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만 건너면 신의주에서 김시현 조직이 폭탄을 넘겨 받기로했다. 서울로 가져가는 문제는 국내 조직이 감당하기로 정했다.
"외백도 해방조국에서 큰일을 할 인재고, 나도 견마지로를 아끼지않으려 하오."
황옥은 다카키가 계속 의열단을 감시할 거라고 알려주었다.
"나와 같이 가는 의열단을 국내 조직과 연결되는 순간 모조리 체포하는 줄 알고 있소."
때를 맞추어서 여기서도 의열단을 체포하려들 테니 그 전에 다카키를 적당히 처리하라고 했다. 하지만 적당한 처리란 없다. 사느냐 죽느냐가 있을 뿐이다. 죽음이 가장 적당할 뿐이다.
유석현과 김시현, 김상윤, 김재진을 비롯한 여섯 명이 황옥 경부를수행하는 일행으로 꾸며서 기차를 타기로 정했다. 마자르는 단원 모두와 뜨겁게 포옹을 했다. 북경을 거쳐 헝가리로 돌아가게 된 그는 혁명이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빌어주었다. 현계옥도 현정건에게 돌려보냈다. 마자르가 포옹하자고 할 때는 머뭇거리더니, 마자르 옆에 서서마자르가 포옹한 사람을 현계옥이 이어서 포옹하자 우르르 마자르앞으로 몰려들었다.
- P149

지난 1923년 1월 12일에 의열단원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일본 경찰을 죽이고 거사를 성공시켰다. 그 후 피신을 다니다22일 5백여 명이나 되는 일본 경찰에 둘러싸였다. 일본 경찰 수십 명을 죽거나 다치게 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번 거사는 김상옥에 대한 복수도 겸하고 있다. 모든 준비는 완벽하다. 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전국 경찰서에서 동시에 폭탄이 터지고 왜적과 친일파를 처단할 날이 눈앞에 왔다. 이번에야말로 불발탄과 시간 끌기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해치울 조건이 다 갖추어졌다. 김상옥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북경에 왔다는 황옥이 오히려 의열단과 합심하고 복수에 앞장서게 되었으니 김상옥 동지가 주고 간 숙제를 풀어간다는 희열이 차올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 P150

"너무 어이가 없소"
사흘 뒤에 혼자 돌아온 김지섭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좀처럼 풀지 않았다. 김재진이 밀고한 것도 맞는데, 사회주의 청년조직이 허술했기 때문이기도 했다며 아쉬워했다. 아직 실전 투쟁 경험이 없고, 노련한 투쟁 단위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밀 유지가 철저하게 되지 않은 탓이라고 했다. 하지만 유자명은 사회주의 청년조직 잘못이라고는 하지 말자고 했다.
"국내에서 창당 준비도 변변히 못하고 있는 조직입니다. 아직 의욕만 넘치는 단계이니 체계가 단단할 리 없고, 투쟁 강령이 확고하게 자리 잡혔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해야 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떠맡긴 우리 잘못이 더 크다며, 거사 실패가국내에서 사회주의 조직을 세우는 데에 방해만 되었으니 도리어 미안하게 여겨야 한다고 정리했다. 나는 일제가 지나치게 분투해 민중을 옭아매고 있으니 제대로 된 조직이 생기나기도 어렵고, 생겨도 제대로 활동하기 어렵다며 현실을 직시하자고 다독였다. 상대를 비난하는 만큼 연대는 멀어지고,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만큼 소통도 멀어진다는 걱정도 덧붙였다.
"우리는 완벽한데 상대가 모자란다는 논리는 절대로 펼치면 안 되오."
- P155

김산은 내무대신 미즈노가 3.1만세운동 때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었고, 경시총감 아카이케는 3.1만세운동 때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을 지냈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 두 놈이 일본 민중에게 조선 사람을 죽이고 스스로를 지키라고 부추겼습니다."
김산은 그 두 사람이 철저하게 계산해서 저지른 일이라고 했다.
일본 입장에서 3.1만세운동은 폭동이다. 사무라이 나라인 일본에서는 폭동이란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 3.1만세운동은 일본이 한번도 겪어본 적 없는 민중봉기였다. 무자비한 폭력 진압은 전 세계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불러왔고, 조선 강점에 대한 비판까지 뒤집어써야 했다.
미즈노도 아카이케도 조선에서 폭력으로 진압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 일본으로 왔는데 일본에서도 폭동이 일어난다면 자국민을 상대로폭력 진압을 할 수 없으니 막을 방법도 없다. 군인이나 경찰이 총이나 칼로 조선 사람을 죽이면 또 엄청난 문제가 일어날 게 뻔하다. 그래서 민간인 조직인 자경단이 집에 숨겨둔 일본도나 죽창, 쇠꼬챙이나 곤봉으로 직접 조선 사람을 죽이도록 유도했다. 사회가 불안할 때 일어난 대지진,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용광로처럼 끓어오른 분노를 엉뚱한 대상인 조선 사람에게 풀게 만들었다.  - P159

1926년 12월 어느 날, 나석주가 단독 면담을 청했다.
"먹고살기 어려운 원인을 게으름과 흉년 때문이라고 일본이 벌이는 거짓 선전에 조선 민중이 속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는 민중을 자각시키겠다며 조선으로 보내달라고 청했다.
"적을 목베기 위해서는 왼팔 정도는 내줄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잃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며 살아 돌아오지 못해도 한 점 부끄러움도 후회도 없다고 각오를 밝혔다.
나석주는 중국어 실력이 좋았다. 중국 사람에게는 조금 어설프게 들려도 일본 사람에게 유창하게 들릴 정도는 되었다. 서른다섯 살 먹은 마중덕이라는 신분증을 만들고 중국 노동자처럼 변장해 인천행배에 올랐다.
12월 28일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던지고 권총을 난사했다. 직원과 경기도 경찰부 경부보를 사살한 뒤일본 경찰로부터 추격을 받자 모여든 군중을 향해 ‘나는 조국과 조선민중이 자유를 누리게 만들기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고 외친 후 권총을 스스로에게 겨누어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섰다.
나석주거사가 있은 뒤 두 해가 지난 어느 날, 백운학이라는 소년이 의열단에 가입하겠다며 찾아왔다. 열서너 살밖에 안 되어 보이는지라 의열단원이 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자기 이름이 나용섭인데, 오는 동안 신분이 탄로날까 봐 백운학이라는 가명을썼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처음 보는데도 얼굴이 낯익은 까닭을 금세 알아차렸다.
"가친은 함자가 석 자 주 자이십니다." - P168

손문은 만나자마자 아픈 곳을 찔렀다.
"언제까지 돌아오지 않는 화살을 쏘려 하시오."
의열단원이 거사를 성공시켜도 공을 치하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원수 손에 무참히 꺾여버리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라고 이해했다. 조선과 일본으로 동지 수백 명을 보냈으나 돌아온 사람은 겨우 손에 꼽을 정도인 사정을 손문도 잘 알고 있었다. 돌아올 화살을 쏘고, 돌아오게 해서 또 쏘아야 한다는 손문 말에 가슴이 꽉 옥죄어졌다.
지난달 임시정부에서 일하는 백범 김구도 의열단 본부로 격려차 방문한 자리에서 해방조국에서 나라를 이끌어가야 할 인재를 낭비하는 것 같아 너무 참담하다며 안타까워했다. 의열단 거사를 낮추어 평가하려는 뜻은 없다고 했으나 뼈에 사무친 아픔을 의열단 밖 사람에게 듣기는 더 민망했다. - P173

목숨을 건 혁명투쟁만큼이나 생업이 때로는 더 가까이에서 목을조이는 현실을 나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내 주위에는 임시정부에서 일하며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의열단원으로 활동한 청년이 많았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창조파와 개조파로 갈리며 분열해버린뒤로는 뿔뿔이 흩어졌다. 누구는 막노동으로, 다른 이는 가게 점원으로, 농장 인부로, 누군가는 장사로 그렇게 먹고사는 길을 열어가고 있지만, 각자도생이라는 개인 목표와 혁명이라는 공동 목표는 그 거리가 너무 멀면 안 된다. 지도부가 자신을 버려둔다고 여기게 해서도 안된다.
나는 생각을 거듭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의열단 근거지를 광주로옮기고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유자명은 외세에 기댄 결과는 좋은 적이 없었다며 끝내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아무리 토론을 해도 완전히 하나로 결론이 나기는 참 어렵다.
나는 최상은 아니라 해도 이 길이 최선이니 의열단을 꼭 지켜내자는 결론으로 논쟁을 마무리했다. 대신 유자명이 상해에 남아서 의열단 본부를 지키기로 했다. 말은 그럴듯하게 ‘상해에 남는다‘로 포장했지만 사실상 낙오다. 유자명을 두고 가는 걸음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 P179

 의열단이 볼셰비키 혁명에서 영향을 받았느냐는 소련 대표단 질문에는 고개를 끄덕이지않았다.
"폭력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투쟁 방식이오."
의열단도 볼셰비키 혁명처럼 민중을 억압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아름다운 폭력을 쓰기는 해도 공산주의를 꿈꾸지는 않는다고 했다. 오성륜이나 김산처럼 의열단원 가운데 공산주의를 꿈꾸는 사람이 많기는 해도 의열단 공식 입장이 공산주의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조지 쇼우가 영국 식민지인 아일랜드 사람으로서 일본 지배를 받는 조선 사람이 벌이는 의열투쟁을 공감하고 지원했으니 아일랜드폭력조직과 의열단이 직접 연결될 수도 있다. 그동안 의열단이 벌인투쟁 소식을 듣고 아일랜드 사람이 스스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어떤방식이든 아일랜드 폭력조직이 의열단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짐작에도 소련 대표단은 동의했다. - P191

예상한대로 올 것이 왔다. 이미 예견된 일이라 크게 놀라진 않았다. 김산과 오성륜 등을 비롯한 공산당원들이 무사히 몸을 피했는지 알아보게 했다.
장개석이 일으킨 쿠데타는 무한에 자리 잡은 국민당 좌파가 공산당과 손을 잡으면서 시작된 국공합작이 무너지는 신호였다. 장개석은 국민당 안에 자리 잡은 공산당을 처단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한총탄으로 두 새를 떨어뜨리는 전략이다. 국민당 안에서 좌파를 몰아낸다는 구호를 통해 국민당과 손잡은 공산당까지 쓸어내려는 전략이다. 어제까지 동지로 모인 국민당과 공산당은 이제 이념으로 갈라선 적이 되어버렸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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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2월에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거사 소식이들려왔다. 밀양은 우리 의열단 혁명동지에게는 본거지나 다름없다.
1차 거사 때엔 폭탄 던질 대상으로 밀양경찰서를 가장 먼저 정하기도 했다. 마침 월요일 조회시간이라 서장이 여러 경찰을 늘여 세우고조회를 하는 가운데에 폭탄을 던져서 유리창이 깨지고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아무도 죽이지 못했다. 최수봉은 칼로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해 체포당했다. 이번에는 폭탄이 문제였다. 정교하게 만들지 못한 폭탄이라 소리만 요란하고 비산 파편이 생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목적을 달성했다면 내 손으로 자결을 하려 했는데, 원수에게 붙잡혀 이런 욕을 당하니 통분할 뿐이라고 법정에서 당당히 외친 최수봉은 사형 선고를 받고 28세로 대구형무소에서 짧지만 당당하게 삶을 마감했다. 첫 번째 거사 때도, 두 번째와 이번에도 성패와 관계없이 동지를 잃었다. 살점이 뜯겨 나가는 아픔이다.  - P102

김산은 독립운동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의열투쟁을 혁명이라고불렀다.
"일제를 몰아낸다고 해도 조선을 되살릴 것도 아니고요."
의열투쟁이 조선왕조를 되살리려는 활동이 아니라, 일제 섬멸을 비롯해 일체 불의를 몰아내 세계 평화를 지키고, 정의를 세우며, 민중을 자각시키는 운동이니까 혁명이라고 불러야 한단다. 김산이 펼치는 견고한 논리에 흐뭇한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왜놈 하나를 죽이고 못 죽이고를 떠나서 폭탄 하나는 커다란 메시지를 던지는 일입니다."
드러나게 보이지 않아도 내 몸속에 생명을 이끄는 심장이 뛰듯이,
단지 폭탄 하나를 던지는 일이지만 세상에도 불의에 항거하는 심장이 뛰고 있음을, 그래서 평화와 자유라는 생명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희망을 던지는 일이라는 주장과 논리에 막힘이 없다. 꼭 내 속에 들어와 내 생각을 낱낱이 읽는 것 같았다. - P129

그 무렵 소비에트 혁명정부는 약소국을 돕는 자금으로 임시정부에 백만 루블 지원을 결정했다. 그 가운데에서 40만 루블을 넘겨받기로했으나 일제 감시를 피해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가지고 갈 방법이없어 애를 태웠다. 그러던 차에 이태준이 몽골 왕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몽골 땅을 거쳐서 돈을 운반해 왔다. 이태준이 아니었다면 코민테른이 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음에도 전달이 안 되어서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코민테른 지금 가운데에서 많은 액수가 의열단 활동비가 되었다.
이태준이 돈을 가지고 온 목적은 자금 운반 하나만이 아니었다. 의열단 가입을 위한 걸음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태준은 의열단이 폭탄 전문가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마자르를 찾아낸 모양이었다. 마자르는 헝가리군으로 러시아 내전에 참전했으나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러나 여비가 없어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팔 무기조차 없는 빈손이었다. 그렇게 마자르는 돈이 없어서 타향을 떠도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피할 데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세미요노프 부대와 만나버렸지뭐요."
세미요노프는 러시아혁명에 반대하는 한 부대를 이끄는 장군이다.
그 부대에 하필이면 요시다라는 일본인이 참모로 있었단다. 마자르와 함께 의열단 본부를 향해 오고 있던 이태준은 코민테른 자금을 운반한 게 빌미가 되어 결국 요시다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 P131

조선혁명선언은 강도 일본이 우리 국호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로 시작했다.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박삭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로 끝나는 6천4백여 자에 이르는 거대 선언이었다. 그야말로 깊고 넓고 큰 혁명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며,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과 손잡고 끝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 강도일본을 타도하고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여 조선을 이상국가로 건설할 것이다."
- P140

그나마 새로 생겨나는 사회주의 단체인 고려공산당 국내 지부가우리를 도울 유일한 조직이다. ‘일제와 자본으로부터 조선 민중을 해방시키고, 토지를 몰수해 무상으로 농민에게 균등하게 분배하며, 대공장과 광산, 기간산업은 국유화한다‘는 고려공산당 강령은 의열단공약과 일맥상통할 뿐만 아니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라는 조선혁명선언에도 부합한다. 상대가 일본 편이 아니라면 손잡지 못할 까닭이 없다.
거사를 위해서 새로 조직을 꾸리려 했다가는 시간만 끌게 된다. 실패한 1차 거사가 되풀이될 뿐이다. 사회주의든 민족주의든 소련이든 중국이든, 혁명을 위해서라면 비록 일본이라도 누구라도 손을 잡아야 한다.
폭탄만 던지고 끝날 일도 아니다. 기미년 만세운동은 비폭력과 평화를 내세워서 아무 소득도 얻지 못했지만, 이번 거사는 일본 통치기관을 모두 부순 다음 국내 조직을 통해서 민중이 들고일어나는 순서다. 그래야 일본을 단번에 굴복시킬 수 있다. 다행히 고려공산당에서 임시정부에 파견한 이동휘 선생이 국내 지도자 김한과 김시현을 연결해주었다. 전국 주요 시설에서 폭탄이 터지고 나면 공산당 청년조식이 앞장서 전국에서 들고일어나기로 정했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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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토지조사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조선 땅을 강제로 빼앗지 않았다면 일본 사람 그 누구도 우리 농토를 한 뼘도 차지하지 못했을거다. 자기 소유의 땅을 나라에 신고하라고 했지만, 백성들은 땅은 나라님 소유라며 신고하지 않았다. 뿐인가. 일본 사람 말은 무조건 듣기 싫다고 안 하고, 문중 땅이지 어떻게 내 땅이냐고 안 하고, 어렵다고 안 하고, 귀찮다고 안 했다. 그러나 일제는 임자없는 땅은 나라 소유라며 모두 빼앗아가버렸다. 그 다음에는 조선임야조사령을 내려서 주인 없는 산도 다 나라 땅이라며 빼앗아가버렸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으니 일본 땅이 되어버렸다. 일제는 빼앗은 땅과 산을 일본에서 건너온 일본 사람에게 싸게 팔아넘겼다. 우리 땅이 그대로 일본 사람차지가 되어버렸다. 그제야 너도나도 나라 빼앗긴 실감을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도 너무 늦은 다음이었다. - P49

만세운동을 이끈 지도자 33명이 왜 비폭력을 선택했는지, 약수 형님 중학교 은사인 박중화 선생이 보내온 편지로 알게 되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를 믿은 탓이다.
"청나라를 믿고 그다음엔 러시아를 믿고 또 미국을 믿어 결국 일본한테 먹히더니, 이번에도 또다시 미국을 믿었다고?"
‘민족이 처한 문제는 민족 스스로 해결해야 하며 미국은 그 민족을돕겠다‘는 윌슨 말에 기대를 걸고는, 만세운동을 일으키면 미국이 일본한테 물러가라고 해줄 거라 믿었다는 말이다. 윌슨 대통령과 미리 약속한 일도 아니고 막연한 기대 하나만으로 온 나라와 백성을 죽음으로 몬 일은 무책임하다고밖에 할 수가 없다. 윌슨이 내세운 민족자결주의가 우리나라에도 해당된다면 파리평화회의에서 김규식이 연설할 때부터 미국은 우리를 돕겠다고 나섰겠지. 일본과 한 편인 미국에 기대를 걸다니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다. 파리평화회의에서 미국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몰라서 벌인 일이 분명하다. 윌슨이 말하는 민족자결주의는 세계대전 패전국이 지배했던 식민지에 독립을 촉구해, 패전국이 식민지를 포기하게 만들려는 교활한 술책일 뿐이다. 조선은 승전국인 일본이 차지한 식민지니까 민족자결에 해당되지 않는다. - P52

"역시 의열투쟁뿐이에요."
내가 내린 결론은 열혈 지사가 앞장서 적을 암살하고 시설을 파괴
하면 조선 민중이 폭력 의거를 일으켜 강도 일본을 타도하고 광복을 이루는 길이다. 의열투쟁은 총을 수천 자루 구하지 않아도 되고을 수천수만 명 모으지 않아도 된다. - P57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세운 까닭은 임시정부를 세운 주축이 경기도와 황해도 출신에다 개신교 신자이기 때문이다. 지역주의와 개신교신자라는 종교 파벌이 적잖이 작용한 탓이다. 이승만을 추대한 세력이 내세운 명분은 미국과 박사였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으니 임시정부 요인 가운데 가장 많이 배운 사람이라고 여긴까닭도 크게 작용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세우면 임시정부가 일본을 대적할 때 큰 나라인 미국으로부터 도움을받기가 수월하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3.1만세운동 때도 아무런 도움을 못 받았으면서 여전히 미국바라기를 버리지 못했다. 보이는 면과보이지 않는 면이 모두 작용해 가장 많은 사람이 추대해서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이승만에게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올 생각이 처음부터없었다. 독립운동가에게 위험 요소라고는 한 줌도 없는 미국에 머물면서 워싱턴에 구미위원회를 만들고 대통령 집무를 보았다. 결국 임시정부는 대통령이 함께하지 않는 껍데기 정부가 되어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승만은 나랏일을 임시정부와 의논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정했다. 워싱턴에서 제멋대로 국채를 발행했다. 나라가 빚을 지는 일을 혼자서 결정하고 마음대로 집행했다. 자신이 대통령이니 나랏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 직접 결정하겠다면서 임시정부가 가지고 있는 돈도 모두 자기에게 넘기라고 떼를 썼다. - P62

 왜놈을 몰아낸다는 ‘구축왜노驅逐倭奴‘와 더불어 ‘광복조국光復祖國‘, ‘타파계급打破階級‘을 비롯해 중국이 신해혁명에서 내세운 토지 소유를 균등하게 한다는 ‘평균지권平均地權‘을 혁명 목표로 정했다.
쳐부술 대상을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 주요기관으로 정하고 ‘5파괴‘라 불렀다. 이어서 처단할 대상을 정했다.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매국노 친일파 거두, 밀정, 반민족 토호열신 그리고 대만 총독을 넣기로 했다.
"대만도 우리처럼 왜놈에게 빼앗긴 땅입니다. 우리가 중국 땅에서 활동하려면 중국으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하니, 대만 총독을 처단하는 일도 우리 활동에 넣읍시다."
내 말에 모두 찬성했다. 이렇게 처단할 일곱 대상을 ‘7가살‘이라 부르기로했다. - P73

조선이 일본에 잡아먹힌 게 아니라 헐값에 팔렸다는 박재혁 말을들으니 생각나는 게 있었다. 가뜩이나 탐관오리 착취와 수탈로 허약해진 농촌 경제가 강화도조약으로 서양 물건이 들어온 후 그것들을 사느라 쌀을 내다팔면서 완전히 무너졌다. 그런데 계몽을 한답시고 학교를 세우네 어쩌네 하면서 동양척식주식회사든 일본금융조합이든 빚 안진 사람이 없게 되었고, 나라에서도 근대화를 한다며 진 빚을 갚지 못하게 되었다.
"임금이 식산흥업 정책도 써보고 백성이 국채보상운동도 해보았지만, 이미 왜놈이 부린 농간으로 달콤한 자본주의 맛을 보았으니 높으나 낮으나 뭐라도 팔아먹을 궁리만 하게 되었습니다."
철도 부설권도 팔고 광산채굴권도 팔고 삼림채벌권도 팔았다. 팔다 팔다 나라까지 서슴없이 팔아먹었다. - P97

"거사는 성공했다는구나."
약수 형님이 내가 가장 궁금해할 소식을 알려주었다. 부산경찰서장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 박재혁은 중상을 입었다고 했다. 부산경찰서가 크게 파손되었고 일본 경찰 두 명도 부상을 심하게 입었다고 했다. 폭탄을 던진 게 아니라 경찰서장과 마주 앉은 상태에서 터트렸다는 말에 왜 퇴로 확보를 사양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폭탄이 실패해 총을 쏘려면 최대한 가까이 붙어야 한다. 네댓 걸음만 떨어져도 몸을 비틀어 피하면 명중시키기가 어렵다.
박재혁은 폭탄을 손에 쥐고 터트려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부상을 당했고, 치료가 되어도 어차피 사형을 받아 죽을 목숨이라며 식사를 거부한다고 했다. 가슴을 파고들어 심장을 도려내는 통증이 훅 밀려왔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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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임포스터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메타인지 학습법》을 집필하고 난 뒤, 나는 메타인지의 특성 중 어떤 부분이 한국 문화에 잘 들어맞고 중요할지 깊이 생각해보았다.
뿐만 아니라 메타인지 강연 후 학부모들과 가졌던 대화 시간에, 나도내 내면의 거울을 통해 나를 더 깊이 관찰할 수 있었다.
<메타인지 학습법>에서도 밝혔듯 나도 나를 인정하는 용기가 많이 부족했었다. 남보다 느리거나 남과 다르다는 생각에 창피함을 느꼈고, 힘든데도 괜찮은 척했으며, 실수를 저지를까 봐 입을다물곤 했다. 과거의 나는 내 진짜 모습을 가리기 위해 가면 뒤에 숨었던 적이 많다.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가면을 쓰게 될까? - P12

나는 메타인지를 용기라고 정의한다. 학습이 이뤄지려면 포기하지 않는 용기, 도전하는 용기, 실수를 극복하는 용기, 창피함을 무릅쓰는 용기,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용기,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용기 등 정말로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메타인지를 정의하는 데필요한 또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믿음이다. 용기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P7

자신을 무능한 가짜라고 믿는 임포스터들은 두 가지 두드러진 행동양상을 보인다. 바로 ‘과도한 노력‘과 ‘미루기‘다. ‘과도한 노력‘은 자신이 가짜란 사실이 탄로나는 것을 막기 위해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 데서 오는 근면함이다. 그 밑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이와 반대로 ‘미루기‘는 시험공부나 면접준비 등 해야 할 일을 앞두고 일부러 하지 않는 것이다. 미루기는 일종의 자기불구화 self-handicapping 현상으로, 자기가 뻔히 실패할 것 같은 일을 앞두고 일을 미룸으로써 미리 실패의 이유를 만들어놓는 심리다. 실패했을때 그 원인을 자신이 아닌 다른 것으로 돌리기 위해서 일부러 성과를 내기 어려운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과도한 노력‘과 ‘미루기‘는 임포스터가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특징적 행동이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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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퍼드대학의 웹페이지를 살펴보더라도 살인의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제인 스탠퍼드의 죽음은 사인이 "확실하게 규명되지 않았다"라고만 나와 있다. 그리고 "조던 학장을 만나보자"라는 페이지에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긴 프로필을 한참 훑어 내려가다 보면 제인 스탠퍼드의 죽음에 그가연루되었을 가능성이 담긴 한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1905년 2월에 제인 스탠퍼드가 불가사의한 상황에서 사망했을 때, 조던은서둘러 하와이로 달려갔다. 이는 시체를 찾아오기 위함이었고, 일부 사람들의 생각에 따르면 제인이 독살되었다는 보도가 나오는걸 막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이런 짐작도 최근에야 추가된것이다. 거의 한 세기가 가깝도록 제인은 자연사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더 흉악한 사인에 대한 소문은 확실히 무시되어왔기때문에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 P167

화이트는 독살이 누구의 소행이든 데이비드가 독살을 은폐하려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점점 더 확신했다. 그의 학생들은 제인의 죽음 이후 데이비드가 벌인 수상한 행동들을 계속해서 밝혀냈다. 데이비드의 지인이 그에게 음식을 너무 많이 먹는 것으로도 죽는 게 가능하다고 확인해주는 편지, 데이비드가 범죄를 은폐한 것에 대해 "사후 세계에서 심판받을" 것이라고 말한 발신자 미상의 편지, 제인의 스파이가 데이비드에게 "돈으로 내 입을 막을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 편지 등. 또한 누구도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은 채 몇십 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데이비드가 계속해서 "제인이 자연적 원인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한 점도 이상했다. 데이비드의 그런 주장은 그가 나이 들어갈수록 연설, 신문 기고문,
편지 등 엉뚱한 곳에서 툭툭 튀어나왔다. 화이트는 데이비드가 이버전의 사건 이야기를 그렇게까지 고집스럽게 계속 주장한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그는 제인의 죽음에 관한 뭔가가 데이비드를 죽을 때까지 줄곧 괴롭혀온 것 같다고 여겼다. - P170

나는 빈손으로 집에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채로.
내 목덜미로 뜨거운 열을 치솟게 만든 그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두어 달 뒤의 일이다. 데이비드가 쓴 물고기수집 안내서 중 하나인 《물고기 연구를 위한 안내》에서 답을 찾고있을 때였다. 나는 미소를 머금고 그의 친절한 서문을 읽었다. 거기서 그는 독자들에게 물고기는 어디서든 찾을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이를테면 "물고기들이 ‘수영하는 구멍‘, 즉 강가의 오래된 나무뿌리가 물속으로 드러난 부분, 그 사이 물살이 빙빙 도는 웅덩이"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가 그린 물고기의 턱뼈, 가슴지느러미, 부레 등의 그림을 휙휙 넘겼다.
그러다가 430 페이지에서, 나는 그것을 보았다. "물고기를 확보하는 방법"이라는 섹션에서, 그는 거기까지 자신을 따라온 대담한 독자들에게 한 가지 비밀을 누설했다. 조수웅덩이 틈새로 쏜살같이 들어가버리는 탓에 좀처럼 잡히지 않는 가장 성가신 물고기를 잡을 때 그가 가장 즐겨 쓰는 방법은 뭘까? 바로 독이다. 구체적으로 그가 추천한 종류는? 언젠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쓴 것"이라고 묘사했던 위험하고 강력한 물질, 바로 스트리크닌이다.
- P175

전 세계에서 인류의 "쇠퇴"를 예방할 유일한 방법은 이 "백치들"을 몰살하는 것이라고 권고하는 책, 겨우 몇십 년 전에 처음 생겨난 한 단어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책이었다. ‘그 단어‘는 그가 처음쓰기 시작했을 때는 미국에서 그리 인기가 없는 단어였지만, 그가 지극한 열성과 과학적 권위를 갖고 옹호했던, 그리하여 그의 도움에 힘입어 미국 땅에 널리 보급된 단어, 바로 우생학eugenics 이다. - P181

이런 글들에서 데이비드는 자신이 지구상에서제거해버리고 싶은 종류의 사람들―빈민들과 술꾼들, "백치들"과 "천치들", "바보들", 도덕적 타락자들―을 모두 모아, 적격자와 반대되는 "부적합자"라는 한 범주에 몰아넣었다. 부적합자! 단박에 귀를 사로잡으며 매우 암시적이고 너무나 깔끔한 단어.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살 자격이 있는가에 관한 그의 의견에 과학의 망토를둘러줄 수 있는 단어였다. 부적합자! 그냥 한 남자의 판단이 아니라, 자연에 존재하는 현실 자체. - P183

내가 받은 전체 교육과정 가운데 이 나라가 우생학 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우생학은 미국식 신여성과 포드 모델 못지않게 미국 문화의 두드러진 한 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비주류가 아니었고, 당파를 가리지 않았으며, 20세기의 첫 다섯 대통령이 모두 우생학의 밝은 전망을 찬양했고, 하버드부터 스탠퍼드, 예일, 캘리포니아 버클리, 프린스턴까지 전국의 모든 명망 있는 대학들에서 우생학을 가르쳤다. 우생학 잡지, 우생학 화장품, 심지어 우생학 경진 대회도 있었다. 주 박람회의 축제 분위기 물씬 나는 흰 천막 아래서 가장 적합한 가족과 최고의 아기를 뽑는 콘테스트가 종종 열렸다. 호박의 크기와 무게를 재듯 아기들의 무게와 치수를 쟀다. 흰 피부, 둥근 두상, 가장 대칭이 잘 이뤄진 이목구비에 파란 리본이 주어졌다. - P185

무엇보다 이견의 핵심은 《종의 기원》에 있었다. 어째선지 데이비드와 프랜시스 골턴은 둘 다 그 결정적인 사실을 흘려버렸다.
한 종을 강력하게 만들고, 그 종이 미래까지 지속하게 해주며, 혼돈이 홍수, 가뭄, 해수면 상승, 기온 급변, 경쟁자, 약탈자, 해충의침략 등 가장 강력한 형태의 타격을 가해올 때도 그 종이 버틸 수있게 해주는 것으로 다윈은 무엇을 꼽았을까? 바로 변이다. 행동과 신체의 특징에 변화를 일으키는 유전자에 생긴 변이 말이다.
동질성은 사형선고와 같다. 한 종에서 돌연변이와 특이한 존재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은 그 종이 자연의 힘에 취약하게 노출되도록 만들어 위험을 초래한다. - P188

이것이 바로 다윈이 예언했던 그런 상황이다. 그가지구의 수많은 생명들의 순위를 정하지 말라고 그토록 뚜렷이 경고한 이유는 "어느 무리가 승리하게 될지 인간은 결코 예측할 수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력으로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생태의 복잡성에대한 이러한 조심스러움과 겸손함, 공경하는 마음은 사실 대단히오래된 것이다. 이는 때로 "민들레 원칙"이라고도 불리는 철학적개념이다. 민들레는 어떤 상황에서는 추려내야 할 잡초로 여겨지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경작해야 하는 가치 있는 약초로 여겨지기도 한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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