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만 건너면 신의주에서 김시현 조직이 폭탄을 넘겨 받기로했다. 서울로 가져가는 문제는 국내 조직이 감당하기로 정했다.
"외백도 해방조국에서 큰일을 할 인재고, 나도 견마지로를 아끼지않으려 하오."
황옥은 다카키가 계속 의열단을 감시할 거라고 알려주었다.
"나와 같이 가는 의열단을 국내 조직과 연결되는 순간 모조리 체포하는 줄 알고 있소."
때를 맞추어서 여기서도 의열단을 체포하려들 테니 그 전에 다카키를 적당히 처리하라고 했다. 하지만 적당한 처리란 없다. 사느냐 죽느냐가 있을 뿐이다. 죽음이 가장 적당할 뿐이다.
유석현과 김시현, 김상윤, 김재진을 비롯한 여섯 명이 황옥 경부를수행하는 일행으로 꾸며서 기차를 타기로 정했다. 마자르는 단원 모두와 뜨겁게 포옹을 했다. 북경을 거쳐 헝가리로 돌아가게 된 그는 혁명이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빌어주었다. 현계옥도 현정건에게 돌려보냈다. 마자르가 포옹하자고 할 때는 머뭇거리더니, 마자르 옆에 서서마자르가 포옹한 사람을 현계옥이 이어서 포옹하자 우르르 마자르앞으로 몰려들었다.
- P149

지난 1923년 1월 12일에 의열단원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일본 경찰을 죽이고 거사를 성공시켰다. 그 후 피신을 다니다22일 5백여 명이나 되는 일본 경찰에 둘러싸였다. 일본 경찰 수십 명을 죽거나 다치게 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번 거사는 김상옥에 대한 복수도 겸하고 있다. 모든 준비는 완벽하다. 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전국 경찰서에서 동시에 폭탄이 터지고 왜적과 친일파를 처단할 날이 눈앞에 왔다. 이번에야말로 불발탄과 시간 끌기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해치울 조건이 다 갖추어졌다. 김상옥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북경에 왔다는 황옥이 오히려 의열단과 합심하고 복수에 앞장서게 되었으니 김상옥 동지가 주고 간 숙제를 풀어간다는 희열이 차올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 P150

"너무 어이가 없소"
사흘 뒤에 혼자 돌아온 김지섭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좀처럼 풀지 않았다. 김재진이 밀고한 것도 맞는데, 사회주의 청년조직이 허술했기 때문이기도 했다며 아쉬워했다. 아직 실전 투쟁 경험이 없고, 노련한 투쟁 단위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밀 유지가 철저하게 되지 않은 탓이라고 했다. 하지만 유자명은 사회주의 청년조직 잘못이라고는 하지 말자고 했다.
"국내에서 창당 준비도 변변히 못하고 있는 조직입니다. 아직 의욕만 넘치는 단계이니 체계가 단단할 리 없고, 투쟁 강령이 확고하게 자리 잡혔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해야 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떠맡긴 우리 잘못이 더 크다며, 거사 실패가국내에서 사회주의 조직을 세우는 데에 방해만 되었으니 도리어 미안하게 여겨야 한다고 정리했다. 나는 일제가 지나치게 분투해 민중을 옭아매고 있으니 제대로 된 조직이 생기나기도 어렵고, 생겨도 제대로 활동하기 어렵다며 현실을 직시하자고 다독였다. 상대를 비난하는 만큼 연대는 멀어지고,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만큼 소통도 멀어진다는 걱정도 덧붙였다.
"우리는 완벽한데 상대가 모자란다는 논리는 절대로 펼치면 안 되오."
- P155

김산은 내무대신 미즈노가 3.1만세운동 때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었고, 경시총감 아카이케는 3.1만세운동 때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을 지냈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 두 놈이 일본 민중에게 조선 사람을 죽이고 스스로를 지키라고 부추겼습니다."
김산은 그 두 사람이 철저하게 계산해서 저지른 일이라고 했다.
일본 입장에서 3.1만세운동은 폭동이다. 사무라이 나라인 일본에서는 폭동이란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 3.1만세운동은 일본이 한번도 겪어본 적 없는 민중봉기였다. 무자비한 폭력 진압은 전 세계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불러왔고, 조선 강점에 대한 비판까지 뒤집어써야 했다.
미즈노도 아카이케도 조선에서 폭력으로 진압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 일본으로 왔는데 일본에서도 폭동이 일어난다면 자국민을 상대로폭력 진압을 할 수 없으니 막을 방법도 없다. 군인이나 경찰이 총이나 칼로 조선 사람을 죽이면 또 엄청난 문제가 일어날 게 뻔하다. 그래서 민간인 조직인 자경단이 집에 숨겨둔 일본도나 죽창, 쇠꼬챙이나 곤봉으로 직접 조선 사람을 죽이도록 유도했다. 사회가 불안할 때 일어난 대지진,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용광로처럼 끓어오른 분노를 엉뚱한 대상인 조선 사람에게 풀게 만들었다.  - P159

1926년 12월 어느 날, 나석주가 단독 면담을 청했다.
"먹고살기 어려운 원인을 게으름과 흉년 때문이라고 일본이 벌이는 거짓 선전에 조선 민중이 속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는 민중을 자각시키겠다며 조선으로 보내달라고 청했다.
"적을 목베기 위해서는 왼팔 정도는 내줄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잃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며 살아 돌아오지 못해도 한 점 부끄러움도 후회도 없다고 각오를 밝혔다.
나석주는 중국어 실력이 좋았다. 중국 사람에게는 조금 어설프게 들려도 일본 사람에게 유창하게 들릴 정도는 되었다. 서른다섯 살 먹은 마중덕이라는 신분증을 만들고 중국 노동자처럼 변장해 인천행배에 올랐다.
12월 28일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던지고 권총을 난사했다. 직원과 경기도 경찰부 경부보를 사살한 뒤일본 경찰로부터 추격을 받자 모여든 군중을 향해 ‘나는 조국과 조선민중이 자유를 누리게 만들기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고 외친 후 권총을 스스로에게 겨누어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섰다.
나석주거사가 있은 뒤 두 해가 지난 어느 날, 백운학이라는 소년이 의열단에 가입하겠다며 찾아왔다. 열서너 살밖에 안 되어 보이는지라 의열단원이 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자기 이름이 나용섭인데, 오는 동안 신분이 탄로날까 봐 백운학이라는 가명을썼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처음 보는데도 얼굴이 낯익은 까닭을 금세 알아차렸다.
"가친은 함자가 석 자 주 자이십니다." - P168

손문은 만나자마자 아픈 곳을 찔렀다.
"언제까지 돌아오지 않는 화살을 쏘려 하시오."
의열단원이 거사를 성공시켜도 공을 치하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원수 손에 무참히 꺾여버리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라고 이해했다. 조선과 일본으로 동지 수백 명을 보냈으나 돌아온 사람은 겨우 손에 꼽을 정도인 사정을 손문도 잘 알고 있었다. 돌아올 화살을 쏘고, 돌아오게 해서 또 쏘아야 한다는 손문 말에 가슴이 꽉 옥죄어졌다.
지난달 임시정부에서 일하는 백범 김구도 의열단 본부로 격려차 방문한 자리에서 해방조국에서 나라를 이끌어가야 할 인재를 낭비하는 것 같아 너무 참담하다며 안타까워했다. 의열단 거사를 낮추어 평가하려는 뜻은 없다고 했으나 뼈에 사무친 아픔을 의열단 밖 사람에게 듣기는 더 민망했다. - P173

목숨을 건 혁명투쟁만큼이나 생업이 때로는 더 가까이에서 목을조이는 현실을 나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내 주위에는 임시정부에서 일하며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의열단원으로 활동한 청년이 많았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창조파와 개조파로 갈리며 분열해버린뒤로는 뿔뿔이 흩어졌다. 누구는 막노동으로, 다른 이는 가게 점원으로, 농장 인부로, 누군가는 장사로 그렇게 먹고사는 길을 열어가고 있지만, 각자도생이라는 개인 목표와 혁명이라는 공동 목표는 그 거리가 너무 멀면 안 된다. 지도부가 자신을 버려둔다고 여기게 해서도 안된다.
나는 생각을 거듭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의열단 근거지를 광주로옮기고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유자명은 외세에 기댄 결과는 좋은 적이 없었다며 끝내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아무리 토론을 해도 완전히 하나로 결론이 나기는 참 어렵다.
나는 최상은 아니라 해도 이 길이 최선이니 의열단을 꼭 지켜내자는 결론으로 논쟁을 마무리했다. 대신 유자명이 상해에 남아서 의열단 본부를 지키기로 했다. 말은 그럴듯하게 ‘상해에 남는다‘로 포장했지만 사실상 낙오다. 유자명을 두고 가는 걸음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 P179

 의열단이 볼셰비키 혁명에서 영향을 받았느냐는 소련 대표단 질문에는 고개를 끄덕이지않았다.
"폭력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투쟁 방식이오."
의열단도 볼셰비키 혁명처럼 민중을 억압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아름다운 폭력을 쓰기는 해도 공산주의를 꿈꾸지는 않는다고 했다. 오성륜이나 김산처럼 의열단원 가운데 공산주의를 꿈꾸는 사람이 많기는 해도 의열단 공식 입장이 공산주의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조지 쇼우가 영국 식민지인 아일랜드 사람으로서 일본 지배를 받는 조선 사람이 벌이는 의열투쟁을 공감하고 지원했으니 아일랜드폭력조직과 의열단이 직접 연결될 수도 있다. 그동안 의열단이 벌인투쟁 소식을 듣고 아일랜드 사람이 스스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어떤방식이든 아일랜드 폭력조직이 의열단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짐작에도 소련 대표단은 동의했다. - P191

예상한대로 올 것이 왔다. 이미 예견된 일이라 크게 놀라진 않았다. 김산과 오성륜 등을 비롯한 공산당원들이 무사히 몸을 피했는지 알아보게 했다.
장개석이 일으킨 쿠데타는 무한에 자리 잡은 국민당 좌파가 공산당과 손을 잡으면서 시작된 국공합작이 무너지는 신호였다. 장개석은 국민당 안에 자리 잡은 공산당을 처단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한총탄으로 두 새를 떨어뜨리는 전략이다. 국민당 안에서 좌파를 몰아낸다는 구호를 통해 국민당과 손잡은 공산당까지 쓸어내려는 전략이다. 어제까지 동지로 모인 국민당과 공산당은 이제 이념으로 갈라선 적이 되어버렸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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