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노 교수는 다음해 1월 중앙공론(中央公論)』이라는 월간잡지에 소위 여운형 사건에 관해서라는 시론(時論)을발표했다. 내용인즉, 양원 의원들이 여운형을 초청한 정부측을 공격하고 나서자 초청자측을 옹호하는 입장을 개진한 것이다. 글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여씨의 주장 가운데는 확실히 하나의 침범하기 어려운 정의의 섬광(閃光)이 보인다. ・・・ 나는 한낱 젊은 신사인그의 견식과 품격에서 드물게 보는 존경할 만한 인격을발견했다. 중국 ·조선·대만 등지의 많은 사람들과 회담했지만, 여운형은 교양 있고 존경할 만한 인격자로서 그중 가장 뛰어난 한 사람이라는 것을 단언한다.

고가, 다나카를 위시한일본 정부 요인들은 모양을 일본까지 초청한 목적을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조선독립운동을 일본 한복판에 선전 확대시킨 꼴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예정되었던 총리대신 하라와의 회견 및 천황과의 대면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 P140

북경호텔에서 의원단 외교부장 포리와 장시간 요담했다.
안창호는 임시정부를 대표해 정치문제를 제언했고, 몽양은 민단장으로 교민들의 독립운동을 말했고, 국내에서 온 장덕준(張德俊)은 국내의 독립운동 현황을 설명했다. 몽양은 한국에 가거든 서울의 이상재에게 전반 사정을 잘 들어보라고권고했다. 특히 몽양은 치욕적 한일합방은 미국에도 책임이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노일전쟁 후까지 한국에 공사를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발언도 없이 공사를 철거했으니 국제도의상 이럴 수가 있느냐고 했다. 금후는 한국만세운동의 진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한국독립에 적극적 원조가 있기를 바란다고 몽양은 힘주어 말했다.
파리강화회의는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원칙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연합국들이 전리품 나눠먹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약소민족들, 특히 한국민족의 실망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 회의에서 제 몫이 적다고 맨 먼저 불만을 표시한 나라가 이탈리아요, 다음으로 나선것이 일본이다. 의외로 강하게 나오는 일본의 태도에 윌슨대통령도 할 수 없이 일단 산동문제에서 일본의 특전을 승인했다.
그러나 하딩이 대통령이 된 후에 일본을 제압할 목적으로1921년 11월에 화부회의를 열기로 하였다.  - P158

후일 몽양은 이때의 일을 ‘고비사막‘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행 소품을 남겼다.

지금까지 인상이 깊은 것은 1921년 11월 하순경에 고비사막에서 10일간이나 야숙(野宿)을 하며 그 사막을 지나던 기억입니다. 고비사막이라고 하면 누구든지 잘 아시겠지만, 그 광막무제(廣漠無際)한 사막을 지나갈 때 밤이면 양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터벅터벅 걸어도 가고, 누워자기도 하였습니다. 고비사막은 북부아시아의 일부요, 더욱이 때가 11월 하순이라 영하 30도나 되어 춥기도 여간이 아니지만, 밤이면 푸른 별들이 누구를 부르는 듯 그아래에 나 홀로 누워 있는 듯 쓸쓸한 사막의 밤은 가장 즐겁고도 유쾌했습니다. 내가 시인이 되었던들 그 웅대한 사막의 밤을 한번 노래해보았을 것입니다. 낮이면  낙타로 사막을 지나가고, 밤이면 양의 가죽을 쓰고 그날그날을지나던 그때 생활은 그야말로 영원의 표랑객과 같아서 퍽이나 유쾌하더군요. 나는 그때 고비 사막을 지나서 시베리아로 들어갔는데 먹고 입을 것이 없어서 기근에 허덕이는 러시아인들이 참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네의 건설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는 그네들도 볼 수가있었습니다. - P159

이 기간 중 몽양은 레닌과 두 차례 회담하였는데, 첫번은일본인 가타야마(片山潛)를 동반했다. 레닌은 벽에 걸린 세계지도에서 손가락 끝으로 먼저 소련 둘레를 한 바퀴 돌아보인 다음, 조선지도 역시 그렇게 해보이고는(몽양은 속으로작은 나라이니 문제해결이 복잡하지 않다는 뜻이겠지 했다) 조선은 크지 않은 나라에 단일민족, 단일언어이니 일본 기반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혁명사업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가타야마더러 조용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동지는 조선독립을 위해 생명을 바쳐 투쟁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고, 다음에는 몽양더러 "동지는 일본의 혁명을 위해 싸울 수있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겠다는 두 사람의 대답을 듣고 레닌은 말을 계속했다.
"같은 공산당이면서도 소련당과 핀란드당이 서로 불화로지내는 까닭은 소련 사람들의 우월감 때문이오. 조선인과 일본인이 서로 악수를 하면 양국의 혁명은 무난할 것이니힘쓰시오."
이날 몽양은 레닌에게 특히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적극 원조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몽양과 레닌의 두번째 회담은 손문의 대리인 구추백(瞿秋白)과 함께였다. 몽양은 손문의 중국혁명을 적극적으로 원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레닌은 "이미 손문에게 편지를 보냈고,
보로딘을 파송했으니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ㅣ - P162

그러나 몽양은 중국공산당원의 대우를 받으면서도 중국국민당원의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공산당원이나 국민당원에게 다 같이 환대를 받았다. 이는 중국인 자체가 자국의 혁명을 위하여 각파가 유능한 인물을 흡수하려 했기 때문이며, 몽양 자신도 국민당이나 공산당이 제국주의 외래침략세력을 몰아내는 데 그 이념을 같이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조선에서 일본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쫓아내는 것과 끊을 수 없는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리하여 몽양은 왕정위 (汪精衛)와 친교를 맺었고, 모택동(毛澤東). 장개석과도 알게 되었다. - P176

몽양은 어릴 때부터 사람은 평등하다고 믿었고, 양반계급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찍이 자기 집 종을 해방시킨 것은 전술한 바다. 이러한 모양이 조국 독립운동에 나섰는지라 소련의 혁명에 시선을 돌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할 수 있다. 더욱이 파리강화회의가 제국주의자들의 야욕때문에 실패로 돌아간 것을 본 모양으로서는 사회주의에 대한 기대가 더욱 높아졌다. 이리하여 몽양은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 우리나라를 동정하고 도와줄 수 있는 나라는 소련뿐이라고 믿게 되었고, 미국에 대한 신뢰는 점점 엷어져갔다. 『몽양 여운형』의 저자 여운홍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있다.

1921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고 또 레닌과 회담한 이후로 형님은 약소민족의 해방을위해 도와줄 나라는 오직 소련뿐이며, 나라와 민족의 구체적 조건들에 따라서 마르크스의 이론을 어느 정도 변형하고 수정하여 적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 후 형님의 사상이 소련식 공산주의와는 멀어지고 점차로 민족적 · 민주적 사회주의에로 전환하여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형님은 국토가 협소하고 단일민족인 우리나라에서는 우선 민족해방을 성취한 후에 민주혁명을 수행하고, 점차로 그러나 과감하게 사회개혁을 실천하여 훌륭한 자주독립 통일의 민주사회주의적인 민족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 P183

몽양이 공산당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은 1920년 봄의 일이다. 여운형은 당시 중국에 머물고 있던 소련 청년 보이진스키를 상해 김만겸(金萬謙)의 집에서 만나게 된다. 이 자리에는 중국의 진독수(陳獨秀), 일본의 오스기(大杉榮)도 함께 있었다.
여기서 보이진스키는 동양에게 제안했다.
"국제공산당은 조선독립운동을 원조할 의사가 있다. 그대와 같은 유력한 독립운동가가 공산당에 협조하기를 바란다.
이동휘가 이미 고려공산당을 조직했으니 거기에 가입하는것이 어떤가?"
이렇게 해서 몽양은 상해 고려공산당에 관계하게 되었다.
몽양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8년 공동으로 발표한[공산당선언]을 1922년 맨 처음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30년대 후반까지 조선과 만주 일대에 은밀히 널리 퍼져 있던 [공산당선언]은 바로 몽양의 번역본에 기초한것이었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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