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光

1

새벽녘 꿈속에서 아내가 웃고 있었다.
잠깐 한순간 보인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잠이 깬 뒤까지 그 얼굴은 끈질기게 뇌리에 엉겨 붙었다. 보통 때의 꿈이라면 아침 햇살에 의식이 차츰 뚜렷해지면서 허망할 만큼 깨끗이 사라지는데 몇십 년 만인지모를 아내의 얼굴은 거꾸로 빛을 얻어 양화陽畵(음화陰畵를 인화지에 박은 사진으로, 색채나 명암이 실물과 동일하게 나타난다)로 도드라지는 필름처럼 선명해졌다. - P7

일흔 살 넘어 최근 몇 년 동안, 잠은 강물처럼 탁해졌다.
잠의 깊이가 강처럼 변한 것이다. 얕은 잠은 탁한 개울물이나 겨우 헤적거리는 것 같고, 깊은 잠은 어두운 강 밑바닥으로 잠겨 들면서도 완전히 가라앉지 못한 채 깊고 무거운 진흙 같은 물속에 반쯤은 묻히고 반쯤은 떠 있었다. 바닥까지 가라앉으면 그건 곧 죽음이고 두 번 다시 이 깊디깊은 잠에서 떠오를 수 없으리라…. 눈을 뜨면 매번 그런 생각이들었다. - P8

사토코 씨의 말을 듣고 주방에 들어섰을 때, 아직도 바닥에는 사과 찌꺼기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설익었다고 할까 아직 단단해 보이는 푸른 사과였습니다. 사토코 씨는 치과에 나오코를 함께 데려가지 않아 이런 일이 생겼다고 몹시 후회하는 기색이었습니다. 얼굴까지 핼쑥해져서 나오코를 찾는 것 말고는 다른 건 돌아볼 겨를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어질러진 사과 찌꺼기가 30개 가까이나 되었을까요.
주린 짐승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과육은 죄다 파먹고 심지만 가늘게 남아 있었습니다. 어린아이의 아직 어린 뼈가 여기저기 버려진 것만 같아서 나는 그걸 하나하나 손으로 줍는 사이에 구역질이 났습니다. 옆에서 함께 줍던 사토코 씨도 그 사과 심지에서 뭔가 불길한 사건을 예감했는지 한 차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더군요.
사건 •••.
정말로 사건이라고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은 그 얼마 뒤였습니다. - P42

내가 정원으로 내려서려는 것을 밀치듯이 사토코 씨가 먼저 "얘, 가요, 대문 전등불 좀 켜봐" 라고 부르짖으며 나무 곁으로 뛰어갔습니다. 곧바로 대문 전등이 켜졌고, 그 불빛에 파르르 떨듯이 주위의 어스름한 저녁 빛은 검게 그늘이지고 꽃만 눅진하게 번들거리는 것을 보니 마치 무더위 때문에 진땀을 흘리는 것 같았습니다.
사토코 씨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한 눈빛으로 나무뿌리 쪽을 보며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을 뿐이지요. 그리고 그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던 나도 말라버린 잡초가 섞인 흙 속에서 삐죽 튀어나온 허연 것이 어린아이의 움켜쥔 작은 손이라는 것을 금세 알았는데도 의식이 뒤틀린 것처럼 멍하니 선 채로 ‘할아버지가 먹고 내던진 사과 심지 하나가 이런 곳에도 떨어져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 P46

우리의 결혼은 이른바 그 집에서 본 ‘가족 풍경‘에서 파생된 것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나오코가 태어나 셋이서 단란한 시간을 보낼 때마다 나는 매번 이 풍경은 그해 정월 가족풍경의 축소판이라고 느끼곤 했습니다. 단란한 가족이란 그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 실제 나와 유키코 사이에는 남남보다 더 멀고 깊은 틈이 벌어져 있었으니까요. 무심코 바라보면 보이지 않을 그 빗금 같은 것이 우리 결혼의 모체가 되었던 그해 정월의 노부부와 아들 부부, 그리고 이제 막 태어난 아기까지 포함한 하나의 가족 풍경에 감춰져 있었다는 마음이 자꾸만 드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과 그 집안을 직접 이어주는 끈은 사토코 씨와 유키코가 자매간이라는 것뿐이었지만, 나는 우리 집이 그집안에서 파생된 새끼 가족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우리 결혼 생활의 불행의 이유가 원래 그 집안에 있었던 세균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긴그것도 철없는 반항기의 어린애가 저 혼자 책임지지 못할 잘못을 부모 탓으로 돌리는 듯한 얘기겠지만.. - P64

그 여자의 몸은 분명 내가 지금까지 뽑은 것 중에 가장큰 행운의 복권이었다. 하지만 그 행운은 이를테면 누군가 깜빡 잊어버리고 간 허름한 가방을 주웠고 그 안을 봤더니돈다발이 가득 들어 있었다는 식의 행운이었다. 그 돈을 모두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동시에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양심의 가책이라는 리스크도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나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 여자의 남편에 대해 그런 양심의 가책이며 위험성을떠안고 있었다. 들키지 않으면 문제는 없다. 하지만 혹시라도 들켰다가는 그 즉시 그 여자의 몸은 행운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뽑은 것 중에 가장 큰 불행의 복권이 된다.... 막연하게나마 그런 부담감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여자가 ‘약간 힘든 부탁‘이라고 말했을 때도 분명 남편이나 딸에 관한 일일 것이라고 예감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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