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내가 차지하고 있는 이 공간적 지점에 시간 속의 이 정확한 순간에 자리잡고 있다. 나는 이 지점이 결정적이지 않은 것을 허락할수 없다.

야금야금 나눠 먹고 있는 책, 지상의 양식의 한 구절입니다. 이 말은 즉, 저는 현재 강남역 어느 세미나실에서 2012년 11월 7일 저녁 7시 30분이라는 순간을 삽니다. 이 순간 속에 있는 게 저고요. 만약 여기에서 마다가스카르나 그랜드 캐니언을 꿈꾼다는 건 내가 서 있는 이 공간에 대한 무시입니다. 이 지점이 결정적이지 않은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현재가 나한테 결정적이지 않은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것이죠. 앙드레 지드는 결국 삶은 ‘현재 순간들의 지속적인 일어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매 순간 그대는 신을 송두리째 가질 수 있음을 잊지 말라‘고 못을 박죠. 매 순간 신은 바로 여기에 있고 전부 내차지가 될 수 있습니다. 앙드레 지드가 말한 ‘그대 온 행복을 순간 속에서 찾아라‘만 실천한다면요.
그가 지상의 양식」에서 말한 순간에 대한 현재에 대한 다른 이야기도 들어볼까요?

- 나는 나의 모든 재산을 내 몸속에 지녔다.
- 결코 미래 속에서 답을 찾으려 하지 말라. 모든 행복은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다.
- 우리는 순간에 찍히는 사진과 같은 생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 우리 생각순간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과 바뀔 수 없다.
- 때로는 오직 그 순간에만 마음을 쏟아야 한다.

사르트르의 이야기도 한마디 더 들어보죠.

인생은 잘 짜인 이야기보다는 그 하나하나가 관능적인 기쁨인, 내일없는 작은 조각들의 광채다.
ㅡ 사르트르 카뮈의 『이방인』에 대한 비평문 중에서 - P142

판사증후군, 대학증후군, 이 이야기는 우리 생각 저변에 ‘아, 저 학교간 사람은 다 똑똑해, 의사가 된 사람은 다 존경할만해‘라는 식의 생각이 깔려 있다는 거죠. 이런 단순 도식이 있을 수 있나요? 아니 인생이 이렇게 단순한가요? 인생은, 사람은 절대 단순하지 않아요. 판사 중에후진 판사는 정말 후져요. 의사 중에 무식한 의사도 많고요. 뉴스 사회면에 나오지 않습니까? 자신이 돈을 벌어다 주는데 아내가 집 열쇠, 차열쇠, 병원 열쇠 가져오지 않았다고 아내를 때리는 의사 이야기요. 이건 무식한 사람이잖아요. 법조계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살펴보세요. 떡검, 개인사찰 등의 뉴스 기사가 많습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이 정상적이고 올바른 사람들이 하는 걸까요? 이런 검사 판사보다 평범한 직업이라도 열심히,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훨씬 멋진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멋지고 말고의 문제는 직업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도이 정도는 다 알고 있어요.
제가 하고 있는 광고 일, 저 역시 사기꾼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하지만 ‘잘‘ 하면 되는 겁니다. 의사도 판사도 아니고 사기꾼 소리나 듣는데 그냥 먹고살 정도로만 대충 해야지, 이런 수동적인 생각으로 일하고 싶지 않아요. 난 이 일을 가장 멋지게 하고 싶습니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니까요. 바깥의 권위에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 P155

이런 것들이 왜 동의가 되어야 하는 걸까요? 우리는 모두 완벽하게 불완전한 사람들인데요. 문턱증후군 때문에 문턱을 넘은 일부 사람들은 완전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믿지 마세요. 회장님이 전지전능하지 않아요. 물론 존경스러울 수도 있지만 모든 말이 옳고, 실수는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에요. 판사도, 의사도, 서울대생도, 회장도 나보다 낫지만 또 한편 나보다 못한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 P157

여러분도 동의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회는, 기득권 세력은 고분고분한 사람을 원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도발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될 테니까요. 때문에 권위를 보이면서 복종하고 따라오라고 무언의 협박을 하죠. 우리는 그런 가짜 권위들을 검증하는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 P163

인생을 멋지게 살고 싶다면, 강자한테 강하고 약자한테 약해져라.

강자한테 당당하게 고개 들고 약자한테 푹 숙이세요. 예전 故 노무현대통령 사진 중에 신문사 사주들을 만났을 때 눈을 보면서 악수하고, 농민을 만나 인사할 때는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있었어요. 저는 그런삶의 태도가 제대로 사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국기행』에는 이런 구절도 나옵니다.

영국인들은 외부의 법규는 모름지기 개인 내부의 입법자에게 비준을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오늘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바깥에 있는 권위는 내 안의 입법자로부터 비준을 받아야 합니다. 비준을 받지 않은 채 무조건 따라서는안 되죠. - P174

인생은 개인의 노력과 재능이라는 씨줄과, 시대의 흐름과 시대정신그리고 운이라는 날줄이 합쳐서 직조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의 의지와 노력과 재능이라는 씨줄만 놓고 미래를 기다립니다. 치고 들어오는 날줄의 모양새는 생각도 안 하고 말입니다. 이 씨줄과 날줄의비유는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인 이 책에 나온 ‘인생을 내 마음대로 계획하기에는 시대라는 날줄이 너무나 험했다‘라는 문장을 읽고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P219

그러니까 요즘처럼 날줄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시절에는 이런 삶의태도가 절실합니다. ‘급한 물에 떠내려가다 닿은 곳에 싹 틔우는 땅버들씨앗, 그렇게 시작해보거라‘라는 고은 시인의 시처럼 살아야 합니다. 땅버들 씨앗도 자기가 닿으면 좋을 장소가 있었을 겁니다. 양지바르고, 촉촉한 땅 위에 닿고 싶었겠죠. 하지만 바람에 흔들리고 물살에 떠밀려미처 다 가지 못하고 나뭇가지가 마구 엉켜 있는 바위 틈에 툭 하고 닿아버린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땅버들 씨앗이 원하던 곳으로 다시 갈수 있습니까? 아니지요. 땅버들 씨앗은 묵묵히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릴겁니다. 우리도 그렇게 시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 P221

영화평론가 이동진 씨는 자신의 책 『밤은 책이다」에서 "하루하루는성실하게 살고 싶고,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살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건 말 그대로 지혜입니다. 맞습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고, 인생은 되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실하게 산 하루하루의 결과가 인생이되는 겁니다. 꿈꾸지 말라고 해서, 날줄이 험할 수 있다고 해서 그냥 놀고 먹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간중간 말씀드렸듯 무엇이 본질적인 것인지, 고전이 왜 중요한지, 발견하는 것이 왜 필요한지를 생각하며 지혜롭게 하루하루를 쌓아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꽉 채워 살다가 돌아보면 펼쳐져 있는 게 인생이지, 단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를 허술하게 보내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 P226

‘해방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 그 자리를 해방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것‘
여기에서 ‘해방‘을 ‘행복‘으로 바꿔보세요. 행복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아니라 내가 선이 자리를 행복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여러분이 되길바랍니다.
묵묵히 자기를 존중하면서, 클래식을 궁금해 하면서, 본질을 추구하고 권위에 도전하고, 현재를 가치 있게 여기고, 깊이 봐가면서, 지혜롭게 소통하면서 각자의 전인미답의 길을 가자.
이게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었던 인생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모든것이었습니다. 마음이 움직이셨나요? 그렇다면 이제 자신을 믿고 씩씩하게 또 행복하게 자신의 인생 길을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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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나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워낙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내 내면이 사생활을 침해당했다고 불만을 제기하지않는 것이 놀라울 정도다. 그만 좀 들여다봐, 이 변태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반드시 머리가 먼저 맑아져야 한다는 생각에 행동을 미루고 머뭇거린 적이 많았다. 하지만 머리가 맑아지는 순간이 결코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 알겠다. 그동안 나는 너무나 많은 경험을 잃어버렸다. 그 경험들이 내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원하는, 머리가 맑은 상태를 만들어주었을지도 모르는데, 행동은 믿음에 선행한다. "일단 해봐 (Just Do It)"라는 말은 그저 영리한 광고 카피가 아니다. 이건 철학이다. - P227

지금까지 나는 수도사들의 청빈을 일종의 자기부정으로 보았다.
거의 마조히즘에 가깝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이런 식으로 살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간디의 말처럼 "스스로 삼가는것은 강요가 아니다." 수도사들에게 물질적 가난은 자유를 뜻한다. 물건을 전혀 소유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물건을 지켜야 할 부담으로부터 자유롭다. 남의 물건을 탐내는 것(또는 다른 사람이 이쪽의 물건을 탐내는 것)으로부터도 자유롭다. 항상 더 좋은 물건을 사야 한다는 부담에서도 자유롭고, 자기가 꼭 사야 할 물건을 제대로 샀는지 걱정하는 일에서도 자유롭고, 그 물건들을 놓아둘 장소를 찾아야 한다는 부담에서도 자유롭다. 물건뿐만이 아니다. 경험도 있다. 우리는 경험에도 애착을 갖는다. 나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경험을 수집한다. 완벽한 식사, 완벽한 여행………… 언제나 전보다 더 완벽한 경험을 찾아다닌다. 이 수집은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 내가 이슬람의 4대 칼리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은 "금욕이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것에게도 소유당하지 않는 것이다." 경험도 물건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소유해버릴 수 있다. 벽장의 공간을 덜 차지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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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거나, 놀거나-나이 예순에도 우리들의 힘과 취향은 열일곱살 때나 마찬가지다. 고생스러웠던 옛날에는 노인들이 자포자기를하고, 은퇴하고, 종교에 의지하고, 독서를 하거나 사색하면서, 그렇다. 사색이라는 걸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 P104

"내 생각에 엡실론들은 자기가 엡실론이 되었다는 걸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양이에요." 그녀가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물론 개의치 않죠.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들은 다른 신분이 되면어떻게 되는지 알지도 못하는데요. 우리들이라면 물론 못마땅해하겠지만요. 하지만 우리들은 다른 습성 훈련을 받았잖아요. 그뿐 아니라 우리들은 조상도 달라요."
"난 내가 엡실론이 아니어서 기뻐요." 레니나가 확신을 얻었다는듯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엡실론이라면 당신이 받은 조건반사 습성 훈련 때문에 자신이 베타나 알파가 아니라는 데 대해서 마찬가지로 감사하게 생각했을 거예요."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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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도 신들을 믿기는 한다. 다만 신들을 너무 높이 평가하지 않을 뿐이다. 그들이 믿는 신은 대문자가 아니라 소문자로 쓴다. 그 신들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몇 가지 지니고 있고,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기는 한다. 하지만 그들 역시 삼사라, 즉 죽음과 환생의 영원한 반복 속에 묶여 있다. 불완전한 신이 되기보다는 깨달음을 얻은 인간이 되는 편이 낫다. 부처는 그런 인간에 대해 "신들조차 부러워한다"고 말했다. 이건 우리의 직관과 어긋나고, 언뜻 신성모독처럼 보이는 사고방식이다. 인간이 신들보다 더 높은 곳에 거한다니, 정말 흥미롭다. - P155

제임스의 자연스러운 측은지심이 인상적이다. 그는 남을 돕는 걸로 법석을 떨지 않고 그냥 돕는다. 불교가 없었더라도 제임스가 이런 선행을 해낼 수 있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불교를 믿기 전에 제임스는 그러지 않았다. 측은지심은 지혜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것이라고 부처는 가르쳤다. 무릎이 아프면 손이 자동으로 무릎을 향해 다가간다. 모두 한 몸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모두 한 몸이라는 걸 깨닫는다면 굳이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자신의 행위가 ‘도움‘이라는 생각조차 없이 남을 돕게 된다고 불교도들은 믿는다. 제임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지금 내 기분은 그저 이 사람들이 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긴장을 풀고 자기 애들을 두들겨 패는 짓을 그만뒀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난 진심으로 이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누가 나한테 시켜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불교도가 되면 자연스레 이렇게 돼요.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의 일부니까." 불교도들은 측은지심이 너절한 감정이 아니라 피아노를 치거나 뜨개질을 하는 것 같은 기술이라고 믿는다.  - P166

 산스크리트어인 슌야타를 제대로 번역하면,
공허함이 아니라 ‘가능성을 잉태한‘이 된다고 한다.
이 편이 좀 더 매력적으로 들린다는 사실은 나도 인정할 수밖에없다. 순수한 가능성으로서의 공허함이라. 내 눈에 텅 빈 캔버스는 그냥 텅 빈 것으로 보일 뿐이지만 피카소는 거기서 수많은 가능성들을 보았다.  - P169

카를 융은 종교가 우리에게 "확신과 힘을 주어서 우리가 우주의괴물들에게 압도당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불교는 그런 괴물들을 피해 도망칠 피난처를 거의 제공해주지 않는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기대어 울 수 있는 어깨를 전혀 제공해주지 않는다는얘기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울 수밖에 없다. 그것이위안이 되면 얼마나 되겠는가? 종교를 뜻하는 ‘릴리전‘ (religion: 라틴어 렐리기오religio에서 유래했다)이라는 단어는 ‘묶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불교는 묶은 것을 푸는 듯한 행동을 오히려 장려한다. 불교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종교다. 영혼이라는 개념, 신이라는 개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이라는 개념까지도 내려놓아야 한다.  - P182

"난 수도사들이 착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요." 내가 말한다.
"우린 착하지 않습니다. 상냥할 뿐입니다." 착한 것과 상냥한 것은다르다고 그가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카트만두에서 린포체가
"지혜가 먼저고, 사랑은 나중"이라고 충고하던 것이 생각난다. 하지만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은 그렇게 순서를 매길 필요가 없다. 사랑에 항상 지혜가 포함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사랑은 결코 어리석을 수 없다"고 말했다. 대개 우리는 사랑을 감정으로 생각한다. 그것도 엉엉 울어대는 감정.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 중 하나에 불과하다. 사랑은 또한 존재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올더스 헉슬리의 가정을 따른다면, 지식의 한 형태라고 할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만을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사랑하지 않는 것은 결코 완전히 알 수 없다." - P209

성 프란체스코는 신학자가 아니었다. 심지어 사제도 아니었다. 그는 시인이었다. 어쩌면 세계 유일의 행복한 시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로 행동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최초의 성자였다. "수도사가 하느님의 즐거운 음유시인 말고 달리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그는 임종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 즐거움은 오늘날 사우스브롱크스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 사이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항상 웃는다.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많이 웃는다. 나보다 많이 웃는 건 확실하다. 나는 가진 물건도 많고 ‘성취한 것도 많은데.
프란체스코에게 혹시 신학적 이론이 있었다면, 독일의 신비주의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추상의 영성"이라고 표현했던 것이그것이다. 프란체스코는 우리가 반드시 자신을 비워야 한다고 믿었다. 소유물, 생각, 자부심 등을 모두 비워야 하느님이 우리 삶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란체스코에게 가난은 예속이 아니라 자유를 의미했다. 우리에게 가진 것이 없으면, 지켜야 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식조차 하느님이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데 방해가될 수 있다고 프란체스코는 믿었다. - P218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는 영어에서 가장 거룩한 말이다.
폴 틸리히가 지적했듯이, 모든 종교적 질문에 대한 답에는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해당하는 요소가 들어 있다. 우리는 죄를 지었는데도 불구하고 용서받았다. 우리는 증거가 부족한데도 불구하고종교를 믿는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결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한다. 좀 더 근본적인 차원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난다(세상에 믿음에 의한 행동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그렇기 때문에(because of)‘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에는 엄청난 틈이 있다. 그리고 그 틈이 바로 차갑고 이성적인 삶과 믿음의 삶을 갈라놓는다. 대개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모드로 살아간다.  - P221

동양 종교에 대해서는 "개인적이지 않다"고 쉽게 말할 수 있다. 월리엄 제임스의 말처럼 그 종교들은 소매가 아니라 도매 차원에서 움직인다. 그리스도교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교는 확실히 소매에 빠져 있다. 그리스도교도에게 하느님은 모호하고 보편적이고 흐늘흐늘한 존재가 아니다. 윤곽이 확실치 않은 범신론적인 분위기는 여기에 없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약속한다. 이런 종교는 어디에도 없다. 수도사 한 명이 이런 말을 했다. "한 사람이다른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개인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그건 아주 심오하고, 아주 과격하죠."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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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런데 여기 트릭이 하나 있습니다. 머릿속에 있다고 모든 것들이 창의적으로 발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머릿속에 있으되, 327번, 128번처럼 아주 정확한 셀에 새겨져 있어야 하는 겁니다. 흘러간 것들은 잡히지 않습니다. 깊이 새겨져 있는 것들만 잡을 수 있는 것이죠. 즉, 나는 간장게장을 흘려 봤던 것이고, 안도현 시인은 깊이 새겨본 겁니다. 넘어지는 아이를 일으켜 세운 게 살면서 처음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계속 흘려 보다가 그때 한 번을 깊이 본 것이 아이디어가 된 것이죠. 이래서 볼 견(見)인 겁니다.
視而不見
聽而不聞
심부재언 시이불견 청이불문 식이부지기미(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그 맛을 모른다는 뜻으로 유교 경전 중 <대학>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의 대부분의 행동은 시청을 하는 거죠. 간장게장을 먹을때 그저 흘려 보고 들은 겁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안도현은 간장게장을 견문을 한 거예요. 그 차이입니다. 흘려 보고 듣느냐, 깊이 보고 듣느냐의 차이. 결국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나의 경쟁력이 되어준 단어는 ‘見‘이었습니다.  - P110

존 러스킨이라는 영국의 시인은 "네가 창의적이 되고 싶다면 말로 그림을 그려라"라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뭘 봤니?"라고 물었을 때 그저 "풀"이라고 대답하지 말고, 풀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고, 잎이 몇 개 있었는데 길이는 어느 정도였고, 햇살은 어떻게 받고 있었으며 앞과 뒤의 색깔은 어땠고, 줄기와 잎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 등 자세하고 소상히 그림 그리듯 말하라는 것이었죠. 이것은 즉, 들여다보라는 겁니다. 앙드레 지드도 지상의 양식에서 "시인의 재능은 자두를 보고도 감동할 줄 아는 재능이다"라고 했습니다. 시인의 재능은 자두를 보고도 감동하고, 간장게장을 보고도 감동하는 겁니다.  - P113

 "여행을 생활처럼하고 생활을 여행처럼 해봐"라고요. 다행히 이 이야기에는 눈을 빛내고 궁금해했어요. 그래서 설명했습니다.

"여행지에서 랜드마크만 찾아가서 보지 말고 내키면 동네 카페에서동네 사람들과 사는 이야기도 하고 벼룩시장에 가서 구경도 하면서 거기사는 사람처럼 여행하는 거야. 그게 더 멋져. 그리고 생활은 여행처럼 해. 이 도시를 네가 3일만 있다가 떠날 곳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갔다가 다신 안 돌아온다고 생각해봐. 파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거기에서 3일밖에 못 머물기 때문이야. 마음의 문제야. 그러니까 생활할 때 여행처럼 해." - P125

저도 개를 길러봐서 아주 잘 압니다. 오랫동안 데리고 있다가 묻어준, 이제는 딸아이가 그린 초상화 한 장으로 기억하는 개가 있는데요. 그 개를 키울 때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가방을 내려놓고, 안경과 모자를 벗고 침대에 눕는 거였습니다. 제가 집에 돌아오면 그 개는 반갑다고 5분 동안은 제 얼굴을 핥고 나서야 짖기를 멈췄기 때문이었는데요, 그때 보면 핥는 일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요. 그리고 밥을 주면, 이 세상에서 밥을 처음 먹어보는 것처럼 먹죠. 잠잘 때도 보면, ‘아, 아까 주인이 왔을 때 꼬리쳤던 게 좀 아쉬운데 어쩌지?‘ 그런 고민은 추호도 없어요. 그냥 잡니다. 공놀이 할 때는 그 공이 우주예요. 하나하나를 온전하게 즐기면서 집중하죠.
밀란 쿤데라도 똑같은 걸 느꼈는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카레닌이라는 개를 이야기하면서 ‘개들은 원형의 시간을 살고 있다. 행복은 원형의 시간 속에 있다‘라는 말을 합니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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