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엮으면서 

재작년 가을 어느 사사로운 모임에서 이재형 선배가무슨 말 끝에 "저 이 형이 여운형 선생을 잘 알아"라고말한 적이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신경림 선생이 그 후나더러 동양 선생의 전기를 한번 써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보다 더 적임자가 있을 텐데요" 하고 일단 사양하는 입장을 취했다. 며칠 후 신 선생은 또다시꼭 써보라고 간곡하고도 격려에 찬 말씀을 하시지 않는가. 신 선생께서 모처럼 두 번씩이나 말씀하시는 것을 사양한다는 것은 예의에도 어긋난다고 생각돼서 미력을 무릅쓰고 써보겠다고 대답했다.
몽양의 전기를 쓰라는 말은, 실은 나에게 있어서 생에 가장 벅찬 감격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필을 주저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모양의 정치적 활동에는 전혀 관여한 일이 없었고 다만 문학 서생으로서 옆에서 몽양을 바라만 보았기 때문이다. 해서 몽양 전기의 필자로는 정치 일선에서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쟁쟁하고도 당당한 당대의 독립투사나 학자 중의 누군가가 의당 붓을 들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해서였다. 한데 그 투사 그 학자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답은 허망할 수밖에 없다. 혹은 작고했고, 혹은 행방불명이 됐고, 혹은 풍진 속 깊숙이 가물거리는 촛불일 게고… 다만 두산 이동화 선생만이 홀로 건재할 뿐이 아니던가. - P27

역사는 흐른다

몽양 여운형(呂運)이 살다간 61년의 세월은 조선민족 근현대사에서 망국-식민-분단의 시작이라는 비운의 소용돌이 한복판이었다. 여운형이 태어난(1886) 무렵의 나라 형편은 극도로 어수선했다.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직후라면 짐작이 가고도 남지 않겠는가. - P35

1905년 미국·영국의 지지를 얻은 일본은 무력한 국왕과매국 각료 을사오적(李完用·李夏榮·李根澤·李址鎔·權重顯)을 협박하여 보호조약을 강제 체결함으로써 조선의 국권을 유린하였다. 이러한 망국의 사태에 직면하여 민영환이 동포에게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는 등 항일 국권회복운동은 개화 · 계몽사상가들의 언론활동과 애국적 유생들의 상소 및 분신의 항거를 도화선으로 치열하게 전개되어갔다. 광범위한 대중이 국권회복을 위한 반일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 몸을 던졌다.
여운형 역시 일본의 침략으로 국권을 박탈당한 민족현실에 통분해 마지않았다. 그는 평생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며 민영환의 유서를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암송했다고 한다.

아아, 나라와 국민의 치욕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우리국민은 향(向) 생존경쟁 속에서 전멸할 것이런가?
그러나 살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죽게 되고 죽음을 기하는 자는 살아나갈 길이 필연코 있을 것이니, 국민 여러분이 이 이치에 어두우리까. 영환 이 몸이 죽음으로써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이천만 형제 동포 여러분께 사죄하나니, 영환 이 몸이 비록 죽는다 하나 영혼은 살아 있어 반드시 국민 제군을 지하에서 도울 것이다. 동포 형제는 더욱 분려(奮勵)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하고 학술을 닦아 마음과 힘을 합하여서 다시금 우리의 자유 독립을 찾을진대, 죽은 이 몸도 저 세상에서 기쁨을 금치 못하리니, 아아 동포여 조금도 실망을 말지어다. 이에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 앞에 결별을 고하노라. - P57

이 당시 여운형은 가정형편상 직업을 갖기 위해서 흥화학교를 그만두고 취직이 보장되는 관립 우체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을사조약에 따라 일본이 통신원을 장악하게 되자, 우체학교도 저절로 일본인 관리하에 들어갔다. 여운형은 졸업을 한 달 앞두고 우체학교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졸업 후에는 월 27원을 받을 수 있는 관리로서의 길이 약속된 자리였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 보장의 탄탄대로를 단숨에 박차버린 것이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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