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한편으로는 현대 과학을 부정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입장은 다시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뉩니다. 지구의 나이가 1만년 내외라고 믿는 ‘젊은 지구 창조론(Young Earth Creationism)‘은 진화생물학을 비롯한 모든 현대 과학을 부정합니다. 반대로 우주의 나이가 현대 천체 물리학과 우주론이 말하듯 137억 년 정도 되었다고 여기는 오랜 지구 창조론 (Old Earth Creationism)‘이나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 Theory)‘은 지질학과 천문학, 물리학 등 현대 과학의성과를 전부 수용하지만 오직 진화론만을 부정합니다. 이들은 종 안에서 변이가 발생하는 것을 ‘소진화(小進化)‘로,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새로운 종이 만들어지는 것을 ‘대진화(大進化)‘로 규정하면서 진화를 세분합니다. 그리고 소진화는 받아들이지만 대진화는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이런 템플턴 재단의 지원에 대해 종교계는 상당히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과학자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죠. 상당수의 과학자들이 이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반면, 장 선생님께서 편지에 쓴 윌슨과 데닛의 언급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과학계의 사람들은 그 엄청난 상금 뒤에 숨어 있는 의도를 살짝 불순하게 보죠.
저는 템플턴 재단의 시도가 돈의 힘으로 학문 분야를 새롭게 확립한 근대 이후 최초의 사례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들의 지원이 종교를 긍정적으로 조명하는 데 집중하는 것에 대한 평가는 일단 접어두더라도, 자본이 지식 시장을 의도적으로 재편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는 우려를 표합니다. 자본에 의한 지식 생산은참여자의 의지와 별개로 늘 자본 공급자의 의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죠. 결국 지식 담론의 왜곡 가능성이나, 지성의 자율성과비판성이 침해받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죠. - P260

지동설이 기독교가 마주친 제1의 파도였다면, 진화론은 제2의 파도, 정신분석학은 제3의 파도였고, 인지과학과 뇌과학은 이제 기독교가 마주치는 제4의 파도가 될 것입니다. 지동설이 인간이 사는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서 끌어내리고, 진화론이 인류를 생명 세계의 정점에서 쫓아내고, 정신분석학이 무의식을 통해 인간의 정신과 의식을 다소 위축시켰죠. 제생각에 아마도 이 네번째 파도가 쓰나미 같은 가장 큰 충격을 가져올 겁니다. 제4의 파도는 신에 대한 믿음이나종교적 경험을 자연주의적 방식으로 설명하면서 기독교의 핵인 신과 영혼 등을 해체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죠. 상당수의 신학자들이이 분야의 작업을 주목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기독교의 과학 논의에서 중심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한논의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 P266

이렇게 볼 때, 유신론적 과학의 전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엄청난 능력과 지성을 가진 초월적이며 인격적인 존재인 신이 특정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설계하고 창조했으며, 인간이 등장할때까지 이 세계의 형성 과정에 직접 개입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의 설계와 창조의 개념을 과학에 적용하는 게 정당하다는것입니다.
유신론적 과학의 이런 전제는 다음과 같은 신앙 태도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가설을 세우고 시험하고, 어떤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거나, 혹은 다양한 가설들의 개연성을 평가할 때, 자신이 아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지식에는당연히 신학적 진술도 포함됩니다. 따라서 창조론자에게 성서는 과학 텍스트이며, 성서의 진술은 ‘참 과학(true science)‘입니다. - P274

호트에 따르면, 종교와 과학 사이의 갈등은 양쪽 모두 우주와 그안에 있는 생명을 오직 한 차원에서만 이해하려는 문자주의적 독법을 강요할 때 발생합니다. 그는 창조 vs. 진화 논쟁도 바로 두 문자주의의 대립으로 봅니다. 이 논쟁 양극단에 있는 두 문자주의가 바로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라는 ‘성서적 문자주의‘와 진화 생물학이라는 ‘우주적 문자주의‘입니다. 두 문자주의 모두 우주와 생명을 펼면적으로 이해하는 1차원적 독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각기 ‘교리주의적 환원‘과 ‘물리주의적 환원‘을 그 본질로 하고 있기때문입니다. 저는 교리주의적 환원을 특징으로 하는 독법을 ‘종교적문자주의‘라고, 물리주의적 환원을 속성으로 하는 독법을 ‘과학적문자주의‘라고 부릅니다.
먼저 호트가 ‘성서적 문자주의‘라고 부르는 종교적 문자주의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만 하죠. 종교적 문자주의는 자연에 대한 지식을문자주의적 성서 이해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특정한 신학적 이해로환원시킵니다. 이것은 자연의 겉모습에서 나타나는 설계에만 관심을 갖고, 그 이면으로 뚫고 들어가 생명의 기나긴 투쟁이라는 복잡다단한 진화 이야기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종교적 사고일 뿐입니다. 이런 신학적 독법은 다윈이 그린 생명에 대한 큰 그림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호트는신앙심 깊은 기독교인들이 취하는 반(反)다원주의적 행보는 자연의깊이로부터 도망치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합니다. - P278

 하지만 거다 러너 (Gerda Lerner) 같은 페미니스트 역사학자는 가부장제가 종교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가부장제는 무엇보다 권력과 소유의 분배를 둘러싼 성차 정치의산물이라고 봅니다. 물론 역사 속에서 가부장제에 종교가 깊이 연루되기도 했습니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원인이 아닌 결과였을 뿐이죠.
게다가 역사 속에서 종교는 가부장제의 보루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타파에 현저히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중세 마녀 사냥이 가부장제와 종교적 광기의 끔찍한 결탁을 보여 준다면, 유대교의가부장적 관습을 어기고 여성들도 제자로 받아들였던 예수는 종교가 어떻게 양성 평등의 전망을 열어 주었는지를 보여 주죠. 가부절제는 거대한 사회적 제도이고, 종교는 그 속에서 제도를 강화하게파열시키는 하나의 요소일 뿐입니다. - P308

불교와 기독교가 대폭발 이론을 비롯한 우주론들을 채택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이렇게 서로 사뭇 다릅니다. 이는 불교와 기독교의 실재판과 시간관, 그리고 궁극적 실재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시간이든 공간이든 물질이든 실재하는 것은 없으며 다만 공(空), 즉 무한히 서로 얽힌 상호연기(相互緣起)의 관계만이 있다고 봅니다. 반대로 기독교는 비록 고전적 실재론에서 비판적 실재론으로 돌아서기는 했지만, 여전히 시간, 공간, 물질의 실재성을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또 불교는 우주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는 순환적 시간관을갖고 있는 반면, 기독교는 우주는 단 한 번만 생성하고 소멸한다는직선적 시간관을 갖고 있죠. 그리고 이 모든 차이는 결국 모든 존재의 근본인 궁극적 실재를 비인격적인 우주적 원리로 보느냐 아니면인격적인 신으로 보느냐 하는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이기도 하죠. 불교는 궁극적 실재를 비인격적으로 보기에 창조자 따위를 인정하지않으며 따라서 창조자의 의도나 목적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반면에기독교는 궁극적 실재를 인격적 신으로 보기 때문에 창조주의 창조의도와 목적이 무엇인지, 창조주가 우연으로 가득한 이토록 무심한우주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하는 문제들과 씨름합니다.
- P334

 1953년에 미국의 생화학자 스탠리 밀러(Stanley L. Miller, 1930~2007년)와 그 스승인 해럴드 유리(Harold C. Urey, 1893~1981년)가 원시 지구의 대기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무기물이 들어 있는 플라스크 속에서 유기물을 합성해 낸 실험. 생명의 기원 문제 자체를 해결한 건 아니었지만, 생명이 무기물로부터 저절로 생겨날 수 있는 가능성을 입증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창조과학자들은 이 실험은 단지 특정 조건에서 유기물을 합성한 것일 뿐,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는 바가 없다고 비판한다. -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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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종교적‘이라는 용어 자체에도 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적‘이라는 표현은 대개 신성함, 근원적 깊이, 존재 자체……… 이런 것들을 망라하는 포괄적 개념으로 쓰이죠. 하지만 ‘종교‘라는 용어가 실제로는 특정 전통으로 구체화된 제도 종교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오해를 사기 십상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마치 종교적 신앙을 고백한 것처럼 오해를 받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하지만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아인슈타인은 다만 스스로 ‘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종교인들을 향해, 넓은 의미에서 보면 자신도어느 종교인들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종교적일 수 있다고 말한것뿐입니다. 아마 아인슈타인은 ‘종교적‘이라는 표현에 그리 만족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인간과 과학을 한없이 겸손하게 만드는 자연의위대한 신비는 ‘종교적‘이라는 표현으로도 다 담아내기 힘들 정도로 깊기 때문이죠. - P180

제 생각에 그 역사적 맥락이란 곧 우리가 말하는 ‘과학‘은 어디까지나 ‘서구 근대 과학‘의 수입품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나라 같은비서구 사회에서 근대 과학은 처음부터 서구의 팽창과 궤적을 같이해 왔습니다. 근대 과학은 비서구 세계가 서구적 근대성 모형에 따라 대대적인 근대화와 서구화를 겪기 시작하면서 도입된 것이죠. 물론 시대와 지역을 넘어서는 과학의 보편성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과학을 둘러싼 담론들이 특수한 역사적 맥락을 지닌다는 점도 역시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의 경우 종교와 과학 논의에서 유독 기독교가 두드러진 역할을 하는 것은 기독교와 근대 과학이 서구의 근대성과 더불어 세계로 확장되어 온 역사적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⅕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롭게 형성되던 근대라는 무대에서가장 유리한 입지를 선점한 것은 바로 서구 종교인 기독교였기 때문이죠. - P193

다만 한 가지만 짚어 두도록 하겠습니다. 가만히 보시면 제가 제시한 기독교 이외 종교들이 과학을 대하는 유형들에서 오늘날의 종교와 과학 양쪽 논객들이 제시하는 관계 유형과 비교해 특정한 관계유형이 있거나 없거나 하는 것 등의 차이가 보이실 겁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를 중심으로 종교와과학의 관계 유형을 정리한 대표적 학자인 이언 바버는 갈등, 독립, 대화, 통합의 네 가지 관계 유형을 제시하는데요. 제가 제시한 기독교 이외 종교들의 과학과의 관계 유형에서는 종교와 과학의 적극적인 만남을 시도하는 대화나 통합 유형이없습니다.
그 이유는 비교적 간단합니다. 대화와 통합이란 충분히 긴 시간동안 많은 논의가 축적된 후에야 비로소 시도될 수 있는 것인데, 서구에서 오래 진행되어 온 논의가 있었기에 한국의 기독교는 비교적충분히 준비된 토대 위에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었지만, 다른 종교들은 대개 모든 논의를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논의가 이제야막 싹트던 단계에 불과했기에 대화와 통합은 아직 시기상조였던 셈이죠. 물론 오늘날의 종교, 특히 불교 같은 종교는 과학과의 만남에아주 적극적입니다. 불교도들은 과학과의 대화와 통합을 추구하는다양한 논의를 국내외에서 펼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불교 등 일부 종교의 일이고, 또 비교적 최근의 일일 뿐, 적어도 근대 이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대부분의 종교들에서는 대화와 통합을 위한 시도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 P198

두 분 선생님은 2006년에 출간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과, 데닛의 ‘주문 깨기』, 그리고 윌슨의 『생명의 편지」까지 보셨으니 이들의 대화가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최근 1~2년은 진화론의 대가들이 저마다 종교에 대한 책들을 출간했던 아주 흥미로운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사실은 종교의 기원 · 유지 · 기능에 대해 모두 생각이 조금씩다르다는 점일 겁니다. 이론적으로 볼 때 이 차이 중 어떤 것은 아주미묘해서 전문가들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기도 하죠.
윌슨이 데닛의 말을 이렇게 받습니다. "저는 리처드(도킨스), 당신(테닛), 그리고 나의 차이를 이렇게 규정하고 싶소. 리처드는 종교와전쟁을 벌이는 전사이고, 당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를 재고하게만드는 영리한 전략가이며, 나는 생태 문제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풀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실용주의자이죠." 이런 성격 규정이 맘에 들었는지 데닛이 맞장구를 치더군요. "이 얼마나 절묘한 분업입니까!" - P232

 휘그적 역사 해석은 원래 영국의 역사를 해석하는 역사관으로, 영국의 역사를 자유를 위한 영국인들의 위대한 투쟁사로 그린다. 본디 자유로운 공동체였던 영국이 노르만족의 정복 이후 그 자유를 잃었다가 17~19세기의 혁명과 투쟁과 자유주의적 개혁을 통해 모범적인 의회 민주주의를 실현한 자유 국가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형성된 과학적 사고가 기독교의 영향으로 몰락한 후, 1000년 후 과학 혁명과 과학자들의 투쟁과 연구를 통해 자유로운 연구가 가능한 현대 과학 체계가 만들어졌다는 칼 세이건과 에드워드 윌슨 같은 일부 과학자들의 관점 역시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한 휘그적 역사 해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대표 저술인 ‘코스모스』나 『통섭』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 P249

서구 사회에서 근대 이전까지 과학은 자율성을 지녔지만, 종속되어 있었죠. 당시에는 오늘처럼 과학(Science)이란 이름에 대응하는 지적 분야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학문적 방범도 오늘날의 과학적 방법과도 달랐습니다. 또한 비록 의학이나 수학과 같은 근대 과학의 하위 분야에 해당하는 분야가 몇 개 있었지만, 물리학, 화학, 지질학, 생물학에 해당하는 분야로 분화되지도않았죠. 모두 ‘자연 철학 분야에 더 넓게는 철학에 속해 있었습니다. 현대 물리학자들이 위대한 과학자라고 칭송하는 아이작 뉴턴역시 자신을 자연 철학자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의 대표작인 ‘프린키피아』의 원제 역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Principia Mathematica)』였죠.
기독교가 지배 종교였던 서구에서 자연 철학은 오랫동안 기독교의 진리를 보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기독교 사제들과 신학자들 그리고 교인들에게 자연에 대한 탐구는, 즉 오늘날의 과학자들이하고 있는 작업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자연에 대한 탐구가 신이 만든 세계를 이해하는 길이었기 때문이죠.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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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지금 행복했고, 그건 사실이었다. 제인 훌턴은 근사한검정 코트 속에서 몸을 조금 움직이며 생각했다. 누가 뭐래도 삶은 선물이라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수많은 순간이 그저 찰나가 아니라 선물임을 아는 것이라고. 게다가 사람들이 연중 이맘때를 이렇게 열심히 기념하는 것은 또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사람들의 삶이 어떻든(그들이 지금 지나치는 이 집들 가운데에는 근심스러운 고민도 있으리란 걸 제인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삶이란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축하할 일임을 알기에 그들은 이맘때를 축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밥은 깜빡이를 켜고 대로로 나섰다. "아, 정말 근사했어." 그녀가 뒤로 물러나 앉으며말했다. 두 사람은 요즈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정말로, 마치결혼생활이라는 복잡하고 기나긴 식사가 끝나고 이제야 근사한 디저트가 나온 것만 같았다. - P227

제인이 한 손을 흔들더니 한숨을 쉬었다가 좌석에 등을 기대고는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난 거기서 일하는 게 좋았어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제인은 특히 십대 소녀들을 좋아했다. 어리고 실수투성이에 피부가 반들반들하고 겁도 많은, 너무시끄럽게 떠들고, 껌을 딱딱 씹어대거나 고개를 푹 숙이고 가만가만 복도를 걸어다니는 십대 소녀들을 제인은 정말로 좋아했다. 그리고 아이들도 그걸 알았다. 심한 생리통으로 양호실에 온소녀들은, 아파서 입술이 바짝 말라버린 채 잿빛이 된 얼굴로 소파에 누워 있었다. "우리 아빠는 내가 엄살부리는 거래요." 이런말을 하는 소녀들이 적지 않았다. 그 말에 얼마나 가슴 아팠던가 소녀로 사는 것은 얼마나 쓸쓸한 일인가!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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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과학 논쟁의 기독교 쏠림 현상은 역사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서구에서 기독교와 과학은 비대칭적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히 기독교 담론과 과학 담론의관계도 비대칭적이고 때로는 일방적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서구 사회에서 기독교 담론은 독립 변수로, 과학 담론은 종속변수로 기능했습니다. 그런데 근대 이후 과학이 자율성을 획득하면서 이 관계가 요동을 치며 새롭게 정립됩니다. 근대 이전의 독립 - 종속 관계에서 근대의 독립-독립 관계로 바뀐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역으로 종교가과학에 종속되는 종속-독립의 관계로 이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변화 때문에 기독교는 과학과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는 과제를안게 됩니다. 이 결과는 현재의 종교와 과학의 관계 지형도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 P127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언가가 우연히 일어났다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 사건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 스토리를 알고 싶어 하는 거죠.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인과율로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의 본능적 · 본성적 능력은 틀림없이 인류가 진화의 역사에서 살아남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사이비 과학이나 비과학적 믿음과 타협 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잡지, <스켑틱스(Skeptics)》의 편집장인 마이클 셔머 (Michael BShermer)는 이 능력을 "믿음 엔진"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이 믿음 엔진은 자연과 초자연을 넘나들며 폭발합니다. 기도는 그나마 이 엔진의 정상적 출력에 해당되겠죠. 하지만 그 엔진이 과열되거나 오작동을 할 때도 많습니다. 가령, 극히 일부의 암환자만이 민간 요법의 효과를 보는데도 그 효력을 신봉한다든지, 출퇴근방향이 비슷해 마주칠 개연성이 높았을 뿐인데 그 만남을 운명으로착각한다든지, 본인의 부주의로 생긴 교통 사고를 신의 깊은 뜻으로돌린다든지, 장로 또는 불자가 대통령이 되어야 나라가 잘 된다고 믿는 것 등이 그런 예일 것입니다.
평소에 멀쩡한 사람들도 입시, 취직, 결혼, 건강, 자녀 등의 문제에직면하게 되면 엄습해 오는 불안감으로 인해 믿음 엔진을 폭발 직전까지 과열시킬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폭발을 막으려면 순정품냉각수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저는 믿음의 근거를 돌아보게 하고합리적 생각을 북돋아 주는 ‘회의주의 정신‘이야말로 그런 냉각수라고 생각합니다. - P148

우선, 진화론적 관점에서 종교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세 진영으로 나뉘는 것같습니다. 첫 번째는 종교를 인간 마음의 ‘적응(adaptation)‘으로 보는견해이고, 두 번째는 종교가 다른 인지 적응들의 ‘부산물(byproduct)‘
이라는 견해이죠. 적응과 부산물의 차이는 이런 것입니다. 가령, 온몸을 돌아다니며 산소를 운반해 주는 피는 적응의 사례이죠. 그런데피의 ‘붉은색‘은 산소 운반을 담당하는 헤모글로빈 때문에 생기는 일종의 부산물입니다. 즉 피는 붉기 때문에 자연 선택된 것이 아니라 산소를 운반하는 기능 때문에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견해에따르면 종교는 인류가 살아남는 데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두번째 견해에 따르면 어쩌다 가지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종교 현상을 ‘밈‘의 역학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여기서 ‘밈‘이란 도킨스가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 낸 용어인데요, 문화 전달의 단위, 혹은 모방의 단위를 뜻합니다. 유전자의gene과 운율이 맞도록 meme이라고 지었죠.  - P153

우선 종교가 적응이라는 견해부터 살펴보죠. 다음 달에 만나기로되어 있는 하버드 대학교의 사회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종교에대한 진화론적 이해의 가능성을 현대적 의미에서 거의 처음으로 제기한 학자입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신과 같은 초원자를믿게끔 진화했다는 겁니다. 예컨대 그는 동물 집단에서 나타나는 서열 행동(열위자가 우위자에게 복종하는 행동)이 종교와 권위에 순종하는 인간의 행동과 매우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동물들이 서열행동을 통해 각자의 적응적 이득을 높이듯이, 인간도 종교적 행위들을 통해 자신의 번식 성공도를 높였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종교행동 자체가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진화했다는 주장입니다.
윌슨처럼 종교의 적응적 이득을 주장하는 이들은 종교가 사람을기분 좋게 만들고 사후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 주며 불확실한 상황에서판단을 도와주기 때문에 진화했다고 말합니다. 즉 초월자를 믿는 것이그렇지 않는 것보다 개인의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죠.
어떤 진화 생물학자들은 종교가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만 도움을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 집단의 생존과 유지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진화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진화 생물학자들을 ‘집단 선택론자‘라고 합니다. 집단 선택론은 어떤 형질들이 개체의 이익이 아니라 집단의 이익을 위해 진화하는 메커니즘을 강조하는 이론으로서 유전자 선택론이나 개체 선택론과 대비됩니다.  - P154

이 견해에 따르면, 종교는 그 자체로 진화적 기능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며, 다른 목적 때문에 진화된 인지 체계의 일부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종교는 무엇(들)의 부산물이 요 스팬드럴이란 말입니까?
진화사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는 99퍼센트의 시기를 수렵·채집을 하며 매우 어렵게 보냈습니다. 이 시기에 인류를 계속 옥죄던 적응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인류는 포식자의 존재를 탐지하고 추하는 능력, 자연에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인과적 추론 능력과설명 능력,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진화시켜야 했습니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이것들을 차례로 ‘행위자 탐지 (agent detection)능력‘, ‘인과 추론(causal reasoning) 능력‘, 그리고 ‘마음 이론 (theory ofmind) 능력‘이라 부르죠. 종교가 부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종교가 이런 인지 능력들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스팬드럴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 종교는 더 중요한 이런 적응 장치들 때문에 생긴 부산물인 것이죠.

 하지만 우리 집 강아지가 갑자기 껑충껑충 뛰는 행동, 옆집 아기가 자지러지게 우는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자세가 필요해 보입니다. 물리 법칙 혹은 설계 원리만을 들이댄다고 해서 이해되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데닛은 바로 이 대목에서 ‘지향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마치 행위자가 어떤 믿음과 욕구를 가지며 그에 따라 행동한다고 보는 그린 자세 말입니다. 데닛의 용법으로는, 유전자와 밈은 ‘지향계(intentional system)‘이고 우리는 지향적 자세로 그것들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디 이상 유전자와 밈의 비유비적 요소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지향성 이론을 종교 현상을 이해하는데 사용해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이런 접근에는 크게 두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종교를 ‘정신 바이러스(virus of mind)‘로 이해하는 도킨스의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를 ‘길들여진 밈(domesticated meme)‘으로 해석하는데닛의 견해입니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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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서구 문명의 상징이 하늘로 찌르는 듯한 고딕식 대성당이라고 한다면 현대 문명의 상징은 거대한 입자가속기나 전파 망원경이나 컴퓨터나 이동 전화가 될 것 같습니다. 문명의 상징이 바뀐다는것은 이미 다른 문명이라는 이야기죠. 설사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성당의 첨탑이 아니라 전파 망원경이나 이동 전화를 통해서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 P73

이야기가 길어졌기 때문에 아주 간략하게 말씀드리죠. 먼저, 신학자들은 20세기 후반부터 신학 역시 ‘구성적(constructive)‘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신학 역시 다른 사회적활동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시대와 상호 작용하면서새롭게 만들어진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 거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동안 경원시해 왔던 자연 과학에 익숙해질 필요가 생겼습니다. 생태문제와 관련한 생태 신학을 전개하는 데 자연 과학의 도움이 필요해졌고, 현대 과학 기술의 성취로부터 현대 신학이 해결해야 할 여러가지 문제들이 새롭게 제기된 탓입니다. 과학을 이해할 필요가 증가함에 따라 신학자들과 종교인들은 과학의 본질에 대한 과학 철학의 최근 논의들을 꼼꼼하게 살피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기반으로 과학의 객관성과 중립성 등에 문제 의식을 갖게 되고, 과학이 더 이상 만능 열쇠가 아니라는 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과학을 무조건 피하던 태도를 바꾸게 됩니다. 자기 한계를 인식하게 된 것이 서로를보는 눈을 바꾸었으며, 오히려 대화를 촉진하게 한 것이지요.. - P78

이제 ‘왜 지금 종교와 과학을 논의하는가?‘에 대한 제 입장을 좀더 거시적 관점에서 이야기하면서 이 편지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저는 종교와 과학은 인류가 오랜 역사 과정에서 환경에 적응하면서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 낸 ‘메커니즘(mechanism)‘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술이나 정치나 경제도 일종의 메커니즘입니다. 메커니즘 대신 ‘생존을 위한 시스템(system)‘이나 ‘모듈(module)‘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인류나 특정 사회는 생존을 위한 메커니즘을 다양하게 가지고 있고 동시에 사용합니다. 각 메커니즘은 일정 부분 자기 영역과 자기 담론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메커니즘과는 서로 보완적일 때도 있고 경쟁적일 때도 있습니다. 인류는 이런 메커니즘 하나에만 독점적 지위를 주지 않고, 상황과 필요에 따라 다양한 메커니즘들 사이의 비중을 달리하면서 각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조정합니다. 그런데 특정 메커니즘이 그 메커니즘이만들어진 기능이나 활동 영역을 벗어나서 지나치게 강한 영향력을행사하는 경우, 인류나 특정 사회는 자동적으로 비대해진 특정 메커니즘을 제어하려고 합니다. 즉 특정 메커니즘의 독주로 인해 인류나 특정 사회가 생존의 위협을 받거나 적응의 정도가 심하게 훼손될때, 다른 메커니즘을 사용해 그 메커니즘을 제어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종교가 사회의 생존을 위협할 지경에 이를 때, 종교는다른 메커니즘의 제어를 받았습니다. 그 제어 과정이 혁명처럼 과격하게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고, 지속적이고 완만하게 이루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서구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종교에서 과학으로의주도권 이행을, 비대해져 사회 자체의 생존을 위협하게 된 종교에 대한 자동적인 제어 과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 P80

사실 종교를 절대 진리에 대한 신앙의 문제로 여기고, 따라서 사람마다 종교가 있거나 없거나, 또 한 사람이 하나의 종교만 갖는다거나 하는 생각은 어디까지나 근대 이후에 성립된 서구적 종교관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극소수의 기독교인과 무신론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일본인들에게 때로 신사에 가서 축원을 올리거나 부적을 사고 때로 사찰에 가서 발을 기원하는 일이 드문 일은 아니죠. 그들에게 종교란 절대 진리의 문제라기보다는 그저 삶의 필요를 채워 주는일상의 일부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 우리나라의 경우도 일본과 아주 비슷합니다. 문화관광부가 2002년도에 각 종교별 집계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통계에 따르면, 불교 3749만 명, 개신교 1872만 명, 천주교 422만 명, 유교600만 명, 천도교 100만명, 원불교 133만 명, 대종교 47만 명, 기타종교 1286만 명으로 종교인 수가 무려 82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총인구의 1.5배나 되는 수치죠. - P86

 이렇게 중층적인 의미를 가진 ‘The Creation‘은 윌슨의 논의에서 종교와 과학이각자 세계관의 차이를 뛰어넘어 함께 활동하는 공동의 장(場)이자함께 보호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장 선생님께서 첫 편지에서 언급했다시피, 윌슨이 종교를 대화의상대로 인정했다는 자체가 놀랍습니다. 윌슨은 종교인들이 머물러있는 마당으로 살며시 건너와 미소를 지으면서 자연스레 인사를 건빕니다. 이어서 주변의 종교인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지만 완곡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합니다. 신이 창조한 세계를 돌보자는 데, 윌슨의 호소에 반대할 기독교인이 얼마나 될까요? 굉장한 설득력입니다. 이 책만 보자면 윌슨은 더 이상 진화를 가르치는 완고한 훈장 선생님이 아니라 종교인들을 살살 달래는 실용주의적 외교관입니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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