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는 집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대체로 완벽한 문장과 정확한 스펠링을 구사하며 농장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썼다. 1944년 어머니날을 며칠 앞두고는 세일럼 Salem 시에 뭔가를 사러 다녀왔다고 연필로 적어 보냈다. "어니스트 아저씨가 어머니날이니까 장미를 사야 한다고 했어요. 빨간 장미는 엄마가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래요. 하얀 장미는 엄마가 죽었다는 뜻이고요." 공놀이를 했다고도 적었다. "제가 올린 점수는... 5/74점이에요." 마지막에는 "도널드 G. T. 루이스"라고 서명까지 했다. 메리는이 편지를 평생 소중히 간직했다. 도널드는 그 뒤로 언제나 그 시절, 동시에 두 가족에 속해 있었던 시절을 행복했던 때로 기억했다. 두 배로 사랑받고 두 배로 보호받았으며, 자기와 비슷한 어린이들이 겪은 끔찍한 일들을 피할 수 있었다. 트리플렛 부부처럼 보다 나은 환경을 만들어줄 여력이 없는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대규모 수용시설에갇혀 때때로 학대당하며 지내던 시대였다. 카너는 도널드가 모든 면에서 성장하고 많은 것을 배워 나가는모습을 보며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전반적으로 소년의 성취는 굳이 따지자면 "중간 수준"이었지만, 자폐 어린이의 발달이란 맥락에서 그 정도면 어마어마하게 넓고 깊은 심연을 건너뛴 것과 다름없었다. 도널드는 적어도 일부 어린이는 자폐증의 가장 파국적인 측면을 극복할 수 있으며, 그런 과정을 적극적으로 시도해볼 가치가있음을 입증하는 생생한 증거였다. - P102
트리플렛 저택은 사회적 허브 역할을 했다. 메리는 종종 도시 행사의 주최자였다. 여성 모임 외에도 장로교회 성가대가 집을 리허설 장소로 사용했다. 방문객들은 트리플렛 집안의 아들 올리버에게익숙했지만 도널드를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농장에서 돌아온 도널드가 남의 눈에 띄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트리플렛 가족은 큰아들의 존재를 부끄러워하며 숨기려고 했던 것 같지는 않다. 합창단에게도, 포레스트의 상류층 여성들에게도 우연히 마주치는어떤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거실에서 시 낭송회가 한창일 때 도널드가 침실에서 갑자기 꽥 소리를 지르거나, 집에 찾아온 부인들의 젖가슴을 넋을 잃고 바라보거나, 누군가를 붙잡고 《타임》 지나 달력에 대한 이야기를 끝없이 늘어놓아도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것이 아이의 본모습이고, 그들의 집에 손님으로 온 이상 그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가족의 원칙이었다. 묵시적으로 비먼과 메리는 분명하고 확고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도널드는 가족의 일원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망설임의 시간을 뒤로 하고 마침내 우리 아이가 평등하게 대우받기를 기대한다는 사실을 지역 사회에 분명히 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사람들은 메시지를 받아들인 것 같다. - P107
포레스트는 도널드에게 안전한 장소였다. 속속들이 알기도 했지만 지역사회가 그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열대여섯 살때쯤 그는 마을 밖으로 이어진 고속도로를 따라 멀리까지 걷곤 했다. 여전히 하늘을 쳐다보며 허공에 뭔가를 끄적거렸다. 사람들은 차를 몰고 지나가다 속도를 늦추고 인사를 건넨 뒤, 묻곤 했다. 태워줄까, 도널드? 돌아오는길에 집에 데려다 줄까? 그저 걷고 싶다고해도 상관없었다. 도널드는 그들이 보호해야 할 존재였다. 누구나 그가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없어서는 안 될 마을의 일부였으며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 P113
숫자가 계속 늘어나는데도 자폐증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려는 노력은 지속되지 못했다. 너무 드물어 과학자들이 주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탓도 있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정신의학자들이 자폐증의 원인이 분명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최종 판결은 이랬다. 자폐증은 엄마가 자녀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이런 생각은 리타 테퍼가 어린이였던 1940년대 후반에 싹터 리타가 엄마가 된 1960년대에는 하나의 신념으로 굳건히 자리잡았다. 스티븐이 자폐증으로 진단받자마자 들은 말도 바로 그것이었다. 모든 의료인이 아들의 자폐증을 그녀의 잘못 때문이라고 믿었다. 동시대에 자폐 자녀를 키우며 눈물겨운 노력을 쏟아부은 여성들처럼 리타도 그런 끔찍한 환경을 견뎌야 했다. - P121
냉장고 엄마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물론 비난이었다. 씨앗이 처음 뿌려진 것은 1948년 4월 26일, 《타임》지에서 "의학-얼어붙은 아이들Medicine: Frosted Children" 이란 기사를 내보냈을 때였다. 자폐증에 관한 최초의 보도였다. 드물지만 "기저귀를 떼기 전부터 혼자 있을 때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유아 조현병 환자들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모든 내용이 부모를 비난하는 데 치우쳐 있었다. 기사는 《타임》지 특유의 과장 섞인 질문으로 끝맺는다. "냉담한 부모가 자녀를 얼어붙게 만들어" 자폐증으로 내모는 것일까? 《타임》지에 따르면 확진된 모든 증례의 엄마 아빠는 한가지 특정한 유형에 해당했다. "자녀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 채" 항상 "냉담"하고 "애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하나같이 뭔가 문제가 있었다." 기사 끝부분에 전문가의 말을 인용하여 그려낸 이미지는 이후 20년간 자폐증에 관한 대중적 논의를 규정했다. •••••• 그리고 그 표현은 도저히 그런 말을 했으리라고 믿을 수 없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바로 레오 카너다. - P128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카너가 부모들의 냉정함에 새롭게 주목했다는 것은 최초의 통찰에 대한 놀라운 배신이었다. 어쩌면 자폐증에 대한 학설을 당시 주류 정신의학계의 사고방식과 일치시키려고했을지 모른다. 자폐를 ‘선천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정신질환이 예외 없이 정서적 외상의 경험에서 생기며, 거의 항상 엄마가 관련된다는 정신의학계의 합의된 의견과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심지어 "조현병 유발성 엄마"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였다. 자폐증을 슬그머니 조현병 항목 밑으로 옮겨놓으면서 카너는 자폐증을 타고난다는이론에서 한걸음 물러나 정신의학계 동료들이 친숙한 방식으로 가족역동에 초점을 맞춰 부모의 행동을 낱낱이 분석하려는 내적 압박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간단히 말해 1948년과 1949년에 부모들에대해 말하고 쓴 것만 본다면 카너는 애초의 확신에 등을 돌리고 엄마가 자폐증의 원인이라고 공공연히 비난하는 최초의 전문가가 되었다. 이런 입장은 매우 실망스러울 뿐 아니라, 이후 여러 차례 명성을 얻었다가 잃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 P144
그 경험을 통해 루스는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알수 있었다. 나중에는 초기 경험을 토대로 젊은 부모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처음부터 그녀는 이해하기 쉽고 명확한 줄거리를통해 "자폐라는 드라마의 열기를 느끼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아이들의 "가슴 아픈 아름다움"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대중의 관심을 붙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P171
근거는 턱없이 부족했다. 자폐 어린이에 관해 세계적으로 알려진몇 가지 기본적인 사실만 따져봐도 엄마가 문제라는 개념을 완전히무너뜨릴 수 있었다. 우선 자폐 어린이를 키우는 거의 모든 엄마에게 자폐가 아닌 자녀들이 있었다. 말벌보다도 독성이 강하다는 여성들이 단 한 번만 침을 사용했다고?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또한 릴랜드는 심리치료가 자폐증을 해결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심리적 요인으로 시작된 질병이라면 조금이라도 반응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심리치료의 결과는 항상 똑같았다. 42명의 어린이가 참여한 연구에서는 29명에게 매우 고강도 심리치료를반복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역설적으로 부적절한 치료를 받았거나 아예 치료를 받지 않은 13명 중 몇몇은 나중에 상태가 좋아져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냉장고 엄마 이론은 어린이가 생애 초기에 정신적 외상을 입었다고 가정했다. 부모가 곁에 없었거나, 형제가 태어났거나,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논문에 포함된 230명의 어린이를 살펴보면 유발 사건에 공통적인 패턴이 전혀 없었다. 아주 어려서 그런 일을 겪었기 때문에 자폐 상태가 되었다는 증거 또한 전혀 없었다. 기록만으로도 부모가 차갑고, 자녀에게 관심이 없으며, 자기에게 빠져 있는 성격이란 가설이 적어도 23개 가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생기에 넘치며 따뜻했다. 림랜드는 엄마들이 진료실에서 자녀를 자신없는 태도로 대했다거나, 의사의 질문에 단조롭고 활기없는 목소리로 답했다는 것이 "냉정함"의 증거가 아니라 지치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아무리 애정어린 말을 건네고 손길을 주어도 자녀가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다면 누구나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한편 림랜드는 부모들의 행동이 유전적 요인을 시사하는 단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식이 부모의 성향을 물려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부모와 어린이들은 그저 동일한 유전적성향을 나타내는지 모른다. 정확히 유전적이 아니라도 어떤 환경적요인이 정도는 다르지만 부모와 자녀에게 모두 영향을 미친 것은아닐까? 림랜드의 데이터베이스는 자폐란 현상이 인간이란 생물체자체에서 기원했을지 모른다는 온갖 증거를 보여주었다. 엄마가 잘못 키웠기 때문이란 증거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심리에 주목하는 것은 핵심을 벗어난 것이며, 자폐증은 생물학적 현상이라고확신했다. - P178
림랜드는 처음부터 이들과의 관계가 어떤 의미인지 분명히 인식했다. 그것은 변혁운동의 시작이었다. 루스 설리번이 뉴욕주 올버니의 작은 공동체에서 엄마들을 조직하여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듯, 이제 림랜드는 모든 가족을 연결하는 중심에 있었다. 수개월이 지나고 각지에서 보내온 편지가 계속 편지함에 쌓이면서 그들의 숫자는 금방 수백 가족을 넘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 전역의 해군기지를 돌아다니는 터였다. 그는 빠듯한 출장 일정을 조정하여 가족들의 집을 방문했다. 몇몇 가족이 만나는 모임을 주선하여 생각처럼 외롭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가족들 역시 너무나 소중한 것을 선물했다. 바로 데이터였다. 그들이 작성한 E-1 서식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 P186
물론 그들은 양부모였다. 프랭키는 데려온 자식에 불과했다. 원한다면 언제라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들은 아이를 돌려보낼수 있었다. "아무래도 잘 안 되네요"라고 말할 수 있었다. "저희로서는 역부족이에요"라고 할 수도 있었다. 사실 그런 생각이 한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반대쪽을 택했다. 프랭키를입양했던 것이다. 아이는 영원히 부부의 아들이 되었다. 사랑을 듬뿍 받았을 뿐 아니라 법적으로 어엿하게 바턴이라는 성을 썼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과정 중에 조지와 앨리스가 결코 외롭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 세대 전 부모들이 모든 면에서 고립되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물론 1970년에도 부모들은 여전히 차가운 빗속에 서있는 셈이었다. 사회는 그들 자녀의 존재와 필요를 전혀 이해하지못했다. 하지만 산타바바라의 바턴 부부는 가족 내 자폐라는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소수의 부모가 주변에 있으며 그들과 연대할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가족들은 서로를 발견하고 교류하며 서로 버팀목이 되었다. 자녀를 위해 뭔가를 변화시킬 수 있으며, 어쩌면 그들 스스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 되어주었다. 숫자는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스무 명 정도였다. 하지만 조지와 앨리스는 공동체의 일원이란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버티고 싸워나갈 힘을 얻었다. 많은 부모가 마찬가지였다. 그 사실이야말로 자폐증의 역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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