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행동‘에 대한 연구는 항상 과학적이며, 위생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용어로 표현된다. 이로 인해 비가학적non-sadistic)이면서 정상적인 젊은 심리학도들은 아무 걱정 없이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세뇌가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소거, extinction)‘ 기술이란 사실상 갈증이나 굶주림을 야기하거나 전기 충격을 줌으로써 고문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부분적인 강화(partial reinforcement)‘란 실험자들이 사전 훈련을 통해 동물에게 야기한 기대를 간헐적으로만 충족시킴으로써 욕구불만을 안겨 주는 것을 일컫는 용어다. ‘부정적 자극(negative stimulus)‘은 동물에게 피할 수 있는 자극을 줄 때에 사용되는 용어다. ‘회피(avoidance)‘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는 별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이는 관찰 가능한 활동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반면 ‘고통스러운‘ 또는 ‘겁나게 하는‘ 자극이라는 용어는 그다지 바람직한 용어가 아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용어가 의인적 擬人的때문이며, 따라서 동물들이 감정이기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인간의 감정과 유사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때문이다. 그러한 용어들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왜냐하면 이는 비행태적이며 비과학적인 용어이기 때문이다(또한 이로 인해 젊고 여린 연구자들이 어떤 창의성 있는 실험을 행하길 주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물에게도 감정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그들은 자신의 상상력을 조금밖에 활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동물행동‘ 분야를 연구하는 실험심리학자들은 의인화를 금기로 생각한다. - P103

많은 과학자들과 의사들은 이와 같은 방식의 실험을 비판해 왔다. 그들은 실험 결과를 인간에게 적용할 수 없음을 지적했다. 캘리포니아박사는 다음과 같이롱비치의 의사인 크리스토퍼 스미스Christopher Smith말하고 있다.

이러한 실험 결과는 독성이 있을 가능성을 예측하거나 인간에게 노출되었을 때의 치료법의 지침으로 사용될 수 없다. 나는 협회가 인증한 응급처방의사로, 사고에 의한 중독과 독극물에 노출되었을 때의 처방에 대한 17년이넘는 임상 경험이 있다. 그런데 나는 드레이즈 실험 자료를 참고하여 눈의상처에 대한 처방을 내리는 응급 처방 의사를 본 적이 없다. 나 또한 사고에의한 중독을 치료하는 데 동물 실험 결과를 사용한 적이 없다. 응급 처방의사는 증상 보고서, 임상 경험, 그리고 인간을 대상으로 한 임상 실험에서 얻은 실험 자료를 통해 최적의 환자 치료 지침을 구한다. 

독물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한 종(species)에서 확인되는 사실로부터 다른 종에 대한 사실을 추정하는 것을 매우 위험한 모험이라고 생각해왔다. 인간에게 예기치 못한 해악을 주었던 가장 악명 높은 의약품은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다. - P114

 인간에게 고통을 가하고 있다고 믿는 경우에도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데, 하물며 교수가 동물 실험을 지시할 경우 학생들이 처음에 느꼈던 양심의 가책을 옆으로 미뤄놓기가 얼마나 쉬울 것인가? 앨리스 하임Alice Heim이 학생에 대한 ‘주입(indoctrination)‘이라고 적절하게 부르는 과정은 생물학 시간의 개구리 해부에서 시작되는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절차다. 미래의 의사, 심리학자, 또는 수의사는 대학에 입학하고 난 후 자신들이 선택한 전문 과정을 이수하려면 살아 있는 동물들로 실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자신들에게 요구되는 바가 표준적인 실습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험을 거부하는 학생들은 과정을 이수하지 못하게 될것이며, 결국 자신들이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분야를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된다.
학생들이 졸업을 해도 실험 압력은 누그러지지 않는다. 동물 실험이일상화되어 있는 대학원 과정에 들어가면 그들은 스스로 실험을 고안해내야 하며, 이를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사용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만약 이러한 방법으로 학생들이 교육을 받는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교수가 되어서도 자연스럽게 동일한 방법을 사용할 것이며, 제자들 또한 동일한 방법으로 훈련시키게 될 것이다. - P134

다음은 로저 울리치 Roger Ulrich의 증언이다. 그는 한때 실험자였으며, 이제 위에서처럼 조건화되는 데서 벗어나 쥐에서 원숭이에 이르는 여러 동물들에게 ‘수년 동안 고통‘을 가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의 증언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1977년 미국 심리학회에서 발간하는 모니터 Monitory 라는 잡지에는 울리치가 행한 공격성에 대한 실험을 의회소위원회가 비인도적인 연구 사례로 선택했다는 글이 실려 있다. 울리치는 비판에 "고무되었다(heartened)"고 회답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는데, 이는 그를 비판했던 동물실험 반대론자와 『모니터』지 편집인을 놀라게 했다.

처음에는 인간의 공격성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에 연구에불을 붙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내 실험 결과를 보면서 이것이 연구의 지속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요. 대신 나는 재정적 지원, 직업적 위신, 여행 기회 등이 연구를 계속하도록 만드는 요인이 아닌지 고민하기시작했으며, 사실상 관료 체계와 입법 체계의 지원을 등에 업은 과학자 공동체에 속해 있는 우리야말로 문제의 일부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 P135

이러한 실험들은 정부 기관의 재정 지원을 받는다. 따라서 과학자들이 그러한 실험들을 하지 못하게 막을 법률이 없다는 사실은 덧붙여 말할 필요도 없다. 일반인들이 개를 때려죽이지 못하게 하는 법률이 있지만 미국에서는 과학자들이 처벌을 받지 않으면서, 그리고 실제로 이익(일상적인 구타로는 산출될 것 같지 않은)을 산출하는지 점검도 받지 않으면서 똑같은 행동을 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다양한이익 집단-연구소에 판매할 목적으로 동물을 사육하는 사람들이 포함된ㅡ의 지원을 받는 과학 기관의 힘과 위세가 효과적인 법률적 제제를 만들려는 노력을 충분히 봉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141

이러한 지적이 적절하다면 우리는 실험자들이 동물 사용을 정당화할 정도로 실험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내세울 경우 항상 다음과 같은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사용하고자 하는 동물들의 지적 수준과 유사한수준의 뇌 장애가 있는 인간을 사용할 용의가 있는가?" 나는 이 장에서서술한 실험들을 뇌장애가 있는 인간에게 행하라고 진지하게 요구할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간혹 몇몇 의학 실험이 본인들의 동의 없이인간을 대상으로 시행되었던 경우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한 사례에서는 공공시설에 수용되어 있던 지적인 장애가 있는 아이들에게 간염을유발했다. 인간에게 유해한 이러한 실험들이 시행되었다는 사실이밝혀지면, 사람들은 대개 실험자들에게 거세게 항의를 하며, 이러한 항의는 정당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실험들은 지식 증진을 구실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려는 연구자의 오만함을 보여 주는 또하나의 사례이다. 그런데 만약 실험자들이 동물에게 고통을 야기하는것을 정당화할 만큼 실험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면, 동일한 지적 수준에 있는 인간에게 고통을 야기하는 실험에도 동일한 주장을 제기할 수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를 안 된다고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양자 간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인가? 한쪽은 우리 종의 구성원이고, 다른 한쪽은 아니라는 단지 그 이유 때문인가? 하지만 그와 같은 차이에호소한다는 것은 인종차별주의나 다른 형태의 임의적인 차별과 마찬가지로, 옹호될 수 없는 편견을 드러내는것이다. - P153

어떤 경우라도 동물 실험이 우리에게 혜택을 주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방법을 통해 동물실험의 정당성에 관한 윤리적 질문을 해결할 수는 없다. 그와 같은 혜택이 있다는 증거가 아무리 명백해도 이는마찬가지다. 이익 동등 고려라는 윤리적 원리에 입각해서 생각해 볼때, 지식을 획득하는 몇 가지 수단들은 배제시켜야 한다. 지식을 추구할 권리에 신성함을 부여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이미 우리는 과학 연구에 관한 많은 제한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과학자들이 사람들의 동의없이 그들에 대한 고통스런, 또는 치명적인 실험을 수행할 일반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와 같은 실험을 통해 다른 어떤 방법보다 훨씬 신속하게 지식이 발전할 수 있는 경우가 많이 생기더라도 이는 마찬가지다. 이제 우리는 실험에 관한 기존의 제한을 확대 적용할 필요가 있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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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삼십칠 분마다 한 명씩 자살한다고 한다. 어느 날엔가 함께 그런 뉴스를 보다가 삼이 내게 혹시 너도 자살 같은 걸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그때 배스킨라빈스에서 하프갤런 한 통을 사와서 마구 퍼먹어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죽으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못 먹잖아, ‘엄마는 외계인도, 하고 대충 말했다. 아이스크림에 그런 이상한 이름을 붙인 회사를 이해할 수 없어하던 삼은 내 대답을 듣고서 그런 사소한 이유로 살고싶은 거냐고 물었다. 그런 사소한 이유로도 살고 싶은 게 사람이아니냐고 나는 대답했다. 죽고 싶은 이유를 수십 가지나 가지고서도, 자기 같은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밤마다 엉엉 울면서도, 아침이면 일어나 허기를 느끼고 무언가를 먹고 마시며 포만해지는 게 사람 아니냐고. 그러자 삼이 내 얼굴을 골똘히 보다가 눈감고 아, 해, 하고 말해서 눈을 감고 아 했더니 내 입속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한 숟갈 넣어주었다. 이 달달함때문에  살고 싶은 거냐고 물어서 차가운 단맛을 침으로 녹이며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나는 맹물을 들이켜면서도 살아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자살은 아니었다.
이것들은 모두 아주 오래된 일이다. - P220

죽은 지 이 일째 되는 아침에는 누군가 나를 깨우러 와줬으면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나는 혼자 살고 있었다. 동이 터올 때부터 요란스레 들리던 새소리가 언제인지 모르게 그쳐 있다. 남의 집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다시 또 삼십여 분 뒤에 비슷한 소리가 한번 더 들린다. 골목을 가로지르는 구두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오토바이 소리와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그 소리들을 제외하면 이 거리의 주택가는 놀랍도록 조용하다. 낮 동안은 거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가끔 바람이 세게 불어 방충망이 덜컹거릴 뿐이다. 저녁이면귀가한 사람들로 다시 조금 소란스러워진다. 티브이 소리, 압력밥솥 소리, 전화벨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내 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연달아서 한 번, 두번, 세 번, 네번, 다섯번・・・・・・ 조금 사이를 두고 다시 한번 더 확인하고 싶다. 내가 죽은지도 모르고 계속 메시지를 보내는 저 사람은 누굴까.
셋째 날 아침에도 아직 마음의 여유가 있다. 누구라도 곧 나를찾아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삶에 대해 기대하는 것이 있었다. 밤동안은 가로등 불빛이 내 방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가로등 불빛이좋다. 사위가 서서히 어두워지는 와중에 막 가로등이 켜지는 순간을 목격한 사람이 있다면 나의 그런 애착을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 P221

동그랗고 노란 그 빛은 어둠 속에서도 자기를 잃지 않는 것 같았다. 넷째 날엔 어디서 빵을 굽는지 구수한 냄새가 온 동네에 퍼져나간다. 죽기 전에는 별로 맡아본 적 없는 냄새다. 다섯째 날엔 혀끝에서 쇠맛이 난다. 공기중에 그런 맛이 떠도는 것 같다. 여섯째 날엔 기분 나쁠 만큼 정교하게 생긴 작은 벌레가 몸에서 마구솟아나온다. 나는 어떤 것들에 대해 반복해 생각한다. 혀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굴리면서 그것들이 완전히 녹아들 때까지. 일곱째날엔 구수한 빵 냄새는 모두 사라지고 다른 불쾌한 것들만 남는다. 이건 내 냄새일까. 그리고 나는 날짜를 세는 걸 포기한다.
나를 발견한 사람이 어쩌면  삼인지도 모른다. 그는 어딘가 전화를 건 다음에 바닥에 주저앉아서는 이제 달리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뿐이라는 듯 울기 시작한다. 딱딱한 것이 녹아 뜨겁게 흘러내리는 울음소리에  마음을 의탁하고 싶어질 때, 나였던 것은 산산이흩어지고 만다. 그래도 그때에는 마음 둘 곳이 몇 있어서 사람들은 잘 살다가도 불쑥불쑥 나를 떠올렸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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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30여 년 전 할로가 박탈 실험을 시작한 이래, 미국에서만 250건 이상의 그와 같은 실험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실험을 하는 사람들은 7,000마리가 넘는 동물들을 동원하여 정신적인 고통과 절망, 불안, 심리적 황폐화를 초래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 지금까지의 일부 인용문이 보여 주고 있는 바와 같이 오늘날 연구는 자생력을 갖게되었다. 리트와 그의 동료들은 침팬지를 실험 대상으로 삼았는데, 그이유는 대형 유인원들에 대해서는 다른 원숭이들보다 실험이 상대적으로 적게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성 박탈 실험을 해야 하는가"라는 기본적인 의문에 답할 필요조차 전혀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그들은 인류에게 이익을 주고자 한다는 주장을 자신들의 실험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내세우지도 않았다. 이미 고아가 된 야생 침팬지들에 대한 폭넓은 관찰이 익히 알려져 있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해봐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태도는 단순했다. 다시 말해 그들의태도는 "그것은 한 종의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었지 다른 동물을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보자"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심리과학 또는 행태과학 분야에서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관련된 이야기 중에서가장 놀라운 것은 납세자들이 이러한 연구를 위해 모든 비용―자그만치 5,800만 달러가 모성 박탈 연구에만 쓰이고 있다―을 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측면(하지만 반드시 이러한 측면만은 아닌)에서 보자면 비군사적동물 실험과 군사적 목적의 실험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 - P80

수없이 시행된 실험들 중에서 중요한 의학 연구에 이바지한 것으로간주될 수 있는 실험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동물들이 대학의 임학과, 심리학과 등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그보다 많은동물들이 상업적인 목적, 즉 화장품, 샴푸, 식용 색소, 그외 하찮은 품목 등의 실험에 이용되고 있다. 이 모든 일이 있어날 수 있는 것은 우리종 구성원이 아닌 생물의 고통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우리의 편견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동물 실험 옹호자들은 동물들이 고통 받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동물의 고통을 부정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실험이 인간의 목적에 어느 정도 기여한다고 주장하려면 인간과 동물들 간의 유사성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실험자들은 쥐에게 굶주림과 전기 충격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고, 그것이 그들에게 궤양을 일으키는가(실제로 궤양을 일으킨다)를 살펴본다. 그런데 실험자들이 그런 실험을 하는 이유는 쥐가 인간과 매우 유사한 신경계를 가지고 있으며, 유사한 방식으로 전기 충격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 P86

실험자들은 어떤 때는 도망갈 기회를 주고, 어떤 때는 주지 않으면서 생쥐에게 다양한 강도의 전기 충격을 주었는데, 이런 실험을 하고난 후에도 자신들의 실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한 적절한 메커니즘이 무엇인가를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내린 결론이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결론이 지난 15년에 걸쳐 행해진 수백 번의 실험 결과의 타당성에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는 15년에 걸쳐 동물들에게 전기 충격을 가했음에도 별다른 결과를 이끌어낼 수 없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기묘한 심리학 분야에서의 동물 실험 세계에서는 이러한 연구 결과가 동물들에게 피할 수 없는 전기 충격을 주는 실험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정당화시켜 주는 구실이 되며, 종국에는 ‘타당한‘ 결과를 얻게 될 것임을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타당한 결과들‘이 피할 수 없는 전기 충격을 받게 될, 함정에 빠져 있는 동물들(일반 동물이 아닌)의 행동에만 적용될 수 있을 뿐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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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판 서문

2008년 수천만의 미국인들은 TV 저녁 뉴스에서 너무나 체력이 약해져서 걷지 못하는 소를 도축하여 식육으로 가공하는 죽음의 도축장 쪽으로 몰아가기 위해 발길로 차고, 전류가 흐르는 봉으로 전기 충격을 주고, 막대기로 눈을 찌르고, 지게차로 이리저리 밀고 다니는 모습을 촬영한 비밀 비디오 영상을 두려움과 의혹의 눈으로 지켜보았다. 이 비디오영상은 캘리포니아 주 치노 Chine 소재 웨스트랜드/홀마크 도축장에서 촬영된 것이었다. 도축장은 최신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대규모 시설로, 전국학교급식프로그램(National School Lunch Program)에 식육을 제공하는 주요공급원이며, 후미진 농촌 지역이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중심부에서 불과50여 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비디오 방영을 계기로미국 역사상 최대의 쇠고기 리콜 사태가 벌어졌다. 걷지 못하는 쇠고기를 먹을 경우 사람들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 P6

1975년판 서문

이 책은 인간 아닌 동물들에 대한 인간의 폭정에 관한 책이다. 이러한 폭정은 이제껏 상당한 고통과 괴로움을 야기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통과 괴로움을 초래하고 있다. 이러한 폭정의 결과와 견줄 수 있는것은 흑인에 대한 백인의 수세기 동안의 폭정의 결과로 야기된 고통과괴로움 밖에 없다. 이러한 폭정에 반대하는 투쟁은 최근 수년 동안의 어떤 도덕적 · 사회적 문제에 대한 투쟁 못지않게 중요하다. - P14

이 책은 애완동물에 대해 쓴 책이 아니다. 이 책은 동물에 대한 사랑이 단순히 고양이를 어루만져 준다거나, 정원의 새들에게 모이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마음 편히 읽으라고 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억압과 착취가 일어나는 곳이면 어디에서건 이를 종식시키고자 하는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이익에 대한 동등한 고려라는 기본적인 도덕 원리를 아무런 이유 없이 우리 종 구성원에만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와 같은 문제들에 관심을 갖기 위해서는 동물 애호가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인간들 사이에서 적용되는 도덕 규준을 다른 동물들에게 확장시킬 용의가 조금도 없음을보여 주는 것이다. 자신의 반대자를 ‘깜둥이 애호가(nigger-lovers)‘라고 욕하려는 인종차별주의자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사람도 "처우를 제대로 받지못한 소수 인종들의 평등에 관심을 가지려면 그러한 소수 인종들을 애호해야 한다거나, 또는 그들을 예뻐서 꽉 껴안고 싶은 존재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진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동물의 조건을 개선하기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동물을 애호해야 한다"고 가정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 P16

동물 해방의 전망과 관련해 더욱 중요한 사실은 억압을 가하는 집단이거의 대부분 직접적으로 억압에 개입되어 있으며, 자신들이 억압을 통해 혜택을 누릴 것임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물에 대한 억압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마치 북부의 백인이 남부의 노예제도를 초연한 입장에서 논의하듯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도축된 동물들의 고기를 매일같이 먹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그리고 고기 외에 무엇을 먹을 수 있을지를 상상하는 것도 어렵다. 이러한 문제에 관한 한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최소한 이익 집단이다. 그들은 현재와 같이 인간 아닌 동물들의 이익을 무시함으로써 이익을 얻게 된다(혹은 최소한 그들은 이익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설득은 더욱 어렵게 된다. 북부의 노예 폐지론자들이 활용했고, 오늘날 우리들 대부분이 받아들이는 논거에 설득될 남부의 노예 소유자들은 과연 얼마니될까? 아마 몇 명은 설득되었겠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 P20

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평등이라는 기본 원리를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확장시켜야 한다고 해서 그것이양 집단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함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이며, 양 집단이 동일한 권리를 가져야 함을 뜻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게 해야 하는지의 여부는 양 집단 구성원이 어떤 본성을 가지고 있는가에따라 달라질 것이다. 평등이라는 기본 원리는 평등한 또는 동일한 처우(treatment)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한 원리는 단지 평등하게 배려하길요구할 따름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존재들을 평등하게 배려한다는 것은 그들을 서로 다르게 처우하며, 그들이 서로 다른 권리를 갖는다는사실을 의미할 것이다. - P29

평등에 관한 주장이지능, 도덕적 재질, 체력 또는 그와 유사한 사실의 문제에 의거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평등은 도덕적 이념이지 사실에관한 단언이 아니다(Equality is moral idea, not assertion of fact). 두 사람간의 실질적인 능력의 차이는 그들의 필요와 이익에 대한 차등적인 배려를 정당화할 논리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 인간 평등의 원리는 인간이 실질적으로 평등하다(이는 근거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이 아니다. 이러한 원리는 우리가 인간을 어떻게 처우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규정(prescription)이다. - P33

문제는 그들에게 이성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있는지, 또는 대화를 나눌 능력이 있는지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고통을 느낄수 있는가이다. 

위의 구절에서 벤담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의 유무‘를 어떤 존재가 평등한 배려를 받을 권리가 있는지를 가늠하는 핵심적인 특징으로 꼽고 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 좀 더 엄밀하게 말해 고통그리고/또는 행복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은 언어 능력 또는 고등수학을 풀 수 있는 능력과는 다른 특징이다. 여기서 벤담의 언급은 어떤존재의 이익을 고려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넘을 수 없는 선‘을 그으려는 사람들이 흔히 잘못된 특징을 선택했다고 말하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벤담은 고통이나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모든 생물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을 함으로써 무단으로 이익을 배제하지 않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고통이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적어도 이익(interests)을 갖기 위한 전제조건이며, 그러한 능력을 갖는다는 조건은 이익을 의미 있는 방식으로 논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충족되어야 한다.  - P37

한편 서로 다른 종간의 고통의 비교가 불가능하며, 이 때문에 동물과 인간의 이익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에 평등의 원리가 아무런 지침이될 수 없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서로 다른 종 구성원들의 고통을 정확히 비교하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확성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동물은 커다란 영향을 받지만 인간의 이익이 크게손상되는 일은 없을 것임이 어느 정도 확실한 경우에만 동물에게 가하는 고통을 방지하려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식사를 비롯해 가축 사육 방식, 여러 과학 분야에서의 실험 절차, 야생 동물에 대한 우리의접근 방식과 사냥 등에서 변혁을 이루어야 한다. 또한 동물을 장식품과 모피로 사용하거나 서커스, 로데오, 그리고 동물원 등 오락 분야에서 활용하는 경우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이것이 현실화될 경우, 동물들은 상당한 양의 고통을 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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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근데 딸기 안 좋아하지 않았어?"
혜수가 트레이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내가 원래 좀 그래."
"뭐가?"
"싫어했던 건 꼭 나중에 좋아하게 되더라고."
"왜 그래."
"그러게 말이야. 왜 그럴까. 그리고 좋았던 건 꼭 싫어져. 그래서 맨날 뒤통수 맞잖아. 근데 생각해보니까, 내 맘대로 점수를 너무 후하게 줘서, 혼자서 그 사람은 막 이렇고 저럴 것이다. 이상화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애초에 그런 사람인 적이 없으니까. 그냥 나 혼자 뒤통수 맞은 기분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더라고."
정은은 선생님도 노력했을 것이라고 정은이 기대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은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선생님의 모습대로 마지막에 정은에게 연락하지 않은 것은 정은이 기대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이제는 물어볼 수가 없다. - P152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리 생각해도 승호에게 나는좋은 상대가 아니었다. 승호가 번듯한 사람이 되어갈수록 거리감이 느껴졌다. 나는 늘 친구들이 잘되길 빌었지만, 그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혼자 남겨지는 건 싫었다. 언제부턴가는 좋은 미래를 상상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물론 좋은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별 볼일 없는 현실을 견디는 데에 도움이됐다. 미래에는 좋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낙관하는 것. 하지만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는 미래만 기다리며 현재를 견디는 것은 오래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제는 미래 쪽에서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미래는 내가 어서 빨리 지쳐 낙오되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미래에는나를 위한 자리가 없을 것만 같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어떤 보상도 주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만약 미래에 나를 위한 자리와 보상이 마련되어 있다면 지금 내게 그 전조들이 보여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낌새와 징조와 기미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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