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역학자 김승섭은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인권침해와 차별의 고통이 어떻게 사람을 아프게 하는지 과학적 통계와 연구 자료로 증명해 보인다. ‘말하지 못한 상처‘는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우리 몸에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새겨진다고 말한다. 노동자가 겪는 차별의 경험은 사람을 아프게 했다. 차별을 경험한 이들이 그렇지않은 사람에 비해 건강이 좋지 않음은 물론이고, 그중에서도 차별 경험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타인에게 말하지 못한 집단(주로 여성)이 더 많이 아픈 것으로 확인되었다. - P84
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 앞에서 1인시위를 하던 노인들이 있었다. 민주정부가 들어서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대통령에게 호소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안 대부분이 수사기관과 사법기관, 정부의 각종 민원기관을 두루 거친 지극히 개인적인 민사 분쟁으로 대통령이 와도 해결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지만, 노인들은 간절한 마음에 매일 눈비 맞으며 청와대 앞에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와대 관계자가 1인시위하는노인들을 은밀히 불러 만찬을 대접하고 대통령의 이름이 적힌흰 봉투를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나의 진정인 중 한분이 그날받은 흰 봉투를 소중히 꺼내 보여주면서 "대통령이 주신 마음"이라고 했다. 하얀 봉투 속에는 빳빳한 1만원권 신권 열장이 들어 있었다. 백일기도하는 마음으로 청와대 앞을 찾는 노인들에게 대통령으로서 해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배려의 방법이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돈을 보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국가인권위원회 진정·민원접수메일 주소의 아이디는 호소(hoso@humanrights.go.kr)다. 인권위 민원 메일 주소를 정하는 회의에 참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누구나 무엇이든 억울한 일이있으면 호소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메일 아이디를 호소로 정했다. 비록 인권 팔이라는 욕을 먹을지라도 더 낮고 어려운 사람들의 호소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호소를 듣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 P103
본격적인 피해자 면담 조사에 앞서 간단한 설문지와 진술서 양식을 돌렸다. 참가자들이 쓴 설문지와 진술서를 정리하면서 나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막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외국인이 쓴 것 같은 글씨체와 잘못된 맞춤법으로 구성된 이상한 문장들이 종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워크숍 내내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하던 그들이 작성한 글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어쩐지 속은 기분이 들었고, 막대한 예산이 사용된 워크숍의 결과가 고작 읽기도 어려운 진술서인가 싶어 속이 상했다. 나의 불만을 눈치 챈 인권활동가가 친절하고도 상냥하게 알려주었다. "조사관님, 그거 아세요? 농인들이 수어를 배우는 것은 청인들이 영어를 배우는 것과 같아요. 그리고 그들이 글을 쓰고 읽는 건 영어 외에 제2외국어로 독일어나 불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죠. 그러니까 수어로 대화하는 것은 유학도 안 가고 동시통역사가 된 사람과 같은 거예요. 대단하죠? 제아무리 뛰어난 동시통역사도 외국어를 몇개씩 유창하게 구사하기는 어렵지 않나요? 청인의 기준에서 피해자들이 쓴 한글이 서툴고 문법이 틀린 것처럼 보이겠지만, 제2외국어로 그 정도 해냈다면 정말 훌륭한 것 아닐까요?" 불만은 금세 부끄러움이 되었다. - P114
사건 종결후에 다시 만나 안부를 주고받은 이는 그녀가 처음이었다. 프놈펜 사건은 여러 방면에서 새로운 선례를 남기고 있었다. 카페를 나오는데 그녀가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폭신한 털이 들어 있는 검은색 가죽 장갑이었다. 받을 수 없다고 손사래를 치는 내게 그녀는 말했다. "조사관님, 조사관님의 손이 계속따뜻했으면 좋겠어요. 저에게 손 내밀어주셨을 때처럼요. 그 말을 듣는데 도저히 상자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선물은 여전히 포장 그대로 옷장 서랍에 들어 있다. 나는 겨울이 되면 무슨 연례행사처럼 장갑을 꺼내 껴보곤 한다. 그러면서 한번씩 생각한다. 억울한 사람들의 고통과 용기에 대하여, 진실에 불을 밝히는 낯선 이들의 호의와 선의에 대하여.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바람대로 조사관으로서의 나의손이 여전히 따뜻한지를. 내가 가는 길이 좋은 선례가 되고 있는지를 말이다. - P142
‘아무리 악랄한 범죄자라도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고적법한 절차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 언제부턴가 이 문장 앞에서 자신이 없어진다. 그날 강간 피의자를 향한 분노와 혐오로 부들부들 떨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인권의 피해자들은 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무해한 존재이며, 선량한 시민이거나 무고한 희생자, 억울한 피해자였지만, 현실에서 만난 이들이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때때로 악랄하고 위선적이고 탐욕스러운 존재에가까웠다. 그때마다 나는 놀라고 당황하며, 인권을 보호한다는것에 대한 깊은 회의감에 빠지곤 한다. 인권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사람의 한계일 수도 있고 실제로 인권의 이념과 현실 사이에 까마득한 골짜기가 생긴 탓인지도 모르겠다. 최근 들어 그 골짜기는 더 깊게만 느껴진다. 골짜기 위를 날아다니는 까마귀처럼 관조하듯 세상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 때가 있음을 고백한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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