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때, 그는 침대 위에서 그레고르 잠자로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반듯이 누운 자세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안의 어둠침침함에 눈이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보아하니 그것은 어디에나 흔히 있는 지극히 평범한 천장이었다. 원래는 흰색이나 연한 크림색 계열로 칠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몰고 온 먼지와 때 탓에 이제는 상해가는 우유를 떠올리게 하는 색으로변했다. 장식도 없고 이렇다 할 특징도 없다. 주장도 메시지도없다. 천장으로서의 구조적인 역할은 일단 무난하게 해내고 있으나, 그 이상의 의욕은 찾아볼 수 없다. - P275
"그나저나 이상한 일이죠." 아가씨는 사려 깊게 말했다. "세계자체가 이렇게 무너져가는 판에 고장난 자물쇠 같은 걸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그걸 또 착실히 고치러 오는 사람도 있어요. 생각해보면 참 이상야릇하다니까요. 그렇죠? 하지만 뭐, 그게 맞는지도 모르겠어요. 의외로 그런 게 정답일 수 있어요. 설령 세계가 지금 당장 무너진다 해도, 그렇게 자잘한 일들을 꼬박꼬박 착실히 유지해가는 것으로 인간은 그럭저럭 제정신을 지켜내는지도 모르겠어요." - P308
"무슨 전화야? 누가 죽었어?" 아내가 물었다. "아무도 죽지 않았어. 잘못 걸려온 전화야." 나는 말했다. 몹시 졸리다는 듯이 느릿한 목소리로. 물론 그녀는 믿지 않았다. 내 목소리에 죽은 자의 기척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죽은 자가 불러일으키는 동요는 강력한 감염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미세한 떨림이 되어 전화선을타고 와 말의 울림을 변형시키고, 세계를 그 진동에 동기화한다. 하지만 아내는 더는 무어라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둠 속에 누워 그곳에 깔린 정적에 귀를 기울이며 각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 P318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그날은 아주 작은 예고나 힌트도 주지 않은 채, 예감도 징조도 없이 노크도 헛기침도 생략하고 느닷없이 당신을 찾아온다. 모퉁이 하나를 돌면 자신이 이미 그곳에 있음을 당신은 안다. 하지만 이젠되돌아갈 수 없다. 일단 모퉁이를 돌면 그것이 당신에게 단 하나의 세계가 되어버린다. 그 세계에서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로 불린다. 한없이 차가운 복수형으로.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그건 여자 없는 남자들이 아니고는 이해하지 못한다. 근사한 서풍을 잃는 것. 열네 살을 영원히 -십억 년은 아마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리라-빼앗겨버리는 것. 저멀리선원들의 쓸쓸하고도 서글픈 노랫소리를 듣는 것. 암모나이트와실러캔스와 함께 캄캄한 바다 밑에 가라앉는 것. 한밤중 한시가넘어 누군가의 집에 전화를 거는 것. 한밤중 한시가 넘어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는 것. 지와 무지 사이 임의의 중간지점에서 낯선 상대와 만날 약속을 하는 것. 타이어 공기압을 측정하며 메마른 길바닥에 눈물을 떨구는 것. - P327
어쨌거나 당신은 그렇게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눈 깜짝할사이다. 그리고 한번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어버리면 그 고독의 빛은 당신 몸 깊숙이 배어든다. 연한 색 카펫에 흘린 레드 와인의 얼룩처럼, 당신이 아무리 전문적인 가정학 지식을 풍부하게갖췄다 해도, 그 얼룩을 지우는 건 끔찍하게 어려운 작업이다. 시간과 함께 색은 다소 바랠지 모르지만 얼룩은 아마 당신이 숨을 거둘 때까지 그곳에 어디까지나 얼룩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얼룩의 자격을 지녔고 때로는 얼룩으로서 공적인 발언권까지 지닐 것이다. 당신은 느리게 색이 바래가는 그 얼룩과 함께, 그 다의적인 윤곽과 함께 생을 보내는 수밖에 없다.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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