매 순간 조금씩 시간에 쏠려 과거로 떨어지고 있었다. - P103
"글쎄. 난 세상은 점점 좋아진다고 생각해. 지금 슬퍼서 우는 사람에게도 우리는 모든 걸 이야기로 만들 수 있으니까. 이야기덕분에 만물은 끝없이 진화하고 있어. 하지만 난 비관주의자야.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비관주의가 도움이 돼. 비관적이지 않으면 굳이 그걸 이야기로 남길필요가 없을 테니까. 이야기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인생도 바꿀 수 있지 않겠어? 누가 도와주는 게 아니야. 이걸 다 우리가 할 수 있어. 우리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어. 그게 나의 믿음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찾아와 그것도 자주. 모든 믿음이 시들해지는 순간이 있어. 인간에 대한 신뢰도 접어두고 싶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때가 그럴때가 바로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 아무리 세찬 모래 폭풍이라고 할지라도 지나간다는 것을 믿는, 버스안의 고개 숙인 인도 사람들처럼. 그건 그 책을 읽기 전부터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였어.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금도 책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그분들은 왜 그렇게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할까? 나는왜 같은 이야기를 읽고 또 읽을까?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된 거야. 그 이유를." "이유가 뭔데?" "언젠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되기 때문이지." - P120
의사가 시키는 대로 병상에 누워 있던 그는 간호사가 그의 왼팔에 수액 바늘을 꽂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장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정미는 새벽별처럼 짧은 시간 동안 지구에서 살다가 마치 원래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사라졌다. 분명 서로의 육체에 가닿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시절이 두 사람에게도 있었건만, 그리고 그때는 거기 정미가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모든 게 의심스러워졌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다른 모든 생명들에게 그랬듯 그들의 인생에도 시간의 폭풍이 불어닥쳤고, 그렇게 그들은 겹겹이 쌓인 깊은 시간의 지층 속으로 파묻히고 있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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