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에게는 매우 보편적인 밤길의 공포를 보통의 남성들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들을 키우면서 여러번 느꼈다. 밤늦게 다니지 말라고 잔소리할 때마다 "네네 어머님" 하며 농담으로 받던 아들이 어느 날은 엉뚱한 질문을 했다. "엄만 밤길이 그렇게 걱정돼? 내가 길이라도 잃어버릴까봐?" 여자인 엄마가 평생에 걸쳐 느껴왔던 공포심을 아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통의 남성이 밤길을 두려워하지 않는것은 (성)폭력의 공포를 상상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것은 성별 상상력의 차이가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위험도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명확히 말할 필요가 있겠다. 언젠가 선배 언니의 20대 딸이 이런 말을 했다. "카페에서 잠깐 자리를비울 때 비싼 노트북도 그냥 펼쳐두고 나가잖아요. 절도 피해를 걱정해야 하는 세상이 더이상 아니니까요. 그런데 왜 여성들은 늘 범죄 피해를 걱정하며 살아야 하죠? 내가 노트북만큼도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P207

한 나라의 인권의 수준을 가늠하는 다양한 지표들이 있다.
미국 서부의 한 도시는 강물로 회귀하는 연어의 수를 인권의 지표로 삼는다고 한다. 연어가 회귀할 수 있는 강이 있는 도시라면 사람이 살기도 좋은 인권 도시가 분명할 것이다. 나에게 인권 지표를 개발하라고 한다면, 숙식 문제를 걱정하지 않는 시인의 수와 막춤일망정 일주일에 한번 이상 춤을 추는 사람들의 숫자를 여기에 포함시키고 싶다. 이러한 권리를 ‘표현의 자유‘라든지 ‘문화 향유권‘ 같은 거창한 말로 설명하지 않고 ‘걱정 없이 춤추고 시 쓰며 살 권리‘라고 표현한다면 인권이 얼마나 쉽고도 다정하게 들릴까? 인권위법의 인권의 정의 역시 이렇게쉽게 고치고 싶다.
"시를 쓰는 것이 인권이다. 춤출 수 있어야 인권이다." - P226

나는 생각해본다. 그 존엄을 위한 투쟁이 이제 인간이 아닌다른 동물의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하는 때가 아닌가. 20년 가까이 인권으로 밥벌이해오면서도 동물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었다. 온 마음을 다해 나를 사랑해준 한 동물로 인해 겨우 알아차리게 되었다. 독일의 철학자 페터 비에리가 삶의 격』에서 말한 것처럼 존엄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남을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나에게 어떻게 대하는가의 문제라면, 그것은 반드시 사람과 사람 사이의관계 맺음에 한정될 수 없고 사람과 다른 동물, 자연과의 관계맺음을 통해 확장된다고 생각한다. 좋은 인간을 넘어 좋은 동물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삶을 가장 존엄하게 살아가는방법이 아닐까. - P235

점심 무렵 인권위옆 작은 공원에 비둘기 밥을 주는 여인이나타난다. 비둘기들은 횡단보도 너머에 여자가 서 있을 때부터구구구 소리를 내며 공원 앞으로 모여들었다. 평화의 상징에서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존재가 된 비둘기들, 나는 아무 감정 없이 새들을 지나치곤 했는데, 어느 날 뜨거운 아스팔트 위의 그 붉은 발을 보고 말았다. 발톱이 뜯겨나가 상처투성이가 된 비둘기의 붉은 발은 자동차 타이어도 녹일 듯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위에서 차와 인파를 피해 먹이를 찾다가 잠시 쉴 곳을 찾아 날아올랐다. 우리가 그러하듯,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은 온힘을 내서 살아간다. 비둘기의 붉은 발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우리는 다른 동물과 자매가 되는 존재일 수 없을까?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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