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에게는 매우 보편적인 밤길의 공포를 보통의 남성들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들을 키우면서 여러번 느꼈다. 밤늦게 다니지 말라고 잔소리할 때마다 "네네 어머님" 하며 농담으로 받던 아들이 어느 날은 엉뚱한 질문을 했다. "엄만 밤길이 그렇게 걱정돼? 내가 길이라도 잃어버릴까봐?" 여자인 엄마가 평생에 걸쳐 느껴왔던 공포심을 아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통의 남성이 밤길을 두려워하지 않는것은 (성)폭력의 공포를 상상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것은 성별 상상력의 차이가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위험도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명확히 말할 필요가 있겠다. 언젠가 선배 언니의 20대 딸이 이런 말을 했다. "카페에서 잠깐 자리를비울 때 비싼 노트북도 그냥 펼쳐두고 나가잖아요. 절도 피해를 걱정해야 하는 세상이 더이상 아니니까요. 그런데 왜 여성들은 늘 범죄 피해를 걱정하며 살아야 하죠? 내가 노트북만큼도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P207

한 나라의 인권의 수준을 가늠하는 다양한 지표들이 있다.
미국 서부의 한 도시는 강물로 회귀하는 연어의 수를 인권의 지표로 삼는다고 한다. 연어가 회귀할 수 있는 강이 있는 도시라면 사람이 살기도 좋은 인권 도시가 분명할 것이다. 나에게 인권 지표를 개발하라고 한다면, 숙식 문제를 걱정하지 않는 시인의 수와 막춤일망정 일주일에 한번 이상 춤을 추는 사람들의 숫자를 여기에 포함시키고 싶다. 이러한 권리를 ‘표현의 자유‘라든지 ‘문화 향유권‘ 같은 거창한 말로 설명하지 않고 ‘걱정 없이 춤추고 시 쓰며 살 권리‘라고 표현한다면 인권이 얼마나 쉽고도 다정하게 들릴까? 인권위법의 인권의 정의 역시 이렇게쉽게 고치고 싶다.
"시를 쓰는 것이 인권이다. 춤출 수 있어야 인권이다." - P226

나는 생각해본다. 그 존엄을 위한 투쟁이 이제 인간이 아닌다른 동물의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하는 때가 아닌가. 20년 가까이 인권으로 밥벌이해오면서도 동물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었다. 온 마음을 다해 나를 사랑해준 한 동물로 인해 겨우 알아차리게 되었다. 독일의 철학자 페터 비에리가 삶의 격』에서 말한 것처럼 존엄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남을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나에게 어떻게 대하는가의 문제라면, 그것은 반드시 사람과 사람 사이의관계 맺음에 한정될 수 없고 사람과 다른 동물, 자연과의 관계맺음을 통해 확장된다고 생각한다. 좋은 인간을 넘어 좋은 동물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삶을 가장 존엄하게 살아가는방법이 아닐까. - P235

점심 무렵 인권위옆 작은 공원에 비둘기 밥을 주는 여인이나타난다. 비둘기들은 횡단보도 너머에 여자가 서 있을 때부터구구구 소리를 내며 공원 앞으로 모여들었다. 평화의 상징에서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존재가 된 비둘기들, 나는 아무 감정 없이 새들을 지나치곤 했는데, 어느 날 뜨거운 아스팔트 위의 그 붉은 발을 보고 말았다. 발톱이 뜯겨나가 상처투성이가 된 비둘기의 붉은 발은 자동차 타이어도 녹일 듯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위에서 차와 인파를 피해 먹이를 찾다가 잠시 쉴 곳을 찾아 날아올랐다. 우리가 그러하듯,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은 온힘을 내서 살아간다. 비둘기의 붉은 발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우리는 다른 동물과 자매가 되는 존재일 수 없을까?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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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의 투옥과 입국은 생각해볼 만한 문제이다. 몽양은 끝끝내 해외에 있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국내에 들어와야 하는가? 몽양은 해외에 혁명의 뿌리를 깊이 박았다.
해외에 있는 애국청년들은 다 몽양의 동지였다. 비록 산하가 가로막혀 서로 얼굴은 못 볼지라도 성기(聲氣)가 상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국내에 들어와 국내에도 독립운동의 뿌리를 박을 필요가 있지 않은가.
당시 국내에 있는 소위 지사(志士)들은 거의가 무위호신(無爲護身)에만 급급해 있었다. 몽양마저 그런 짓이나 하려면 들어올 필요가 없다. 그러나 몽양은 열화 속에든 홍수 속에든 뛰어들어 투쟁할 기개와 실천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의 폭염에 사막이 된 이 땅에서 샘물을 파내고, 국혼이 고목같이 말라가던 그때에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일은 모양 같은 인물이 아니고는 불가능했다.
이와 같이 당시 객관적 정세로 보아 몽양의 입국은 꼭 필요했고, 입국하되 투옥이라는 극적 상황으로 입국한 것은 침체해가는 독립투쟁에 하나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조선독립운동 면에서나 또한 독립투사로서의 몽양자신에게나 중요한 계기요, 사건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P198

이토 검사와의 본격적인 문답을 한두 가지 적어본다.
"피고가 생각하고 있는 조선독립운동이라는 것은 조선에서 행해지는 일본의 정치가 나빠서 조선을 일본 정치기반에서 이탈시키려는 것인가?"
"그렇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조선민족에게도 인격이 인정되어야 한다. 즉 사람에게 인격이있는 것처럼 민족에게도 인격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조선의 독립은 꼭 필요불가결한 것이니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해서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정치는 너무나 나쁘다. 조선민족으로부터 빼앗아 가는 정치를 하고 있으니 조선민족은 살기 위해서 부득이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저 길가에서 피로곤비한 민중을 보라, 빈부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가 절박한…아, 감개무량하다."
"피고는 장래에 어떠한 태도로써 조선에 임할 것인가?"
"역시 민족해방운동에 정진할 것이다. 이것도 안 된다면 할 수 없이 향리로 돌아가 호미를 잡을 수밖에." - P201

문 : 그대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여하한 견해를 갖는가?
답 : 마르크스의 이론에는 찬성하지만 그대로의 실행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오. 특히 조선 같은 경우는 폭력으로 실행할 바가 아니라 믿소. 마르크스주의는 러시아에서는 레닌주의가 되고, 중국에서는 삼민주의가 되어 있지만,
조선에서는 그 사정을 러시아나 중국과는 달리하고 있다.
고 생각하오.
문 : 그대는 레닌 등의 동방정책, 즉 민족해방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갖는가?
답 : 나는 직접 모스크바에서 레닌과 만났소만 만나기전까지는 사실 러시아가 조선에다 공산주의를 그대로 선전하려 들지 않나 적이 걱정하였으나 만나본즉 그는 조선의 특수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소. 조선의 교통과 국어를묻기에 교통은 하루에 전통될 정도, 국어는 한 개 국어라하니까 레닌은 ‘매우 좋다. 조선은 전에는 문화가 발달했지만 목하는 민도가 낮으므로 곧 공산주의를 실행하려 드는 것은 잘못이다. 지금은 민주주의부터 실행함이 현명할것이다‘고 말했는데 내 소신에 합치되매 나는 매우 만족하였소.
문 : 그러면 그대는 자본주의를 바라는가?
답 : 이상으로는 공산주의를 찬성하오만 실행문제에선 조선에 그대로 가져올 수 없다고 보오. 조선엔 먼저 자본주의를 발달시키고 그 다음에 공산주의를 실행해야 될 것이오. 러시아에서도 신경제정책이니 5개년 계획이니 하고 시대와 장소에 적응시켜 고쳐가면서 실행하는 것이오. - P211

몽양은 독방에서 그물을 뜨되 그저 기계적으로 막연히 뜬것이 아니었다. ‘임연선불여퇴이결망(臨淵羨魚不如退而結網)‘이라는 한시를 생각하며 떴다. 을사조약 직후 몽양이 상을 당해 향리에 내려가서 청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칠 때도이 한시를 생각하며 그대로 실천했던 것이다. "연못에 가서 고기를 탐내는 것은 물러가서 그물을 뜨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이 한시는 준비의 중요성을 가르쳐주고 있다. - P219

출옥 8개월 만인 1933년 3월 16일, 몽양은 중앙일보 사장직에 취임하게 된다. 몽양은 취임사에서 다음처럼 소감을말했다.

"세계의 풍운이 정히 급박한 이때에 내 감히 이러한 중책을 지게 되니 스스로 난감한 생각을 금할 수 없다. 본시우리의 언론기관이란 그 경영의 간난함이 천인현애 (千인懸崖)에 달리는 것보다도 오히려 더 심한 바이거늘, 하물며 오늘날 이 ㅔ굽이에 당해서일까 보냐•••." (『중앙일보』,
1933년 3월 17일자에서) - P227

최린은 당시 독립운동을 하지 말고 일본인 밑에서 편안히살자는 시중회(時中會)라는 정치단체를 만들어가지고 전국을 순회강연하며 돌아다녔다. 그 당시 함흥고보 1학년이었던 필자는, 동명극장에서 아일랜드가 독립하지 않는 이유를견강부회하던 최린의 모습과 목소리가 50년이 지난 오늘에도 눈에 선하고 귀에 쟁쟁하다.
조선중앙일보가 시중회를 하도 공격하자 하루는 최린이몽양을 찾아왔다.
"사회가 너무 침체하기에 이러한 정치운동을 일으킨 것이고, 내 주의도 조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니 너무 공격을 말아달라."
몽양은 반문했다.
"최린 씨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때와는 아주 달라졌다.
그대가 하는 일이 참으로 조선을 위하는 것이라면 중앙일보의 공격쯤으로 일이 아니 될 리가 없다. 자신이 있으면 용진할 뿐이다. 내 공격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내 공격을 방해로 볼 까닭도 없으며, 따라서 그런 주문을 할 필요도 없지않은가?" - P235

몽양은 우리나라 역대인물 중에서 문무를 겸한 이순신 장군을 가장 좋아했다. 1935년 봄 그 누구도 감히 선뜻 손을댈 수 없었던 그 무렵, 현직 신문사 사장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충무공 묘역 정화에 나섰다. 황폐한 묘소 토역을 말끔히마치고 나무를 심고 이각경 글씨로 된 장군의 송덕비를 세워 장군의 위업을 기리고 후손들을 위로하였다.
1936년 5월, 휘문고보 5학년의 18세 소년인 김성집은 일본 동경에서 열린 제1회 전 일본 역도대회 겸 베를린올림픽 파견 선발대회에 참가하여 미들급에서 라이트급의 김용성과 함께 당당 우승을 차지하여 당시 신문들을 떠들썩하게했다. 김 선수는 추상이 특기로서 추상과 인상 두 종목만의점수로도 차점자 일본 선수의 세 종목 점수보다 많았다고하니 당시 김성집의 역도 실력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조선에 돌아오자, 김 선수는 제일 먼저 몽양을 찾아 인사를 드렸다.
"여선생이 그렇게도 좋아하실 수 없어요. 만면에 웃음을띠시고 어쩔 줄을 몰라해요. 그 좋아하시던 여 선생 모습을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날 몽양, 서상천, 김용성과 넷이서 찍은 기념사진을 6.
25 때 잃어버렸다면서 김성집은 여간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는 모양이 8. 15 해방 후 초대 조선체육회장으로 있을때, 서울운동장 등에서 여러 차례 연설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1947년 4월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 선수가 우승의 영광을 안고 돌아왔을 때, 군정청(중앙청)앞 광장 환영대회에서 행한 연설은 가장 감명 깊었다고 회고했다.
1947년 8월 3일, 몽양장례식 때 김성집 씨는 손기정 · 석진경 · 이제황 · 김유창·정상윤·이성구 · 이순재 등 체육인과 함께 흰 상복을 입고 고인의 영구를 호위, 운구와 하관을 담당했다며 못내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 P246

손기정 선수가 세계 제패의 역사적인 우승 테이프를 끊은것은 베를린 시간으로 1936년 8월 9일 오후 3시 지나서이고우리나라 시간으로는 10일 꼭두새벽이었다. 8월 10일자 아침 『조선중앙일보』는 손기정, 마라톤 세계 제패」의 감격적인 호외와 그 뒷면에 실린 심훈(沈薰)의 「오오, 대한남아여!」라는 즉흥시가 독자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조선중앙일보의 운명의 시각은 다가오고야 말았다.
"베를린에서 돌아와서 여선생을 만나니 선생이 뭐라고말씀하셨어요?"
"어디 만날 수 있어야다. 왜놈들이 통 못 만나게 해서리.
몇 달 후에 만났디랬지. 감격이 김빠진 후에, 여 선생도 신문사를 그만둔 후고."
47 년 전을 회상하는 왕년의 패자 손기정 씨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 P256

"이 사건은 일본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일·영 · 미가 중국에서 장거리 경주를 하는데 제1차대전 전까지는 영국이 패권을 잡았고, 전쟁 중에는 일본이 잡았고, 전쟁 후에는 미국이 패권을 잡아 미국의 차관이 단연 증가하니 일본은 자기가 독점하지 못한 데 분개하여 노구교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독점은 영 · 미가 절대 불허한다. 이때에 양국은 반드시 합작하여 일본에 대항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대요소인 원료시장 · 소비시장 · 투자시장, 이 세 가지가 중국에는 구비되어 있다. 이런 좋은 시장인 중국이 경제적 자립을 못하였으니 저기압이 생긴 곳에 공기가 밀려들듯 자본주의 세력은 이 저기압 시장으로 밀려들 것이고 어느 일국의 독점은 불가능한 것이다. 각국이 침입하는 중에 일국의 세를 제지하고 중국은 갱생의 길을 찾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국가인 미국이나 영국이 이런 시장을 어느 한 나라의 독점에 맡겨둘 리가 없는데 더욱이 저들이 만만히 보고 있는 일본국의 독점이야말로 허용할 리가 절대 없다. 영미는 반드시 중국의 운동을 빌려가지고 일본과 싸울 것이다. 미국 혼자서도 일본을 대항하기에 넉넉할 터인데 황차 삼국이리요. 그러므로 일본은 자멸하고 조선은 해방될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기다리고 준비하여야 한다." ( 동양의 구술과 『여운형 투쟁사』에서) -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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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역학자 김승섭은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인권침해와 차별의 고통이 어떻게 사람을 아프게 하는지 과학적 통계와 연구 자료로 증명해 보인다. ‘말하지 못한 상처‘는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우리 몸에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새겨진다고 말한다. 노동자가 겪는 차별의 경험은 사람을 아프게 했다. 차별을 경험한 이들이 그렇지않은 사람에 비해 건강이 좋지 않음은 물론이고, 그중에서도 차별 경험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타인에게 말하지 못한 집단(주로 여성)이 더 많이 아픈 것으로 확인되었다.  - P84

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 앞에서 1인시위를 하던 노인들이 있었다. 민주정부가 들어서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대통령에게 호소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안 대부분이 수사기관과 사법기관, 정부의 각종 민원기관을 두루 거친 지극히 개인적인 민사 분쟁으로 대통령이 와도 해결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지만, 노인들은 간절한 마음에 매일 눈비 맞으며 청와대 앞에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와대 관계자가 1인시위하는노인들을 은밀히 불러 만찬을 대접하고 대통령의 이름이 적힌흰 봉투를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나의 진정인 중 한분이 그날받은 흰 봉투를 소중히 꺼내 보여주면서 "대통령이 주신 마음"이라고 했다. 하얀 봉투 속에는 빳빳한 1만원권 신권 열장이 들어 있었다. 백일기도하는 마음으로 청와대 앞을 찾는 노인들에게 대통령으로서 해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배려의 방법이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돈을 보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국가인권위원회 진정·민원접수메일 주소의 아이디는 호소(hoso@humanrights.go.kr)다. 인권위 민원 메일 주소를 정하는 회의에 참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누구나 무엇이든 억울한 일이있으면 호소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메일 아이디를 호소로 정했다. 비록 인권 팔이라는 욕을 먹을지라도 더 낮고 어려운 사람들의 호소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호소를 듣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 P103

본격적인 피해자 면담 조사에 앞서 간단한 설문지와 진술서 양식을 돌렸다. 참가자들이 쓴 설문지와 진술서를 정리하면서 나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막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외국인이 쓴 것 같은 글씨체와 잘못된 맞춤법으로 구성된 이상한 문장들이 종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워크숍 내내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하던 그들이 작성한 글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어쩐지 속은 기분이 들었고, 막대한 예산이 사용된 워크숍의 결과가 고작 읽기도 어려운 진술서인가 싶어 속이 상했다. 나의 불만을 눈치 챈 인권활동가가 친절하고도 상냥하게 알려주었다.
"조사관님, 그거 아세요? 농인들이 수어를 배우는 것은 청인들이 영어를 배우는 것과 같아요. 그리고 그들이 글을 쓰고 읽는 건 영어 외에 제2외국어로 독일어나 불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죠. 그러니까 수어로 대화하는 것은 유학도 안 가고 동시통역사가 된 사람과 같은 거예요. 대단하죠? 제아무리 뛰어난 동시통역사도 외국어를 몇개씩 유창하게 구사하기는 어렵지 않나요? 청인의 기준에서 피해자들이 쓴 한글이 서툴고 문법이 틀린 것처럼 보이겠지만, 제2외국어로 그 정도 해냈다면 정말 훌륭한 것 아닐까요?"
불만은 금세 부끄러움이 되었다. - P114

 사건 종결후에 다시 만나 안부를 주고받은 이는 그녀가 처음이었다. 프놈펜 사건은 여러 방면에서 새로운 선례를 남기고 있었다. 카페를 나오는데 그녀가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폭신한 털이 들어 있는 검은색 가죽 장갑이었다. 받을 수 없다고 손사래를 치는 내게 그녀는 말했다. "조사관님, 조사관님의 손이 계속따뜻했으면 좋겠어요. 저에게 손 내밀어주셨을 때처럼요. 그 말을 듣는데 도저히 상자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선물은 여전히 포장 그대로 옷장 서랍에 들어 있다.
나는 겨울이 되면 무슨 연례행사처럼 장갑을 꺼내 껴보곤 한다. 그러면서 한번씩 생각한다. 억울한 사람들의 고통과 용기에 대하여, 진실에 불을 밝히는 낯선 이들의 호의와 선의에 대하여.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바람대로 조사관으로서의 나의손이 여전히 따뜻한지를. 내가 가는 길이 좋은 선례가 되고 있는지를 말이다. - P142

‘아무리 악랄한 범죄자라도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고적법한 절차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 언제부턴가 이 문장 앞에서 자신이 없어진다. 그날 강간 피의자를 향한 분노와 혐오로 부들부들 떨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인권의 피해자들은 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무해한 존재이며, 선량한 시민이거나 무고한 희생자, 억울한 피해자였지만, 현실에서 만난 이들이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때때로 악랄하고 위선적이고 탐욕스러운 존재에가까웠다. 그때마다 나는 놀라고 당황하며, 인권을 보호한다는것에 대한 깊은 회의감에 빠지곤 한다. 인권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사람의 한계일 수도 있고 실제로 인권의 이념과 현실 사이에 까마득한 골짜기가 생긴 탓인지도 모르겠다. 최근 들어 그 골짜기는 더 깊게만 느껴진다. 골짜기 위를 날아다니는 까마귀처럼 관조하듯 세상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 때가 있음을 고백한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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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있으라

아홉 살 때의 일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는 아버지의 지방 발령으로 어느 바닷가 시골 마을로 이사를 가야 했다. 밤늦게 서울에서 출발하는 자동차 뒷좌석에서 아이는 까무룩 잠이 들었고, 아침 햇살이 얼굴을 때려 잠에서 깨었을 때도 여전히 자동차는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하룻밤을 꼬박 달려 도착한 곳은 바닷가 작은 마을에 새로 지어진 단층양옥집이었다.
아이는 그날 처음으로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를 보았다. 바닥이훤히 보일 정도로 투명하게 파란 한려수도의 바다를 때는 여름 방학 시기인 8월이었기에 주변은 온통 푸르렀다. 집 근처의 논과 들판, 산등성이들은 초록이 한창이었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따라 야트막한 집 몇 채만지나가면 바로 맑은 바다가 나타났다. - P12

500만 년의 폭발 순간 이후, 다시 5억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38개의 동물 문에는 하나의 새로운 문도 추가되지 않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수십 억 년 동안에도 제자리걸음이었던 생명체의 새로운 모습들이 이렇게 순식간에 다양하게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새로운 동물문이 추가되지 않은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5억 년 전에 처음 생겨나지금까지 지속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이후 5억 년의 시간 동안 그변화를 능가하는 새로운 변화를 허락하지 않은 굳건한 무언가 말이다.
이처럼 진화상에서 갑작스레 많은 동물 문들이 추가된 것을 ‘캄브리아기의 대폭발‘이라 부른다. 학자들은 저마다 증거들을 해석해 캄브리아기의 생물 대폭발을 일으킨 다양한 가설들을 제시했는데 그중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빛 스위치 이론 Light Switch Thoery‘이다. 빛, 정확히 말해 빛을 식별할 수 있는 기관인 ‘눈‘의 존재가 수많은 생명체를 진화시킨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 P15

하지만 단순히 빛을 느끼는‘ 것과 빛을 이용해 사물을 ‘보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빛을 느끼는 것은 밝음과 어두움을 구별하고 빛과 함께하는 열기를 피부감각으로 느끼는 것에 불과하지만, ‘보는‘ 것은 빛을 이용해 주변 사물의 존재와 위치를 감지하고 상대를 식별할 수 있게한다. 물론 눈이 없어도 소리(청각)나 화학물질(후각과 미각), 혹은 기타다른 감각 장치를 이용해 상대를 식별하고 감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건아니다. 하지만 빛은 그만의 특성이 있다.
지구는 태양에 의해 하루 중 절반은 빛을 받는다. 그리고 빛은 빠르다. 빛은 소리나 화학물질에 비해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먼 거리에서도 상대를 식별할 수 있게 한다. 즉, 타자의 발자국 소리나 냄새가 인지되었을 때는 이미 피하기 힘들 만큼 충분히 가까운 경우가 많지만, 빛을 이용해 상대를 감지하는 건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충분히 가능하다. 멀리서도 상대를 파악해 대응할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 이것이생물체의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했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 P16

삼엽충은 현대의 절지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외부가 단단한 골격으로 덮여 있는 외골격 동물이다. 삼엽충의 외골격 기본 구성물질은 탄산칼슘이었다. 그래서 지구상에 최초로 나타난 눈이 방해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방해석은 투명한 마름모꼴의 결정체로 출토되는 암석으로, 탄산칼슘으로 만들어진 돌이다. 흑연을 이루는 것이 탄소인 것처럼 방해석을 이루는 물질이 바로 탄산칼슘인 것이다. 방해석은투명해서 빛이 잘 투과하는데다 삼엽충 입장에서는 어차피 외골격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하고 있으니 조달하기도 쉬웠을 것이다. 이렇듯 삼엽충은 광물질인 방해석을 이용해 눈을 만들었다. 이건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에게 행운의 요소가 되었다.
사람을 비롯해 대부분의 포유동물의 눈은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고, 단백질은 무르고 변성이 잘 되는 조직이기 때문에 화석으로 남겨지기가극히 어렵다. 하지만 방해석으로 만들어진 삼엽충의 눈은 그 자체가 단단한 구조물이기 때문에 화석으로 남겨지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고, 그 결과 인류는 수억 년 전에 살던 삼엽충의 눈을 원형과 크게 어긋나지않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발견된 삼엽충의 눈은 대부분의 절지동물들이 그렇듯 여러 개의 작은 홑눈이모여 만들어진 겹눈 구조를 띠고 있다. - P19

 즉 각막을 지난 빛은 홍채가 만든 틈, 동공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고 수정체를 통해 굴절된 뒤, 유리체 vitreous body를 통과해 망막에 상을 맺는다. 이렇게 형성된 상은 시각신경을 통해 눈 뒤쪽으로 빠져나가 뇌로 전해지고, 뇌는 이 신호를 읽어 이미지를 해석한다. - P23

19세기 신학자 윌리엄 페일리는 [자연신학 또는 자연현상에서 수립된신의 존재와 속성에 대한 증거]라는 논문을 통해 생물은 신의 의도에 의해만들어졌다고 주장하면서 시계 비유를 들었다. 그는 시계처럼 대상 자체가 정밀하고 복잡한 물체가 결코 저절로 만들어질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시계보다 100만 배 쯤은 더 복잡하고 정밀한 생명의 탄생에는 창조주의 의도적인 설계가 있었을 것이라 유추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주장했다.
특히 페일리의 시계 논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눈‘이다. 각각의 시계에 반드시 시계를 만든 시계공이 존재한다면, 그보다 훨씬 더복잡하고 정교한 눈에는 훨씬 더 정교하고 위대한 창조주나 조물주가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는 직관적으로 쉽게 이해된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애석하게도 우리의 눈이 어떤 식으로 진화되어 왔는지에 대한 증거는 거의 없다. 앞서 말했듯 사람의 눈은 삼엽충의 그것과는 달라서 대부분 화석적 증거로 남겨지기 전에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눈을구성하는 구조물들이 어떤 순서로 나타났는지 직접적으로 볼 수 없다그렇다면 우리 눈은 특정한 설계도에 따라 처음부터 이 상태 그대로 만들어진 것일까? - P29

비록 시야의 확장 분야에서는 사람의 눈이 말이나 토끼보다 못하더라도사람의 시야 효율이 꼭 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 사람의 경우, 눈이 얼굴 전면에 가깝게 존재하는 덕에 시야는 좁지만 대신 두 눈의 시야가 상당 부분 겹쳐지면서 원근감과 입체감의 판별에 있어 매우 유리하다. 눈이 두 개이고 두 눈이 약간이라도 떨어져 있다면 각각의 눈에 들어오는시각 영역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눈앞에 손가락을 하나 세우고 양쪽눈을 번갈아 윙크하듯 감아보면, 눈을 번갈아 뜰 때마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양쪽 눈이 보는 세상은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하나의 대상에 대해 두 개의 상을 형성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각각의눈에 들어온 시각 정보를 합쳐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하게 된다. 양쪽 눈에서 각각 뻗어 나온 시신경이 뇌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로 합쳐지는 이유는 이 때문이며 이렇게 양쪽 시야를 합치는 과정에서 시야에 입체감이더해진다. 사람의 눈은 비록 시야가 넓은 편이 아니지만, 원근감과 입체감을 판별하는 데 매우 탁월하다. - P40

동물들도 말이나 사슴 같은 초식동물은 얼굴 측면에 따로따로 눈이 존재하지만, 사자나 호랑이와 같은 육식동물의 경우 얼굴 전면 중앙부에 두 개의 눈이 빛나고 있다. 이렇게 눈의 위치가 다른 것은 아마도 쫓는자와 쫓기는 자의 숙명 때문일 것이다. 초식동물의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천적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다. 천적이 멀리 있는지 가까이 있는지 따지기에 앞서 일단 천적 - 혹은 천적으로 의심되는 존재 - 이 나타나면 무조건 도망쳐야 살아날 확률이 높다. 따라서 이들은 눈의 위치를 최대한 멀리 떨어뜨림으로써 각각의 눈이 지닌 시야를 최대한으로 확장시키는 방식으로 생존을 도모했다.
반면 육식동물의 경우, 눈앞의 먹잇감이 하나는 백이든 내 발톱으로 움켜쥐기 전까지는 모조리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단순히 보이는 것보다, 대상과의 거리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 그래서 이들은 넓은 시야 대신 좁지만 겹쳐지는 시야를 통해 대상과의 거리감과 입체감을 획득한다. - P44

대부분의 곤충은 여러개의 작은 낱눈이 모인 겹눈 두 개와 세 개의 홑운을 가진다. 하지만 홑눈은 빛의 명암만을 구별할 수 있어 세상을 ‘인식‘한다는 측면에서 진정한 시각을 가진 눈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곤충에게 있어서도 색채, 운동하는 물체에 대한 정보, 입체적 감각등을 담당하는 것은 홑눈이 아니라 겹눈이다. 사실 곤충의 눈이 굳이 겹눈을 이룰 필요는 없다. 곤충의 겹눈을 이루는 낱눈은 비록 크기는 작아도 저마다 키틴질로 이루어진 볼록렌즈 모양의 각막, 유리체, 시세포로이루어진 소망막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조그만 눈이다. 이런 조그만 눈들이 모여서 커다란 눈을 이루게 된다. 하나의 겹눈을 이루는 낱눈의 개수는 종류에 따라 달라서 주로 땅 속에서 살고 냄새로 의사소통을 하는개미의 경우 아홉 개 정도이지만 나비는 1,500개, 꿀벌은 5,000개로 이루어지며, 곤충계의 사냥꾼인 잠자리의 경우 무려 2만8,000개의 낱눈이 모여 하나의 겹눈을 이룬다. 하지만 결국 이들이 형성하는 겹눈의 개수는두 개다. - P47

시력 視力, visual activity가능한 시야 각도‘라고 정의되어 있다. 눈의 인식력은 크게 분리력Separability (서로 떨어진 두 점을 구별할 수 있는 해상력), 가시력Visibility (인식가능한 물체 혹은 점의 최소 크기)뿐 아니라 가독력 Legibility (가장 작은 그림과 문자의 판독력), 판별력Discriminability (시야 내 여러 물체의 상호 관계에 대한 인식력) 등을 포함한다. 다시 말해, 시력이 좋다는 것은 단지 얼마나 작은 것을 볼 수 있느냐 뿐만 아니라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느나. 얼마나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느냐까지 포함한 개념이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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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노 교수는 다음해 1월 중앙공론(中央公論)』이라는 월간잡지에 소위 여운형 사건에 관해서라는 시론(時論)을발표했다. 내용인즉, 양원 의원들이 여운형을 초청한 정부측을 공격하고 나서자 초청자측을 옹호하는 입장을 개진한 것이다. 글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여씨의 주장 가운데는 확실히 하나의 침범하기 어려운 정의의 섬광(閃光)이 보인다. ・・・ 나는 한낱 젊은 신사인그의 견식과 품격에서 드물게 보는 존경할 만한 인격을발견했다. 중국 ·조선·대만 등지의 많은 사람들과 회담했지만, 여운형은 교양 있고 존경할 만한 인격자로서 그중 가장 뛰어난 한 사람이라는 것을 단언한다.

고가, 다나카를 위시한일본 정부 요인들은 모양을 일본까지 초청한 목적을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조선독립운동을 일본 한복판에 선전 확대시킨 꼴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예정되었던 총리대신 하라와의 회견 및 천황과의 대면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 P140

북경호텔에서 의원단 외교부장 포리와 장시간 요담했다.
안창호는 임시정부를 대표해 정치문제를 제언했고, 몽양은 민단장으로 교민들의 독립운동을 말했고, 국내에서 온 장덕준(張德俊)은 국내의 독립운동 현황을 설명했다. 몽양은 한국에 가거든 서울의 이상재에게 전반 사정을 잘 들어보라고권고했다. 특히 몽양은 치욕적 한일합방은 미국에도 책임이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노일전쟁 후까지 한국에 공사를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발언도 없이 공사를 철거했으니 국제도의상 이럴 수가 있느냐고 했다. 금후는 한국만세운동의 진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한국독립에 적극적 원조가 있기를 바란다고 몽양은 힘주어 말했다.
파리강화회의는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원칙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연합국들이 전리품 나눠먹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약소민족들, 특히 한국민족의 실망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 회의에서 제 몫이 적다고 맨 먼저 불만을 표시한 나라가 이탈리아요, 다음으로 나선것이 일본이다. 의외로 강하게 나오는 일본의 태도에 윌슨대통령도 할 수 없이 일단 산동문제에서 일본의 특전을 승인했다.
그러나 하딩이 대통령이 된 후에 일본을 제압할 목적으로1921년 11월에 화부회의를 열기로 하였다.  - P158

후일 몽양은 이때의 일을 ‘고비사막‘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행 소품을 남겼다.

지금까지 인상이 깊은 것은 1921년 11월 하순경에 고비사막에서 10일간이나 야숙(野宿)을 하며 그 사막을 지나던 기억입니다. 고비사막이라고 하면 누구든지 잘 아시겠지만, 그 광막무제(廣漠無際)한 사막을 지나갈 때 밤이면 양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터벅터벅 걸어도 가고, 누워자기도 하였습니다. 고비사막은 북부아시아의 일부요, 더욱이 때가 11월 하순이라 영하 30도나 되어 춥기도 여간이 아니지만, 밤이면 푸른 별들이 누구를 부르는 듯 그아래에 나 홀로 누워 있는 듯 쓸쓸한 사막의 밤은 가장 즐겁고도 유쾌했습니다. 내가 시인이 되었던들 그 웅대한 사막의 밤을 한번 노래해보았을 것입니다. 낮이면  낙타로 사막을 지나가고, 밤이면 양의 가죽을 쓰고 그날그날을지나던 그때 생활은 그야말로 영원의 표랑객과 같아서 퍽이나 유쾌하더군요. 나는 그때 고비 사막을 지나서 시베리아로 들어갔는데 먹고 입을 것이 없어서 기근에 허덕이는 러시아인들이 참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네의 건설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는 그네들도 볼 수가있었습니다. - P159

이 기간 중 몽양은 레닌과 두 차례 회담하였는데, 첫번은일본인 가타야마(片山潛)를 동반했다. 레닌은 벽에 걸린 세계지도에서 손가락 끝으로 먼저 소련 둘레를 한 바퀴 돌아보인 다음, 조선지도 역시 그렇게 해보이고는(몽양은 속으로작은 나라이니 문제해결이 복잡하지 않다는 뜻이겠지 했다) 조선은 크지 않은 나라에 단일민족, 단일언어이니 일본 기반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혁명사업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가타야마더러 조용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동지는 조선독립을 위해 생명을 바쳐 투쟁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고, 다음에는 몽양더러 "동지는 일본의 혁명을 위해 싸울 수있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겠다는 두 사람의 대답을 듣고 레닌은 말을 계속했다.
"같은 공산당이면서도 소련당과 핀란드당이 서로 불화로지내는 까닭은 소련 사람들의 우월감 때문이오. 조선인과 일본인이 서로 악수를 하면 양국의 혁명은 무난할 것이니힘쓰시오."
이날 몽양은 레닌에게 특히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적극 원조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몽양과 레닌의 두번째 회담은 손문의 대리인 구추백(瞿秋白)과 함께였다. 몽양은 손문의 중국혁명을 적극적으로 원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레닌은 "이미 손문에게 편지를 보냈고,
보로딘을 파송했으니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ㅣ - P162

그러나 몽양은 중국공산당원의 대우를 받으면서도 중국국민당원의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공산당원이나 국민당원에게 다 같이 환대를 받았다. 이는 중국인 자체가 자국의 혁명을 위하여 각파가 유능한 인물을 흡수하려 했기 때문이며, 몽양 자신도 국민당이나 공산당이 제국주의 외래침략세력을 몰아내는 데 그 이념을 같이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조선에서 일본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쫓아내는 것과 끊을 수 없는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리하여 몽양은 왕정위 (汪精衛)와 친교를 맺었고, 모택동(毛澤東). 장개석과도 알게 되었다. - P176

몽양은 어릴 때부터 사람은 평등하다고 믿었고, 양반계급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찍이 자기 집 종을 해방시킨 것은 전술한 바다. 이러한 모양이 조국 독립운동에 나섰는지라 소련의 혁명에 시선을 돌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할 수 있다. 더욱이 파리강화회의가 제국주의자들의 야욕때문에 실패로 돌아간 것을 본 모양으로서는 사회주의에 대한 기대가 더욱 높아졌다. 이리하여 몽양은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 우리나라를 동정하고 도와줄 수 있는 나라는 소련뿐이라고 믿게 되었고, 미국에 대한 신뢰는 점점 엷어져갔다. 『몽양 여운형』의 저자 여운홍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있다.

1921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고 또 레닌과 회담한 이후로 형님은 약소민족의 해방을위해 도와줄 나라는 오직 소련뿐이며, 나라와 민족의 구체적 조건들에 따라서 마르크스의 이론을 어느 정도 변형하고 수정하여 적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 후 형님의 사상이 소련식 공산주의와는 멀어지고 점차로 민족적 · 민주적 사회주의에로 전환하여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형님은 국토가 협소하고 단일민족인 우리나라에서는 우선 민족해방을 성취한 후에 민주혁명을 수행하고, 점차로 그러나 과감하게 사회개혁을 실천하여 훌륭한 자주독립 통일의 민주사회주의적인 민족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 P183

몽양이 공산당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은 1920년 봄의 일이다. 여운형은 당시 중국에 머물고 있던 소련 청년 보이진스키를 상해 김만겸(金萬謙)의 집에서 만나게 된다. 이 자리에는 중국의 진독수(陳獨秀), 일본의 오스기(大杉榮)도 함께 있었다.
여기서 보이진스키는 동양에게 제안했다.
"국제공산당은 조선독립운동을 원조할 의사가 있다. 그대와 같은 유력한 독립운동가가 공산당에 협조하기를 바란다.
이동휘가 이미 고려공산당을 조직했으니 거기에 가입하는것이 어떤가?"
이렇게 해서 몽양은 상해 고려공산당에 관계하게 되었다.
몽양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8년 공동으로 발표한[공산당선언]을 1922년 맨 처음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30년대 후반까지 조선과 만주 일대에 은밀히 널리 퍼져 있던 [공산당선언]은 바로 몽양의 번역본에 기초한것이었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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