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光

1

새벽녘 꿈속에서 아내가 웃고 있었다.
잠깐 한순간 보인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잠이 깬 뒤까지 그 얼굴은 끈질기게 뇌리에 엉겨 붙었다. 보통 때의 꿈이라면 아침 햇살에 의식이 차츰 뚜렷해지면서 허망할 만큼 깨끗이 사라지는데 몇십 년 만인지모를 아내의 얼굴은 거꾸로 빛을 얻어 양화陽畵(음화陰畵를 인화지에 박은 사진으로, 색채나 명암이 실물과 동일하게 나타난다)로 도드라지는 필름처럼 선명해졌다. - P7

일흔 살 넘어 최근 몇 년 동안, 잠은 강물처럼 탁해졌다.
잠의 깊이가 강처럼 변한 것이다. 얕은 잠은 탁한 개울물이나 겨우 헤적거리는 것 같고, 깊은 잠은 어두운 강 밑바닥으로 잠겨 들면서도 완전히 가라앉지 못한 채 깊고 무거운 진흙 같은 물속에 반쯤은 묻히고 반쯤은 떠 있었다. 바닥까지 가라앉으면 그건 곧 죽음이고 두 번 다시 이 깊디깊은 잠에서 떠오를 수 없으리라…. 눈을 뜨면 매번 그런 생각이들었다. - P8

사토코 씨의 말을 듣고 주방에 들어섰을 때, 아직도 바닥에는 사과 찌꺼기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설익었다고 할까 아직 단단해 보이는 푸른 사과였습니다. 사토코 씨는 치과에 나오코를 함께 데려가지 않아 이런 일이 생겼다고 몹시 후회하는 기색이었습니다. 얼굴까지 핼쑥해져서 나오코를 찾는 것 말고는 다른 건 돌아볼 겨를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어질러진 사과 찌꺼기가 30개 가까이나 되었을까요.
주린 짐승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과육은 죄다 파먹고 심지만 가늘게 남아 있었습니다. 어린아이의 아직 어린 뼈가 여기저기 버려진 것만 같아서 나는 그걸 하나하나 손으로 줍는 사이에 구역질이 났습니다. 옆에서 함께 줍던 사토코 씨도 그 사과 심지에서 뭔가 불길한 사건을 예감했는지 한 차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더군요.
사건 •••.
정말로 사건이라고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은 그 얼마 뒤였습니다. - P42

내가 정원으로 내려서려는 것을 밀치듯이 사토코 씨가 먼저 "얘, 가요, 대문 전등불 좀 켜봐" 라고 부르짖으며 나무 곁으로 뛰어갔습니다. 곧바로 대문 전등이 켜졌고, 그 불빛에 파르르 떨듯이 주위의 어스름한 저녁 빛은 검게 그늘이지고 꽃만 눅진하게 번들거리는 것을 보니 마치 무더위 때문에 진땀을 흘리는 것 같았습니다.
사토코 씨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한 눈빛으로 나무뿌리 쪽을 보며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을 뿐이지요. 그리고 그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던 나도 말라버린 잡초가 섞인 흙 속에서 삐죽 튀어나온 허연 것이 어린아이의 움켜쥔 작은 손이라는 것을 금세 알았는데도 의식이 뒤틀린 것처럼 멍하니 선 채로 ‘할아버지가 먹고 내던진 사과 심지 하나가 이런 곳에도 떨어져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 P46

우리의 결혼은 이른바 그 집에서 본 ‘가족 풍경‘에서 파생된 것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나오코가 태어나 셋이서 단란한 시간을 보낼 때마다 나는 매번 이 풍경은 그해 정월 가족풍경의 축소판이라고 느끼곤 했습니다. 단란한 가족이란 그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 실제 나와 유키코 사이에는 남남보다 더 멀고 깊은 틈이 벌어져 있었으니까요. 무심코 바라보면 보이지 않을 그 빗금 같은 것이 우리 결혼의 모체가 되었던 그해 정월의 노부부와 아들 부부, 그리고 이제 막 태어난 아기까지 포함한 하나의 가족 풍경에 감춰져 있었다는 마음이 자꾸만 드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과 그 집안을 직접 이어주는 끈은 사토코 씨와 유키코가 자매간이라는 것뿐이었지만, 나는 우리 집이 그집안에서 파생된 새끼 가족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우리 결혼 생활의 불행의 이유가 원래 그 집안에 있었던 세균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긴그것도 철없는 반항기의 어린애가 저 혼자 책임지지 못할 잘못을 부모 탓으로 돌리는 듯한 얘기겠지만.. - P64

그 여자의 몸은 분명 내가 지금까지 뽑은 것 중에 가장큰 행운의 복권이었다. 하지만 그 행운은 이를테면 누군가 깜빡 잊어버리고 간 허름한 가방을 주웠고 그 안을 봤더니돈다발이 가득 들어 있었다는 식의 행운이었다. 그 돈을 모두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동시에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양심의 가책이라는 리스크도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나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 여자의 남편에 대해 그런 양심의 가책이며 위험성을떠안고 있었다. 들키지 않으면 문제는 없다. 하지만 혹시라도 들켰다가는 그 즉시 그 여자의 몸은 행운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뽑은 것 중에 가장 큰 불행의 복권이 된다.... 막연하게나마 그런 부담감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여자가 ‘약간 힘든 부탁‘이라고 말했을 때도 분명 남편이나 딸에 관한 일일 것이라고 예감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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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는 집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대체로 완벽한 문장과 정확한 스펠링을 구사하며 농장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썼다. 1944년 어머니날을 며칠 앞두고는 세일럼 Salem 시에 뭔가를 사러 다녀왔다고 연필로 적어 보냈다. "어니스트 아저씨가 어머니날이니까 장미를 사야 한다고 했어요. 빨간 장미는 엄마가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래요. 하얀 장미는 엄마가 죽었다는 뜻이고요." 공놀이를 했다고도 적었다. "제가 올린 점수는... 5/74점이에요." 마지막에는 "도널드 G. T. 루이스"라고 서명까지 했다. 메리는이 편지를 평생 소중히 간직했다.
도널드는 그 뒤로 언제나 그 시절, 동시에 두 가족에 속해 있었던 시절을 행복했던 때로 기억했다. 두 배로 사랑받고 두 배로 보호받았으며, 자기와 비슷한 어린이들이 겪은 끔찍한 일들을 피할 수 있었다. 트리플렛 부부처럼 보다 나은 환경을 만들어줄 여력이 없는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대규모 수용시설에갇혀 때때로 학대당하며 지내던 시대였다.
카너는 도널드가 모든 면에서 성장하고 많은 것을 배워 나가는모습을 보며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전반적으로 소년의 성취는 굳이 따지자면 "중간 수준"이었지만, 자폐 어린이의 발달이란 맥락에서 그 정도면 어마어마하게 넓고 깊은 심연을 건너뛴 것과 다름없었다. 도널드는 적어도 일부 어린이는 자폐증의 가장 파국적인 측면을 극복할 수 있으며, 그런 과정을 적극적으로 시도해볼 가치가있음을 입증하는 생생한 증거였다. - P102

트리플렛 저택은 사회적 허브 역할을 했다. 메리는 종종 도시 행사의 주최자였다. 여성 모임 외에도 장로교회 성가대가 집을 리허설 장소로 사용했다. 방문객들은 트리플렛 집안의 아들 올리버에게익숙했지만 도널드를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농장에서 돌아온 도널드가 남의 눈에 띄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트리플렛 가족은 큰아들의 존재를 부끄러워하며 숨기려고 했던 것 같지는 않다.
합창단에게도, 포레스트의 상류층 여성들에게도 우연히 마주치는어떤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거실에서 시 낭송회가 한창일 때 도널드가 침실에서 갑자기 꽥 소리를 지르거나, 집에 찾아온 부인들의 젖가슴을 넋을 잃고 바라보거나, 누군가를 붙잡고 《타임》 지나 달력에 대한 이야기를 끝없이 늘어놓아도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것이 아이의 본모습이고, 그들의 집에 손님으로 온 이상 그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가족의 원칙이었다. 묵시적으로 비먼과 메리는 분명하고 확고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도널드는 가족의 일원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망설임의 시간을 뒤로 하고 마침내 우리 아이가 평등하게 대우받기를 기대한다는 사실을 지역 사회에 분명히 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사람들은 메시지를 받아들인 것 같다. - P107

포레스트는 도널드에게 안전한 장소였다. 속속들이 알기도 했지만 지역사회가 그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열대여섯 살때쯤 그는 마을 밖으로 이어진 고속도로를 따라 멀리까지 걷곤 했다. 여전히 하늘을 쳐다보며 허공에 뭔가를 끄적거렸다. 사람들은 차를 몰고 지나가다 속도를 늦추고 인사를 건넨 뒤, 묻곤 했다. 태워줄까, 도널드? 돌아오는길에 집에 데려다 줄까? 그저 걷고 싶다고해도 상관없었다. 도널드는 그들이 보호해야 할 존재였다. 누구나 그가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없어서는 안 될 마을의 일부였으며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 P113

숫자가 계속 늘어나는데도 자폐증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려는 노력은 지속되지 못했다. 너무 드물어 과학자들이 주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탓도 있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정신의학자들이 자폐증의 원인이 분명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최종 판결은 이랬다.

자폐증은 엄마가 자녀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이런 생각은 리타 테퍼가 어린이였던 1940년대 후반에 싹터 리타가 엄마가 된 1960년대에는 하나의 신념으로 굳건히 자리잡았다. 스티븐이 자폐증으로 진단받자마자 들은 말도 바로 그것이었다. 모든 의료인이 아들의 자폐증을 그녀의 잘못 때문이라고 믿었다. 동시대에 자폐 자녀를 키우며 눈물겨운 노력을 쏟아부은 여성들처럼 리타도 그런 끔찍한 환경을 견뎌야 했다. - P121

냉장고 엄마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물론 비난이었다. 씨앗이 처음 뿌려진 것은 1948년 4월 26일, 《타임》지에서 "의학-얼어붙은 아이들Medicine: Frosted Children" 이란 기사를 내보냈을 때였다. 자폐증에 관한 최초의 보도였다. 드물지만 "기저귀를 떼기 전부터 혼자 있을 때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유아 조현병 환자들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모든 내용이 부모를 비난하는 데 치우쳐 있었다.
기사는 《타임》지 특유의 과장 섞인 질문으로 끝맺는다. "냉담한 부모가 자녀를 얼어붙게 만들어" 자폐증으로 내모는 것일까? 《타임》지에 따르면 확진된 모든 증례의 엄마 아빠는 한가지 특정한 유형에 해당했다. "자녀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 채" 항상 "냉담"하고 "애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하나같이 뭔가 문제가 있었다."
기사 끝부분에 전문가의 말을 인용하여 그려낸 이미지는 이후 20년간 자폐증에 관한 대중적 논의를 규정했다.
••••••
그리고 그 표현은 도저히 그런 말을 했으리라고 믿을 수 없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바로 레오 카너다. - P128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카너가 부모들의 냉정함에 새롭게 주목했다는 것은 최초의 통찰에 대한 놀라운 배신이었다. 어쩌면 자폐증에 대한 학설을 당시 주류 정신의학계의 사고방식과 일치시키려고했을지 모른다. 자폐를 ‘선천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정신질환이 예외 없이 정서적 외상의 경험에서 생기며, 거의 항상 엄마가 관련된다는 정신의학계의 합의된 의견과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심지어 "조현병 유발성 엄마"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였다. 자폐증을 슬그머니 조현병 항목 밑으로 옮겨놓으면서 카너는 자폐증을 타고난다는이론에서 한걸음 물러나 정신의학계 동료들이 친숙한 방식으로 가족역동에 초점을 맞춰 부모의 행동을 낱낱이 분석하려는 내적 압박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간단히 말해 1948년과 1949년에 부모들에대해 말하고 쓴 것만 본다면 카너는 애초의 확신에 등을 돌리고 엄마가 자폐증의 원인이라고 공공연히 비난하는 최초의 전문가가 되었다. 이런 입장은 매우 실망스러울 뿐 아니라, 이후 여러 차례 명성을 얻었다가 잃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 P144

 그 경험을 통해 루스는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알수 있었다. 나중에는 초기 경험을 토대로 젊은 부모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처음부터 그녀는 이해하기 쉽고 명확한 줄거리를통해 "자폐라는 드라마의 열기를 느끼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아이들의 "가슴 아픈 아름다움"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대중의 관심을 붙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P171

근거는 턱없이 부족했다. 자폐 어린이에 관해 세계적으로 알려진몇 가지 기본적인 사실만 따져봐도 엄마가 문제라는 개념을 완전히무너뜨릴 수 있었다. 우선 자폐 어린이를 키우는 거의 모든 엄마에게 자폐가 아닌 자녀들이 있었다. 말벌보다도 독성이 강하다는 여성들이 단 한 번만 침을 사용했다고?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또한 릴랜드는 심리치료가 자폐증을 해결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심리적 요인으로 시작된 질병이라면 조금이라도 반응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심리치료의 결과는 항상 똑같았다. 42명의 어린이가 참여한 연구에서는 29명에게 매우 고강도 심리치료를반복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역설적으로 부적절한 치료를 받았거나 아예 치료를 받지 않은 13명 중 몇몇은 나중에 상태가 좋아져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냉장고 엄마 이론은 어린이가 생애 초기에 정신적 외상을 입었다고 가정했다. 부모가 곁에 없었거나, 형제가 태어났거나,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논문에 포함된 230명의 어린이를 살펴보면 유발 사건에 공통적인 패턴이 전혀 없었다. 아주 어려서 그런 일을 겪었기 때문에 자폐 상태가 되었다는 증거 또한 전혀 없었다. 기록만으로도 부모가 차갑고, 자녀에게 관심이 없으며, 자기에게 빠져 있는 성격이란 가설이 적어도 23개 가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생기에 넘치며 따뜻했다. 림랜드는 엄마들이 진료실에서 자녀를 자신없는 태도로 대했다거나, 의사의 질문에 단조롭고 활기없는 목소리로 답했다는 것이 "냉정함"의 증거가 아니라 지치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아무리 애정어린 말을 건네고 손길을 주어도 자녀가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다면 누구나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한편 림랜드는 부모들의 행동이 유전적 요인을 시사하는 단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식이 부모의 성향을 물려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부모와 어린이들은 그저 동일한 유전적성향을 나타내는지 모른다. 정확히 유전적이 아니라도 어떤 환경적요인이 정도는 다르지만 부모와 자녀에게 모두 영향을 미친 것은아닐까? 림랜드의 데이터베이스는 자폐란 현상이 인간이란 생물체자체에서 기원했을지 모른다는 온갖 증거를 보여주었다. 엄마가 잘못 키웠기 때문이란 증거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심리에 주목하는 것은 핵심을 벗어난 것이며, 자폐증은 생물학적 현상이라고확신했다. - P178

림랜드는 처음부터 이들과의 관계가 어떤 의미인지 분명히 인식했다. 그것은 변혁운동의 시작이었다. 루스 설리번이 뉴욕주 올버니의 작은 공동체에서 엄마들을 조직하여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듯, 이제 림랜드는 모든 가족을 연결하는 중심에 있었다. 수개월이 지나고 각지에서 보내온 편지가 계속 편지함에 쌓이면서 그들의 숫자는 금방 수백 가족을 넘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 전역의 해군기지를 돌아다니는 터였다. 그는 빠듯한 출장 일정을 조정하여 가족들의 집을 방문했다. 몇몇 가족이 만나는 모임을 주선하여 생각처럼 외롭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가족들 역시 너무나 소중한 것을 선물했다. 바로 데이터였다. 그들이 작성한 E-1 서식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 P186

물론 그들은 양부모였다. 프랭키는 데려온 자식에 불과했다. 원한다면 언제라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들은 아이를 돌려보낼수 있었다. "아무래도 잘 안 되네요"라고 말할 수 있었다. "저희로서는 역부족이에요"라고 할 수도 있었다. 사실 그런 생각이 한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반대쪽을 택했다. 프랭키를입양했던 것이다. 아이는 영원히 부부의 아들이 되었다. 사랑을 듬뿍 받았을 뿐 아니라 법적으로 어엿하게 바턴이라는 성을 썼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과정 중에 조지와 앨리스가 결코 외롭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 세대 전 부모들이 모든 면에서 고립되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물론 1970년에도 부모들은 여전히 차가운 빗속에 서있는 셈이었다. 사회는 그들 자녀의 존재와 필요를 전혀 이해하지못했다. 하지만 산타바바라의 바턴 부부는 가족 내 자폐라는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소수의 부모가 주변에 있으며 그들과 연대할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가족들은 서로를 발견하고 교류하며 서로 버팀목이 되었다. 자녀를 위해 뭔가를 변화시킬 수 있으며, 어쩌면 그들 스스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 되어주었다. 숫자는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스무 명 정도였다. 하지만 조지와 앨리스는 공동체의 일원이란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버티고 싸워나갈 힘을 얻었다. 많은 부모가 마찬가지였다. 그 사실이야말로 자폐증의 역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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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을 가져야 한다. 가까이 모시고 있는 대통령부터 멀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저 건너편 사람들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졌던 ‘직‘을 맡는 순간부터는 ‘정치적입장‘은 버리는 것이 좋다. 우리는 국가 행사나 기념식, 추념식등을 준비하며, 종종 이 일이 ‘제사‘와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사이가 나쁘고 밉고 싫어도 제사상 앞에서 가족들은 억지로라도 서로를 참고 예를 다하려 한다. 그 자리에서 극적으로 화해하고 서로를 이해하기도 한다. - P423

윤석열 정부 청와대 폐쇄가 공식화되고, 대통령 임기 마지막날 자정에 개방 행사를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몹시 언짢고 화가 났다. 다음 날 대통령이 취임식에 참석한다는 것을 알면서, 주무시고 계실 자정에 청와대를 개방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뻔했다. 그 의도가 참 흉측했다.
제대로 된 취임식도 못 해드렸는데, 퇴임도 이렇게 쫓겨나듯하게 됐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대통령은 홀가분해하셨다. "잘 됐다. 밖에서 하루를 보내고, 취임식 참석 후에 양산으로 내려가면 되지"라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계속 씩씩거리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다.
"아니 왜 이렇게 화를 내, 화내지 마. 탁 비서관은 계속 화가나 있는 것 같아."
"화가 나니까 화를 내죠."
처음으로 혼잣말이 아니라 들으실 수 있을 만한 목소리로 툴툴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화를 내 본들 어쩌겠는가. 게다가 대통령은 좋다고 하시는데……… 퇴임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이다가올수록 사람들은, "대통령 퇴임하실 때 뭐 특별한 거 있지?
있겠지? 당연히 있겠지 뭐" 이렇게들 믿고 있는 눈치였다. 그제야 ‘아, 대통령이 싫다고 하셔도 뭐라도 해야겠구나‘ 싶었다.
대통령을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 준비를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P430

마지막 순서로 대통령과 여사님을 무대 위로 모셨다. 그리고모두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대통령은 무대에 올라 나를 보고 웃으며 말씀하셨다.
"오늘 이 행사 누구 허락받고 하는 건가요? 탁 비서관 나한테 허락받았나요?"
나는 대답했다.
"냅두세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대통령은 다시 한번 크게 웃으시며 말씀을 이어갔다.
"오늘 이렇게 우리가 모일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밖에서 누가 뭐라고 하든, 오늘 이 자리에서처럼, 우리가 우리 스스로 해 온일들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우리 모두 함께 일한 것이 영광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으로 나도 여러분도 다 보상받은 겁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여사님도 짧게 한 말씀하셨다.
"청와대에서 내가 제일 대통령을 위하고, 힘들고, 어려운지알았는데, 오늘 여러분들 말씀을 듣고 영상을 보니 이렇게 많은사람이 대통령을 위해서 일했구나 싶어 정말 고맙습니다."
두 분 말씀을 끝으로 이제 정말 행사를 끝내야 할 시간이 됐다. 퇴장 음악 <미스터 프레지던트>가 흘러나왔다. 나는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준비했던 마지막 멘트를 했다.
"이제 대한민국 대통령께서 퇴장하시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환송해 주시기 바랍니다." - P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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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그들도 울었다. 극장안의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발코니에서도, 1층객석에서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어쩔 줄 몰랐다. 무대 구석에서는 그날 밤 쇼의 호스트 존 스튜어트 on Stewart가 손으로 뺨을 감싸고계속 쓸어내렸다. 무대 뒤로 퇴장할 시간이었지만 잠시라도 더 박수를 보내는 청중과 그 순간을 마음속 깊이 담아두고 싶었다. 무대위에는 지금 막 듀엣으로 압도적인 공연을 펼친 아이와 가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서 있다. 감격과 환희의 눈물 속에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 P16

실제로 도널드는 자기 세계의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특이한 점 중에서 부모는 이부분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아빠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도품에 뛰어드는 법이 없었다. 엄마를 간절히 찾는 일도 거의 없었다. 친척들 역시 아이와 사귀지 못했다. 언젠가 크리스마스에 혹시나주의를 끌어볼까 해서 누군가 산타 복장을 하고 나타났을 때도 도널드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이렇듯 주변 사람의 존재를 아예 의식하지 않는 것 같다가도 자기가 하던 일에 방해를 받으면 즉시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하던 일이라봐야 허공에 단어를 쓴다든지, 바닥에 주저앉아 끊임없이 냄비뚜껑을 돌리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집스럽게 지키려는 것이 무엇인지 점점 분명해졌다. 그것은 ‘동일함‘이었다. 완전하고도 순수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물리적 환경이 아주 조금만 변해도 참지 못했다. 가구를 옮기면 화를 냈고, 밖에 나갈 때는 들어올 때 밟았던 곳을 하나도 빠짐없이 거꾸로 밟았으며, 장난감은 놀다 내버려둔 채로 고스란히 남아 있어야 했다. 어떤 것이든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난리가 났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이전에 그것들이 어떤 상태였는지 기억해야했다. 실제로 도널드는 기억력이 비상했다. 아버지가 여러 가지 색깔의 구슬을 실에 꿰고 있으면 제대로 본 것 같지도 않은데 똑같은것을 만들었다. 블록으로 쌓은 탑을 무너뜨리면 이내 똑같은 탑을쌓았다. 수많은 블록이 원래 위치에 놓인 것은 물론, 각 면이 향했던 방향까지 똑같았다. 두 살이 되자 금방 알파벳을 깨치더니 거꾸로도 줄줄 외웠다. 순서가 변하지 않는 한 어느쪽으로 진행하는 아무문제가 되지 않았다.
각각의 행동보다 더 이상한 것은 모든 행동이 다양한 결핍과 재능이 독특하게 결합된 형태로 한 사람 속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행동의 총합이야말로 도널드라는 사람의 극적인 인격을 포괄적으로 규정했지만, 거기에는 이름이 없었다. 아무도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다. 사람은 생각할 수 있는 단어에의존할 수밖에 없다. 엄마가 이해할 수 있는 결론은 오직 하나였다. 그녀는 편지 속에 안타까움과 슬픔을 담아 어린 아들이 "아무 희망이 없을 정도로 정신이 이상하다"고 고백했다. "자폐증"이란 진단명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널드의 엄마인 메리 트리플렛Mary Triplett은 이런 상태를 변화시킨 사람 중 하나다. 그녀와 남편은 도움을 얻으려고 했을 뿐이지만, 그런 노력의 결과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 의해 결국 도널드의 자폐증을 발견하고 의학저널을 통해 자폐증이란 상태가 최초로 기술되어 국제적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사건이 꼬리를물고 일어나기 전에 부모는 자신들이 결정해놓고 즉시 후회했던 한가지 실수를 바로잡아야 했다. 아이를 다시 집으로 데려와야 했던것이다. - P29

당시 수용시설에 보내라는 조언은 그리 잔인한 것으로 여겨지지않았다. "결함이 있다"는 말이 특별히 차별적인 용어도 아니었다. "신장판막의 결함 "처럼 그저 정상적인 기능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을지닌 임상용어일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1902년에 등장한 "백치ethor", "치우unterle" "노둔moron "이란 용어도 "정신연령"이 3세 미만3~7세.7~10세인 사람을 지칭하는 의학용어일 뿐이었다. 20세기 전반에 장애를 지칭한 어휘 속에는 "천치retin", "무식쟁이ignoramus", "쑥맥 simpleton", "미치광이 maniac", "광인lunaue", "바보culard", "지진아durce", "망령난demented", "미친ceranged", "정신분열성 schizoid", "저능아spastic", "정신박약feebleminded", "정신이상 psychonic" 같은 말이 버젓이들어 있었다. 의료인들은 강의나 학술논문에서 명확히 정의된 임상적인 상태를 기술하기 위해 이런 용어들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런 용어가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임상의학이란 맥락을 벗어나 누군가를 조롱하고, 상처를 주고, 낙인을 찍기 위한 말로 변질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이런 의미 변화로 인해 미국에서 가장 먼저 결성된 지적장애 전문가 단체는 다섯 번이나 이름을 바꿔야 했다. 1876년에 설립된 백치 및 정신박약자를 위한 미국의료인Association of Medical Officers of American Institutions for Idiotic andFeebleminded Persons는 1906년 미국정신박약연구협회 American Associationfor the Study of the Feebleminded 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33년에는 미국정신박약협회 American Association on Mental Deficiency로 개칭했다. 1987년에는 미국정신지체협회 American Association on Mental Retardation가 되었다가, 마침내 2006년에 이르러 미국지능발달장애협회 American Association on Intellectual and Developmental Disabilities 라는 이름을 얻었다. "지체retarded"라는 말도 한때 장애에 관한 용어 중 가장 중립적인 말로 "발달이 늦다delayed"는 의미를 고상하게 표현한 것이었지만, 오랜세월 동안 문화 전반에 걸쳐 수많은 모욕적인 단어를 파생시켰다.
"몽골인을 닮은mongoloid "이란 단어도 빼놓을 수 없다. 다운 증후군을 지닌 사람을 지칭했던 이 말은 처음부터 인종적 함의 때문에 이중적 모욕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워낙 널리 사용되어 육아 분야 최초의 베스트셀러였던 벤저민 스폭Benjamin Spock 박사의 육아서 제1판에도 비슷한 단어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2판부터는 다운증후군 어린이의 부모에 대한 스폭 박사의 조언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물론 처음 조언 역시 당시 통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P42

인류학, 동물학, 유전학, 심리측정학 등 비교적 새로운 과학들의결합에서 탄생한 우생학은 인류의 혈통에서 결점과 불순물을 씻어버릴 수 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테디 루스벨트 대통령조차 친구인 뉴욕의 변호사 메디슨 그랜트Madison Grant 가 쓴 우생학선언서 《위대한 혈통의 전승The Passing of the Great Race》을 추켜세웠다. 책에서 그랜트는 집단 선택번식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에서 "허약하고, 결함투성이이며, 정신적 불구인" 유전적 영향을 일소하고, "무가치"하고 "형편없는 수백만 시민을 제거하라고 권고했다. 루스벨트는 "국민이 가장 절실히 깨달아야 할 사실을 잘 요약한 책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 오스트리아 청년은 그랜트에게 팬레터를 보내 그의 책이 자신의 "바이블"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청년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였다.
그랜트는 자손을 이어갈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강제불임술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우생학에 어찌나 열광했던지1920년대에 미국 17개 주에서 강제불임술을 법제화할 정도였다.
이런 조치는 정파를 가리지 않고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1926년 가족계획연맹Planned Parenthood의 창립자이자 사회적 약자를 적극 옹호했던 마거릿 생어 Margaret Sanger는 바사 대학 Vassar College 강연 중 이렇게 말했다. "갈수록 늘어나 이제 문명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기에 이른 지능박약인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미국 국민은 세금을, 그것도아주 무거운 세금을 물고 있습니다." - P53

모든 사람이 케네디 편은 아니었다. 《정신의학저널》 같은 호에는 여섯 쪽에 걸쳐 모든 장애인이 사회에서 나름대로 살아갈 가치가있음을 인정하고, 정신장애인을 "인간답게 대할 것"을 천명하는 논문이 함께 실렸다. 저자는 비록 당시의 용어(결함이 있다. 정신박약, 치우)를 사용했지만, 장애인에 대한 공감과 그들의 존엄성 및 권리에 대한 존중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는 정신의학계가 당장 "정신박약이란 용어를 경멸적 의미로 취급하기를 중단해야 하며, 사회가 가장 약한 사람을 옹호하는 일을 축소시킨다면 결국 사회 자체가 왜소화되고 만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런 말로 논문을 끝맺었다. "정신박약자를 해방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해방하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정신장애 어린이를 대변하며 기존의학계에 도전장을 던진 사람은 존스홉킨스 대학 소아정신과 전문의 레오 카너 Leo Kanner 였다.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카너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논문, 21세기까지도 전 세계에서 끊임없이 인용될 한 편의 논문을 발표한다. 그 논문은 6년 전 부모의 손을 잡고 볼티모어에 있는 카너의 진료실을 찾았던 한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미시시피주에서 온 소년의 이름은 도널드 트리플렛이었다. - P56

하지만 1942년 9월 28일자로 되어 있는 이 편지를 쓸 즈음 도널드의 행동에 대한 카너의 인식은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는다. (먹지를대고 쓴 이 편지의 복사본은 65년간 어느 누구의 눈에 띄지 않은 채 존스홉킨스 병원 문서보관실에 놓여 있었다.) 상당 부분 절망에 빠진 메리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쓰인 이 편지는 진단에 실패했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때 카너는 이미 새로운 진단명을 떠올리고있었다. 도널드와 비슷한 어린이를 몇 명 더 진찰한 후 그는 메리에게 "사상 최초로 정신의학은 물론 다른 어떤 문헌에도 기술된 바 없는 질병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썼다. 편지에 따르면 그는 "도널드와 매우 비슷한 여덟 건의 중례‘를 발견했다. 그때까지 알리지 않은 것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어린이들을 관찰하고 발달 상황을 추적하기위해서였을 뿐, 머지않아 자신의 관찰을 널리 알리고 병명도 정할생각이라고 했다.
"도널드와 다른 소년들의 상태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정서적접촉에 대한 자폐적 장애‘로 명명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카너는 도널드와 비슷한 행동 패턴이란 맥락에서 최초로 사용한 "자폐적"이란 말에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이 어린이들이 아주 이른 유아기부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연결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능력이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전반적 건강상태와 "타고난 지적능력큰 문제가 없다는 점이라고 했다. 결국 카너가 장차 자폐증이라고불릴 상태를 발견했다고 처음으로 선언한 것은 한 어머니에게 보낸 개인적 서신을 통해서였다. 이제 도널드는 최초의 자폐증 환자가될 터였다. - P73

"저는 잪ㅖ증를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자폐증은 그전부터 있던 병이었습니다."
그전부터 있었다.
이 한 문장으로 카너는 자폐증이란 분야에서 가장 오랜 논쟁거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요약했다. 그가 "자폐적 장애"라고 기술했던 일련의 행동은 20세기 중반에 새롭게 나타난 현상인가 아니면 그전부터 계속 있었지만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까?
이 질문은 몇 가지 이유로 인해 명확히 대답하기 어려웠다. 한 가지 이유는 20세기 이전까지 의학적 기록과 기록을 보관하는 방식이 초보적인 수준이었다는 점이다. 1차대전 전까지는 통계학적으로유익한 규모의 인구집단에서 개인의 행동 특성을 체계적으로 관찰한 데이터베이스 자체가 없었다. 19세기 후반까지도 과학적 방법론, 일관성있는 용어, 연구와 관찰을 통해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근거로서 정신의학적 진료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하물며 어린이 정신의학은 두말할 것도 없다. 카너의 세대는 선구자가 될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기록이 없으므로 도널드에게서 관찰한 자폐증이란 행동이 그 시점에 생겨났다고 주장해도 통계학적 근거를 들어 반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반대로 자폐증이 그전부터 있었다고주장해도 추측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신의학 영역에서는 너무나 뻔한 것조차 올바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아무도 깨닫지 못한 채 묻혀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카너는 알았다. 연설 중에 설명했듯이 그는 자폐증을 발견했다기보다 그것을 볼 수 있는 관점을 발견한 것이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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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군악대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ASEAN-Republicof KOREA Commemorative Summit) 공식환영식에서 각국 정상들의 입장, 퇴장 음악을 연주했을 때였다. 그냥 적당한 곡을 정해반복해도 그만이었는데 각국 대통령, 총리, 국왕의 상징 음악을애써 구하고 그게 없으면 그 나라의 군가와 행진곡을 찾아서 편곡하고 연습했다. 태국 정상이 퇴장할 때는 태국 음악을, 필리핀정상이 퇴장할 때는 필리핀 음악을 ‘맞춤‘으로 연주해 각국 정상들이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그 모습을 보자 우리 군악대가 정말 자랑스러웠다. - P86

다음 날 몇몇 극우 유튜버들이 대통령이 백신을 바꿔치기했다는 헛소리를 했다. 아스트라제네카가 아닌 화이자를 맞았다며 국민을 속였다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이런 말들을 소개하는 매체들까지 등장했다. ‘헛소리‘를 ‘보도‘로 확산시키는 매체들의 선정성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들은 심지어 대통령에게주사를 놓았던 간호사의 신상까지 공개했다.
우리는 그 간호사에게 너무 상심하지 말라며 위로했는데, 다행히 그 간호사는 그런 말들에 신경 쓰지 않는다며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부담이 있을 것 같아 대통령의 2차 접종때는 다른 사람이 해도 된다고 말하자, 그 간호사는 말했다.
"그런 말들 신경 언 씁니다. 우리 보건소에 다시 오시면, 제가 할 거예요. 이게 제 일입니다." - P108

대통령에게 상황을 말씀드리자 "(그 장소에) 그렇게 계신다면인사라도 나누는 것이 맞겠지요"라며 차에 오르셨다. 우리는 도착 전에 부모님을 하차 지점으로 모셔 직접 대통령을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이 중사 부모님은 대통령 앞에서 조용히 인사를 하고준비한 입장문을 전달했다. 이 중사 어머니는 이 중사 사진을 대통령에게 보여드리며 "지난번에 보셨던 예람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조용히 자리를 떠나셨다.
대통령을 앞에 두고 하고 싶은 많은 말을 참으며 딸 사진만을 보여준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또 그 사진을 바라보며잘 알겠다고 답하는 대통령 마음은 어떠했을까. 차마 하소연도못 하는 부모 심정과, 그 마음을 잘 알면서도 아무 말 하지 못하는대통령 마음이 자꾸 같아 보였다.
옆에서 본 대통령의 일이란 권한의 크기보다 책임의 크기가훨씬 더 컸다. 또한 대통령의 일이란 지금 바로, 여기서, 확실하고 분명하게 할 수 있는 것보다는 천천히 확인하여, 여러 가지를종합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더 많았다.
대통령은 결과를 명령할 수 없다. 대통령은 과정만 명령할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명령한 과정을 결과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그 명령의 결과가 생각과 다를때 깊은 상처를 받는다. 대통령 앞까지 나서야 했던 유가족의 서러운 마음과, 그 마음을알지만 결과를 명령할 수 없는 대통령의 처지, 그 옆에서 우리는 그저 무력했다. - P138

직접 만나본 오희옥 지사는 92세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하시고 총기가 있었다. 오 지사를 뵙는 순간 이분이 애국가를 부르는 것이 가장 좋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행사 전날 리허설 시간에 지사님을 무대로 모셔서 부탁드렸다.
"지사님, 애국가 한번 불러 보실 수 있겠어요?"
"그럼 할 수 있지."
원래는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연습 겸 해볼 요량이었는데마침 국방부 관현악단이 잠시 휴식 중이라 연주를 할 수가 없었다.
"지사님, 지금 반주가 없는데 몇 소절만 그냥 해보실래요?"
"어, 그럼 애국가 부르면 되는 거지?"
오 지사는 숨도 고르지 않고 바로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희옥 애국지사가 부른 애국가는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가 아니라 올드 랭 사인 Auld lang syne 애국가였다. 우리 애국가에 곡조가 없을 때 스코틀랜드 민요에 가사를 붙여 불렀던 애국가, 독립운동가 애국가로 알려진 그 멜로디였다.
"우리가 독립운동할 때는 이렇게 불렀었어."
어린 시절 광복군이었던 부모님과 함께 불렀다는 옛 애국가를, 아무 반주도 없이 92세 노지사의 목소리로 만났을 때, 독립지사들에 대한 경의와 존경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그들이 겪었을 오랜 고초가 그 노래 마디마디마다 스며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P160

한 분, 한 분이 민주화 운동의 역사였고 슬픔이었고 비극이어서 어떤 훈, 포장 수여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회한이 느껴졌다. 이날 국민훈장 모란장 맨 마지막 수여자는 배은심 여사였다. 민주화 운동의 어머니이자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무대 위에 서있는 것조차 민망해하신, 그을린 얼굴에 슬프고 또 슬픈 표정을가진 배은심 여사는 민주화 운동 투사가 아닌 그저 아들을 잃은 어머니였다.
일전에 영화 <1987> 시사회에 참석한 대통령이 영화 상영에앞서 관계자들과 환담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배은심 여사도 참석하셨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영화를 함께 보자고 제안하셨지만 배 여사님은 "나는 못 보겠어요. 아직은"이라고 말씀했었다. 그 한마디에 대통령 내외분은 물론 그 자리에 있던 감독과 배우들, 수행원들 모두 뭐라 말을 보탤 수가 없었다.
- P215

통상 국가 기념행사는 대통령 입장으로 행사가 시작된다. 당연한 의전이다. 대통령은 국가의 대표이자 수반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보고드렸다.
"이번 광복절 행사에는 대통령께서 먼저 입장하시고 독립유공자분들을 마지막으로 모실까 합니다."
"이유가 뭡니까?"
"매해 행사에 참석하실 수 있는 독립유공자분들의 숫자가줄고 있습니다. 이제 행사에 참석하실 수 있는 분들이 열 분이 안됩니다. 남은 그분들에게 최고의 예우를 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싶습니다."
대통령도 흔쾌히 허락하셨다. 우리는 별도의 의전 차량과 의장 병을 애국지사 자택으로 보내 직접 모시고 행사장 안까지 안내했다. 대통령 내외분은 먼저 도착해 자리에 서서 그분들을 맞이했다. 훈, 포장 수여 순서 때 몸이 불편해 무대 위로 올라오지못하는 애국지사 가족을 위해 대통령이 단상에서 내려와 무릎을굽히고 훈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 P244

특사단은 크즐오르다에 있는 홍범도 장군 묘역에서 카자흐스탄 정부 관계자, 고려인협회와 함께 유해를 정중히 모시고 공군 특별수송기(KC-330)로 유해를 봉송했다. 특별수송기가 카자흐스탄을 떠날 때는 크즐오르다 상공을 3회 선회한 후 대한민국으로 향했다. 홍범도 장군을 아끼고 사랑했던 고려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였으며 장군의 회한을 담은 비행이었다.
공군 특별수송기가 대한민국 방공식별구역(KADIZ)으로 진입한 후에는 공군 전투기 6대의 엄호 비행을 받으며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이때 대한민국 공군이 운용하는 전투 기종(F-15K, F-4E, F-35A, F-5F, KF-16D, FA-50) 을 모두 투입했는데, 우리 군의위용을 홍범도 장군에게 보여드리겠다는 의도를 가진 엄호 비행이었다. 지상에서는 대통령 내외, 국방부 장관, 안보실장이 홍범도장군을 맞이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광복군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한 김영관 애국지사도 특별히 초청했다. 함께 싸웠던 애국지사가 유족이 없는 홍범도 장군의 귀환을 직접 맞이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봉환식은 참석자 전체가 일어선 채로 진행했지만, 연로하신 김 지사가 걱정되어 의자를 하나 놓았다. 하지만 김영관 지사는 한사코 자리에 앉지 않고 떨리는 손으로 홍범도 장군에게 거수경례를 하셨고 그 장면은 많은 국민을 뭉클하게 했다.
봉환식을 준비하면서 장군의 유해가 대한민국 땅에 처음 닿을 때 어떤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101년만에 해방된 조국 땅에 도착한 홍범도 장군을 환영하는 음악을무엇으로 할지, 그 순간의 의미를 어떻게 부여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이었다. <고향의 봄>, <독립군가>, <고잉 홈 Going Home〉 여러음악이 떠올랐지만, <올드랭사인> 곡조 애국가를 선택했다. - P277

판문점 회담이 끝나고 얼마 뒤 서태지를 만났다 . 늦었지만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 제대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어느날 저녁 그와 마주 앉아 이 모든 과정을 그에게 상세히 소개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여 말했다.
"그날 <발해를 꿈꾸며〉가 흘러나올 때 남북 정상들이 그 노래를 들으며 한 방향으로 걸어올 때, 그 노래가 없었으면 정말 어떻게 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별말 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태지가 말했다.
"그 시절 서태지와 아이들이 왜 그 노래를 만들었는지, 어떻게 불리기를 바랐는지, 그리고 그 노래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길 바랐는지, 그날 그 자리에서 다 보여준 것 같았어요. 노래를 만들었을 때의 감정과 그 쓰임이 너무나 잘 맞은 순간이었습니다. 고마웠어요." - P323

미국 명예훈장 (Medal of Honor) 수여식에 양국 정상이 참석했던 장면도 큰 화제가 됐다. 명예훈장은 미국 군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무공훈장이다. 처음 미국으로부터 이 일정을 제안받았을 때는 감이 오지 않았다. 우리 태극무공훈장 수여식에 미국 대통령이 참석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훈장을 받는 분이 누구인지 들으니 우리도 양국 대통령이함께 참석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훈장을 받게 된 랠프 퍼켓 주니어Ralph Puchett Jr. 대령은 한국전의 영웅이었다. 청천강 전투 때 미 특수부대 제8레인저 중대를지휘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날 수여식은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후 처음 갖는 1호 훈장 수여식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 있는 자리에 한국 대통령과 함께하고 싶다는 것은 대단히 사려 깊은 제안이었다. 미국은 그 자리에서 우리 대통령의 연설도 부탁했다. 대통령은 퍼켓 대령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령님은 아까 제게, 당시 한국은 모든 것이 파괴되어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한국은 전쟁의 폐허에서 다시일어섰고, 한국의 평화와 자유를 함께 지켜준 미국 참전용사들의 그 힘으로 오늘의 번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랠프 퍼켓 대령님이 우리 곁에 오래 머물러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이 퍼켓 대령 양옆에서 무릎꿇고 찍은 그날의 사진은 앞으로도 한미동맹을 이야기할 때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가 될 것임을 예감할 수 있었다.  - P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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