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는 소변을 보다가 피를 발견했다. 월경이었다. 물론 폐경기 초기에는 월경이 불규칙한 경우가 많고 폐경기가 왔다고 해서 월경이 갑자기 끊기는 게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폐경을 맞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을 휘어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취기와 생리 탓에 약해진 마음이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앨리스는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쉰살이었고 미쳐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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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그때, 그러니까 1년여 전부터 그녀의 머릿속에서 뉴런들이질식해 죽어가고 있었다. 귀에서 멀지 않은 곳의 뉴런들이었지만 너무조용한 죽음이었기에 그녀 자신에게조차 들리지 않았다. 부지불식간에 상황이 너무 나빠져서 뉴런들이 스스로 파멸했을 수도 있다. 그것이 분자 살해였든 세포 자살이었든, 뉴런들은 죽기 전에 그녀에게 그런 상황에 대해 경고할 수가 없었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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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케네스갤브레이스는 60여 년 전에 이미 경제학자들이 생각하는 <완전 경쟁>에 근접한 시장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대항권력>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글을 썼다. 수많은 신문과 텔레비전 방송국이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고 있지만 미국 언론계에는 참된 의미의 경쟁이 자리 잡을 가능성이 없다. 하지만 상황을 개선할 여지는 있다. 우리는 광고시장을 제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념 시장을 제어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독점금지법의 감시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특히 신문, 텔레비전, 라디오를 지배하려는 언론 기업들의 시도를 철저히 차단해야 한다. 또한 언론에 공적 지원을 제공하면 언로를 다양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공익은 공공재다. 정부가 제대로 움직이면 모든 국민이 혜택을 받는다. 경제학계의 기본적인 시각은 민간 시장을 자율에 맡겨 두면 공공재에 대한 투자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 전체가 누리는 편익은 크지만 개인이 누리는 편익은 그만큼 크지 않기 때문이다. 충분한 정보를 확보한 대중의 존재는 민주주의의 정상적인 작동에 긴요한 요소다. 이를 위해서는 적극적이고 다양한 언론이 보장되어야 한다. 여러 국가들이 이런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들 국가들은 국영 공익 방송국과 지역 자체 라디오 방송국, 소규모 공동체 내의 소규모 신문사 등 언론에 대해 폭넓은 공적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 P248

경제학자들과 통계학자들은 투표권자 관리과정상의 실수를 두 가지로 구별한다. 하나는 투표권이 있는 사람이 투표를 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실수이고 다른 하나는 투표권이 없는 사람이투표를 하도록 허용하는 실수다. 공화당은 두 번째 실수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하고, 민주당은 첫 번째 실수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공화당의 주장은 표리부동한 것이다. 공화당이 두 번째 실수를 차단하겠다며 만들려고 하는 장벽은 사실 <경제적 장벽일 뿐, 투표권자로서의 자격 여부와 관련된 장벽이 아니다. 유권자 등록 과정에서 정부가 교부한 사진 부착 신분증(대표적인 것이 미국 차량국이 발행하는 운전면허증이다)을 요구하는 것은 차량국에 가는 데 필요한 돈과 시간과 정보를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이다. 투표권자임을 확인받으려면 출생증명서나 기타 서류가 필요한데, 이 서류까지 준비하려면 더 많은돈과 시간, 그리고 공무 행정 조직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미국에서 특정 집단을 투표 참여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일들이 벌어지던 시절은 지나갔지만, 투표 참여를 제한하는 계획들은 여전히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다. 물론 그 계획들은 어김없이 가난한 사람들과 인맥이 시원찮은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다. 관계 당국은 교묘한 방법을 이용해서 특정 집단의 정치 참여를 막을 수 있다. 이를테면 빈민층이나 이민자 집단에 대한투표 독려를 부실하게 진행하거나, 투표소에 인력을 충분히 투입하지 않거나, 일부 중죄인의 투표를 막는 방법이다. 업무 태만인지 계획적인 선거권 박탈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본질이야 어떻든 이런 행위들은 특정 집단의 투표율을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동일한 효과를 발휘한다. 이런 행위들은 유권자 등록이나 투표 행위를 막는 장벽은 아니지만 유권자들의 투표 참여율을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이런 효과는 특히 투표를하려는 열의가 낮고 공적인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높은 비특권 계층 가운데서 크게 나타난다. 미국에서는 결과적으로 유권자 자격을 충족하는 사람 네 명 중 한 명(5,100만 명 이상)이 유권자 등록을 포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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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권을 박탈하려는 시도들은 이중 효과를 발휘한다. 이런 시도들이 성공하면 그만큼 유권자들의 의견은 무시된다. 게다가 모든 유권자가 효과적으로 투표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오래된 원칙을 뒤집으려는 시도를 확인하면서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정치 시스템에 대한 환멸감이 강화되고 정치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의식이 커지게 된다. - P250

 선거권을 박탈하기 위한 시도들, 정치 시스템과 경제 시스템이 불공정하다는 인식, 그리고 상위 계층에게 장악된 언론이 정보의 흐름을 좌우하고 있다는 인식, 과도한 정치자금 기부 관행 등을 통해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금권의 힘 등은 정치 시스템에 대한 일반인들의 환멸감을 강화한다. 환멸감은 특히 하위 계층의 정치 참여를 위축시킨다는 점에서 노골적인 선거권 박탈 시도들과 마찬가지로 상위 계층에게 유리한 결과를 몰아준다. 이런 상황은 상위 1퍼센트의 부유층과 그들이 가진 돈이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를 넓히고, 그 결과 정치에 대한 불신과 환멸감은 더욱 강화된다. 이러한 환멸감 때문에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하게 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든다. 또한 사람들을 투표소에 나오게 하려는 노력이 상위 계층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사람들에게 집중되기도 한다. - P255

지금 적용되고 있는 세계화의 규칙은 미국의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아마도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가 세계화 체제의 효율성 향상에도, 공정성 향상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식의 세계화 규칙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아넣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또 다른 세계를 이룰 수있다. 미국의 경제와 민주주의 양쪽 모두에게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세계화를 관리할 수 있는 대안은 분명히 존재한다. <아무런 규제가 없는> 세계화는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아무런 규제가 없는 시장이 미국 경제에 얼마나 큰 위협이 되는지, 그리고 막강한 힘을 가진 소수 계층이 아니라 국민 <대다수>에게 이익을 돌려주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길들여야 하는지를 확실히 깨달았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계화도 길들일 수있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보존하고, 현재의 심각한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을 막고, 미국의 세계적인 영향력을 지속시키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세계화를 길들여야 한다. - P268

심리학 연구의 두 번째 중요한 주장은 개인이 기존의 신념에 부합하는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과 그렇지 않은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다는것이다. 신념에 부합하는 정보는 기억에 새겨지고, 적절한 것으로 여겨지며, 신념을 강화한다. 신념에 부합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되거나 쓸데없는것으로 치부되거나 잊힌다. 이런 왜곡을 <확증 편향confirmatory bias>이라부른다.
이 과정에서 신념이 강한 지속력을 발휘하는 <허구의 평형 상태equili-brium fictions>가 나타날 수 있다. 개인이 정보를 인지하고 처리할 때 그의눈에는 자신의 신념에 완전히 부합하는 증거만 들어오기 때문이다. - P276

18믿음이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경제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은 자연과학과는 다르다. 원자의 운동 방식에 관한 믿음은 원자의 실제적인 운동 방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경제 시스템이 움직이는 방식에관한 믿음은 그 실제적인 움직임에 영향을 미친다. 억만장자 금융업자인조지 소로스는 이런 현상을 <재귀성reflexivity>이라고 불렀는데, 그가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이유는 이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위대한 경제학자이자 뛰어난 투자자로 이름을 날렸던 케인스는 시장을 미인선발 대회에 비유했다. 남들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사람이 미인 선발 대회의 우승자가 된다.
시장이 스스로 현실을 창조하는 경우도 있다. 시장이 효율적이며 정부규제는 효율성을 저해할 뿐이라는 인식이 일반화되어 있으면, 정부는 규제를 걷어 낼 가능성이 높고, 정부 규제 완화는 시장의 실제적인 행동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최근 경제 위기 때 규제 완화 정책이 실시된 이후의 시장상황은 효율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이의 해석을 둘러싸고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우파는 외견상으로 드러난 시장실패를 정부의 탓으로 돌리려 했다. 그들은 문제의 원인은 하위 계층의 주택소유를 장려했던 정부의 노력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은 보수권에서는 일반화되어 있지만, 그 근거를 평가하려는 진지한 시도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런관점은 그다지 타당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시장이 결코 나쁜일을 할 수 없고 정부는 결코 좋은 일을 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미미한 타당성을 근거로 자신의 관점이 타당하다는 확신을 굳힌다. 이것 역시 <확증편향>의 한 가지 사례다. - P278

관념이 느리게 변화하는 이유는 관념과 인식은 <사회적 구성물>이라는데 있다. 어떤 신념을 지지하는 나의 생각은 비슷한 신념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나는 국내 여행과 세계 여행을 할 때마다어떤 곳에서는 어떤 관념(이를테면 정부는 필연적으로 효율성에 역행한다는 주장이나 정부가 경기 침체를 야기한다는 주장, 혹은 지구 온난화 논리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일반적인 통념으로 통하고 있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정반대의관념이 <진리>로 여겨지는 현실에 종종 부딪히곤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각각의 관념이 지닌 증거를 직접 검토하지 않는다. 설사 시간적 여유가 있다 해도 지구 온난화의 증거를 평가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에불과하다. 그러나 자신이 이야기를 나누고 신뢰하는 다른 사람들이 특정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 신념이 타당하다는 확신을 강화한다.
사회적 구성물인 관념과 인식은 개인의 세계관에도 영향을 미친다. 인종 및 계급 등의 차별 의식이 용인되는 사회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회도 있다. 하지만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인종 혹은 계급을 차별하는 <관념>은 현실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뿐 아니라 그 영향력이 장기적으로 지속되기도 한다.
사회는 특정한 신념에 <갇혀> 있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신념 변화가 충분히 이루어져야만 개인의 신념 변화가 이루어지고, 다른 사람들의 신념이 변하지 않으면 <개인>의 신념 변화는 이루어지지않는다.
관념과 인식을 사회적 구성물로 파악하면 사회적 신념이 상당히 빠르게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관념을 받아들이는 시람들이 많아지면 티핑 포인트 tipping point에 이를 수 있다. 이때 그 관념은 새로이 출현한 <현실적인 사회적 구성물〉, 즉 새로운 일반적 통념이 된다. - P286

문제는 물건이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듯이, 관념도 시장에서 거래될 수있다는 점이다. 정책을 뒷받침하는 관념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현대 마케팅 이론은 인식을 형성하는 기술과 학문을 가르친다. 풍족한 자원을 가진사람들(부자들이 압도적인 다수를 이룬다)은 인식을 형성하는 데 투자할 자원을 가지고 있다.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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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엮으면서 

재작년 가을 어느 사사로운 모임에서 이재형 선배가무슨 말 끝에 "저 이 형이 여운형 선생을 잘 알아"라고말한 적이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신경림 선생이 그 후나더러 동양 선생의 전기를 한번 써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보다 더 적임자가 있을 텐데요" 하고 일단 사양하는 입장을 취했다. 며칠 후 신 선생은 또다시꼭 써보라고 간곡하고도 격려에 찬 말씀을 하시지 않는가. 신 선생께서 모처럼 두 번씩이나 말씀하시는 것을 사양한다는 것은 예의에도 어긋난다고 생각돼서 미력을 무릅쓰고 써보겠다고 대답했다.
몽양의 전기를 쓰라는 말은, 실은 나에게 있어서 생에 가장 벅찬 감격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필을 주저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모양의 정치적 활동에는 전혀 관여한 일이 없었고 다만 문학 서생으로서 옆에서 몽양을 바라만 보았기 때문이다. 해서 몽양 전기의 필자로는 정치 일선에서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쟁쟁하고도 당당한 당대의 독립투사나 학자 중의 누군가가 의당 붓을 들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해서였다. 한데 그 투사 그 학자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답은 허망할 수밖에 없다. 혹은 작고했고, 혹은 행방불명이 됐고, 혹은 풍진 속 깊숙이 가물거리는 촛불일 게고… 다만 두산 이동화 선생만이 홀로 건재할 뿐이 아니던가. - P27

역사는 흐른다

몽양 여운형(呂運)이 살다간 61년의 세월은 조선민족 근현대사에서 망국-식민-분단의 시작이라는 비운의 소용돌이 한복판이었다. 여운형이 태어난(1886) 무렵의 나라 형편은 극도로 어수선했다.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직후라면 짐작이 가고도 남지 않겠는가. - P35

1905년 미국·영국의 지지를 얻은 일본은 무력한 국왕과매국 각료 을사오적(李完用·李夏榮·李根澤·李址鎔·權重顯)을 협박하여 보호조약을 강제 체결함으로써 조선의 국권을 유린하였다. 이러한 망국의 사태에 직면하여 민영환이 동포에게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는 등 항일 국권회복운동은 개화 · 계몽사상가들의 언론활동과 애국적 유생들의 상소 및 분신의 항거를 도화선으로 치열하게 전개되어갔다. 광범위한 대중이 국권회복을 위한 반일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 몸을 던졌다.
여운형 역시 일본의 침략으로 국권을 박탈당한 민족현실에 통분해 마지않았다. 그는 평생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며 민영환의 유서를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암송했다고 한다.

아아, 나라와 국민의 치욕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우리국민은 향(向) 생존경쟁 속에서 전멸할 것이런가?
그러나 살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죽게 되고 죽음을 기하는 자는 살아나갈 길이 필연코 있을 것이니, 국민 여러분이 이 이치에 어두우리까. 영환 이 몸이 죽음으로써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이천만 형제 동포 여러분께 사죄하나니, 영환 이 몸이 비록 죽는다 하나 영혼은 살아 있어 반드시 국민 제군을 지하에서 도울 것이다. 동포 형제는 더욱 분려(奮勵)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하고 학술을 닦아 마음과 힘을 합하여서 다시금 우리의 자유 독립을 찾을진대, 죽은 이 몸도 저 세상에서 기쁨을 금치 못하리니, 아아 동포여 조금도 실망을 말지어다. 이에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 앞에 결별을 고하노라. - P57

이 당시 여운형은 가정형편상 직업을 갖기 위해서 흥화학교를 그만두고 취직이 보장되는 관립 우체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을사조약에 따라 일본이 통신원을 장악하게 되자, 우체학교도 저절로 일본인 관리하에 들어갔다. 여운형은 졸업을 한 달 앞두고 우체학교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졸업 후에는 월 27원을 받을 수 있는 관리로서의 길이 약속된 자리였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 보장의 탄탄대로를 단숨에 박차버린 것이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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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때, 그는 침대 위에서 그레고르 잠자로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반듯이 누운 자세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안의 어둠침침함에 눈이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보아하니 그것은 어디에나 흔히 있는 지극히 평범한 천장이었다. 원래는 흰색이나 연한 크림색 계열로 칠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몰고 온 먼지와 때 탓에 이제는 상해가는 우유를 떠올리게 하는 색으로변했다. 장식도 없고 이렇다 할 특징도 없다. 주장도 메시지도없다. 천장으로서의 구조적인 역할은 일단 무난하게 해내고 있으나, 그 이상의 의욕은 찾아볼 수 없다. - P275

"그나저나 이상한 일이죠." 아가씨는 사려 깊게 말했다. "세계자체가 이렇게 무너져가는 판에 고장난 자물쇠 같은 걸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그걸 또 착실히 고치러 오는 사람도 있어요. 생각해보면 참 이상야릇하다니까요. 그렇죠? 하지만 뭐, 그게 맞는지도 모르겠어요. 의외로 그런 게 정답일 수 있어요. 설령 세계가 지금 당장 무너진다 해도, 그렇게 자잘한 일들을 꼬박꼬박 착실히 유지해가는 것으로 인간은 그럭저럭 제정신을 지켜내는지도 모르겠어요." - P308

"무슨 전화야? 누가 죽었어?" 아내가 물었다.
"아무도 죽지 않았어. 잘못 걸려온 전화야." 나는 말했다. 몹시 졸리다는 듯이 느릿한 목소리로.
물론 그녀는 믿지 않았다. 내 목소리에 죽은 자의 기척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죽은 자가 불러일으키는 동요는 강력한 감염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미세한 떨림이 되어 전화선을타고 와 말의 울림을 변형시키고, 세계를 그 진동에 동기화한다.
하지만 아내는 더는 무어라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둠 속에 누워 그곳에 깔린 정적에 귀를 기울이며 각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 P318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그날은 아주 작은 예고나 힌트도 주지 않은 채, 예감도 징조도 없이 노크도 헛기침도 생략하고 느닷없이 당신을 찾아온다. 모퉁이 하나를 돌면 자신이 이미 그곳에 있음을 당신은 안다. 하지만 이젠되돌아갈 수 없다. 일단 모퉁이를 돌면 그것이 당신에게 단 하나의 세계가 되어버린다. 그 세계에서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로 불린다. 한없이 차가운 복수형으로.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그건 여자 없는 남자들이 아니고는 이해하지 못한다. 근사한 서풍을 잃는 것. 열네 살을 영원히 -십억 년은 아마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리라-빼앗겨버리는 것. 저멀리선원들의 쓸쓸하고도 서글픈 노랫소리를 듣는 것. 암모나이트와실러캔스와 함께 캄캄한 바다 밑에 가라앉는 것. 한밤중 한시가넘어 누군가의 집에 전화를 거는 것. 한밤중 한시가 넘어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는 것. 지와 무지 사이 임의의 중간지점에서 낯선 상대와 만날 약속을 하는 것. 타이어 공기압을 측정하며 메마른 길바닥에 눈물을 떨구는 것. - P327

어쨌거나 당신은 그렇게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눈 깜짝할사이다. 그리고 한번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어버리면 그 고독의 빛은 당신 몸 깊숙이 배어든다. 연한 색 카펫에 흘린 레드 와인의 얼룩처럼, 당신이 아무리 전문적인 가정학 지식을 풍부하게갖췄다 해도, 그 얼룩을 지우는 건 끔찍하게 어려운 작업이다. 시간과 함께 색은 다소 바랠지 모르지만 얼룩은 아마 당신이 숨을 거둘 때까지 그곳에 어디까지나 얼룩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얼룩의 자격을 지녔고 때로는 얼룩으로서 공적인 발언권까지 지닐 것이다. 당신은 느리게 색이 바래가는 그 얼룩과 함께, 그 다의적인 윤곽과 함께 생을 보내는 수밖에 없다.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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