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의 투옥과 입국은 생각해볼 만한 문제이다. 몽양은 끝끝내 해외에 있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국내에 들어와야 하는가? 몽양은 해외에 혁명의 뿌리를 깊이 박았다.
해외에 있는 애국청년들은 다 몽양의 동지였다. 비록 산하가 가로막혀 서로 얼굴은 못 볼지라도 성기(聲氣)가 상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국내에 들어와 국내에도 독립운동의 뿌리를 박을 필요가 있지 않은가.
당시 국내에 있는 소위 지사(志士)들은 거의가 무위호신(無爲護身)에만 급급해 있었다. 몽양마저 그런 짓이나 하려면 들어올 필요가 없다. 그러나 몽양은 열화 속에든 홍수 속에든 뛰어들어 투쟁할 기개와 실천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의 폭염에 사막이 된 이 땅에서 샘물을 파내고, 국혼이 고목같이 말라가던 그때에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일은 모양 같은 인물이 아니고는 불가능했다.
이와 같이 당시 객관적 정세로 보아 몽양의 입국은 꼭 필요했고, 입국하되 투옥이라는 극적 상황으로 입국한 것은 침체해가는 독립투쟁에 하나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조선독립운동 면에서나 또한 독립투사로서의 몽양자신에게나 중요한 계기요, 사건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P198

이토 검사와의 본격적인 문답을 한두 가지 적어본다.
"피고가 생각하고 있는 조선독립운동이라는 것은 조선에서 행해지는 일본의 정치가 나빠서 조선을 일본 정치기반에서 이탈시키려는 것인가?"
"그렇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조선민족에게도 인격이 인정되어야 한다. 즉 사람에게 인격이있는 것처럼 민족에게도 인격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조선의 독립은 꼭 필요불가결한 것이니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해서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정치는 너무나 나쁘다. 조선민족으로부터 빼앗아 가는 정치를 하고 있으니 조선민족은 살기 위해서 부득이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저 길가에서 피로곤비한 민중을 보라, 빈부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가 절박한…아, 감개무량하다."
"피고는 장래에 어떠한 태도로써 조선에 임할 것인가?"
"역시 민족해방운동에 정진할 것이다. 이것도 안 된다면 할 수 없이 향리로 돌아가 호미를 잡을 수밖에." - P201

문 : 그대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여하한 견해를 갖는가?
답 : 마르크스의 이론에는 찬성하지만 그대로의 실행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오. 특히 조선 같은 경우는 폭력으로 실행할 바가 아니라 믿소. 마르크스주의는 러시아에서는 레닌주의가 되고, 중국에서는 삼민주의가 되어 있지만,
조선에서는 그 사정을 러시아나 중국과는 달리하고 있다.
고 생각하오.
문 : 그대는 레닌 등의 동방정책, 즉 민족해방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갖는가?
답 : 나는 직접 모스크바에서 레닌과 만났소만 만나기전까지는 사실 러시아가 조선에다 공산주의를 그대로 선전하려 들지 않나 적이 걱정하였으나 만나본즉 그는 조선의 특수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소. 조선의 교통과 국어를묻기에 교통은 하루에 전통될 정도, 국어는 한 개 국어라하니까 레닌은 ‘매우 좋다. 조선은 전에는 문화가 발달했지만 목하는 민도가 낮으므로 곧 공산주의를 실행하려 드는 것은 잘못이다. 지금은 민주주의부터 실행함이 현명할것이다‘고 말했는데 내 소신에 합치되매 나는 매우 만족하였소.
문 : 그러면 그대는 자본주의를 바라는가?
답 : 이상으로는 공산주의를 찬성하오만 실행문제에선 조선에 그대로 가져올 수 없다고 보오. 조선엔 먼저 자본주의를 발달시키고 그 다음에 공산주의를 실행해야 될 것이오. 러시아에서도 신경제정책이니 5개년 계획이니 하고 시대와 장소에 적응시켜 고쳐가면서 실행하는 것이오. - P211

몽양은 독방에서 그물을 뜨되 그저 기계적으로 막연히 뜬것이 아니었다. ‘임연선불여퇴이결망(臨淵羨魚不如退而結網)‘이라는 한시를 생각하며 떴다. 을사조약 직후 몽양이 상을 당해 향리에 내려가서 청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칠 때도이 한시를 생각하며 그대로 실천했던 것이다. "연못에 가서 고기를 탐내는 것은 물러가서 그물을 뜨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이 한시는 준비의 중요성을 가르쳐주고 있다. - P219

출옥 8개월 만인 1933년 3월 16일, 몽양은 중앙일보 사장직에 취임하게 된다. 몽양은 취임사에서 다음처럼 소감을말했다.

"세계의 풍운이 정히 급박한 이때에 내 감히 이러한 중책을 지게 되니 스스로 난감한 생각을 금할 수 없다. 본시우리의 언론기관이란 그 경영의 간난함이 천인현애 (千인懸崖)에 달리는 것보다도 오히려 더 심한 바이거늘, 하물며 오늘날 이 ㅔ굽이에 당해서일까 보냐•••." (『중앙일보』,
1933년 3월 17일자에서) - P227

최린은 당시 독립운동을 하지 말고 일본인 밑에서 편안히살자는 시중회(時中會)라는 정치단체를 만들어가지고 전국을 순회강연하며 돌아다녔다. 그 당시 함흥고보 1학년이었던 필자는, 동명극장에서 아일랜드가 독립하지 않는 이유를견강부회하던 최린의 모습과 목소리가 50년이 지난 오늘에도 눈에 선하고 귀에 쟁쟁하다.
조선중앙일보가 시중회를 하도 공격하자 하루는 최린이몽양을 찾아왔다.
"사회가 너무 침체하기에 이러한 정치운동을 일으킨 것이고, 내 주의도 조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니 너무 공격을 말아달라."
몽양은 반문했다.
"최린 씨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때와는 아주 달라졌다.
그대가 하는 일이 참으로 조선을 위하는 것이라면 중앙일보의 공격쯤으로 일이 아니 될 리가 없다. 자신이 있으면 용진할 뿐이다. 내 공격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내 공격을 방해로 볼 까닭도 없으며, 따라서 그런 주문을 할 필요도 없지않은가?" - P235

몽양은 우리나라 역대인물 중에서 문무를 겸한 이순신 장군을 가장 좋아했다. 1935년 봄 그 누구도 감히 선뜻 손을댈 수 없었던 그 무렵, 현직 신문사 사장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충무공 묘역 정화에 나섰다. 황폐한 묘소 토역을 말끔히마치고 나무를 심고 이각경 글씨로 된 장군의 송덕비를 세워 장군의 위업을 기리고 후손들을 위로하였다.
1936년 5월, 휘문고보 5학년의 18세 소년인 김성집은 일본 동경에서 열린 제1회 전 일본 역도대회 겸 베를린올림픽 파견 선발대회에 참가하여 미들급에서 라이트급의 김용성과 함께 당당 우승을 차지하여 당시 신문들을 떠들썩하게했다. 김 선수는 추상이 특기로서 추상과 인상 두 종목만의점수로도 차점자 일본 선수의 세 종목 점수보다 많았다고하니 당시 김성집의 역도 실력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조선에 돌아오자, 김 선수는 제일 먼저 몽양을 찾아 인사를 드렸다.
"여선생이 그렇게도 좋아하실 수 없어요. 만면에 웃음을띠시고 어쩔 줄을 몰라해요. 그 좋아하시던 여 선생 모습을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날 몽양, 서상천, 김용성과 넷이서 찍은 기념사진을 6.
25 때 잃어버렸다면서 김성집은 여간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는 모양이 8. 15 해방 후 초대 조선체육회장으로 있을때, 서울운동장 등에서 여러 차례 연설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1947년 4월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 선수가 우승의 영광을 안고 돌아왔을 때, 군정청(중앙청)앞 광장 환영대회에서 행한 연설은 가장 감명 깊었다고 회고했다.
1947년 8월 3일, 몽양장례식 때 김성집 씨는 손기정 · 석진경 · 이제황 · 김유창·정상윤·이성구 · 이순재 등 체육인과 함께 흰 상복을 입고 고인의 영구를 호위, 운구와 하관을 담당했다며 못내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 P246

손기정 선수가 세계 제패의 역사적인 우승 테이프를 끊은것은 베를린 시간으로 1936년 8월 9일 오후 3시 지나서이고우리나라 시간으로는 10일 꼭두새벽이었다. 8월 10일자 아침 『조선중앙일보』는 손기정, 마라톤 세계 제패」의 감격적인 호외와 그 뒷면에 실린 심훈(沈薰)의 「오오, 대한남아여!」라는 즉흥시가 독자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조선중앙일보의 운명의 시각은 다가오고야 말았다.
"베를린에서 돌아와서 여선생을 만나니 선생이 뭐라고말씀하셨어요?"
"어디 만날 수 있어야다. 왜놈들이 통 못 만나게 해서리.
몇 달 후에 만났디랬지. 감격이 김빠진 후에, 여 선생도 신문사를 그만둔 후고."
47 년 전을 회상하는 왕년의 패자 손기정 씨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 P256

"이 사건은 일본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일·영 · 미가 중국에서 장거리 경주를 하는데 제1차대전 전까지는 영국이 패권을 잡았고, 전쟁 중에는 일본이 잡았고, 전쟁 후에는 미국이 패권을 잡아 미국의 차관이 단연 증가하니 일본은 자기가 독점하지 못한 데 분개하여 노구교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독점은 영 · 미가 절대 불허한다. 이때에 양국은 반드시 합작하여 일본에 대항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대요소인 원료시장 · 소비시장 · 투자시장, 이 세 가지가 중국에는 구비되어 있다. 이런 좋은 시장인 중국이 경제적 자립을 못하였으니 저기압이 생긴 곳에 공기가 밀려들듯 자본주의 세력은 이 저기압 시장으로 밀려들 것이고 어느 일국의 독점은 불가능한 것이다. 각국이 침입하는 중에 일국의 세를 제지하고 중국은 갱생의 길을 찾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국가인 미국이나 영국이 이런 시장을 어느 한 나라의 독점에 맡겨둘 리가 없는데 더욱이 저들이 만만히 보고 있는 일본국의 독점이야말로 허용할 리가 절대 없다. 영미는 반드시 중국의 운동을 빌려가지고 일본과 싸울 것이다. 미국 혼자서도 일본을 대항하기에 넉넉할 터인데 황차 삼국이리요. 그러므로 일본은 자멸하고 조선은 해방될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기다리고 준비하여야 한다." ( 동양의 구술과 『여운형 투쟁사』에서) - P2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