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황이 되면서 기독교 내부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부각하기 시작한 게 바로 리더십 문제입니다. 이전까지 권력을 독점하던 목사는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죠. 대신 평신도 리더십이 부상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조직화된 가톨릭 교회에서 ‘만인 사제설‘을 주장하고 갈라져 나온 개신교에서 리더십은 태생부터 분점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사회의 다원화가 교회에도 깊숙이 침투했기 때문에 통일된 조직 체계를 이룰 수가 없는 거죠. 대신 이런 현실에 적응한 조직들, 예를 들어 소그룹 조직들이 만들어져 평신도리더십을 만들어 내고 있죠. 이제 목사나 목회자의 역할은 권력을쥐고 교회 조직을 흔드는 게 아니라 이러한 소그룹 조직들을 서로 묶고, 이해 관계를 조정하는 식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컴퓨터나 인터넷 같은 과학 기술이 이 변화의 촉매로 작용했죠.
- P515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초대 교회에서는 신을 사물이나 존재로,즉 현실적인 물체나 인격체로 표현하는 경향이 상당히 강했죠. 이것은 유대교에서부터 내려온 히브리 성경적 전통을 따른 거죠. 성경에서는 신을 인격적인 존재로 묘사하죠. 예를 들어 주기도문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어요. "하나님 아버지"하고 시작하잖아요. 주로 ‘아버지, 반석, 깃발, 왕, 목자‘ 같은 사물들로 표현되었죠. 그런데 헬레니즘 문화권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의 신 담론을 흡수하고 변화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전지, 전능, 완벽, 완전, 무소부재(無所不在) 같은 속성들을 가지게 되죠. 사실은 이 개념들은 그리스 철학에서 신의 속성을 가리키는 거였죠. 기독교의 초기 역사에서는 이두 속성이 경쟁을 합니다.
그런데 수백 년간 경쟁하는 과정에서 결국 그리스적 속성을 띤 신담론이 승리하게 되죠. 가톨릭 신자나 개신교인들이 기도하는 것을보면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하는 말이 먼저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는 식으로 기도를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소수파지요. 저는 이것이 개인으로서의 기독교가 조직으로서의 기독교로 변화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현재의 변화를 본다면, 이 역시 다시 바뀌지 않을까싶어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아버지"로 되돌아가지는 못하겠죠. 이미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은 이후이니까요. - P516

그런데 사실 이런 주술적 요소가 전혀 없는 종교란 세상에 거의없습니다. 근대적 종교이고 미신을 추방했다고 자처하는 개신교에서조차도 결코 사라진 적이 없지요. 저는 종교의 미래를 생각할 때 이문제가 중요하고, 이 주술적 요소가 종교의 수명을 좌우한다고 생각해요. 만약 지금 같은 제도 종교들이 없어진다고 해도, 주술적인 사고나 실천은 분명히 어떤 형태로든 계속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내러티브, 실천, 제도에 더해, 주술도 종교의 미래를 지속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추가해야겠네요. 아무튼 종교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명확하게 답을 할 수는 없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해요. - P524

종교는 어떤 신념체계, 그리고 인간이 본성적으로 추구하는 소속감이나 공동체 의식을 결합시켜 사람들에게 인생의 의미에서부터관혼상제까지 수많은 서비스를 완벽하게 제공해 왔습니다. 물론 사람들도 이에 납득하고 종교의 그 막강한 영향력을 받아들여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보세요. 신념 체계와 조직이 분리되고 있지 않습니까? 과학이 발전하면서 기독교나 불교의 경전이나 교리를 진지하게믿는 사람들은 많이 줄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하는 설교를 싫어하는 기독교인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도 종교가 가지고 있는 조직 또는 공동체적 성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떠나지 않고붙어 있습니다. 자신을 받아 줄 공동체를 갈망하는 거죠. 하지만 사회가 변화하면서 신념과 관계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종교 밖에서도 생겨나고 있지 않습니까?

김윤성 그렇죠. 신념 구조가 없는 조직에는 붙어 있기도 힘들고, 그조직 자체도 오래 살아남기 힘들죠.

장대의 그런 의미에서 신과 인간, 사제와 평신도 같은 위계적인 조직과 신념 체계를 가진 기존의 제도 종교를 대신하는 신념과 조직을가진 동호회 같은 모임이 종교를 대체하는 상황이 곧 오게 되지 않을까요? 물론 그 모임의 행태와 신념 구조에 종교라는 이름을 붙일수 있을지는 알 수 없겠지만요. - P526

DNA 보세요. 그 역사가 수십억 년이잖아요. 인간의 언어와 심지어는 디지털이라는 매체를 손에 넣은 종교라는 복제자는 그보다 수명이 더 길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지구 표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유기 분자에 불과한 DNA에 비해 디지털화된 밈들은 전파를 타고 지구를 떠나 우주 공간으로 퍼져 나갈 수 있지 않습니까? 복제자로서의 성능만 본다면 종교 밈의 수명이 더 길지도 모르죠.
장대익ㅡ 현재 종교가 가진 최고의 유용성 또는 기능은 뭘까요? 일종의 공동체성이 그 답이 될까요?
신재식ㅡ 공동체성이지 싶어요.
김윤성ㅡ 그것은 한두 차원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인식론적 차원도 지속될 겁니다.
신재식 그렇지만 인식론적 차원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할믿음의 내용을 가르쳐서 전도하는 게 아니거든요. 일단, 교회에나오게 되면 그때부터 믿음의 내용을 배우는 겁니다. 신념 체계가무엇인지 신이 무엇인지는 일단 괄호 속에 넣어 둘 수 있는 이차적인문제입니다. - P541

엘리아데가 그러지 않았나요? 종교의 기원은 직립하게 된 인간이 하늘을 올려다본 것이라고요.
김윤성ㅡ 예. 엘리아데가 그랬죠. 그런데 하늘을 우러러보고 숭배한게 종교의 기원이라는 식의 얘기는 아니고요, 직립한 덕분에 위아래라는 축이 생기고 이를 중심으로 전후좌우라는 방향이 생겨 이로부터 성스러운 중심과속된 주변을 구분하는 종교적 공간 관념이 생겨났다는 얘깁니다. 엘리아데는 직립의 결과 이런 종교적 공간 관념이생겨난 것이 인간을 다른 영장류와 본질적으로 다르게 만들어주었다고 봅니다. 상상력에 근거한 것이긴 해도, 왜 그럴듯한 해석이죠. 하지만 솔직히 말해 영장류 사이의 연속성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를 구성하고 있는 특질들 중에는 다른 영장류와 단절된 것도 있지만 연속된 것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 않습니까?
종교를 인간만 갖고 있는 것인지 하는 문제를 살펴려면 종교나 종교성이 진화에 있어서 단절의 영역에 속하는지 연속의 영역에 속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고고학에서는 매장풍습의 유물이나 그 흔적의 유무로 종교성의 대두를 판단하죠.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보다 먼저 출현해서 한동안 공존했던 네안데르탈인들의 유적에도 죽은 사람을 매장하고 꽃 같은 걸 바친 흔적이 남아 있고, 따라서 많은 학자들이 네안데르탈인에게도 종교성이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죽음에 대한 태도를 종교성의 기준으로 삼는 거지요.
저도 아직은 종교성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만 지닌 특정한 정신적 능력과 관련된 현생 인류 고유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P547

장대익ㅡ 하지만 에드워드 윌슨이 사회 생물학에서 비유한 대로, 만약 외계인이 있어 지구로 내려와 인간과 다른 동물들을 관찰한다면인간의 종교적 의례와 동물의 강박 행동을 구별할 수 없을지도 모르죠. 아마도 외계인은 그런 행동들이 같은 기능을 한다고 판단할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동물의 반복 행동이나 강박 행동을 가리키는용어와 종교적 의례를 가리키는 용어가 같다(ritual)는 것은 나름 의미심장한 것 같습니다. - P548

김윤성ㅡ 지성을 가졌다면 당연히 종교도 갖고 있겠죠. 물론 우리가지금 지구상에서 보고 있는 종교와는 많이 다르겠지만요.
장대익 ㅡ저는 외계인에 대해서 그렇게 단언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함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종교와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종교성자체가 없을 수도 있겠죠. 그리고 특히 종교성이 인지 능력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부산물로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면, 진화 과정에 따라서는 종교성 같은 부산물이 생기지 않고도 지성이 진화할 수 있겠죠.
하지만 우리는 지성의 진화 시나리오 중 한 가지만 알고 있기 때문에 확언하기는 힘들죠. - P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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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

6월의 어느 토요일 이른 오후, 잭 케니슨은 선글라스를 쓰고스포츠카에 올라탄 뒤 차 지붕을 열고 어깨와 불룩하게 나온 배위로 안전벨트를 했다. 위스키를 사러 가려는 것이었는데, 이곳메인주 크로스비에 있는 식료품점에서 올리브 키터리지와 마주치느니 차라리 포틀랜드ㅡ거의 한 시간 거리였다ㅡ까지 가기로 했다. 그러면 식료품점에서 두 번 마주친 다른 여자도 피할수 있었다. 그 여자가 날씨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는 위스키를들고 서 있었다. 날씨 이야기라니. 그 여자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도 남편과 사별했다. - P9

갑자기 불안감이 그녀를 덮쳤다.
픽업트럭에 탄 남자는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다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머리가 뒤로 젖혀지는 게 보였고, 심지어 입을벌려 웃을 때 치아까지 다 보였다. 그리고 트럭에 시동을 걸고차를 후진시킬 때도 여전히 통화중이었다. 올리브는 눈앞에 펼쳐진 만을 혼자서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은 물위로 영롱한 빛을튕겨냈고 작은 섬의 나무들은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돌멩이는젖어 있었고 조수는 썰물 때였다. 자신이 음식을 씹는 작은 소리가 들렸고, 깊은 외로움이 그녀를 공격했다. - P41

사실 올리브는 나이를 먹으면서 왜 남편에 대한 마음이 굳어버렸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그것은 그녀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이었다. 긴 결혼생활 동안 그들 사이에 생겨난 긴 돌담-그들 사이를 갈라놓았지만 중간중간 예상치 못한 곳에 이끼로 덮인 따뜻하고 움푹 팬 자리가 있어서, 때로 느닷없는 이해의 웃음이 터질 때면 두 사람 사이의 그 자리에 햇빛이 일렁이기도 했다 이더욱 높아지고 단단해져서 작은 구멍에 꽃이 피기는커녕 담을따라 얼음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달리 말하면 그들 사이에뭔가가 생겼고, 그것은 극복할 수 없는 듯 보였다. 어떤 날에는여기는 돌덩이가 더해진 자리, 저기는 돌멩이 한 무더기 (크리스토퍼의 사춘기, 오래전 그녀와 같은 학교 동료 교사였던 짐 오케이시에 대한 감정, 시도라는 여자와 헨리가 벌인 어이없는 애정행각, 죽음의 협박 속에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면서 헨리와 함께 견딘 범죄의 공포, 크리스토퍼가 이혼하고 타운을 떠난 것)가 보태진 자리라고 짚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노년으로 향하면서 그들 사이에 왜 그렇게 높고 끔찍한 담이 세워졌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녀의 심장이 쪼그라들수록 헨리의 심장은 더욱 굶주렸다. - P50

그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가 참 우렁찼다. 그것이 올리브의 신체감각을 자극했다. 전율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공포를 느꼈다. 몸이 기름에 흠뻑 적셔진 상태에서 누가 성냥을켜서 갖다댄 것처럼. 그의 웃음이 일으킨 공포, 전율, 그 느낌은악몽 같았지만, 한편으로 그녀 자신이 쑤셔박혀 있던 거대한 캔의 뚜껑이 방금 열린 것 같았다.
"진짜예요." 올리브가 말했다. 그러고는 침대에서 돌아누웠다. "얼른 저리 가요, 잭."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눈을 꼭 감았다. 제발,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도 그게 어떤 의미인지알지 못했다. 제발, 그녀가 다시 생각했다. 제발.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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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폭력화된 시위가 절정에 달했을 때, 중국 경찰(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공안이라고 하죠.)이나 군인은 단 한 사람도 라싸 중심부에 없었어요. 시위 초기에 경찰들은 사라졌지요. 경찰이 나타난 것은 시가지가 화염으로 휩싸이고, 3시간 이상이 지나 방화와 폭력이 어느 정도 잦아들고서야 나타났습니다. 경찰이 나타나자마자 시위대는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군인들이 나타난 것은 거의 저녁이 다 되었을 때였습니다. 적어도 그날 낮 라싸 시내에서 시위대와 군경의 공식 충돌은 없었습니다.
이것을 보니 마음이 참 찹찹해지더군요. 티베트 사람들이 제대로낚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티베트 시위대의 공격이 관공서 같은 권력 기구나 방송국 같은 선전 기구를 향하지 않고, 한족과 이슬람교도의 상점, 슈퍼마켓, 은행에 가해졌으니까요. 시위의 본질이 희석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 역사적 가해자인 한족이 피해자가 되고,
역사적 피해자인 티베트 사람들이 가해자가 된 것이지요. 수많은 한을 안고 그 오랜 시간을 견뎌 온 티베트 사람들이 겨우 서너 시간의 사건으로 단순 방화 폭도로 전락해 버린 것이지요.
- P454

김윤성 예나 지금이나 종교와 폭력 문제가 기독교나 이슬람교 같은종교에서 좀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폭력이 꼭 이런 유일신교들에만 국한된 건 아닙니다. 불교라고 해서 폭력과 본질적으로 거리가 먼 것은 아니죠. 근세 일본에서는 불교가 신토와 손잡고 바쿠후 정권의 천주교 탄압과 학살에 앞장섰습니다. 또 20년 넘게지속되고 있는 스리랑카 내전에서도 불교가 핵심에 있죠. 불교도인다수 민족 싱할라 족이 불국토를 건설하겠다는 일념 아래 힌두교도인 소수 민족 타밀 족을 차별하자, 타밀 족이 이에 반발해 종교의 자유와 민족의 독립을 요구해 왔고, 그 대립 과정에서 상호 간에 엄청난 학살이 벌어진 거죠. 이런 사례들을 보면 불교를 비폭력의 종교로 여기는 생각은 단지 만들어진 통념에 불과해 보입니다. 아무리 평화를 말하는 종교라도 상황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폭력적이 될 수 있다는 얘기죠. - P457

해외 선교에서 가장 큰 이득을 누가 보느냐, 제가 보기에 한국 교회 상황에서는 개별 교회라고 생각해요. 개별 교회가 이득을 가장많이 보는 거죠. 피선교지 입장에서는 어느 누가 오나 관계없어요.
어느 교단이나, 어느 교회나 관계없죠. 근데 선교사를 보내는 교회에서는 한 사람을 보냄으로써 그 교회가 지향하는 목표가 더욱더 분명해지고, 교회 내의 통합성을 엄청 높일 수가 있거든요. 그리고 교인들은 자존감과 자긍심을 높이고 긍정적 동기를 부여하는 결과를가져오죠. 우리 교회는 선교사를 파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그 교회 사람들에게 확인시켜 주고, 이것이 교인들을 고무시키는 거죠. 이것은 선교 단체의 경우에는 더 심해집니다. 선교 단체는그것이 존재 목적이니까요. - P466

장대익 과학 공동체들이 종교화되었다구요?
김윤성 그러니까 그만큼 종교라는 개념이 워낙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는 겁니다. 벨라가 말하는 시민 종교는 과거의 종교들이 사회를통합하는 기능을 했던 것처럼 성조기 같은, 어찌 보면 종교와 무관하게 세속적으로만 보이는 상징물들이 종교적 상징 못지않은 굉장한 응집력을 발휘하고, 그 힘을 어떻게 유지하는지를 분석하는 개념이지. 꼭 종교를 부정적 측면에서 보는 가치 평가적인 개념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 통합적인 기능을 하는 종교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평가를 하고 있는 거죠.
장대익 물론 그 안에서 보면 그것은 분명 사회 통합적인 기능을 하는 거겠죠. 하지만 그 바깥, 그러니까 그 종교와는 다른 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 통합이 아닌 거 아닐까요.
김윤성 그렇죠.
장대익 그러니까 그게 문제 아닌가요?
김윤성 그렇죠. 그러니까 빌라처럼 종교의 사회 통합 기능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완전 반대편에 사회적 갈등의 측면에 주목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있는 거죠. 사회 통합 이론이 다분히 보수적이라면,
사회 갈등 이론은 진보적이죠.
장대익 그렇죠.
김윤성 어쨌든 종교는 강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이자 억압 장치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피지배자들,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저항하고 반란을 일으킬 때 기대는 언덕이기도 했습니다.  - P484

장대익 잠깐만요.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정리해 보죠. 그동안 종교라는 밈의 외연이 넓어지기도 하고 변하기도 해 왔는데, 이제는 그밈 자체의 미래가 불투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존에 종교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밈은 살아남아 진화하게 될 것이고, 기존의 종교가 했었던 구체적인 역할들을 이제 이를 대체할 새로운 밈이 다른 방향으로 혹은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계속 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밈이 만드는 현상에 더 이상 ‘종교‘라는 단어를 붙일 수 없게 될 것이고, 종교에 대한 논의도 전혀 새로운 지평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밈이 해 온 역할, 그 밈이 만들어 온 현상들은 계속되고 반복되고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P494

기독교 같은 종교는 서양에서 생성, 성장, 쇠퇴 과정을 모두 거쳐왔어요. 수명이 거의 다한 거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잖아요. 이경우 우리는 서구 기독교라는 종교의 수명을 질 수가 있습니다. 물론서구라는 지역에 한해서 말한다면 그렇다는 말이죠. 그런데 현실적으로 기독교는 결코 소멸하지 않았어요. 지역을 넘어, 국경을 넘어,
대륙을 넘어 다른 곳으로 넓게 퍼져서 수명을 더 길게 이어 가고 있죠. 특히 한국이나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는 토착 문화와 갈등하거나뒤섞이면서 변형된 형태로 계속 번성하고 있어요. 이런 예는 신종교에서는 더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주의 죽음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새로운 전도지, 새로운 신도, 새로운 제도, 새로운 해석을 덧붙여 가면서 계속 살아남죠. 만약 밈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면, 그신종교는 집단이나 지역의 폐쇄성을 넘어 복제자의 풀(pool)을 확대하는 데 성공한 셈이라고 할 수 있겠죠.
장대익 그렇죠.
김윤성 전 세계가 빠르게 근대화, 세속화, 나아가 현대화, 탈현대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중세성 내지는 전근대성안에서 살아 가고 있는 사회들도 많죠. 이런 식으로 사회의 변화 속도나 양상은 균일하지가 않지요. 종교는 그런 틈을 파고 들어가 살아남을 겁니다. - P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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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키터리지 선생님이 어느 날 했던 그 말이 늘 기억에 남아 있어. 배고픔을 두려워하지 마라. 배고픔을 두려워하면 다른사람들과 똑같은 얼간이가 될 뿐이다."
위니는 줄리가 새끼손가락에 한 번 더 매니큐어를 찬찬히 바르는 걸 지켜보며 기다렸다. "아무도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지"
줄리가 손톱을 들어올려 쳐다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었는데?" 위니가 물었다.
"그냥 말 그대로야. 내생각에 처음엔 우리 대부분이 키터리지 선생님이 음식에 대해서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 우리는 기껏해야 7학년-아, 미안, 꼬맹이 - 이었으니까. 하지만시간이 지나니까 좀더 이해할 것 같아." - P352

달에 건설한 도시 같았다. 도시는 그때도 지금도 끌리지 않았지만, 비행기 두 대가 트윈 타워를 뚫고 들어갔을 때 올리브는 침실에 앉아서 아기처럼 울었다. 나라 때문이라기보다는 도시 때문이었다. 뉴욕이라는 도시는 갑자기 낯설고 딱딱한 곳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의연한, 한 무리의 연약한 유치원 아이들이 된 것만 같았다. 창문에서 뛰어내리다니. 그 광경에 올리브는 가슴이 아팠고, 검은 머리의 비행기 납치범들이 조용히 그들만의대의에 취해 캐나다에서 내려온 다음, 그 무시무시한 파괴를 자행하기 위해 포틀랜드 공항을 뚜벅뚜벅 통과했다는 걸 알고는속으로 치를 떨었다. (그날 아침 올리브가 차를 타고 가며 그들곁을 지나쳤을지 누가 안단 말인가?) - P359

"엄마한테 와달라고 했죠. 크리스토퍼가 천천히 입을 열었드려보았다.
다. "엄마를 보고 싶어서요. 앤이 엄마를 만나고 싶어해서요. 우린 그저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따름이에요. 좀 달라졌기를,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엄마, 전엄마의 그 극도로 변덕스러운 기분에 대해 책임지지 않을 거예요. 뭔가 속상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면 말씀을 하셔야죠. 그래야대화를 하죠."
"젠장, 넌 평생 입을 다물고 살았어. 왜 이제야 갑자기 말을시작하는 건데?" 갑자기 깨달았다. 이게 다 정신과 의사 때문이었다. 그럼 그렇지. 그 멍청한 아서라는 작자, 올리브는 조심해야 했다. 이 모든 게 치료 모임에서 다 재연될 테니. 엄마의 그 극도로 변덕스러운 기분. 그것은 크리스토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세상에, 그들은 벌써 올리브에 대해 샅샅이 논의를 했던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너 무슨 소리하는 거야? 내 극도로 변덕스러운 기분이라니. 대체 그게 무슨우라질 소리야?" - P411

놀랍게도, 아들은 조리대에서 더러운 접시를 모아 식기세척기에 넣기 시작했다.
"이렇게 날 그냥 쫓아낼 셈이냐?" 올리브가 말했다. 심장이방망이질을 하며 사납게 날뛰었다.
"봤죠, 이게 극명한 예잖아요." 크리스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차분하게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넣으면서, "엄마가 가고 싶다면서 내가 엄마를 쫓아낸다고 비난하잖아요. 과거에는 그런 말을들으면 기분이 처참해졌는데 이젠 그러지 않을 거예요. 제가 그런게 아니니까요. 엄마의 그런 행동에는 대응이 따른다는 걸 엄마는 깨닫지 못하시는 거 같아요." - P413

레베키는 개수대 밑에서 바비큐 라이터를 꺼내 배낭에 집어넣는 자신을 지켜보았다. 속옷 서랍에서 엄마로부터 온 오래된엽서들을 조용히 꺼내는 자신을 지켜보았다. 부엌에서 엽서를반으로 찢었다. 엽서를 찢을 때 레베카에게서 조용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찢은 엽서를 배낭에 넣었다. 그러고는 데이비드를 위해 산 셔츠를 가방에 집어넣고, 그 광고가 들어 있던 잠지도 넣었다. 그리고 담배 라이터를 외투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복도를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오는데 머릿속에서 아까 들은말이 되풀이되었다.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 권리가 있다. 권리가 있다. 권리가 있다.
체포되어도 좋으리라. 그들이 그렇게 말해준다면. - P448

올리브는 이틀을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썼다. "내 아들도 날 미워해요."
한 시간 후 답장이 왔다. "그래서 죽도록 괴롭소? 난 죽도록괴로워요, 딸이 날 미워해서. 하지만 나도 그게 내 잘못이라는건 알아요."
올리브는 당장 답장을 썼다. "나도 죽도록 괴로워요. 죽음보다더, 분명 내 잘못일 텐데, 난 이해를 못하겠어요. 같은 일도 아이가 기억하는 것하고 내가 기억하는 게 달라요. 아들은 아서라는정신과 의사를 만나는데, 내생각엔 아서가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것 같아요." 그리고 오랫동안 가만히 있다가 ‘보내기‘
를 누르곤 바로 다시 썼다. "추신. 하지만 분명 내잘못이기도할 거예요. 내가 절대로 사과를 하지 않는다고 헨리가 말한 적이있는데, 어쩌면 헨리 말이 맞을 거예요."  - P479

너무 슬퍼서 올리브는 눈을 감았다.
젊은 사람들은 모르지. 이 남자의 곁에 누우며, 그의 손을 팔을 어깨에 느끼며 올리브는 생각했다. 오, 젊은 사람들은 정말로모른다. 그들은 이 커다랗고 늙고 주름진 몸뚱이들이 젊고 탱탱한 그들의 몸만큼이나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내차례가 돌아올 타르트 접시처럼 사랑을 경솔하게 내던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모른다. 아니, 사랑이 눈앞에 있다면 당신은 선택하거나,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녀의 타르트 접시는 헨리의선량함으로 가득했고 그것이 부담스러워 올리브가 가끔 부스러기를 털어냈다면, 그건 그녀가 알아야 할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지 못하는 새 하루하루를 낭비했다는 것을. - P483

그녀는 눈을 감았다. 지친 그녀는 파도를 느꼈다. 감사의, 그리고 회한의 파도를 그리고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햇살 좋은 이방을 햇살이 어루만진 벽을 바깥의 베이베리를 그것이 그녀를힘들게 했다. 세상이 그러나 올리브는 아직 세상을 등지고 싶지않았다. - P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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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도 잘 아시겠지만, 과학은 이런 식으로 굴러가지 않습니다.
김 선생님도 지적하셨듯이 과학은 기본적으로 집단적인 작업이지않습니까? 어떤 주제를 연구하는 일군의 과학자 공동체가 있고, 그사람들이 공유하는 문제, 해답, 풀이 방식이 존재합니다. 이건 꼭 과학 철학자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죠. 그래서 만일 어떤 이들이,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기존의 과학 이론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면, 기본적인 규칙을 잘 지켜서 해야합니다.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믿고 받아들이는 진화론을 일개 대학원생이 하루 이틀 공부하고 대본을 달달 외워 선량한 교인들을 상대로 "아멘 할렐루야‘를이끌어내는 행위는 열성적 종교 행위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과학자들이 대중들과 소통하는 정상적인 방식은 아닙니다. - P379

과학에 대해 사람들이 자주 혼동하는 몇 가지가 있는 듯해요. 과학의 본질은 ‘내용‘이 아니라 ‘절차‘ 또는 ‘방법‘인데, 사람들은 자꾸 내용에 대해서만 물어요. "공룡과 인간이 같은 시대에 살았다는 주장이 과학이냐?", "외계인이 사람을 납치해 간다는 주장이 과학이냐?", "B형 남자는 성질이 더럽다는데 그게 과학적 사실이냐?"
등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 어떤 내용을담은 주장도 원칙적으로 제지당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이 모든 것이 과학이라고 해도 경찰에 연행되지는 않지요. (갈릴레오 때까지만 해도로마 가톨릭 교리에 반하는 주장을 하면 끌려가기도 하고 심지어 화형도 당했으니까 세상 많이 좋아진 셈이지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주장들이 과학자 공동체의 인정을 받지는 못합니다. 과학자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런 주장들이과학적 절차나 방법을 거쳐서 나온 것인가 하는 것이죠. 누구나 참신하고 엉뚱한 주장을 할 수는 있겠지만, 과학자 공동체는 그 주장의 내용보다 그 주장이 나온 절차를 문제 삼습니다. 물론 그 절차에대해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겠죠. 20세기 과학 철학의 역사 속에 등장한 귀납주의, 가설 연역주의, 반증주의, 패러다임 이론 등은바로 그 절차에 관한 논쟁의 결과물들입니다. - P381

김 선생님도 지적하셨듯이, ‘지적설계론‘라는 용어 자체는 1989년에 사상과 윤리 재단이 출간한 「판다와 사람에 관하여』에 처음 공식적으로 등장합니다. 이 책은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용으로 씌어졌는데, 「창세기」의 구절들을 직접적으로 인용하는 창조과학의 방식과는 달리, 성서를 참조하지 않으면서 ‘창조‘나 ‘창조론‘ 등의 용어들을 ‘지적 설계(ID)‘ 같은 탈기독교적 용어로 대체하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현명한 선택이었죠. 이 책의 저자들은 지적 설계론이 "생명의 다양한 형태들이 본래의 특성을 가진 상태에서 갑자기 지적 행위자(intelligent agent)에 의해 시작되었다."라고 주장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적인 행위자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공립 학교 교과서의 최소요건 중 하나 - "특정 종교의 확립에 기여해서는 안 된다." 를 만족시키려 했습니다. 이때부터 출판사는 여러 자원들을 동원해 교육위원회들이 이 책을 교과서로 택할 수 있도록 홍보와 로비를 펼치기시작합니다. - P393

서두가 길었습니다. 그럼 제가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을 비롯해창조 vs. 진화 논쟁을 어떻게 보는지 먼저 밝히죠. 우선 저는 기독교에는 진화론에 대한 입장이 거부에서 수용까지 다양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창조 vs. 진화 논쟁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죠.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 운동이 양자택일을강요하고 있죠. 이들은 본질적으로 과학 운동이 아닙니다. 과학계밖, 종교계 안에 있는 제 입장에서 봤을 때 이 운동은 뿌리도 동인因)도 기독교 신앙에 둔 종교 운동일 뿐입니다. 게다가 과학과 종교를동시에 왜곡하는 문제 많은 운동입니다. 잘못된 신앙 행태를 조장하고, 기독교의 핵심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죠. 저는 한국의 기독교계가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이 주는 미망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주장합니다. - P415

첫째,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이 오류이면 창조론은 저절로 정당성이 증명된다?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론 모두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아주 편향적인 흑백 논리에 빠져 있습니다. 갑이라는 이론이 특정한 사례를 해명하지 못한다면, 을이라는 이론이 옳다는 논리이죠. 진화론이 설명하지 못하니까창조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들은 종교와 과학이 하나의 링위에서 경쟁하고 있다고 보고, 과학에서 발견된 오류를 자신들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증거로 이해합니다.
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의 주장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제대로 된 과학 이론으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론 비판에 열을 올립니다.  - P418

둘째, 목회적인 차원에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 현장에서 보면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의 주장에 대해 대부분 교인들은 환영하고 안도합니다. 왜 그럴까요? 한국 교회가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의 주장을 제대로 평가를 할 능력이 부족한 것도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원인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과학에 대해 가지고있는 피해 의식과 두려움입니다. 과학이 이 시대의 사제가 된 이래,
종교는 열등한 것이고 신앙 지식은 유사 지식이라는 의식이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듣고 싶은 소리가 들립니다. "자,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이 진짜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신앙의 적인 진화론은 과학적으로 오류라고 증명되었습니다. 성서는 과학적으로도 사실입니다." 그동안 신앙을 왜소하게 만들었던 과학, 그것을 ‘과학자‘가 와서 그렇지 않다고 시원하게 반박하니 얼마나 신이 납니까? 우리의 신앙이 과학적으로도 확고한 기반을 가지고 있다고 기뻐합니다.
- P419

이런 까닭에 오늘날 신학계에는 유물론적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진화론을 가지고 씨름하는 신학자는 많지만, 지적 설계론을 가지고 기독교 신학을 전개하는 신학자는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애시당초 신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으니까요.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의논지를 따르면, 신은 역사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일회성 창조로 끝이 납니다. 신의 활동 여지를 아주 없애 버리죠. 활동을 멈춘 신은 더 이상 기독교의 신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희망의 근원은 창조과학이 말하듯이, 태초의 창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 역사가 열려 있다는 약속에 있죠. 이것을 신학적으로 ‘종말론적 개방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이 들어서는 순간 계속 창조와 궁극적 창조를 사고하는 기독교 신학은 중단됩니다.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의 주장이 함축하고 있는 이런 신학적인 문제 때문에, 그리고 기독교 신학을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저는 이들의 논의를 더 심각하게비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 P425

를 해김 선생님이나 장 선생님 모두 한국 교회는 왜 창조과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지 궁금해 하셨죠. "한국 교회에서 복음주의와근본주의의 경계가 모호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이런 말씀도 하셨죠. 복음주의와 근본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다소 정교한 논의가 필요한데, 그냥 간단히 말씀드리죠. (제가 대학원에서 개설한 과목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한국 교회에서 말하는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와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궁금해 하셨던, 한국 교회가 창조과학에 환호하는 이유를 금방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보수주의적 신앙과 창조과학의 주장 사이에 ‘선택적 친화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과학은 미국의 근본주의 흐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근본주의나 보수주의 성향의 교회에서 환영받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죠. 한마디로서로 잘 맞는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창조과학은 보수적인 교회나신앙인들이 ‘듣기 원하는 바로 그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한국 교회의 보수주의 성향을 생각하면, 문득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초기 한국 교회를 지배하던 신학이, 바로 20세기 초 근본주의 - 현대주의 논쟁을 경험한미국 교회를 보고 오히려 보수 반동으로 되돌아선 사람들과 선교사들에 의해 형성되었으니, 이런 결과는 당연하죠.
- P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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