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불교도 신들을 믿기는 한다. 다만 신들을 너무 높이 평가하지 않을 뿐이다. 그들이 믿는 신은 대문자가 아니라 소문자로 쓴다. 그 신들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몇 가지 지니고 있고,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기는 한다. 하지만 그들 역시 삼사라, 즉 죽음과 환생의 영원한 반복 속에 묶여 있다. 불완전한 신이 되기보다는 깨달음을 얻은 인간이 되는 편이 낫다. 부처는 그런 인간에 대해 "신들조차 부러워한다"고 말했다. 이건 우리의 직관과 어긋나고, 언뜻 신성모독처럼 보이는 사고방식이다. 인간이 신들보다 더 높은 곳에 거한다니, 정말 흥미롭다. - P155
제임스의 자연스러운 측은지심이 인상적이다. 그는 남을 돕는 걸로 법석을 떨지 않고 그냥 돕는다. 불교가 없었더라도 제임스가 이런 선행을 해낼 수 있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불교를 믿기 전에 제임스는 그러지 않았다. 측은지심은 지혜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것이라고 부처는 가르쳤다. 무릎이 아프면 손이 자동으로 무릎을 향해 다가간다. 모두 한 몸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모두 한 몸이라는 걸 깨닫는다면 굳이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자신의 행위가 ‘도움‘이라는 생각조차 없이 남을 돕게 된다고 불교도들은 믿는다. 제임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지금 내 기분은 그저 이 사람들이 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긴장을 풀고 자기 애들을 두들겨 패는 짓을 그만뒀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난 진심으로 이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누가 나한테 시켜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불교도가 되면 자연스레 이렇게 돼요.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의 일부니까." 불교도들은 측은지심이 너절한 감정이 아니라 피아노를 치거나 뜨개질을 하는 것 같은 기술이라고 믿는다. - P166
산스크리트어인 슌야타를 제대로 번역하면, 공허함이 아니라 ‘가능성을 잉태한‘이 된다고 한다. 이 편이 좀 더 매력적으로 들린다는 사실은 나도 인정할 수밖에없다. 순수한 가능성으로서의 공허함이라. 내 눈에 텅 빈 캔버스는 그냥 텅 빈 것으로 보일 뿐이지만 피카소는 거기서 수많은 가능성들을 보았다. - P169
카를 융은 종교가 우리에게 "확신과 힘을 주어서 우리가 우주의괴물들에게 압도당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불교는 그런 괴물들을 피해 도망칠 피난처를 거의 제공해주지 않는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기대어 울 수 있는 어깨를 전혀 제공해주지 않는다는얘기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울 수밖에 없다. 그것이위안이 되면 얼마나 되겠는가? 종교를 뜻하는 ‘릴리전‘ (religion: 라틴어 렐리기오religio에서 유래했다)이라는 단어는 ‘묶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불교는 묶은 것을 푸는 듯한 행동을 오히려 장려한다. 불교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종교다. 영혼이라는 개념, 신이라는 개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이라는 개념까지도 내려놓아야 한다. - P182
"난 수도사들이 착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요." 내가 말한다. "우린 착하지 않습니다. 상냥할 뿐입니다." 착한 것과 상냥한 것은다르다고 그가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카트만두에서 린포체가 "지혜가 먼저고, 사랑은 나중"이라고 충고하던 것이 생각난다. 하지만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은 그렇게 순서를 매길 필요가 없다. 사랑에 항상 지혜가 포함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사랑은 결코 어리석을 수 없다"고 말했다. 대개 우리는 사랑을 감정으로 생각한다. 그것도 엉엉 울어대는 감정.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 중 하나에 불과하다. 사랑은 또한 존재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올더스 헉슬리의 가정을 따른다면, 지식의 한 형태라고 할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만을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사랑하지 않는 것은 결코 완전히 알 수 없다." - P209
성 프란체스코는 신학자가 아니었다. 심지어 사제도 아니었다. 그는 시인이었다. 어쩌면 세계 유일의 행복한 시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로 행동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최초의 성자였다. "수도사가 하느님의 즐거운 음유시인 말고 달리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그는 임종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 즐거움은 오늘날 사우스브롱크스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 사이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항상 웃는다.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많이 웃는다. 나보다 많이 웃는 건 확실하다. 나는 가진 물건도 많고 ‘성취한 것도 많은데. 프란체스코에게 혹시 신학적 이론이 있었다면, 독일의 신비주의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추상의 영성"이라고 표현했던 것이그것이다. 프란체스코는 우리가 반드시 자신을 비워야 한다고 믿었다. 소유물, 생각, 자부심 등을 모두 비워야 하느님이 우리 삶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란체스코에게 가난은 예속이 아니라 자유를 의미했다. 우리에게 가진 것이 없으면, 지켜야 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식조차 하느님이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데 방해가될 수 있다고 프란체스코는 믿었다. - P218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는 영어에서 가장 거룩한 말이다. 폴 틸리히가 지적했듯이, 모든 종교적 질문에 대한 답에는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해당하는 요소가 들어 있다. 우리는 죄를 지었는데도 불구하고 용서받았다. 우리는 증거가 부족한데도 불구하고종교를 믿는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결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한다. 좀 더 근본적인 차원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난다(세상에 믿음에 의한 행동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그렇기 때문에(because of)‘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에는 엄청난 틈이 있다. 그리고 그 틈이 바로 차갑고 이성적인 삶과 믿음의 삶을 갈라놓는다. 대개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모드로 살아간다. - P221
동양 종교에 대해서는 "개인적이지 않다"고 쉽게 말할 수 있다. 월리엄 제임스의 말처럼 그 종교들은 소매가 아니라 도매 차원에서 움직인다. 그리스도교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교는 확실히 소매에 빠져 있다. 그리스도교도에게 하느님은 모호하고 보편적이고 흐늘흐늘한 존재가 아니다. 윤곽이 확실치 않은 범신론적인 분위기는 여기에 없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약속한다. 이런 종교는 어디에도 없다. 수도사 한 명이 이런 말을 했다. "한 사람이다른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개인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그건 아주 심오하고, 아주 과격하죠."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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