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개진 그들의 손은 불타고 있었다. 땀이 밴 두 손바닥은 하나처럼 붙고, 꽉 낀 손가락들은 서로를 아프도록 눌렀다. 로랑과 테레즈는 상대편의 피가 손가락을 통해서 서로의 가슴속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붙잡은 두 손은그들의 생명이 끓는 불타는 가마솥이 되었다. 밤과 다가오는 괴로운 침묵의 한복판에서 그들이 나누고 있는 정열적인 손의 결합은 카미유가 물 속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그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듯했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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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소크라테스는 난놈이었다. 하지만 그냥 난놈이 아니라 아테네 난놈이었다. 그 아테네의 난놈이 소크라테스였다. 한 인물과 도시가 이토록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적은 그전에도 그후에도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를 사랑했으며 다른 곳에서 살겠다- 아니면 죽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아테네에서 달아나면 처형을 면할 수 있었지만, 탈옥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는 도시와 계약을 맺었으며, 최후까지 의무를 다하고자 했다.
맨발의 기인이자 사랑스러운 고집쟁이인 소크라테스는 여느 천재와 마찬가지로 위태로운 자리 -내부자와 외부자의 중간 지점-에 서 있었다. 참신한 시각으로 세상을 볼 만큼 주류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자신의 참신한 시각을 남에게 설득할 만큼 가까운 자리였다. - P59

 얼리샤가 고대 그리스인을 왜 현재 시제로 언급하는지도 설명된다. 좋은 작품, 심지어 위대한 작품을 진정한 천재의 작품과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도 설명된다. 좋은 시나 그림은 특정 시기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하지만 천재의 작품은 그런시간적 제약을 뛰어넘으며 뒤이은 세대들에게 새로이 재발견된다.
이런 작품은 정적이지 않다. 새로운 수용자가 작품을 만날 때마다작품은 수용자를 바꾸고 수용자는 작품을 바꾼다. 파블로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미술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미술 작품이 늘현재를 살 수 없다면 그건 결코 미술이라 할 수 없다. 그리스인의 미술, 이집트인의 미술, 다른 시대를 산 위대한 화가의 미술은 과거의 미술이 아니다.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더 생생히 살아 있는것인지도 모른다." - P62

그 답은 전문성에, 아니 그보다는 전문성의 결여에 있다고 브래다는 말한다. 고대 아테네에는 직업 정치인도, 직업 판사도, 심지어 직업 성직자도 없었다. 모두가 모든 일을 했다. 군인이 시를 쓰고 시인이 싸우러 나갔다. 당시는 엄밀히 말해서 아마추어의 시대였으며, 그리스인들만 놓고 보자면 이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들은 천재성이 단순함에 있다고 생각했기에 전문성에 의혹의 눈초리를던졌다.
브래디는 다윈의 진화론에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이르기까지 지적 도약이 일어날 때마다 세상이 좀더 단순해졌다고말한다. "연관성 없어 보이는 데이터가 널려 있는데 누가 이렇게말하는 겁니다. ‘잠깐만, 이렇게 하면 전부 들어맞는군. 근데 그걸좋아하는 거죠."
이를테면 수학은 ‘우아한 증명을 높이 평가한다. 우아한 증명이란 단순히 정확한 게 아니라 매우 간소화된 증명이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 우아한 증명은 우아한 디자인이 눈을 즐겁게 하는것처럼 마음을 즐겁게 한다. 그리스인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늘 가장 우아한 해결책을 모색했다. 이는 예외 없이 연관성을 찾는다는 뜻이었는데 역사가 이디스 해밀턴 말마따나 "뭐든 다른 것과의 관계로 보는 것은 단순화하여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 P77

로버트는 저 항구가 없었으면 고대 아테네도 없었을 거라며 페리클레스를 인용한다. "우리 도시가 위대하기에 온 땅의 열매가 우리에게 흘러든다." 아테네는 세계 최초의 국제도시였다. 조선술과 항해술의 달인이었던 아테네인들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너머까지 항해하여,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물건을 가져왔다. 이런 물건에는 밀항자가 숨어 있었으니, 바로 아이디어였다. 이는 곧잘 일어나는 일이다. 아이디어는 물건에 스며들어서는 눈 밝은 관찰자가 꺼내줄 때까지 잠들어 있다. 정치는 안 되지만 경제는 개방할 수있다고 믿는 전체주의 정권이 어리석은 이유는 그래서다.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토마토 수프 깡통이나 크록스 신발에 들어 있던 전복적 아이디어는 언젠가 빠져나오기 마련이다.
그리스인들은 외국의 아이디어를 기꺼이 ‘빌렸다‘. 관점에 따라서는 ‘훔쳤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는 결론을 알게 됐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스스로 발명한 게 별로 없다. 그들은 사실 지독한 거지였다. 페니키아인에게는 알파벳을, 이집트인에게는 의약과 조각을, 바빌로니아인에게는 수학을, 수메르인에게는 문학을 빌렸다. 그들은 지적 도둑질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아테네인들은 온갖 잘못을 저질렀지만(노예제와 여성에 대한 처우를 보라) ‘우리가 발명하지않았어‘ 콤플렉스는 없었다. 그들은 괴테 말마따나 "자신이 표절했음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무의식적 자만"임을 알고 있었다. - P91

물론 그들은 아이디어를 빌려 거기에 자신의 도장을 찍었다. 아테네인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훔치든 그들은 ‘아테네화‘했다. 플라톤은 휴브리스의 기미를 강하게 풍기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인은 외국인에게서 빌린 것을 완벽하게 만든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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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카시즘의 위력은 미국 사회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미국정부는 공산주의를 이롭게 한다는 의심이 들면 무슨 일이든 간섭하고 개입하며 ‘세계의 경찰‘을 자처했다. ‘베트남의 공산화‘는 묵인할 수 없는 사태였다. 군사전략적·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려는 장삿속도 물론 작용했다. 인도차이나는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는 데 요긴한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주석과 텅스텐 같은 자원이 풍부했다. 미국 국방부의 장성들과 군수산업 자본가들은 평화를 반기지 않았다. 그들은 대중의 반공 정서를 이용해 행정부를 쥐락펴락하고 의회를 움직여 대규모 전쟁 예산을 편성했다. 전쟁의 승패가 어찌 되든, 베트남 민중과 미국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죽든 상관하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제발로 전쟁의 늪으로 걸어 들어갔다.  - P257

응오딘지엠은 지나치게 열심히 일한 탓에 남베트남의 멸망을 앞당겼다. 그는 치안유지법을 제정해 모든 형태의 반정부운동탄압했다. 야당과 사회단체뿐만 아니라 정부와 군대에까지 ‘라오‘라는 비밀조직을 심어 사찰과 테러를 저질렀다. 북베트남에서 도망쳐 나온 가톨릭 신도가 중심이 된 칸라오는 불교 탄압으로 악명을 떨쳤다. 응오딘지엠 정부는 프랑스인 소유 토지를 지주에게 넘겼고 게릴라들이 빈농에게 나눠준 토지도 회수해 돌려있다. 장교들은 예산을 착복했으며 관리들은 뇌물을 받고 탈세를용인했다. 남베트남 정부군은 농촌 게릴라를 소탕한다면서 9천여개의 전략촌을 지정해 농민을 강제로 수용하고, 제네바협정 이후귀향한 6천여 명의 베트민 전사를 색출하기 위해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전개했다.
정부가 부패와 폭정을 저지르자 전국의 농촌에서 무장 세력이 출현했다. 남베트남과 미국 정부는 ‘베트콩(베트남 코뮤니스트)‘이라 했지만 대부분 지식인과 불교도였으며 소수민족도 일부 있었다. 정부군과 미군한테서 빼앗은 총으로 무장하고 각양각색의 깃발을 들었던 남베트남 무장 세력은 1960년 해방전선을 결성하고 전국적인 게릴라전에 들어갔다. 해방전선은 점령한 해방구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도시의 노동조합을 끌어들여 지지 기반을 넓혔으며 행정기관과 군대 내부를 파고들어 협력자를 찾았다. 얼마지나지 않아 해방전선은 남베트남 땅의 절반 이상을 장악했다. - P259

해방전선은 병력과 무기의 열세를 자기네 방식으로 이겨냈다. 미군은 유격전으로 상대했고, 미국 정부와 남베트남 정부는 정치투쟁으로 흔들었으며, 남베트남 군대는 설득공작으로 무너뜨렸다." 유격전부터 살펴보자. 베트남에 상륙한 미군은 세 종류의 적을 만났다. 가장 먼저 민간인 사이에 숨은 민병과 게릴라가 미군을 기습하고 함정에 빠뜨렸다. 도시와 농촌 모든 곳이 전장이었다. 다음에는 소규모 지방군이 기동전으로 공격했고, 마지막으로 정규군이 밀림에서 미군의 주력을 타격했다. 미군 보병은 공격을 받으면 일단 물러났고 포병과 공군이 적의 진지를 폭격했다. 보병이 다시 진입해 수색할 때, 진지를 빠져나온 해방전선 게릴라는 후방의 포병부대와 전투사령부를 습격했다.
미군은 적대적인 민간인과 게릴라에게 스물네 시간 동안 포위됐다. 현지 음식과 물을 믿을 수 없어서 필리핀에서 공수한 식수와 콜라를 마시고 통조림을 먹었다. 해방전선은 손실을 입어도 농민과 도시 노동자, 청년 학생과 지식인, 불교도와 산악 소수민족의 지원 덕분에 금방 회복했다. 그들은 땅굴 · 죽창·함정 같은 원시적인 수단뿐만 아니라 소련제 첨단무기도 사용했다. 1965년부터 3년 동안 소련은 북베트남에 15억 달러 규모의 원조를 제공했다. 맨발의 게릴라가 소련제 휴대용 로켓포로 최신형 미군 전투기를 격추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 P261

그 무렵 미국사회의 최대 현안은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가 이끈 흑인민권운동이었다. 흑인들은 법률적·관습적 차별의 철폐와 빈곤층에 대한 복지정책 확대를 요구했다. 그러나 빈곤 추방을 국가 과제로 선포하고 사회복지 예산의 대폭확대를 공언했던 케네디 대통령도 베트남 전비가 끝없이 늘어난탓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흑인민권운동과 반전(反戰) 평화운동이 손을 잡자 미국 사회는 남북전쟁 이후 가장 거센 정치투쟁의 격랑에 휩싸였다. 미군의 양민학살 사건이 드러나면서 베트남전쟁을 비판하는 국제사회의 여론도 높아졌다. - P263

9월 12일 『타임』지는 미국의 적이었던 호찌민의 얼굴을 표지에 올리고 다음과 같은 고별사를 실었다.

호찌민은 독립한 통일 베트남 건설에 일생을 바쳤다. 북베트남과인민은 이런 미래상을 이루려고 전력을 다한 그의 헌신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그들은 애정 어린 마음으로 ‘호 아저씨‘
를 이해했다. 남베트남 사람들도 같은 감정을 품고 있다. 살아 있는 민족 지도자 중에서 이 사람만큼 오랫동안 꿋꿋하게 적의 총구앞에서 버틴 이는 없다. - P266

문서 유출에서 언론보도와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이르기까지 놀라움의 연속이었던 그 사태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펜타곤페이퍼‘의 내용이었다. 그 문서는 미국 정부의 베트남 개입 동기가 처음부터 추악했고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거짓과 조작을 일삼았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미국 국방부가 어떤목적에서 어떤 자세로 베트남에 개입했는지 보여주는 몇몇 문서만 살펴보자."

「남베트남 행동계획」 최종 각서 (1964년 8월 3일, 비밀문서 제19호)
만일 최악의 경우 남베트남이 붕괴하든가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어 남베트남을 버리기로 결정한다면, 훌륭한 의사가 최선을 다해치료했는데도 환자는 죽고 말았다는 인상을 대외적으로 주게끔 노력한다.

미국의 베트남 개입 목적(1964년 11월 29일, 국방성 비밀문서 제27호)① 침략에 반대하는 보호자라는 명성을 지킨다.
② 동남아시아에서 공산화 도미노 현상을 저지한다.
③ 남베트남을 ‘붉은 손‘ 에서 지킨다.

미국의 베트남전쟁 목적 (1965년 3월 24일, 맥너턴 국방차관보가 맥너마라 국방장관에게 보낸 남베트남을 위한 행동계획)
70% : 미국의 굴욕적인 패배를 저지한다.
20%: 남베트남(그리고 이웃 나라들)의 영토를 중공의 손에서 지킨다.
10% 남베트남 국민에게 더 나은 자유생활을 보장한다.
그리고 수락 불가능한 폐해가 남지 않게 하면서 위기에서 빠져나간다. 만약 미군 철수를 요청받을 경우에는 그대로 남아 있기 어렵지만, 우리의 목적은 벗을 돕는 것이 아니다. - P268

베트남전쟁은 명백한 제국주의 침략전쟁이었다. 미군은 5만여 명이 전사하고 수십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살아서 귀환한 참전 군인들은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와 고엽제 후유증을않았다. 전쟁비용을 충당하려고 달러를 너무 많이 발행한 탓에 연방준비은행은 금 태환을 중지해야 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미국 경제는 1973년을 기점으로 활력을 잃고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미국 국민은 독립전쟁을 벌여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날 때 내세운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켰다. 베트남전쟁의 추악한 진실을 알린 엘스버그와 기자들, 언론자유를 수호한 연방대법원 판사들, 반전운동을 벌인 시민과 투옥의 고통을 감수하며 징집을 거부한 청년들, 전쟁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비판한 지식인들, 그들 모두가 함께 미국의 민주주의를 구했다. - P273

베트남 참전이 잘못이었다고 하면 참전 군인과 가족은 마음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트남전쟁의 기억을 지우는 것은 떳떳한 일이 아니다. 용맹하기로 명성이 높았다는 ‘따이한 부대‘가 그토록 많은 사상자를 냈다면 변변치 못한 무기를 들고 싸운 해방전선의 손실은 얼마나 컸겠는가. 한국군은 퐁니·퐁넛 사건과 같은 양민학살을 다른 곳에서도 저질렀고 베트남 여성이 낳은 한국계 자녀를 모두 버리고 철수했다. 베트남전쟁의 상처는 어디까지나 ‘가해자‘로서 입은 것이었다.
그 문제를 덮어두고 한국과 베트남의 우호관계를 말하는 것은 남과 자기 자신을 모두 속이는 일이다. 그런 식이라면 합리화하지 못할 죄악이란 없다. 조선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가리켜 ‘제국주의 시대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불행한일‘이라거나 ‘좋은 미래를 위해 어두운 과거를 얼른 잊어버리는게 좋다‘고 하는 일본 우익과 다를 바 없다. 베트남에 파병한 덕에 우리 기업이 사업 기회를 잡았고, 그렇게 벌어들인 외화로 산업화를 성공시켰으니 잘된 일이라고 한다면, 정당화할 수 없는 침략전쟁은 없을 것이다. - P274

맬컴은 흑인사회 내부의 계급분화 현상을 눈여겨봤다. 20세기 들어 농촌의 흑인들이 도시로 대거 이주하고 소득과 교육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지자 백인과 백인 기업이 공급할 수 없거나공급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시장 수요가 생겼다. 교사·복사·의사·변호사 · 이발사 · 미용사· 장의사·보험업 · 흑인신문 같은 분야에서 백인이 흑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흑인 전문직업인 집단과 소규모 기업이 탄생하고 ‘중산층 흑인‘ 또는 ‘흑인 부르주아지‘가 등장했다. 그들은 미국 사회에 통합되기를 원해서 기독교와 백인 문화를 받아들였다. 백인은 그들이 흑인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대기업과 행정기관에 받아들이는 한편 ‘흑인향상협회‘나 ‘인종평등협회‘ 같은 민권운동 단체를 지원했다. 그런데 이런 정책은 빈민가의 흑인과 무관했다. 그래서 맬컴은 이슬람을 선택하고 통합을 거부했으며 흑인민권운동 지도자들을 ‘백인화한 흑인‘이라고 비난했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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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히틀러는 민주주의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단을 동원했다. 도로 건설과 토지 개량, 대규모 병영과 비행장 건설등의 토목건설 사업에 중장비 대신 인력을 쓰게 했다. 군대와 경찰을 대폭 증원했고 친위대도 5만 명 넘게 채용했다. 감옥과 수용소를 지어 정치적 반대자를 가뒀다. 유대인의 상점을 폐쇄하고직장에서 쫓아냈다. 미혼 여성에게 자금을 대출해주어 혼인을 장려하고 직장의 기혼 여성을 가정으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해서만든 모든 일자리는 ‘게르만 남자‘에게 줬다.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고 충성심과 능력을 기준으로 젊은이를 등용했다. 노동자와 빈곤층 남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 P189

유럽의 유대인은 세상에 섞일 수 없는 ‘천민‘이었다. 담장으로 격리한 ‘게토(ghetto)‘에 거주하면서 특별한 표식을 한 옷을 입어야 했다.
시민권이 없어서 교육을 받을 수도 취직할 수도 없었기에 가정에서 아이들을 교육했고 고리대금업이나 전당포처럼 기독교도가 기피하던 일을 했다. 유대인에 대한 사적 폭력을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에 크고 작은 학살이 끊이지 않았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고 계몽사상이 퍼지자 유대인에 대한 법적 차별을 폐지하는 나라가 늘어났다. 유대인은 언론·출판·법률·금융 등 지식과 정보를 다루는 새로운 산업에 진출했다. 그러자 귀족과 지주 등 전통적인 보수파뿐만 아니라 소상인 · 농민·노동자들까지 해묵은 불신과 혐오감을 드러냈다. 중세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자본주의사회의 개인으로 고립당한 그들은 자기네 신앙과 생활방식과 공동체 문화를 굳건히 지키는 유대인들을 부러워하고 무서워했다.  - P195

독일 국민의 책임을 더 강력하게 추궁하는 견해는 1996년에 나왔다. 하버드대학 교수 대니얼 골드하겐(Daniel Goldhagen)이 쓴「히틀러의 자발적 사형집행자들(Hitler‘s Willing Executioners)』이라는책이다. 골드하겐은 대학 신입생 때 홀로코스트 강의를 들으면서이런 의문을 품었다. 왜 누가 명령을 내렸는지만 이야기할까? 독일인이 왜 히틀러의 명령을 집행했는지 밝혀야 하는 것 아닌가?
골드하겐은 전범재판 기록부터 친위대의 개인 서신에 이르기까지 홀로코스트에 관한 모든 기록을 검토한 끝에 아렌트보다 한걸음 나아간 결론을 내렸다. 독일의 보통 시민 대부분이 여러 세기 동안 형성한 독일 특유의 ‘절멸주의적 반유대주의‘를 내면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홀로코스트 명령을 집행했다는것이었다.
독일 정부와 국민은 나치시대의 국가범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한다. 연방 총리와 주요 정치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듭사과했고 피해자를 확인할 때마다 배상했으며 홀로코스트 관련자를 추적하고 체포하고 재판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통일수도 베를린에 거대한 홀로코스트 기억 시설을 조성했고 학교교육과 미디어를 활용해 나치의 범죄에 관한 기억을 끝없이 되살린다.
집단적 책임을 후세대가 상속해야 하는지 여부를 두고 학자와 언론인들은 종종 논쟁을 벌이지만, 독일 정부는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그 책임을 이어받았다.
다시 말하지만 나치즘은 ‘모든 악의 연대‘였다. 나치의 범죄에 대한 기억을 흐리게 하는 행위는 개별적인 악을 강화하고 ‘모든 악의 연대‘를 되살릴 위험이 있다. 독일 정치 지도자와 시민들이 나치 시대의 기억을 나날이 새롭게 되새기는 까닭은 그 위험을 알기 때문이다. - P203

영국 정부는 1915년 7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이집트 주재외교관 헨리 맥마흔(Henry McMahon)을 통해 아랍의 정치·종교 지도자 ‘메카의 샤리프‘ 후사인 빈 알리(Husain bin Ali)에게 열 통의서한을 전달했다. 아랍인이 영국과 함께 오스만제국과 싸우면 전쟁이 끝난 뒤에 아랍 독립국가 수립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을 ‘후사인-맥마흔 서한‘이라고 한다. 그런데 영국 정부는1916년 5월 러시아의 승인을 받고 오스만제국의 아랍 영토를 프랑스와 나누어 가지는 비밀협정을 체결했다. 오늘의 국경을 기준으로 보면 시리아, 레바논, 터키 남부, 이라크 북부는 프랑스가이라크의 나머지 지역과 팔레스타인 요르단은 영국이, 보스포루스해협 주변과 흑해 연안은 러시아가 차지하는 방안이었다. 영국의 중동 전문가 마크 사이크스(Mark Sykes)와 프랑스 외교관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François Georges-Picot)가 초안을 만들었기 때문에 ‘사이크스-피코 협정‘이라고 한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1917년 11월에는 외교장관 밸푸어가 유대인의 협력을 얻어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일 목적으로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수립하게끔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이른바 ‘밸푸어선언‘인데, 영국 정부의 속임수 외교는 단순한 배신행위로 끝나지 않고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불렀다.
- P216

 반면 나치가 동유럽 수용소에서 저지른 대학살의 참상을 확인한 시온주의자들은 더욱전투적인 태도로 국가 건설 계획을 밀고 나갔다. 급진파 무장 세력은 유대인의 이주를 규제한 영국 정부에 전쟁을 선포했다. 관공서, 외국 영사관, 민간 호텔 등 대상을 가리지 않고 테러 공격을 했다. 영국 정부는 자기네가 일으킨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유엔에 떠넘겼다. 유엔은 1947년 11월 29일 팔레스타인을 둘로나눠 두 개의 국가를 만드는 ‘총회결의 181호‘를 채택했다. 영국군이 철수할 시점이 다가오자 아랍 게릴라와 시온주의 민병대는 땅을 한 뼘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 P217

이스라엘 건국은 곧 팔레스타인에 대한 침략이었다. 유럽 유대인은 2천 년 동안 혹독한 차별과 박해를 받았다.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본 유럽·미국의 기독교인과 정부가 시오니즘운동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인 사정도 이해할 만하다. 자신의 국가를 세워 안전한 삶을 도모하려 한 유대 민족의 동기도 정당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을 빼앗고 거기에 살던 사람들을 내쫓을 권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만약 모든 민족이 수천 년 전 조상이 한때 살았다는 이유로 남이 사는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폭력을 행사한다면 세계는 당장 전쟁터가 되고 말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그곳에서 땅을 경작하고 자손을 낳고 나름의 역사와 문화를 일군 아랍인의 것이었다.
시온주의자들은 호소하고 설득하고 협력을 구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원주민을 내쫓았다. 부당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종교와 문화를 지킨 유대인의 역사가 아무리 눈물겨워도, 유대인이 과학과 예술 발전에 기여한 바가 아무리 컸다 해도, 네게브사막의 황무지를 옥토로 바꾼 기술과 의지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그에 견주어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능력이 아무리 뒤떨어졌다 해도, 제국주의 시대가 저물고 아랍 민중이 민족 정체성과 자주성에 눈을 뜬 그 시기에 시온주의자들이 저지른 학살과 파괴행위를 정당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온주의는 다른 민족 집단을 폭력으로 내쫓고 자기 나라를 세운 침략적 민족주의였다. 그들이 한 일은 수천년동안 유대인을 부당하게 차별하고 박해하고 학살한 유럽 기독교인의 행위와 다르지 않았다. - P221

1974년 11월 13일, 유엔총회가 ‘팔레스타인 문제‘를 놓고 토론을열었다. 아라파트는 머리에 두건을 두른 게릴라 차림으로 뉴욕유엔본부에 나타났다. 그가 회의장에 들어서자 미국 대표를 제외한 참석자 전원이 기립해 박수를 쳤다. 연단에 선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에 과도적으로 유대인 기독교인·무슬림의 국가를 각각 수립한 다음 하나의 민주국가로 나아가자는 PLO의 기본 견해를 밝히고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우리는 꿈을 꿀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과 재산, 민족의 모든 권리를 되찾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존재를직시하는 현실적인 사람으로서 나는 꿈이 언제나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민주국가건설에 동참한다는 의사를 자유롭게 결정할 때까지 우리는 조그만국토에 만족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한 손에 올리브가지를, 다른 한 손에 자유를 위한 전사(戰士)의 무기를 들고 왔습니다. 내 손의 올리브 가지를 던져버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우리는유대교와 시온주의를 구별합니다. 시온주의 침략 책동에는 반대하지만 유대인의 신앙은 존중합니다. 이 위대한 유엔 본부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적대적이고 호전적인 데모가 과연 미국의 진정한 의견인지 나는 묻습니다. 팔레스타인 민중이 미국 국민에게 무슨 범죄를 저질렀습니까? 무엇 때문에 당신들은 우리와 싸우려 하는 것입니까? 정당화할 수 없는 적대감은 당신들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않습니다. 미국과 아랍 세계 전체가 더 새롭고 차원 높은 우호관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미국인이 알아주기 바랄 뿐입니다."

유엔총회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자결권과 주권을 인정하는 결의 3236조를 채택하고 PLO를 옵서버 단체로 받아들였다.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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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날 위선자,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어요. 날 자신들의 미적지근한 생활 속에 질식시켰던 거예요. 어떻게 해서 내 혈관에 아직도 피가 남아 있는지 알 수 없군요. 난 눈을 내리깔고 그들처럼 맥없고 어리석은 낯짝을 하고 있었죠. 난 그들과 똑같이 죽은 생활을 했어요. 당신이 날 만났을때 난 바보같았어요. 그렇지 않았나요? 침울하고 기운이 빠지고 정신이 나가 있었어요. 난아무 희망이 없어서 언젠가는 센 강에 투신할 생각이었죠. 그런데 그렇게 되기까지 내가 얼마나 많은 증오의 밤을 새웠는지 아세요? 저 시골 베르농에 살 때 싸늘한 방에서 나는 베개를 물어뜯으며 울음을 참았어요. 나는 속을 부글부글 끓이며, 나 자신이 비겁하다고 생각했어요. 피가 전신을 태우는 바람에 사지가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나는 두 번이나 도망쳐 곧장 햇빛 속을 뚫고 어딘가로 가려 했어요. 그러나 용기가 부족했던 나는 맥없는 그들의 친절과 구역질나는 그들의 애정에 붙잡혀 온순한 바보가되고 말았지요. 그래서 나는 거짓말을 했어요. 아니 늘 거짓말을 한 셈이죠. 나는 그들에게 순종하며 조용히 지내면서도 무언가를 때리고 물어뜯을 꿈을 꾸고 있었지요." - P72

"그러니까 당신은 경찰이 무력하다는 걸 인정하는군요! 대낮에도 버젓이 돌아다니는 살인자들이 있으니까!"
"흥! 딱한 노릇이지만 그렇달 수밖에" 하고 퇴직 경관이 대답했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그리베가 결론을 내렸다.
이런 대화가 오고 가는 동안 테레즈와 로랑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리베의 어리석음에 미소조차 보이지 않았다. 둘다 식탁에 팔꿈치를 대고 다소 창백한 얼굴에 흐리멍덩한 눈을하고 그저 듣고만 있었다. 잠시 그들의 검고 뜨거운 시선이 서로만났다. 조그마한 땀방울이 테레즈의 머리카락 속에 방울져 있었고, 불어오는 찬바람에 로랑의 피부는 보이지 않는 전율을 일으키고 있었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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